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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한 점 없는 높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인간이 하늘을 날고 싶었던 염원이 처음으
로 시도된 것이 연날리기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연날리기는 겨울철인 음력으로 12월 중순경부터 시작하여 정초에 성행했다가 대보름 밤이나 그 전야인 열
나흘 날 밤에 ‘액막이 연날리기’로 끝을 맺는다.
우리 민족이 즐기던 민속놀이중 하나인 연놀이는 언제, 어느 민족이 처음 연을 만들어 날렸으며 어떤 방법 에 의해 각
나라에 전파 되었는지 그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히기 어렵다.
그것은 세계 어디에서나 연은 만들어졌지만 그 재료가 종이인 탓으로 보존이 어렵고, 자료나 전설의 빈곤으로 유래를
찾기에는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문헌에 나타난 기록과 전설을 통해 우리나라의 유래를 살펴보자.
연의 역사적 유래
우리 나라 옛 문헌을 살펴보면 ‘위지 동이전’에 삼국의 명절인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의 제천의식 때에 온 나라의 백성
이 제를 지내고 신단 앞 광장에서 온갖 가무와 기예와 오락이 벌어졌
다는 기록 이 보인다. 제천 의식이 끝난 후에 기예와 오락의 행사로
하늘을 향해 연놀이가 있었지 않았나 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 記) 41권 <열
전>(列傳> 김유신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1,350여년 전 신라 선덕여왕이 돌아가고 진덕여왕이 즉위하였다.
진덕여왕 元年(西紀 647年) 비담(琵曇)과 염종(廉宗)이 여왕은 정사를 잘 해 나갈수가 없다고 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왕을 축출하려 하였다. 이에 진덕여왕이 궁궐을 수비하였다.
비담의 군사는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고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에 주둔하였다. 서로 공격하기를 10여일, 그러던 중
병진날 밤 삼경(23시~01시)에 큰 별똥이 월성에 떨어졌다. 이에 비담등이 병사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데 별이 떨
어지는 곳에서는 반드시 피가 흐른다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여왕이 패망할 징조라”고 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큰 소리
로 환호를 하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진덕여왕이 그 사실을 알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김유신이 왕께 아뢰기를 “길흉은 오직 사람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중략)..... 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요.”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우인 (허수아비·인형)을 만들어 불을
붙이고, 이를 연에 실어 띄우니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았다 . 그 다음날 김유신이 사람들에게 ‘어제 저녁
에 떨어졌던 별이 간밤에 도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여 적군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삼국시대에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반란군을 평정하기 위해 연을 만들어 전략적으로 이용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는 과연 김유신 장군이 처음으로 연을 고안해 내었을까? 하는 의문과 또는, 그
전부터 우리 민족에게 연놀이 풍속이 있었는가?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 기록으로 미루어 우리나라 연은 삼
국시대 때에 형태는 어떻든 공중에 띄우는 연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연놀이가 군사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사례는 1849년에 홍석모가
펴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최영 장군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말엽(西紀 1374年) 최영 장군이 탐라(제주도)의 목호 (몽고인으로
목축을 하는 사람)의 반란을 평정할 때(1374) 군대를 싣고 탐라에 이르
렀는데, 섬의 사방이 절벽이라 상륙할 수가 없었다. 장군은 묘안을 내어
연밑에 갈대씨를 담은 주머니를 달아 그 연을 높이 띄워 섬 주변 가시밭
에 그 씨주머니를 떨어뜨렸다. 그 해 가을에 섬 주위는 마른 갈대로 뒤덮
였으므로 불을 질러, 혼란을 틈타 성을 점령했다.
속설에 최영 장군이 탐라국 평정시 군사를 연에 매달아 병선(兵船 )에서
연을 띄워 절벽 위에 상륙시켰으며, 불덩이를 매단 연을 적의 성안으로
날려 보내 불타게 하여 공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조에는 세종대왕(西紀 1455年) 때 남이 장군이 강화도에서 연을 즐겨 날렸다는 기록과 임진왜란 당시 충
무공 이순신 장군이 섬과 육지를 연락하는 통신수단이나 작전 지시의 방편으로 연을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충무에 계시던 이순신장군은 왜적이 쳐들어 올 때 흩어져 있는 군사들의 집결지를
알리기 위해 연을 날렸다고 한다. 연의 문양에 따라 명령이 달랐는데 예를 들면, 삼봉산의 문양이 있는 연(
삼봉산연)을 날리면 모든 군사들은 삼봉산에 모였다는 뜻이 된다. 이 삼봉산연은 오늘날까지 충무(통영)지방
에 전해지고 있다.
특히 영조대왕은 연날리기를 좋아하여 즐겨 구경하고 장려하여 서기1725~76년 무렵에는 우리나라에 연날리
기가 널리 민중에 보급되어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1954년 민족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에서 정부가 정책적으
로 연날리기를 장려하여 문화공보부에서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연기능 보유자들을 수소문 하여 연날리기 대
회를 광복 후 처음으로 열게 되었으며, 그 후 1956년 한국
일보사 주최 제1회 전국연날리기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
되어 당시 이승만대통령도 매년 대회장에 나와 관전도 하
고 연도 날리며 연에 대한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이 때
부터 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어 연을 수집, 제
작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오랜 옛날부터 전승되어 오는 민족 전래의 연날리기에서 연줄을 한없이 풀어낼 수 있었던 이유도 주위에
장애물이 없는 청계천변(서울), 개울가, 동산(시골)에서 많이 날렸는데 그 시기는 음력 정월 초하루에서부터 대
보름까지가 본격적이며 특히 대보름 며칠 전에는 구경꾼들의 성원과 열기가 절정에 달해 장관을 이루었다.
연날리기는 정월 대보름 며칠 전에 큰 성황을 이루지만 대보름이 지나면 날리지 않는 것이 본래의 풍속이다. 대
보름이 되면 액(厄)연(鳶)띄운다' 하여 연에다 "액(厄)"자 하나를 쓰기도 하고 "送厄"이니, "送厄迎福"이라고 써
서 얼레에 감겨있던 실을 모두 풀어 멀리 날려 보낸다. 이것을 '액연 띄운다', 혹은 '액연 날린다'라고 하였다.
한국의 연은 기록에 의하면 원래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그러다가 점차 연날리기를 놀이로 삼게 되었고,
그것이 민속과 결합되어 조선시대에 들어와 연을 날리는 시기가 섣달부터 정월 보름 사이로 고정 되었다. 이는
한국의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농경기에 연날리기를 하면 농사에 지장을 줄 것으로 보고
, 농한기인 음력 12월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즉, 정월 보름날 액막이의 민속과 관련시켜 연을 날려 보냄으로써 연날리기를 끝내고, 다시 농사 준비를 시작하
였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강변 등 넓은 공간과 알맞은 바람(초속 3~5m)만 있으면 연중 어느 때라도 연을 날
리는 새로운 풍속도가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연날리기의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중국, 일본 등 세계의 연이 높이 띄우거나 그림, 모양 등
에 관심을 두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연은 연을 날리는 사
람의 조종에 따라 상승과 하강, 좌우로 돌기, 급상승과
급하강, 전진과 후퇴가 가능하다.
또한 얼마든지 높이 날릴 수도 있고 빠르게 날릴 수도 있
다. 한국연의 구조는 연날리는 사람에 의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기동력을 갖게 되어 있다. 이러한 기능적
특성 때문에 연싸움(연줄 끊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액을 막아주는 액막이 연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정월 대보름날 밤이 되면 달맞이를 하고 난 후에 각자
띄우던 연을 가지고 나와 액막이연을 날리는 풍속이 있다.
액막이연이란 연에 ‘액(厄)’자 한자를 쓰거나 송액, 또는 송액영복 (送厄迎福)
이라는 액을 막는 글을 쓴 후, 자기의 생년월일이나 성명을 적어 연줄을 끊어
하늘로 날려 보내거나 불에 태워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 풍속은 민속신앙적인 사고가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연에 액을 실어 날
려 보내거나 불에 태움으로써 한해의 액운을 막아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복을 불러들이는, 기복연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정월 대보름날 밤이 되면 달맞이를 하고 난 후에 각자 띄우던 연을 가지고 나와 액막이
연을 날리는 풍속이 있다.
액막이연이란 연에 ‘액(厄)’자 한자를 쓰거나 송액, 또는 송액영복 (送厄迎福)이라는 액을 막는 글을 쓴 후, 자
기의 생년월일이나 성명을 적어 연줄을 끊어 하늘로 날려 보내거나 불에 태워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 풍속은 민속신앙적인 사고가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연에 액을 실어 날려 보내거나 불에 태움으로써 한
해의 액운을 막아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 연의 종류는 연의 형태와 문양에 따라 분류되므로 그 종류가 100여종에 이르고 있다. 형태면에서 살
펴보면, 우리 나라 연의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사각 장방형의 중앙에 방구멍이 뚫려있는 방패연이 대부분을
이루며, 어린이들이 날리는 꼬리가 달린 가오리연과, 사람·동물 등 여러가지 형태로 제작자의 창의성에 따른
입체성이 있는 창작연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 연은 외국 연과 같이 명칭에 따라서 연의 모양이 다른것이 아니고, 방패연에 색깔을 칠하던가 혹은,
색지의 모양만을 다르게 오려 연에 붙인 표시로써 어떤 특징을 나타내어 거기에 따라 일정한 명칭을 붙여 구
별하기 때문에 문양으로 보면 연의 종류가 다양해진다.
이를테면, 연의 머리에 색지를 반달 모양으로 오려 붙이면 반달연이라 하고, 그 색지의 색이 검은 색이면 먹반
달연, 푸른 색이면 청반달연, 붉은 색이면 홍반달연이란 명칭이 붙게 된다. 각 지방의 방언에 따라 같은 유형의
연이라도 조금씩 다르게 이름 지어진 종류도 있다.
'동국세시기'에의하면 기반(碁班), 묵액(墨額), 쟁반(錚盤), 방초(方草), 묘안(猫眼), 묘령(描翎), 용미(龍 尾),
어린(魚鱗) 등의 여러 명칭과 종류가 번거롭게 등장한다. 여기서 나타난 명칭을 보면, 기반은 바둑판 연을 말하
고, 묵액은 머리쪽에 검은색을 칠한 연이며, 쟁반은 접시같이 둥근 모양의 연이고, 방초는 방패 모양의 연, 묘안
은 고양이 눈을 그린것 같은 연이며, 묘령은 까치 날개모양의 연, 어린은 물고기 비늘 모양 의 연, 용미는 용의
꼬리 모양같이 길게 된 연임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형태적 분류와 문양적 분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문양적 분류에서는 가장 간단한 문
양과 현대에 와서 변형한 (여러가지 문양이 혼합된 연) 문양으로 된 연을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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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전통 연의 99%이상이 사각 장방향으로 된 방패연으로 중앙에 방구 멍이 뚫
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사각 장방형연(이하 방패연)의 크기는 가로 40cm, 세로 60cm
안팍이고, 큰것은 가로 150cm, 세로 220cm 정도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방패연을 조사해 보면 전통연의 형태와 같은 가로와 세로의 크기
비율이 2:3의 황금분활의 비율로 적용되어 만들어 졌고 연의 평균 수치 는 큰연은 가로
58~60cm, 세로 88~90cm이고, 중연은 가로 38~40cm, 세로 58~60cm이며, 작은 연은
가로 30cm, 세로 45cm가 평균 크기로 되어 있다.
방패연은 연 중앙에 방구멍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 구멍이 있기 때문에 센 바람을 흡수하여 연이 잘 뜨며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다. 방구멍은 세계 어느 나라 연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우리 연의 특징이다.
방패연은 연 몸체에 여러가지 무늬, 그림 글씨나 색지를 붙인 문양(원, 반원, 사각형, 삼각형, 이것들 의 변형)
과 문양의 색(빨강(赤). 파랑(靑), 노랑(黃), 흰(白) 이것들의 중간색)에 따라 꼭지연, 반달연, 동이연, 치마연,
초연, 발연, 박이연, 기타연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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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형태가 마름모꼴인 가오리연과 부채꼴인 문어연과 마름모꼴의 변형으로
만들어진 연을 통털어 가오리연이라 한다. 가오리연의 특징은 방구멍 없이 꼬
리를 길게 붙여 바람이 꼬리를 타고 흐르게하여 연을 쉽게 띄울 수 있으며, 제
작 방법이 간편하여 주로 어린이들이 날린다.
가. 가오리연: 사각형 흰종이의 모난 상하를 세로로 중심하여 가운데 길이로 중
살(중심살이라고도 함)을 붙이고, 좌우 모난데서부터 허리살을 동
그랗게 구부려 좌우 모난 양쪽 귀를 싸서 덮어 붙이고 꽁지를 길게
붙인 연으로 가오리 모양을 닳았다고 해서 가오리연이라 한다.
나. 문 어 연: 가오리연의 형태에서 머리 부분을 둥글게 오려 내어 머리가 문어를
닳은 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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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크기는 연을 날리는 사람의 연령이나, 바람이 강한 해안지방과 바람이 비교적 약한 내륙지방에 따
라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30cm*45cm 규격의 방패연 제작과정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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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살 | ||||||||||||
방패연에는 5개의 댓살만 있으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왕대 또는 참대가 바짝 말라서 누렇게 된 고황죽 으로 만 들면 된다. 이것을 다듬을 때에는 겉대와 속대를 보고 다듬어야 한다. 겉대는 초록색이며 윤기가 나고 속대는 누런색이며 윤기가 없다. 이때에 풀칠할 자리는 속대이며 겉대는 윤기가 나면서 기름기가 있어 부착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두께는 가로, 세로 약 5미리 정도가 알맞으며 그림과 같이 다듬으면 좋다. 특히 허릿살은 바람의 저항을 부드럼게 하기 위하여 좀 가늘게 다듬는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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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패연 만들기 예비작업 |
1. 미름질 : 먼저 연의 크기를 정하고, 한지(韓紙)의 규격을 2:3 비율로 재단한다. 한지(가로 2×세로 3)에 연 필과 자를 이용하여 연살(대나무살)붙일 곳 및 방구멍 오려 낼 부분을 표시한다. 2. 머릿살 붙이는 곳 표시하기 : 한지의 윗 부분을 2~3㎝ 접고 머릿살 붙일 부분에 자를 대고 연필로 선을 그린 다. (그림1, 2 참조) 3. 허릿살 붙이는 곳 : 가로로 머릿살처럼 그린다. (그림3 참조) 4. 중살 붙이는 곳 : 머릿살 중앙에서 세로(일직선)로 그린다. (그림3 참조) 5. 장살(양귓살) 붙이는 곳 표시하기 : 대각선으로 ×선을 그린다. (그림4 참조) 6. 방구멍 오려내기 : 대각선으로 선을 그린 후 한지의 중심점에 콤파스를 사용하여 원(반지름7㎝)을 그린 다음 오려낸다. (그림5 참조) |
▒ 그림그리기 |
마름질이 끝난 한지(韓紙)에 그리고자 하는 그림을 그린다.(물감,서예 등) <색(色)이 마른 다음 다림질을 하면 효과적> |
* 방패연 만드는 방법 |
① 머릿살에 풀(본드)칠을 하여 한지의 머릿살 줄쳐진 부분에 붙이고 연살이 한지에 잘 붙게하기 위해 연을 뒤 집어 살이 붙은 곳을 양 손가락으로 문질러 준다. |
② 두 개의 장살을 대각선으로 붙이는데 아래 부분부터 붙인다.
③ 장살 윗부분에 풀을 칠한다음 양 손가락을 이용하여 검지 손가락은 머릿살을 앞으로 당기는 힘을 가하고 엄
지 손가락은 장살 귀부분을 잡고 미는 힘을 가하면 이 때 배가 튀어오르는데 이때 튀어나온 배의 높이는 눈짐
작으로 약 3~4㎝ 정도면 된다.
④ 중살을 붙이는데 장살 아래쪽으로 넣어 붙인다. 이때 중살과 머릿살이 영어의 “T”자 모양으로 머릿살에 밀착
되도록 붙인다.
⑤ 마지막으로 허리살을 붙이는데 중살 아래쪽으로 붙인다.
⑥ 머릿살 윗부분의 남은 종이 부분에 풀칠을 하여 머릿살을 덮어 씌우면 연이 완성된다. 대나무에는 겉대(녹색
빛을 띠며 윤기 있음)와 속대(누런색이며 윤기 없음)가 있는데 풀칠을 할 때에는 속대에다가 한다. 연살을 붙
이는 작업은 이제 끝났다. 연살이 한지보다 더 튀어 나온 부분은 니퍼로 잘라준다.
※ 주의사항 : 양 귀부분은 실을 매야 하므로 충분히 여유를 주고 잘라낸다.
* 방패연의 목줄(방줄) 매는 방법 | ||
방패연줄을 지역에 따라 벌잇줄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통상적으로 목줄 또는 방줄이라고 한다. 아무리 연을 잘 만들어도 목줄을 잘못 매면 연이 잘 뜨지 않는다는 것을 아아두어야 한다. 이 기회에 목줄매는 방법을 정확히 배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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