뀌뜨르르....귀뜨르...
손폰의 알람소리에 이불속을 빠져나왔다.
챙겨놓은 배낭을 메고 2층으로 살며시 내려와 양치를 하고 1층 가게 책상 밑에 감추어 놓은 신발을 갈아 신고 밖으로 나와서 현관 셔터 틈 사이로 손을 오그려 넣어 안에서 자물쇠를 채웠다.
대형백화점 공사를 시작하느라 높이 둘러친 펜스 그늘을 종종걸음으로 벗어나니 통쾌한 생각이 나서 혼자 킬킬 웃었다.
늦잠에서 깨어난 아내가 사라진 남편이 동네 목욕탕에서 잠든 줄로 착각할 생각을 하니 고소하다.
밤늦도록 북새통을 치며 넘쳐나던 행인들은 간곳없고 시장을 낀 사거리는 휑뎅그렁하다.
아침 요기를 할 양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쇼핑빌딩 옆 길모퉁이에 판넬로 이어지은 죽집 할머니와 눈이 마주쳐서 끌리듯 들어갔다.
이른 아침이라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거울을 빈틈없이 붙여놓은 벽을 따라 길게 연결해 놓은 식탁에 아침햇살이 비춰들었다.
숟가락으로 죽을 퍼서 입술로 쭉 빨았다. 으윽!
거울속의 사내가 너무 뜨거워서 비명을 질렀다. 못난 녀석!
할머니께 물김치를 한 사발 받자마자 건더기만 건져서 죽 그릇에 넣고는 휘휘 저었다.
새알이다. 푸르스름한 배추 잎 사이로 하얀 새알이 예닐곱 개 숨어있었다.
숟가락으로 한 알 한 알 조심스럽게 떠서 입 안에 품었다.
시간이 넉넉하여 별 다방의 원두커피를 받아들고 쇼핑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이 거무튀튀한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메고 둘 셋씩 따로따로 모여서는 인사를 나누고 양지바른 곳에는 일단의 청년들이 미팅을 가는지 엉덩이가 터지도록 팽팽한 청바지를 입은 처녀들과 손을 맞잡고 운동화 발을 굴리며 조잘거렸다.
줄지어 늘어선 버스 중에는 결혼식 하객을 실어가는 차도 있는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중년부인이 버스 문 앞에 서성이고 볼때기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청년이 양복차림으로 화물칸을 열고 과일박스를 싣고 있었다.
환승역으로 통하는 지하도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올라왔다.
지리산 선비 샘에서 물이 솟듯이 연이어 올라왔다.
백만송이, 백만송이...
효도 폰의 폴더를 열었다.
오늘 산행에 리딩을 맡은 준영이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못 생긴 김 아무갭니다”라고 일부러 길게 인사했다.
“잘 생긴 친구야, 지하철 타지 말고 거기 있어라”
“잘 생긴 놈, 모조리 외국 갔나?”하고는 폴더를 닫았다.
길 건너편 편의점에서 생수 한 병을 배낭에 챙겨 넣고 횡단보도를 다시 건너왔다.
동쪽 하늘을 쳐다보니 해는 보이지 않고 치솟은 빌딩의 검은 유리벽이 아침 햇살을 튕기고 있다.
빨간 승용차가 발 앞에 멈추어서 한발 물러서니 중절모를 멋들어지게 쓴 준영이가 내렸다.
“으잉?”
악수한 채 몸을 구부려 운전석을 보니, 살구씨앗처럼 예쁜 눈을 가진 향란님이 핸들을 잡고 웃고 있었다.
트렁크에 배낭을 싣고 텅 빈 대로를 달렸다.
“대구는 와 왔능교?”
준영이가 새로 싼 모자를 앞으로 썼다가 뒤로 썼다가 하면서 큰 소리로 자랑하는 통에 향란님의 말귀를 자세히 알아듣지 못하였다.
“저기! 저기!”
큰 키에 쫄바지를 입고 배낭끈을 한쪽 어께에 모아 걸친 석준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석준이 핸들을 넘겨받고는 익숙하게 차를 몰았다.
백미러를 보니 일전에 맥주를 마시던 모습이 불현듯 생각나서 뒤통수를 보고 싱긋 웃었다.
수려한 외모보다 수더분한 성품이다.
웃고 떠들다가 시내 외곽에서 한 사람 더 탔다.
초면이지만 다부진 체격만큼이나 음성이 기운차다.
통성명을 하니 귀한 존함은 박 윤제님이시다. 말하는 투로 준영이 절친한 친구이다.
추수가 끝난 들녘을 지나자 낙동강 둑에 갈대가 부풀어 피었다.
성주 읍내를 우회하여 대가면 소제지에 차를 세웠다.
예철 회장님이 인솔하는 일행은 아포 분기점을 막 지났다는 연락이 왔다.
채소를 가득 실은 1톤 트럭의 스피커가 시골마을의 고요를 깨며, “오래 오래 사랑하고 싶어요.
우리네 가슴에 시들지 않는 그런 사랑 만들고 싶어요.” 쿵작쿵작하며 지나갔다.
찜통에 허연 국물이 버글버글 끓는 식육점에서 대포를 한 사발씩 마시고 나오니 저만치 버스가 당도하였다.
훌쩍 뛰어내린 회장님의 손을 잡으니, 이 양반이 미다스의 손이다.
저자거리의 동전을 황금으로 변모시키는 매력을 갖추었다.
툇마루에 올라서듯 버스에 깡충 튀어 올랐다.
희미해진 눈아, 봐라!
꽃이다. 스물아홉 송이 들국화였다.
차안에서 받은 자줏빛 콩이 드문드문 박힌 흰떡을 배낭에 고이 넣으며 백운동 주차장에 내렸다.
스르륵 누질리던 카메라 샷다 소리를 뒤로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른 계곡에 걸쳐진 백운교를 건넜다.
산행 들머리가 완만하다. 종아리에 기운이 솟았다. 삶의 길이다.
알록달록하게 물이 든 나뭇잎을 구경하다보니 후덥지근하다.
백운교를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좌로 건넜다. 다리 아래에서 물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보이는 것이 다 선명하다. 애늙은 노의 길이다.
울퉁불퉁한 돌밭을 성큼성큼 걸었다.
좁은 잎은 가지에 말라붙었고 커다란 잎은 누렇게 물이 들어 땅바닥에 뚝 떨어졌다.
백운교를 건넜다. 병의 길이다.
아치형의 다리를 또 건너서 웅성웅성한 공터에 이르러 물을 한 모금 씹어 마시고 한 발을 내딛으니 급경사다.
숨이 턱에 닿았다. 사의 길이다.
앞서 가겠다는 욕심을 버렸다
스틱을 한 자루 빼어 허리를 의지한 후 입으로 심호흡을 하였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고개를 치켜들었으나 산 봉오리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장갑을 끼고 스틱을 움켜잡았다. 통나무를 잘라 흙을 다져 만든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랐다.
서장재이다. 장갑 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능선을 따라 우러러 보니 새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산 봉오리가 보였다.
정 제형님의 손에 들고 있는 포도송이를 따서 껍질 채 꾹꾹 씹으며 가야할 길을 짐작하니 두려운 느낌이 왔다.
스틱으로 송판 계단을 꽉 찍었다.
퉁! 퉁!
갑자기 우측 고관절 부위에 통증이 왔다.
아뿔사!
어제 도보성지순례로 60여리를 여섯 시간 남짓 걸은 것이 무리가 되는 모양이다.
앞서 가는 석준에게 “얼마를 왔지?”하고 물으니 절반을 넘었단다.
왼발을 선행하며 전진하였다.
높이 오를수록 잎을 다 날려버린 앙상한 나무 가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비탈진 바위에 붙어 구부러지게 자란 소나무만이 푸르고 푸르렀다.
두 손으로 바위를 기어가며 가랑이 사이에 거꾸로 보이는 계곡은 장관이다.
깎아 세운 듯한 바위에 기대어 벗었던 상의를 겹으로 입었다.
바윗길을 오르락내리락하여 칠불봉에 다다랐다.
배낭의 허리끈을 풀며 아래를 조망하니 바위들의 일대 관병식이다.
칠불봉과 적당한 간격으로 마주한 상왕봉을 향하여 고개 숙이고 엎드린 모습이 장엄하다.
헤아릴 수 없는 나한이 부처님을 공양하는 듯하고, 한 무제의 노신이 군왕을 보필하는 듯도 하도다.
태산의 꼭대기는 너그러워서 반석의 자리를 베풀고도 정수리에 등산객을 얹어놓고 어르며 달래었다.
까마귀도 쌍봉 위를 날지 아니하고, 우비정엔 옥황상제의 선녀가 어른거렸다.
가없이 파란 하늘을 가슴 시리도록 바라보았다.
우회로는 지름길이 되었다.
산길을 꿰뚫고 있는 준영이 선두에 나섰다. 비탈진 바윗길을 내려서자 너덜지대로 접어들었다. 덩굴이 길을 막았다.
앞사람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헤쳐 나갔다.
가을 가뭄으로 메마른 낙엽이 걸음마다 유난히 바스락거렸다.
후미를 맡은 김 회장이 정숙보행을 권유하였다.
산죽이 파랗게 펼쳐졌다.
허리춤까지 자란 산죽 밭을 가로지르니 아랫도리가 빗질되어 서늘하다.
수북이 쌓인 낙엽에 쫄딱 미끄러졌다.
“네, 이 눔!”
저 아래 골짜기에서 성철 큰스님이 성큼성큼 다가오시는 것 같았다.
환각이렷다!
여시아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고얀 눔! 주둥이에 몽둥이 뜸질을 당해야 견성하겠느냐?”
환청이렷다!
얼른 밧줄을 넘어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골짜기로 나직하게 비쳐드는 오후의 햇살에 노랗게 물이 든 나뭇잎이 버거워 하는 것 같았다. 행렬을 이루며 일행이 하산완료 하였다.
예약된 식당에 무릎을 맞대고 팔꿈치를 비비며 앉았다.
삼빡하게 썰어 놓은 두부는 담백하고 건네받은 동동주는 쌉쌀하다.
예철 회장님이 자리를 옮겨가며 술을 권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대가면에서 내려 아쉬운 작별을 하고 바위처럼 단단한 권 오석님의 가슴을 어께로 떠밀었다. 다시 만나자!
향란님의 빨간 차가 차도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을 휘저으며 어두워지는 성주 읍내를 벗어날 때 준영이 보고 그랬다.
“친구야, 혹시 말이다. 쌍봉을 둘러싼 바위 군상들이 산수식당에서 잔을 나누던 친구들 아이가?
우비정에 어른거리던 선녀들 또한 청국장에 밥을 비벼먹던 산사랑 여친들 아이가?”
준영이 고개를 끄덕하는데 모자가 바람에 휙 날려 벗겨졌다.
2008년 11월 2일
첫댓글 친구~글솜씨 대단한데~
아따 보기 좋네 난 언제 같이 한번 가보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