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공노”
하늘과 사람이 함께 노한다는 뜻으로,
누구나 분노할 만큼 증오스럽거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미성숙한 사람을 우린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스스로 깨우치기를 기다리기엔 너무나 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맞춤으로 알려주기엔 알고자 하는 의지가 참으로 부족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이렇습니다. 가해자라고 불리어 지게 되는 사람은 그 사람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기 이전에는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해자 예방교육을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현실적인 대안으로 “피해예방교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해자라고 불리어 지는 사람을 보게 될 때마다 천인공노할 피해사실 앞에 ‘왜 그런 가해를 하게 되었는가?’ 라는 우문만이 자꾸 떠오릅니다.
신문의 1면에 보도된 성폭력 사건에 대한 기사를 보면 피해사실이 낱낱이 보고되어 있습니다. 어디에 사는 누구이며, 몇 살이고, 피해 장소가 어디이며, 어떤 피해를 입었으며 등등. 자세한 인적사항이 나열되어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 같지만, 그 내용 중 피해자가 한 ‘여성’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그런 피해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살았기 때문에, 어디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몇 살이기 때문에, 어느 학교의 아이이기 때문에, 누구의 자식이기 때문에 라는 것은 가해자라 불리우게 된 사람에게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피해자로 인한 가해상황 유발은 이제 더 이상 논의 될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피해자가 가진 어떤 사유도 고려치 않는 다는 것이 가해자라 불리어 지게 되는 사람들의 행태인 것 같습니다. 천인공노할 행위가 신문지면이 꽉 차는 것을 보게 되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우리의 딸들이 아니라, 우리의 아들들을 어떻게 키우면 좋을까요?
늦은 밤 시간의 피해사실이 보고되면 부모들은 딸 걱정에 버스 정류장으로 골목길 어귀로 마중을 나갑니다. 혹 어떠한 방법으로 가해자를 물리쳤다는 기사가 보도되면 그것이 하나의 대안처럼 수면위로 올라와 모두가 그 방법을 혹은 기구를 알고자 합니다. 하나의 사건이 보도되면 모두 각자 최선의 예방책을 찾습니다. 그리고 하나 둘 모여 사건에 대해 논의하고 각자가 마련한 대비책을 교환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더욱더 이런 자리를 가져야 합니다.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하는 옆자리에 정책관계자들이 있어 다 듣고 참고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관심을 갖고 서로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같이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린 한동네에서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경찰을 탓하고 늦장 입법을 한 정치인을 탓하고, 솜 방망이 처벌을 한 사법부를 탓하기만을 하기엔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엄마만의 대안은 어떤 것이 있는지, 나의 그것이 우리 자녀에게 진정으로 어떤 도움이 되는지 여부를 확인하여 아이들 스스로 해결책을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시민정신이 드높아져야 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내 자녀 지키기가 우리 자녀 지키기로 그리고 이 사회를 바로잡는 방향으로 까지 함께 가야 합니다. 내 안전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우리 마을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나아가 우리아이의 생활터전을 지키고자 하는 실행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자식이 살아갈 이 나라를 바로 잡으려는 정신으로 계속 발전해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피해를 예방하는 교육을 하고 있는 현장 실무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반응 하십시오. 당신의 자녀를 위해 이 사회를 위해 엄마 못지않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곁에 있습니다. 단 한명의 관심이 이 사회를 바꿉니다. 시민의 협조에 공개수배범이 잡힌 그 순간처럼 말입니다.<행가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