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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글
친족은 혈통에 기반을 둔 가장 기초적인 인간관계이며, 개인의 사회적 위치를 규정하는 일차적 준거로 기능한다. 친족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는 친족집단은 사회조직의 기초 단위로서 개인의 행동은 이 친족집단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전통사회에서 뿐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도 친족과 친족집단은 사회적 행동과 사회관계의 기초를 이루기 때문에 인류학자들은 친족에 대한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한국의 친족집단에 대한 인류학자의 관심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연구 경향은 친족집단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다(유명기 1977, 이광규 1977, 김성철 1997, 김창민 2001 등). 이 연구의 경향은 당내와 문중을 구분하고 그 구조의 차이를 밝히기도 하고 친족집단의 분파기제에 대한 분석을 하기도 한다. 이 유형의 연구들은 중국, 일본 등의 친족제도와 비교함으로써 한국 친족의 구조를 밝히기도 하였다. 두 번째 유형은 친족집단의 종교적 기능에 주목하여 조상숭배의례를 분석하는 것이다(Janelli, R. & Janelli, Y. 1982, 김광억 1986, 이광규 1977 등). 친족집단과 조상숭배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제사와 시제 등이 분석되었고 친족집단의 분파도 조상숭배의례와의 연관성 위에서 분석되었다. 이 유형의 친족 연구는 조상숭배의례의 관행을 사회조직과 연관시켜 설명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세 번째 유형은 친족의 변화를 다룬 것이다(김주희 1995, 박부진 1994, 이창기 1980 등). 도시지역의 친족집단이 가지는 기능변화, 여성의 관점에서 친족에 대한 고찰 등이 이 유형에 속하는 대표적인 연구들이며, 이는 현대사회에서 친족의 의미와 개인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들은 한국 친족집단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의미를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연구들은 친족집단 연구를 친족집단 내부에 한정하여 살펴보았을 뿐 친족집단 외부와 연결하여 고찰하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가진다. 즉, 친족 연구를 친족의 문제로만 파악하였을 뿐 친족집단과 지역 공동체간의 관계나 친족집단 구성원과 친족 외부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 등에 대한 관심은 부족하였다. 동족마을이라고 하더라도 친족과 친족집단이 사회생활의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친족집단은 친족집단 외부의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런 차원에서 양반 동족마을에서 양반과 상민 사이의 관계는 중요성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한 마을에 유력한 친족집단이 둘 이상 있을 경우 친족집단간 관계도 친족 연구에서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2) 친족집단간 관계를 분석하는 것은 친족 집단 연구를 더 넓은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친족집단과 지역집단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도 친족 연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질 수 있다. 친족에 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동족집단, 특히 양반 동족집단을 대상으로 한 경향이 있다. 이런 연구에서는 친족집단과 마을을 동일시하여 친족의 원리가 마을 내 사회생활 전체를 설명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비록 전통사회에서는 이런 측면이 강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마을이 국가나 지역사회 그리고 시장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친족을 마을과 동일시하는 것은 마을이 가지는 역동성이나 외부 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친족의 현대적 의미 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개연성이 크다. 개별 친족집단은 마을의 경계를 넘어서서 존재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한 마을에 유력한 다수의 성씨가 함께 거주할 수도 있기 때문에 친족집단과 마을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친족 정체성과 지역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이 연구는 한 마을에 거주하는 유력한 두 친족집단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한다. 대등한 사회적 위세를 가진 두 친족집단은 경쟁과 협력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위세를 높이며, ‘위대한 조상 만들기’ 경쟁을 한다. 친족 집단의 위세를 높이는 방법도 두 친족집단은 서로를 준거로 하여 차별화를 시도한다. 이러한 두 친족집단 사이의 관계는 친족집단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 연구의 두 번째 목표는 두 친족집단 사이의 상호 경쟁과 협력이 마을의 정체성 강화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연구 대상 마을은 영암을 비롯한 전남 일대에서 유력한 양반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유사한 성격의 양반마을들과 위세 경쟁 관계에 있다. 친족집단의 위세를 높이는 것과 마을의 위세를 높이는 것은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양반마을로서 지역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일에 친족집단의 활동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이 과정에서 마을 내 신분을 의미하는 상징물들이 주목받게 되고 지역 축제가 친족집단에 의해 주도되기도 한다.
연구 대상 마을은 전남 영암군의 영보마을이다. 이 마을은 600여년 전에 입향한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에 의해 전주 최씨가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의 사위인 신후경(愼後庚)이 거창 신씨의 입향조가 되어 친족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두 친족집단이 여러 과거 급제자와 유학들을 배출하고 영보정을 중심으로 향약을 만들면서 영보마을은 양반마을로서 위세를 높이게 되었다.
2. 영보마을의 민족지적 배경
영보마을은 영암군 덕진면에 속해있다. 국립공원 월출산으로 유명한 영암군은 영산강의 남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월출산은 영암군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형상 영암군은 영산강과 월출산 사이의 넓은 평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농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다.
영산강의 풍부한 용수와 넓은 농경지를 배경으로 영암에는 일찍부터 사족이 발달하였다(이해준 1988, 1990, 김경옥 1991). 그 중에서도 덕진면 영보마을과 군서면 구림마을 그리고 신북면 모산마을 등은 사족들이 지배하던 대표적인 마을로서 지역에서는 양반마을로 알려져 있다. 영보마을은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 그리고 남평 문씨들이 세거하는 마을로서 구림마을과 비교되면서 영암의 대표적인 사족마을로 인정되고 있다.
영보마을은 영암군 소재지인 영암읍으로부터 동북방향으로 약 7km정도 떨어져 있으며 면소재지인 덕진으로부터는 동쪽으로 5km정도 떨어져 있다. 마을의 뒤에는 월출산과 이어진 활성산이 자리하고 있어 영보는 산자락에 서향으로 자리잡은 셈이다. 영산강변을 따라 제방을 쌓아 간척지가 생기기 전까지 영산강의 물길이 덕진까지 이어졌으며 당시에는 영보가 덕진 일대의 중심이었다. 영보에는 역이 있었으며 덕진면 소재지도 영보에 있었다. 영보의 사족들은 영보역을 영암으로 이설하도록 하였으며 면소재지도 덕진으로 옮겨가게 하였다. 역에는 하층민들이 거주하며 주막과 같은 시설들이 있기 때문에 양반의 이미지와는 부합되지 않는다고 인식된다. 행정기관 역시 아전들이 주로 생활하고 거주하기 때문에 양반의 이미지와는 부합되지 않는다고 인식된다. 영보의 사족들은 역과 면사무소를 이전하게 함으로써 양반의 이미지가 오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양반마을로서 영보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었다.
영산강 간척 이전까지 영보는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마을 뒤에 있는 산을 중심으로 밭3)이 많이 개간되었으며, 마을 앞의 논도 적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간척 이후 영보는 토지 면적이 상대적으로 적어지게 되었다. 영산강 물줄기를 따라 간척지가 만들어지면서 덕진면, 군서면, 시종면 일대에는 넓은 농경지가 새로 생겨났다. 산을 배경으로 한 영보에는 특별히 새로 늘어날 토지가 없어 영보의 경제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낮아지게 되었으며, 지금도 마을 주민들은 영보의 경제적 상황이 열악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영보마을의 사회적 지위는 아직도 영암군 내에서 상당히 높게 인식되고 있다. 영보마을은 행정구역상 영보1, 2구, 노송 1,2,3구, 운암 1,2,3구, 백계2구와 영등 1구를 포함하는 지역이지만 전통적으로 영보는 자연마을 단위로 12마을4)로도 인지되고 있다. 영보 12마을은 영보와 경쟁관계에 있는 구림이 12마을로 구성된 것과도 비교되어 마을의 높은 위세를 나타낼 때 언급된다. 뿐만 아니라 운암이나 노송에 사는 사람들도 자신이 영보마을에 살고 있다고 대답하여 영보마을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고 있다. 영보마을에 산다는 것은 곧 영암군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 높은 지위의 양반마을에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기도 한다5).
영보마을은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 그리고 남평 문씨가 중요한 친족집단으로서 세거하고 있다. 전주 최씨의 입향조는 연촌 최덕지(1384-1455)다. 최덕지는 4형제중 막내로서 전주, 완주 등에 살다가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내직으로는 삼사와 한림원의 여러 직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김제군수, 남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남원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1445년 영보마을에 들어와 은거하였으며 존양루를 지어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고 한다6)(김경옥 1991 참고). 전주에서 세거할 당시 연촌에게는 전주 박씨 부인이 있었으나 영보마을에서는 영보에 세거하고 있던 평양 조씨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살았다. 즉, 연촌은 조씨의 사위로서 영보마을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조씨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기반으로 삼아 영보에 정착할 수 있었다.
거창 신씨의 입향조는 신후경(愼後庚)이다. 그의 아버지인 愼幾는 연촌과 교분이 있던 사람으로서 연촌이 영보마을에 은거한 이후 전라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연촌은 신기의 막내아들이던 신후경을 사위로 삼아 영보마을에 살게 함으로써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가 함께 영보마을을 형성하고 세거하게 되었다7) 이후 두 성씨는 비록 성씨는 다르지만 하나의 친족집단과 같은 결속력을 보이면서 사족집단으로서 지위를 확보해 나갔다(김경옥 1991:21).
한편 남평 문씨도 영보마을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성씨이다. 남평 문씨의 입향조는 문맹화(文孟和)다. 그는 연촌의 큰 사위인 김총(金摠)의 사위로서 연촌은 그의 처외조부가 된다. 문맹화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면서 영암에 은거하던 중 영보마을의 사위가 되었고, 이후 영보에 살다가 장암(영암읍에 속한 마을)으로 이주하여 세거하고 있다. 영보마을이 대표적인 사족마을로서 지위를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 세 성씨들의 친족관계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림1>과 같다.
<그림1> 전주최씨, 거창신씨, 남평문씨의 친족관계
영보마을에는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많은 상징물들이 있다. 영보마을에서도 전주 최씨들의 세거지인 내동에 들어서면 영보정이 자리하고 있다. 영보정은 구림의 회사정, 장암의 장암정과 함께 영암군의 대표적인 정자이며, 향약을 집행하던 장소이기도 하다8). 영보정 앞에는 인공 연못이 조성되어 있으며, 도 지정 보호수인 오래된 소나무가 있고, 비석도 여러 개 세워져 있다. 영보정의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로 전해진다. 이러한 주변적 조건들은 영보정의 권위를 나타내며, 영보정은 영보마을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고 있다.
영보정을 지나면 전주 최씨의 제실인 합경제(合敬齊)와 영당(影堂)이 나온다. 합경제의 대문은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으며, 주차장으로도 이용되는 넓은 앞마당에는 비석이 여러개 세워져 있다. 합경제는 전주 최씨들의 문중 행사장으로 이용된다. 문중회의를 할 때나 복달음 행사를 할 때, 그리고 영당 제사를 모실 때 문중 사람들은 합경제에 모이고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이곳에서 숙식을 하기도 한다. 최씨들의 문집과 각종 기록물은 합경제의 방에 보관되어 있고 문중 사무실도 이곳에 있다. 합경제의 뒷편에는 보물 594로 지정된 연촌의 영정과 유지초본을 모신 영당이 있다. 영당은 영보마을의 전주 최씨들에게 가장 신성한 것이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각종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영보마을을 방문하는 외지이 종친들은 반드시 영당을 참배하고자 하며 그렇게 참배하는 것을 영광으로 인식한다. 합경제와 영당 사이에는 중문이 있으며 영당의 문은 잠겨져 있다. 영당은 도난방지를 위해 전체가 금고 형태로 보완되어 있고 각종 보안장치가 설비되어 있다. 영당 안에는 연촌의 영정과 유지초본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는 영정 모사품이 걸려 있다.
합경제의 좌측에는 판각(板閣)이 있다. 이 판각은 연촌유사, 산당집, 문곡집 등의 목판본을 보관하는 곳이다. 전주 최씨들이 선조의 학문적 업적을 과시할 때 판각이 주로 이용된다. 판각은 종종 팔만대장경의 목판과 비교되며, 연촌을 비롯한 선조들의 학문적 업적이 뛰어났기 때문에 목판 인쇄를 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목판과 영정9)은 원래 녹동서원에 있던 것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합경제로 옮겼다고 한다.
합경제를 지나면 현 종손이 살고 있는 집에 존양루(存養樓)가 있다. 이 존양루는 연촌이 낙향하여 살던 곳으로 전해진다. 존양루의 현판은 안평대군의 글씨라고 전해지며 누각 안에는 연촌에게 보낸 송시를 적은 편액과 연촌이 지은 글을 담은 편액들이 다수 보존되어 있다. 연촌이 낙향한 15세기 중엽에 처음 지어진 존양루는 연촌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건축물로서 연촌을 상징하고 있다. 연촌의 세 아들 중 막내의 후손을 종손으로 인정하는 것도 연촌과 막내가 바로 이 존양루에 거처하였던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거창 신씨들의 상징물은 주로 ‘솔안’에 있다. 솔안으로 들어서는 마을 입구에는 정려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는 솔안과 솔안에 거주하는 거창 신씨들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낸다. 마을 가운데에 들어서면 송양사(松陽祠)가 나온다. 송양사는 송양서원이라고도 하며 거창 신씨들의 가장 중요한 상징물이다. 송양사 앞 마당에는 송양사에 모신 5분의 현조의 행적을 적은 비석이 6개 배치되어 있으며 사우 안 곳곳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송양사에는 건물이 3동 있다. 맨 앞의 건물은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친족원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제사 준비를 하는 곳이다. 두 번째 건물은 이우당(二友堂)으로서 입향조 신후경의 차남이 거처하였던 곳이라고 전해져 온다. 이우당의 손자는 한석봉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영계 희남이며, 희남도 이우당에서 후학을 양성했다고 한다. 희남은 거창 신씨의 학문적 명성을 나타낸 조상으로 송양사에 모셔진 5분의 조상 중 한 분이다. 이런 이유로 이우당은 거창 신씨들에게 중요한 상징물이 되고 있다. 송양사의 맨 뒤에는 사당이 있다. 이 사당에는 신후경의 아버지인 경재공(景齋公), 신후경의 장남인 산정공(山亭公), 신후경의 증손인 영계공(瀯溪公), 영계공의 증손인 소은공(素隱公 天翊)과 호산공(湖山公 海翊)이 모셔져 있다. 이 다섯 조상은 거창 신씨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상이다. 영보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유산들은 이 다섯 조상과 연계되어 있다.
민속자료 164호로 지정된 내동의 최성호씨 가옥은 거창 신씨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가옥이다. 이 가옥을 거창 신씨들은 ‘산정(山亭)’이라고 한다10). 원래 이 가옥은 최씨들 소유였으나 신후경이 영보마을에 정착한 후 처가로부터 물려받아 이 곳에 거주하다가 장남에게 물려주었다. 산정은 집의 이름인 동시에 입향조인 후경의 장남의 호이기도 하다. 즉, 후경의 장남이 산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호를 산정이라고 하였다. 산정은 최씨와 신씨들이 사족을 형성하여 향촌을 지배하던 당시 마을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향약의 집행 장소이기도 하여 영보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물의 하나이다. 신씨들은 상정이 산정공과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하던 곳이라는 점을 부각함으로써 산정이 가지는 상징성을 자신들의 소유로 확보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약 200년전 신씨들은 이 집을 최씨들에게 되팔아 지금은 다시 최씨 소유의 집이 되고 말았다. 최씨들은 산정을 ‘최성호씨 가옥’이라고 부르면서 소유권이 자신들에게 있는 만큼 신씨들과의 관련성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신씨들은 비록 재산상 소유권은 최씨들에게 있지만 산정의 상징적 소유권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보마을은 연중 조상 및 친족집단과 관련된 대규모 행사가 진행된다. 음력 정월에는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의 대문회가 열린다. 대문회는 일년에 한번 열리는 문중 정기총회로서 타지에 출타한 인사들까지 대문회에 참가하고 있다. 음력 4월 5일에는 녹동서원제가 열린다. 녹동서원에는 연촌을 비롯하여 그의 손자인 산당(山堂) 최충성(崔忠誠),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네 분을 모신 서원으로서, 모셔진 네 분은 영암지역에서 대유학으로 추앙되고 있다. 녹동서원제는 영암의 유림에서 제를 모시지만 경비는 주로 전주 최씨 문중에서 당당하고 있다.
양력 5월 5일에는 풍향제가 열린다. 풍향제는 KBS가 정한 전국 100대 지방추제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일명 ‘영보의 날’, 또는 ‘고향방문일’이라고도 한다. 풍향제는 영보마을 출신으로서 외지에 나간 출향인사들이 고향을 방문하는 날로서 마을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하루를 즐거운 잔치마당으로 만든다. 풍향제는 형식상 영보마을이라는 ‘지역’의 축제이지만 행사의 책임자는 최씨와 신씨가 교대로 맡아왔고, 준비도 이 두 친족집단이 주도적으로 하고 있으며, 방문하는 출향인사들도 대부분 이 두 친족성원으로서 내용상으로는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가 주도하는 ‘친족집단’의 축제이다.
한여름에는 ‘복달음’ 행사를 한다. 복달음은 마을 노인들을 위로하는 잔치로 출발한 것으로서 이 행사를 위하여 ‘양로계’를 구성하였으나 지금은 외지의 친족원들이 마을을 방문하여 문중 일을 의논하는 날로 성격이 변화되고 있다. 처음에는 초복, 중복, 말복에 개나 염소 등을 잡아 노인들을 대접하였으나 점차 간소화되었고, 지금은 거창 신씨들은 초복에, 전주 최씨들은 말복에 이 행사를 하고 있다. 지금도 복달음 행사는 양로계 유사가 책임을 맡아서 한다.
영보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음력 10월 초정일(初丁日)에 열리는 영정제사와 송향서원제라고 할 수 있다. 10월 초정일은 시제를 모시는 가장 좋은 날로 인식되어 최씨와 신씨 모두 이 날에 가장 중요한 문중 제사를 모시고 있다. 영정제사는 영당에 모셔진 연촌의 영정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서 전주 최씨 연촌공파 최대의 기념일이다. 이 날에는 많은 제물을 준비하고 영암의 유림을 초빙하여 제를 지낸다. 영정이 최씨들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만큼 이 날에는 원근각처에서 친족들이 방문하며 제사를 위한 경비 부담에도 적극적이다. 송향서원제는 송향서원에 모셔진 5분을 모시는 거창 신씨 최대의 기념일이다. 송향서원제 역시 유림에서 제를 모시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모든 준비는 거창 신씨들이 하며 출향한 친족들도 방문한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제를 모시기 때문에 영정제사와 송향서원제는 암묵적으로 비교되면서 경쟁하는 구도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영보마을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박찬승 2003 참고). 특히 거창 신씨들은 지주라고 하여 인민군들로부터 피해를 많이 입었으며, 인민군에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동족마을의 성격을 가진 영보마을에서 인명 피해는 친족간 갈등과 대립의 요소가 되기도 하여 이후 마을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현재 영보마을의 인구는 상당히 고령화되어 있다11). 영보마을의 고령화에는 경제적 여건도 크게 작용하였다. 인근 마을에 비해 토지가 넓은 편도 아니며 특별한 산업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젊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여건 마련이 어렵기 때문이다.
3. 친족집단의 구조
친족집단은 분파기제를 가지고 있고 분파기제에 대한 이해는 현재 친족원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수단이 된다. 영보마을의 최씨와 신씨들은 외견상 하나의 친족집단으로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복잡한 분파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두 친족집단의 분파기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영보마을의 전주 최씨들은 연촌이라고 하는 저명한 조상을 중심으로 친족집단을 구성하고 있다. 연촌의 후손들은 ‘연촌공파’에 속해 있으며 영보마을에서 일어나는 친족 관련 일체의 일은 이 연촌공파의 종손과 유사에 의해 추진된다. 즉, 연촌공파는 전주 최씨의 대문중으로 기능하고 있다. 연촌공파의 대문중이 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큰 일은 연촌과 관련된 숭조사업이다. 매년 반복되는 영정제사, 녹동서원제, 풍향제, 연촌 시제 등을 추진하는 것은 물론이고 존양루, 합경제, 영보정 등과 같은 친족집단의 상징물을 관리하고 보수하는 일도 대문중의 일이다. 대문중은 합경제에 문중 사무실을 두고 친족집단과 관련된 각종 업무를 추진하고 있다.
대문중이 문중의 대소사 일을 주관하고 있지만 전주 최씨들의 친족집단이 대문중으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연촌공파 아래에는 복잡한 분파들이 존재한다. 시조 후 5세인 연촌은 세 아들을 두었으며 이들은 각각 호군공파, 사용공파, 생원공파를 이룬다. 호군공파를 이루는 장남의 후손들은 남원에 거주하고 있으며 호군공파 아래에 다시 시조 후 8세에서 교도공파와 엄계공파가 분파하고, 9세에서 감찰공파, 10세에서 참봉공파, 11세에서 도사공파, 12세에서 참봉공파 등이 분파하였다. 연촌의 차남은 네 아들을 두었으며 이들은 각각 호조참의공파, 의령공파, 병조참의공파, 산당공파를 이룬다. 반면 연촌의 삼남은 후사가 없어서 차남의 둘째 아들인 지성(智成)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다. 즉, 의령공파는 연촌의 삼남의 후사를 잇게 되었다(그림 2 참고). 연촌은 영보마을에 거주하면서 삼남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최씨들은 현재 의령공파를 종가로 보고 있으며 의령공파의 직계 종손이 연촌의 종손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림2> 전주 최씨의 분파
최씨들의 분파는 매우 복잡하게 존재하지만 현재 영보마을에서 분파로 인정되고 기능하는 것은 산당공파와 의령공파 뿐이다. 산당공파와 의령공파의 후손들이 집중적으로 영보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며 경제적 기반도 이 두 분파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종손은 의령공파에 속해 있으며12), 최씨 문중의 일을 보고 있는 고문은 산당공파에 속해 있다.
분파가 하나의 사회조직으로 기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반은 경제적 기반이다(김창민 2001).산당공파는 중문계(中門契)라고 하는 친족계를 조직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의령공파는 의계(義契)라는 친족계를 조직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친족계는 초기에 계원들이 나락으로 기금을 조성함으로써 발족되었다. 계원들이 납부한 나락은 매년 계원들이 사용하고 일년 뒤 이자를 더하여 자산을 증식하였다. 계의 자산을 증식시키기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기도 하였다. 토지를 매입한 후 소작을 주면 더 빨리 기금을 증식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친족계는 가능하면 많은 토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현재 대문중은 논 6,000평 정도 산 120정보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며, 중문계와 의계는 각각 논 2,000평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
친족계 재산이 있지만 문중의 여러 대소사를 치르기에 문중 재산은 많이 부족한 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최씨들은 친족원으로부터 희사를 받는 것을 관례화하고 있으며, 친족원들도 숭조사업에 희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가장 대표적인 희사는 영정제사에서 나타난다. 영정 제사를 모시기 위해 매년 재물을 담당하는 세 명의 유사를 둔다. 이 중 떡을 담당하는 ‘편유사’는 약 100만원 정도, 채소를 비롯한 반찬을 담당하는 ‘반상유사’는 약 100만원 정도, 고기와 해물, 과일을 담당하는 ‘어육과유사’는 약 300만원 정도의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세 유사는 가능하면 출향 인사가 담당하고자 한다. 특히 비용을 가장 많이 부담하는 어육과유사는 거의 대부분 출향 인사가 담당한다. 고향에 있는 사람들이 조상을 위한 일을 아무래도 많이 하게 된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은 출향 인사가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신후경을 정점으로 하는 영보마을의 거창 신씨들 문중은 ‘통례공파(通禮公派)’라고 한다. 즉, 통례공파가 영보마을에서 신씨들의 도문중13)이다. 통례공파 역시 많은 분파, 즉 사문중(私門中)을 가지고 있다. 시조 후 15세인 후경은 두 아들을 두었다. 두 아들 중 장남이 ‘산정공’으로서 이 장남의 후손들을 ‘산정공파’라고 한다. 반면 차남은 파시조가 되지 못하였다14). 차남의 손자인 영계공 희남은 학문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벼슬에도 나가 그의 후손들이 희남을 정점으로 하여 ‘영계공파’를 형성하였다. 영계의 아들과 손자는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하다가 증손에 와서 다시 소은공 천익과 호산공 해익이라는 큰 인물이 나게 되었다15) 이 두 사람을 정점으로 하여 다시 ‘소은공파’와 ‘호산공파’라는 사문중이 형성되었다(그림 3 참고). 신씨들의 친족집단은 송향서원에 모셔진 조상을 중심으로 분파하여 사문중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림 3> 거창 신씨의 분파
영보마을의 거창 신씨들의 경우 도문중이 외부적으로 친족집단을 대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문중이 중심이 되어 친족집단의 일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산정공파와 영계공파가 사문중의 중심이 된다. 송향서원제를 모시는 일이나 도선산에서 시제를 모시는 일은 도문중의 일이지만 필요한 경비는 각 사문중에서 분담한다. 반면 조상의 묘제는 사문중이 중심이 되어 사문중별로 모시고 있다.
신씨들 역시 문중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나 많은 편은 아니다. 현재 문중 재산은 논 8,000평 정도로서 문중 행사를 치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과거에는 소작을 주면 상당한 소득이 되었으나 요즘은 소작을 하려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소작료도 얼마 되지 않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결국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구마다 추렴을 해야한다.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는 친족집단의 구조에서 차이를 보인다. 영보마을의 전주 최씨들은 연촌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있다. 비록 대문중 아래 사문중이 분파되어 있지만 친족집단의 모든 일은 대문중 중심이며 친족집단의 일도 대문중의 정점인 연촌을 숭모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친족집단 구성원들 역시 연촌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있고 연촌을 대상으로 한 숭모사업에 헌신적이다. 조상을 열심히 모시면 후손들 사이의 단결과 화합도 잘 된다고 인식하면서 최씨들은 분파간 경쟁을 철저히 막고 있다. 즉, 분파별로 친족계를 만들어 사업을 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으나 분파간 경쟁이나 대립은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다. 반면 거창 신씨들은 도문중보다 사문중의 역할이 더 크다. 후경이라는 중시조가 있지만 후경이 신씨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후경이 연촌의 사위라고 하는 위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후경이 숭앙되면 숭앙될수록 자연적으로 그를 사위로 둔 장인 연촌의 지위도 높아진다. 신씨들 입장에서 보면 자기 조상을 높여 최씨의 지위를 고양하는 셈이 된다. 이에 비해 산정이나 영계는 최씨와의 관계가 비교적 자유롭다. 산정과 영계는 그들의 학식과 관직으로 신씨들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따라서 거창 신씨들은 산정공파와 영계공파의 정점을 이루는 산정과 영계를 더 추앙한다. 산정과 영계 뿐 아니라 소은공과 호산공 역시 중요한 조상으로 인식되어 이들을 정점으로 하는 사문중도 형성되었다. 조상의 숭배에서도 신씨들은 어느 한 조상이 아니라 이들을 포함하는 다섯 조상을 숭상한다. 최씨들의 중요한 상징물들이 모두 연촌에 집중되어 있음에 비해 신씨들은 송양서원에서 보듯 늘 다섯 조상을 동시에 숭상한다. 신씨들의 친족 집단 구성원들 역시 사문중으로 통합되어 있다. 이들은 어느 사문중에 속해 있느냐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지표가 된다. 따라서 도문중의 일에는 소극적이다.
친족구조의 차이는 문중 활동의 적극성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 전주 최씨들은 대부분의 문중 활동에서 모든 친족원들이 참여하고 재원을 집중하기 때문에 규모를 크게 할 수 있다. 연촌 유산 살리기 운동 당시 친족원들을 대상으로 2억 5천만원 이상의 기금을 모금할 수 있었던 것이나 영정 제사에서 많은 제물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친족 조직이 대문중 중심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거창 신씨들은 대규모 사업을 벌이는데 소극적이다. 사문중 중심으로 친족 조직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문중의 파시조를 위하는 일에는 적극적이어도 도문중의 일에는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문중을 대표할 조상이 없기 때문에 신씨들의 문중 활동은 대부분 사문중 의 파시조를 위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친족활동의 차이는 친족 집단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자기 친족집단의 우월성을 주장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최씨들은 친족 활동의 적극성과 후손들의 참여를 내세워 신씨들에 대한 우위성을 주장하는 반면 신씨들은 여러 명의 훌륭한 조상을 두고 있다는 점을 과시한다. 친족집단의 구조는 친족 활동과 친족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4. 친족집단과 지역 정체성
영보마을에서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는 협력과 경쟁관계에 있다. 대외적으로 영보마을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있어서 최씨와 신씨는 협력관계를 유지한다. 마을 내에서도 최씨와 신씨들은 협력하여 타성들과 차별화 하고자 한다. 반면 마을 내부적으로 최씨와 신씨는 위세 경쟁관계에 있다. 조상을 위하는 일이나 친족관계의 일에서 항상 두 친족집단은 상대방을 염두에 두는 경쟁관계에 있다
영보마을은 영암군내에서 항상 구림리와 비교된다. 영보마을의 최씨와 신씨들의 입장에서 보면 구림은 항상 영보의 경쟁상대다. 1979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풍향제는 구림의 ‘왕인축제’와 비교되면서 영보마을의 위상을 높이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16). 풍향제는 후손에게 고향과 선조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어 점차 영보마을의 지역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행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풍향제 추진위원들은 구림의 왕인축제가 역사적 사실이 빈약한 것을 상업화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풍향제가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풍향제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풍향제에는 영보 12마을이 다 함께 참석함으로써 지역성을 표현하고 있으나 실제 풍향제의 가치와 의의를 강조하고 행사를 추진하는 것은 최씨와 신씨들이다. 풍향제에는 최씨와 신씨가 함께 참가하고 일을 추진한다. 풍향제를 주관하는 ‘풍향제추진위원회’의 회장은 최씨와 신씨가 반드시 교대로 맡기로 되어 있으며, 두 친족의 종손은 당연직으로 추진위원에 포함된다. 풍향제의 시작을 알리는 제사에도 두 집안은 공동으로 참가한다.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과 같은 헌관은 영암군수나 유도회장 등이 맡지만 나머지 제관은 최씨와 신씨들이 주로 맡는다. 행사의 외향적 성공 여부는 참석자의 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최씨와 신씨 모두 참가에 적극적이다. 출향한 인사들도 풍향제에는 가능하면 참가하고자 하며 마을주민들도 출향 인사들에게 연락을 하여 참가를 종용하기도 한다.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 역시 풍향제에 참가하여 외지에서 참가한 손님들을 맞이하는 주인 역할을 한다. 최씨와 신씨들은 풍향제의 성공을 위해 적극 협력하며 풍향제의 성공은 마을의 위상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영보마을의 위상을 높이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는 영보마을에 있는 여러 가지 상징적 자원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것이다. 영보정은 이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존양루나 합경제가 최씨 친족집단의 상징적 자원이고 송양사가 신씨 친족집단의 상징적 자원이라면 영보정은 최씨와 신씨를 포함하는 영보마을을 상징하는 자원이다. 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영보정은 우선 그 규모와 주위 경관에서 사족의 권위를 표현한다. 영보정에 걸린 현판이 한석봉의 글씨라고 전해오는 것도 이런 권위의 한 부분을 이룬다. 영보정은 구림의 회사정, 장암의 장암정과 함께 영암의 대표적인 향약 집회소였다는 것으로도 사족의 권위를 드러낸다. 향약을 하던 당시 마을의 규율이 엄하였다는 것은 산정(山亭)에 개마목이 있었다는 것으로 종종 말해진다. 개마목은 산정에 있던 기둥으로 향약을 어긴 사람은 개마목에 매여 공공적인 체벌을 받았다고 한다. 최씨와 신씨 친족집단은 양반마을로서 영보마을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중요한 수단이 되는 영보정의 위상을 높이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해왔고 지금도 협력하고 있다. 우선 영보정은 연촌과 그의 사위인 신후경, 그리고 신후경의 아들인 산정이 공동으로 설립하였다고 하며, 인조 연간에 연촌의 7대손인 최정(崔珽)과 후경의 6세손인 소은공 신천익(愼天翊)에 의해 중건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최씨들이 주도한 ‘연촌 유산 살리기 운동’을 통해 영보정은 다시 보수되었다.
연촌 유산 살리기 운동은 최씨들이 후손들에게 모금을 하여 영보정 뿐 아니라 존양루, 합경제, 영당 등을 보수한 일련의 사업을 말한다. 영보에서 최씨 문중의 일을 맡아보던 종손과 고문은 전국에 있는 후손들에게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모금을 하였다. 구좌당 100만원을 정하고 전국을 다니면서 최씨 후손들에게 모금한 결과 2억 5000만원이 넘는 많은 기금이 모금되었다. 이 돈으로 영보의 각종 상징물들이 보수되었다. 이는 양반으로서 전주 최씨들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양반마을로서 영보의 사회적 위세를 높이는 데도 기여하게 되었다.
최씨와 신씨들에 의해 영보마을의 위상을 높이는 다른 하나의 수단은 제사를 모시는 방식이다. 영보마을의 최씨와 신씨들은 야행(夜行)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영암군의 다른 반촌에서는 저녁이나 아침에 제사를 모시지만 영암마을의 최씨와 신씨들은 아직까지 전통에 따라 자정을 넘긴 시간에 제를 모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것을 통해 영보마을을 경쟁하는 다른 마을과 차별화 하고자 한다. 야행은 후손들에게 다소 불편함이 있더라도 원칙대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이는 후손의 편리함에 따라 제사 모시는 시간을 마음대로 바꾸는 사람들보다 우월한 양반의 지위를 나타낸다고 설명된다. 즉, 제사의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서로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영보에 세거하고있는 최씨와 신씨들은 모두 ‘야행’을 하고 있다는 점을 서로 강조함으로써 두 성씨 모두 다른 마을의 양반들에 비해 우월한 양반으로서의 정체성과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영보마을이라고 하는 지역의 위상을 높이고 양반마을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최씨와 신씨는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 마을 외부에 대해서나 마을 내 타성들에 대해서 신씨들은 최씨를 띄워주고 최씨들은 신씨를 띄워준다. 유력한 친족집단이 서로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함으로써 두 친족집단은 함께 위세를 상승시키게 되고 영보마을의 위상도 높아지게 된다.
영보에서 최씨와 신씨들이 긴밀하게 협조하는 것에 대해 타성들은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최씨와 신씨들이 협조함으로써 마을의 중요한 사안들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 타성들은 ‘영보에서는 최씨, 신씨가 아니면 꼼짝할 수 없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마을의 중요한 직책은 최씨나 신씨가 독점하며 중요한 의사결정도 마을 공식 회의보다 친족집단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이들은 최씨와 신씨들에 의해 영보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외부에서는 영보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영보마을의 위상을 높이는데 협력하는 최씨와 신씨들은 상호 위세 경쟁 관계에 있기도 하다. 최씨들은 우선 연촌이 후경과는 비교될 수 없는 조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신씨의 입향조인 후경이 연촌의 사위로 마을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신씨들이 외손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연촌이 남긴 문집이나 연촌과 관련된 유산들을 강조함으로써 신씨들에 대한 우월성을 나타낸다. 최씨들은 연촌과 관련된 신화 만들기에도 적극적이다. 최씨들은 연촌의 이름인 덕지(德之)를 ‘덕지’로 읽지 않고 ‘덕의’로 읽는다. 너무나 큰 조상이기 때문에 이름자를 바로 부를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연촌의 호와 관련된 신화도 만들어지고 있다. 즉, 연촌의 호가 ‘연촌’으로 된 것은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그가 구휼미를 베풀 것을 상소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마을마다 연기가 올라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최씨들이 연촌의 위대함을 말할 때 자주 드는 이야기는 그가 제사를 일년에 네 번이나 받는다는 점이다. 연촌은 시제와 영정 제사를 받을 뿐 아니라 녹동서원과 임실군 지산면 방계리에 있는 주암서원에 배향되어 있어서 일 년에 총 네 번의 제사를 받고 있다. 서원에 두 곳이나 배향되었다는 점은 연촌의 학문적 업적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다. 이렇게 위대한 조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최씨들은 자신들을 표현할 때 ‘비단 조상에 거적데기 후손’이라고 한다. 이 표현은 조상에 못 미치는 후손임을 표현한 것이지만 최씨들은 이 표현을 통해 조상의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최씨들은 연촌과 관련된 상징물이 신씨들에 비해 우월하다는 점도 강조한다. 비록 영보정을 최씨와 신씨들이 힘을 합쳐 건립하였다고는 하지만 향약의 실시나 영보정에 게시된 여러 현판들이 연촌과 직접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면서 영보정에 대한 연촌 연관성을 강조한다. 보물로 지정된 연촌의 영정과 유지초본은 최씨들의 신분상 우위를 말할 때마다 거론된다. 영정의 유지초본은 그 역사성이나 작품의 우수성, 그리고 그것이 어전에서 그려졌다는 점 등을 통해 최씨의 자부심을 제고하고 있다. 그 외에도 판각, 존양루, 존양당 등과 같은 여러 건물은 상대적으로 신씨에 비해 최씨의 신분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중요한 소재가 된다. 연촌이 모셔져 있는 녹동서원도 최씨들에게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녹동서원은 영암 유일의 사액서원으로서 창건 당시에는 연촌만 유일하게 배향되었고, 이어 그의 손자인 산당공까지 봉안되었다는 점에서 최씨들은 녹동서원을 자신들의 소유물로 인식한다17). 실제 녹동서원에서 제를 모시는 것이나 녹동서원의 유지, 보수는 최씨들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씨들이 신씨에 대해 우월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방법은 후손들이 조상을 모시는 일에 적극 헌신한다는 점이다. ‘연촌 유산 살리기 운동’의 예에서 보듯 최씨들은 조상을 위하는 일과 친족집단의 사업에 대해 대단히 헌신적이다. 영정 제사를 모실 때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되는 반상유사, 편유사, 어육과유사는 서로 하려고 한다. 제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최씨들은 엄청난 양의 제물을 준비한다. 제를 지내기 전 준비된 제물을 합경제 마당에 진설하고 제에 참가한 친족들에게 일일이 제물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자신들이 제물 준비를 제대로 했음을 과시하며 이런 제물 준비는 어느 성씨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라고 자랑한다. 제물을 담당하여 많은 희사를 하는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최씨 친족원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 자부심은 친족에 대한 우월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최규호씨(60세)는 10여 년 전에 영정제사의 편유사를 맡았다. 외지에 살면서 조상을 위해 한번은 유사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월의 대문중 회의 때 자진해서 편유사를 하기로 하였다. 당시 농협 직원이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편유사를 맡고 보니 쌀 5가마니 분량의 떡을 하게 되었다. 당시 돈으로 100만원 정도 들었다고 한다. 편유사를 맡았기 때문에 제를 모실 때 제관직을 맡게 되었다. 제를 모시기 위해 제관복을 입고 유건을 쓰고 상마다 일일이 무릎을 꿇고 떡을 올렸다. 제상 앞에 꿇어 엎드려 제를 지내는데 그러면서도 ‘이게 자랑인가, 아니면 시대착오적인 행동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정성 드려 제물을 준비하고 엄숙하게 제를 지내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 과정에 참가하고 보니 자신이 하는 일이 가족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보더라도 조상을 정성 드려 모시는 일이 자랑이 되면 되었지 욕이 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해부터는 아들을 데리고 참가한다고 한다. 또한 최씨들은 각종 행사로 마을을 방문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며 방문할 때마다 문중에 희사를 하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문중 일이 잘 되는 것을 최씨들은 ‘두드러진 인물이나 부자는 없어도 문중 일은 잘 된다’고 표현한다.
최씨들의 친족집단에서 연촌을 정점으로 하는 대문중이 발달한 반면 사문중의 활동이 미미하다는 사실과 이들의 친족집단 경쟁 방법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최씨들은 연촌이라는 한 명의 조상에게 모든 물질적, 상징적 자원을 집중함으로써 친족집단의 위상을 제고하고자 한다. 연촌을 높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사문중도 모든 활동을 대문중이 하는 일에 협력하는 것에 한정시키고 있다. 모든 친족원이 대문중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최씨들은 외부적으로 과시적인 여러 활동들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반면 신씨들은 자신들은 여러 명의 훌륭한 선조를 두었음을 과시한다. 최씨들이 연촌 한 명의 훌륭한 조상을 두었음에 비해 자신들은 후경, 산정, 이우당, 영계공, 소은공, 호산공 등 여러 명의 훌륭한 조상을 두었음을 자랑한다. 이들을 배향하고 있는 송양사 앞에는 6개의 거대한 비석을 세워 자신들의 가문에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음을 과시한다.
신씨들은 선조가 남긴 상징물을 관리하는데도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씨들에 비해 그런 상징물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상징물 만들기에도 노력하고 있다. 비록 산정이 지금은 최씨의 소유로 되어 있지만 그 곳이 산정이 거주하던 곳이었으며, 그 건물이 가지는 상징적 자산은 자신들의 소유임을 강조한다. 또한 현재는 퇴락되어 있는 이우당이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퇴락된 이우당을 보수하지 않는 것도 보수하면 원형을 상실하여 문화재 지정이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신씨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솔안’ 입구에 새롭게 정려비를 세우는 것이나 영보정 입구에 있는 산정의 공덕비를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18) 등은 이러한 상징물 만들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신씨들이 최씨들에 비해 우월성을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제사를 모시는 방법이다. 최씨들은 후손들의 경제적 후원으로 많은 제물을 준비하는 것을 자랑하고 있다. 반면 신씨들은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데 생물을 사용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최씨들은 ‘숙물’이라고 하여 모든 제물을 불에 익힌다. 그러나 신씨들은 ‘생물’이라고 하여 제물을 불에 익히지 않고 생으로 사용한다. 생물을 사용하게 되면 정성이 더 많이 들게 되며 이는 조상에 대한 진정한 예의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최씨들은 제물의 양만 많았지 정성이 부족하다면서 상대적으로 신씨의 우월을 강조한다.
영암 일대에서 양반을 ‘신, 최, 조, 리, 박’으로 지칭한다는 점도 신씨들에 의해 강조된다. 신, 최, 조, 리, 박은 양반의 서열을 나타내는 것이라면서 가장 앞에 나오는 신씨가 최씨나 다른 양반에 비해 더 앞서 있다고 해석한다. 신씨의 조상들이 벼슬에 나갈 기회가 많이 있었음에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는 말도 신씨 조상의 우월성을 강조할 때마다 거론된다. 희남이 한석봉의 스승이었다는 점도 신씨들을 과시할 때 사용되는 주제다. 영보정의 현판이 한석봉의 글씨로 전해내려 온다는 점과 결부되어 그를 가르킨 희남의 학문이 숭상되고 이는 신씨들의 학문적 자부심을 나타내는 도구가 된다.
여러 명의 위대한 조상을 가진 거창 신씨들은 사문중별로 조상을 높이고 있다. 도문중의 역할은 신씨 친족집단을 외부적으로 대표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고 사문중별로 자신들의 선조를 내세우고 있다. 이런 구조로 신씨들은 과시적인 사업을 벌이는데는 한계를 보이고 있으며, 조상을 숭배하는 내용에서 최씨들과 차별성을 나타내고자 한다.
영보마을의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는 협력과 경쟁의 관계에 있다. 영보마을이라는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족이 지배하였던 양반마을로서 영보의 위상을 제고하는 일에 두 친족집단은 긴밀하게 협력한다. 특히 최씨의 경우 지역의 위상을 제고하는 일에는 신씨를 적극 포용한다. 연촌과 후경이 장인-사위 관계였음을 부각시키고 두 친족집단이 마치 하나의 친족집단인 것처럼 통일성을 강조한다. 풍향제에서 두 친족집단이 단합하고 있는 모습이나 영보정의 유지와 관리에 두 친족집단이 힘을 합하고 있는 모습 등을 통해 최씨와 신씨는 협력관계에 있음을 과시한다. 신씨 역시 마을 외부에 대해 영보마을의 위상을 제고하는 것이 자신들의 신분을 제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보마을의 정체성 확립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두 성씨는 친족집단의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끊임없이 경쟁한다. 자신의 조상이 더 위대한 조상임을 과시하기 위하여 ‘조상 만들기’를 경쟁적으로 시도한다. 조상이 남긴 건축물들을 보수하고 문화재로 지정 받도록 하는 것이나 조상의 업적과 행적을 나타내는 비석을 경쟁적으로 세우는 일, 많은 비용과 정성을 드려 조상숭배 의례를 강화하는 것, 조상과 관련된 전설을 발굴하고 재창조하는 것 등은 이러한 ‘조상 만들기’의 일환이다. 친족집단의 우월성을 경쟁하는 것은 결국 영보마을의 사회적 위상을 제고하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위대한 조상 만들기를 통해 마을 내에 상징물들이 만들어지고 보수됨으로써 영보마을은 양반 마을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즉, 두 친족집단의 경쟁이 심해질수록 영보마을의 사회적 지위도 상승하게 된다. 두 친족집단의 협력과 경쟁은 영보마을의 양반마을로서의 정체성 만들기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5. 맺음말
이 연구는 한 마을에 함께 세거하고 있는 두 유력한 친족집단이 마을이라고 하는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에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를 민족지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영암의 유력한 양반마을의 하나인 영보마을에는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가 1400년대부터 친족집단을 형성하면서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최씨와 신씨의 입향조는 장인과 사위의 관계로서 두 친족집단은 영보마을에서 향약을 함께 실시하고 사족 지배를 강화하였다.
유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사족 지배를 강화해 온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는 친족 조직에서는 상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최씨들은 입향조인 연촌이라는 한 명의 유력한 조상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있다. 친족조직도 연촌을 정점으로 하는 ‘전주 최씨 연촌공파’라고 하는 대문중이 친족 조직의 중심이 되어 있으며 친족계의 분화는 인정하지만 친족조직의 분파적 활동은 용인하지 않고 있다. 사문중들은 친족계를 통해 대문중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역할만 한다. 이에 비해 거창 신씨들은 송양사에 모셔진 유력한 다섯 분의 조상을 두고 있고 이들을 정점으로 하는 사문중이 잘 발달되어 있다. 입향조인 후경은 영보마을 신씨들을 대표하고 있기는 하지만 문중의 중심 조상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다섯 조상들이 실질적으로 신씨들의 위세를 높이는 상징적 인물로 추앙되고 있다.
친족 조직의 차이는 친족 활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문중에 의해 잘 통합된 최씨들은 숭조사업에서 모든 친족원이 협력하는 경향을 보인다. 최씨들은 연촌의 후예라는 인식이 강하며 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전제 위에서 친족 활동을 전개한다. 반면 신씨들은 서로 다른 중시조를 모시고 있다고 인식되어 숭조사업에서도 통합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최씨들은 친족집단 내부의 통합력을 바탕으로 다른 친족집단과 위세 경쟁을 하거나 외부의 위협에 공동 대응하는 잠재력을 가진 반면 신씨들은 사문중간 경쟁으로 통합된 힘을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좌우익의 이념적 혼란기에 최씨들은 친족집단의 내적 통합력을 바탕으로 피해를 최소화 한 반면 신씨들은 사문중간 경쟁으로 친족 내부의 통합력이 약해 많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들이 세거하고 있는 영보마을에서 문중이라는 친족집단과 마을이라는 지역 집단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양반 마을로서 마을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것은 친족집단의 명성을 높이는 것이 되며, 친족집단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여러 활동들은 역으로 마을의 위상을 제고하는 것이 된다. 친족 집단의 상징물들을 보수하고 가치를 높일수록 영보마을의 양반마을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되며, 지역 축제로서 풍향제 추진, 영보정 보수, 영보역 이전 등과 같은 지역집단의 사업을 잘 추진할수록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의 사회적 지명도는 고양되게 된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최씨와 신씨들은 영보마을의 정체성 강화를 위하여 긴밀히 협조하여 왔다. 대부분의 마을 사업은 두 친족집단이 협력관계에 기초하여 공동으로 추진함으로써 두 친족집단은 강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는 친족집단의 위세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있기도 하다. 이 경쟁관계는 상호 위세를 높이는 방향으로 전개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두 친족집단의 위세를 제고하는 것은 물론 양반 친족 집단의 거주지로서 영보마을의 위상을 제고하는 결과도 가져오게 되었다. 조상이 남긴 상징물의 보수와 재건, 문화재 지정 추진, 정려비 건립과 같은 새로운 상징물 만들기, ‘위대한 조상 만들기’ 등을 통해 마을에는 양반마을을 상징하는 여러 건물과 표석들이 정비되어 영보마을은 외견상으로도 양반 마을의 모양을 잘 갖추게 되었다.
요약하면, 사족 지배의 전통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양반마을의 경우 혈통집단과 지역집단은 엄격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단위로서 마을의 통합성은 친족집단에 의해 주어지며 친족집단의 구조에 따라 통합의 단위도 달리 나타나고 있다. 또한 친족집단의 정체성은 지역집단의 정체성과 구분되기도 어렵다. 친족집단의 활동은 지역 집단으로서 마을 정체성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며, 양자는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통합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친족집단과 지역 집단을 엄격하게 구분한 지금까지의 연구 전통은 재점검될 필요가 있다. 지역 집단에 대한 고려 없는 친족집단에 대한 연구나 친족집단에 대한 고려 없는 지역집단에 대한 연구는 인간의 사회 생활을 총체적으로 조망하였다고 평가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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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Kinship Organization and the Relationship of Kin Groups in Youngbo
Kim, Chang-Min (Jeonju Univ.)
This study aims to analysis the relationship of kin groups and regional identity. For this aim, I have done anthropological field research on Youngbo where two major patrilineal descent groups have dwelled for about 600 years. The name of two descent groups are Choi and Shinne which are noblemen(Yangban).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
Though Choi and Shinne have very similar historical background as a noblemen, They have different structure of kin group. Choi have one dominant ancestor and they integrated by one big-lineage. But Shinne have five reputed ancestors and each reputed ancestor is apexes of small-lineage.
Choi and Shinne have competing for reputation of noblemen on Youngbo. They rebuild symbols of kin group such as ancestor halls, pavilions and set up monuments and stone markers of such symbols. They also develop the grounds of arguments who are more dominant noblemen. In this competition, Choi demonstrate integrated capacity of one integrated gig-lineage, but Sinne play divided ability of each small-lineage.
The competition of Choi and Shinne for reputation of noblemen play an important role in regional identity of Youngbo as a nobility village(Yangban-maul). Undertakings of two kin groups for promoting their social status as a noblemen result in monuments building and renovation of historical houses. That is, their competition promotes the reputation of Youngbo as a nobility village.
In this regards, it is insisted that kin groups and regional groups are not strictly divided but well connected on nobility village. The identity of village is not separated from that of kin group and social status of village is determined by that of kin groups.
key words :
kin group, kinship organization, Youngbo, regional identity, making great ancestors
주제어 :
친족집단, 친족조직, 영보, 지역정체성, 위대한 조상 만들기
첫댓글 전주에서 세거할 당시 연촌에게는 전주 박씨 부인이 있었으나 ....라는 글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우리는 인정을 하지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