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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 3국,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몰도바, 크림반도 14일(18년10월17일~30일)]
●01일 13:15(SU 251, 9h) 인천 출발→ 16:15 모스크바 세르메체보 공항 도착→ 18:05(SU2114, 1h40) 모스크바
출발→ 19:50 (1) 에스토니아 탈린 도착
●02일 탈린 관광[1 마가레트 탑 2 성 울라프 교회 3 검은머리전당 4 네브스키 성당 5 톰 교회 6 전망대 7 부엌을
엿보라(니콜라스 교회) 8 자유 광장 9 구 시청 10 비루 거리]→ 패르누→ (2) 라트비아 시굴다
●03일 시굴다[1 구타마니스 동굴 2 투라이다 성 방문]→ 리가 관광[1 리가 성 2 검은 머리전당 3 성 베드로 교회
4 고양이집, 대 길드 5 자유기념비 6 화약탑 7 스웨덴 문 8 성 야곱 성당 8 피터 폴 교회 9 삼형제 집
●04일 리가→ 룬달레 궁전→ (3) 리투아니아 시아우리아이(십자가 언덕)→ 카우나스 관광[1 카우나스 성 2
순교자 성 조지 교회 3 시청사 4 성 프란체스코 성당 5 페르쿠나스 집 5 비타우타스 성당 6 베드로와 바울 성당
●05일 카우나스→ 트라카이[성과 박물관]→ 빌뉴스 관광[1 게디미나스 성 2 성 베드로 바울 교회 3 새벽 문
4 시청사 5 빌니우스 대학 6 대통령 궁 7 빌뉴스 대성당 8 성 안나 성당 9 호박 박물관 10 우주피스
●06일 빌뉴스(170km)→ (4) 벨로루시 민스크 관광[1 눈물의 섬 2 삼위일체 마을 3 2차 대전기념관 4 성 시몬과
헬레나 교회 5 승리 기념탑 6 국립도서관 7 시청사 8 저울 조각 9 성령 대성당 10 벨로루시 국립미술관
●07일 08:25(B2 843) 민스크 출발→ (5) 우크라이나 키예프 관광[1 세계 2차 대전기념관 2 페체르스크 라브라
동굴수도원 3 마린스키 왕궁 4 성소피아 대성당 5 성 미카엘 6 후니쿨라 7 안드레아 교회 8 황금 문
●08일 키예프 공항→ 09: 50(PS 57) 키예프 출발→ 10: 50 오데사 관광[1 보론초프 궁전 2 예카데리나 2세
동상 3 포템킨 계단 4 푸시킨 동상 5 시청 6 오페라 발레극장 6 시 공원 7 파시지 호텔 8 대성당 광장
●9일 오데사(180km)→ (6) 몰도바 키시네프 관광[1 법원 2 정교회 2 국회 3 스테판 공원(푸시킨, 스테판 동상)
4 오르간 홀과 시청 5 성당 공원(개선문 아취, 대성당)
●10일 코리코바[포도주농장 방문]→ 발티→ 리플 기념물→ 공항 이동→ 모스크바→ 향발
●11일 00:50(SU1845, 4h) 키시나우 출발→ 03:45 모스크바 도착→ 06:20(SU 1636, 2h40) 출발→ 09:00
(7) 러시아 크림반도 심페로폴→ 세바스토폴 관광[1 스커틀 쉽 기념탑 2 크림 전쟁 파노라마 그림→ 얄타이동
●12일 얄타 관광[1 레닌 광장 2 소보르 알렉산드라 성당 3 보론쵸프 왕궁 3 리바디아 궁전 4 체호프 박물관]
●13일 심페로폴 이동→ 14:10(SU136, 3h)→ 17:10모스크바도착→ 21:35(SU599, 8h45)인천향발→
●14일 11: 10 인천도착
※발트: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어로 ‘희다’라는 뜻으로 러시아지배 때 생겼는데 발트 하늘은 1년에 10개월은 흐려
그 구름이 바다에 비친 이유도 있지만 겨울에 6개월은 얼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발트의 길: 1989년 600㎞ 거리를 200만 명이 손을 잡고 평화와 독립의 노래를 불러 평화로 독립을 얻었다.
<발트 3국, 벨로루시, 몰도바, 크림반도 여행지도>
[1일] 18년 10월 17일 수요일 ●일정: 13:15(SU 251, 9h) 인천 출발→ 16:15 모스크바 세르메체보 공항 도착→
18:05(SU2114, 1h40) 모스크바 출발→ 19:50 (1) 에스토니아 탈린 도착→ ILMARINE(일마린)
[팀 구성]
이번 팀은 TC 포함해서 6명으로 여성 4분과 남성은 TC와 나 아주 간단했으나 여성 4분은 아마도 남편 없는 곳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관광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들은 부유했다.
오로지 자는 곳이 좋은지? 아니면 무엇을 먹는지? 여자 중에 제일 나이 많은 한분은 캐리어를 2개 가지고 왔는데
하나는 먹는 것만 넣은 캐리어를 힘들게 끌고 다녔으나 후에는 TC 몫이 되었다.
그들은 분명 평범한 여행자이었으나 나에게는 얼마나 불편했으면 이것으로 세계여행을 끝낼 것으로 마음먹을 까?
여행이 끝날 때쯤에는 음악만 들고 같이 여행을 하자고 했으나 난 이미 결정을 한 상태이었다.
[에스토니아 공화국(Republic of Estonia) 역사]
문화: 핀란드 면적: 45,228㎢(경기도1/2), 인구: 134만 명, GNP: 2만3천 달러 호수: 1,400개, 화폐: 유로(€),
민족: 에스토니아인(68%), 러시아인(26%),
역사: 3국 가장 소국, 가장 많은 섬(1521개)을 가진 나라로 13세기 초 이 지방이 신성로마제국에 편입된 이후
1237년 에스토니아의 남부는 독일계인 튜턴기사단이 지배를 했고, 북부는 덴마크가 지배를 했다.
북부를 튜튼기사단에게 팔아 버린 후 외세의 침략과 압제에 시달렸으며, 1695~1697간의 대기근 때 인구의
20%인 7만 명이 굶어 죽었고, 18세기 초 21년 간 전쟁 끝에 스웨덴의 패배로 러시아 지배하에 들어갔다.
에스토니아를 러시아화 하려고 언어와 문화말살을 기도하였고,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세계 각처에서 벌어진 민족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이 틈에 1918년 에스토니아도 독립을 선언하여 근대역사상 처음으로 독립국가가 되었다.
1938년까지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였고 민족문화가 꽃을 피기도 하였으나 1939년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맺은 러시아가 다시 침공하였으며, 에스토니아는 독일과 핀란드의 지원을 받아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다시 소련의 지배아래 들어갔고, 1941년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하여 34,000명의
에스토니아 청년들이 강제 징집되어 전선에 투입되었고, 살아서 돌아온 이들은 30%가 채 못 되었다.
1941~44년 동안 독립군으로 알았던 나치치하에 놓였고, 나치는 유태인의 피가 섞인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에서
학살하여 2차 세계대전 중에 유럽에서 가장 큰 피해를 봤다.
전쟁기간 중에 에스토니아 인구의 25%인 90,000명이 희생되었는데 독일군대나 러시아군대에 징집되어 전투 중
사망한 젊은이들과 러시아와 독일로 강제 이송되어 강제노동에 동원된 사람들이 포함된 수치이다.
1989년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 국민들 2백만 명이 인간 띠를 만들어
독립을 염원하는 노래를 부른 노래혁명(Singing Revolution)은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결국 1991년 8월 20일 독립을 선언하였고, 1994년 서방 나라들의 압력으로 에스토니아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군대가 완전히 철수했으며, 2004년 3월 29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5월1일 EU(유럽연합)에 가입했다.
종교분포는 루터교 30%, 러시아 정교회 28%, 가톨릭 3%, 기타 26% 이며,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강국을 꿈꾸는
한국처럼 에스토니아에서 IT산업이 발전한 역사적 이유는 소련 지배시절 에스토니아 젊은이들은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반감을 인터넷으로 서방과 교류하면서 해소했다고 한다.
체제 유지를 위해 강요되는 일방적인 인문학 대신 컴퓨터 등 기술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2018년 10월에 방한한 에스토니아 대통령 케르스티 칼유라이드(Kersti Kaljulaid)는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에스토니아가 전자강국임을 강조하면서 전자영주권에 관한이야기도 했다.
발트 3국 중에 여성 대통령은 2분 있는데 한 사람은 기혼자인 에스토니아 대통령이고, 다른 한 분은 미혼자인
리투아니아 대통령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Dalia Grybauskaite)로 2012년 3월25일에 방한 했다.
[발트의 튜튼기사단(독일기사단) 역사]
튜턴(튜튼)기사단은 십자군시대의 3대(튜턴, 템플, 요한)기사단 중에 하나로 독일 기사단(Deutscher 0rden)이다.
1190년 제3회 십자군이 아콘(돌레마이)을 포위하였을 때 뤼베크와 브레멘 시민들이 부상병 구호를 위해 세운
병원이 기원이며, 유대지방의 성지방위를 담당하는 종교기사단으로 변모하여 1198년 교황의 승인을 얻었다.
이들은 흑십자(黑十字) 휘장을 붙인 백색망토를 입었으며, 의료 외에 이교도와 싸우는 임무까지 맡아 독일황제나
제후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기증 받았고, 검우기사단(劍友騎士團)과 통합됨으로써 기반이 확고해졌다.
1226년 폴란드 마조비아공(公)의 부름을 받아 발트 해의 슬라브족을 교화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동프로이센
지방의 개척과 포교의 임무도 맡게 되어 활동 중심지는 프로이센으로 옮겨졌다.
1309년 마리엔부르크에 본부를 설치하여, 각지 도시에 성을 축조하면서 무력으로 개종시켜 독일인의 세력을
확장시켰으며, 14세기에 전성기를 누렸으나, 15세기 폴란드에 패배하여 영지의 대부분을 잃고 폴란드왕의
지배하에 놓였고, 종교개혁시기에 기사단의 영지는 거의가 세속영주에게 양도되었다.
단원도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으로 분열하였으며, 1809년까지 잔존한 가톨릭계 기사단도 교회재산 국유화로
영지가 몰수되면서 소멸되었으나 중세 독일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탈린(Tallinn) 역사] 인구: 약43만
‘발트 해의 진주’라 불리는 탈린은 핀란드 만(灣) 속의 탈린 만에 면해 있고, BC 1000년경부터 AD 12세기에
도시가 세워졌으며, 1219년 데인족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가 점령하여 툼페아 언덕에 요새를 세웠다.
1227년 튜턴기사단이 지배했고, 1258년 덴마크가 다시 점령했고, 탈린을 테마기행에서 한자어로 ‘탑의 숲’이라고
했으나 ‘덴마크(Taani)의 도시 (Linn)’의 뜻이며, 1285년 한자 동맹에 가입한 후로는 교역이 발달했다.
1346년 튜튼기사단에게 은 4.5톤에 팔렸다가 1561년 기사단이 해체되어 스웨덴으로 넘어가 황금시대를
맞이했고, 1719년 21년 전쟁에서 표트르대제가 승리하여 러시아영토가 되었다.
1918년 10월 혁명은 왕정붕괴로 잠시 독립했을 때 에스토니아의 수도가 되었다가 1940년 다시 소련에
합병되었고, 1941~44년 독일군에게 점령되어 크게 파괴당했다.
1940, 1944~49년 2차례에 걸쳐 탈린에 살던 에스토니아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증거도 없는 반역죄, 독일군에
협력한 죄, 집단화 반대 등의 죄목으로 소련군에 의해 추방당하거나 투옥되었다.
추방된 사람들은 대부분 스웨덴이나 북아메리카에 정착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이곳의 동료들과 계속 접촉했고,
그 결과 러시아인들이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으로 이주하여 인구의 35%(1970)를 차지했다.
반면, 토착 에스토니아인은 56%로 감소했으며, 탈린의 오랜 역사유적은 툼페아 구릉과 성벽에 둘러싸인 시가지는
복원되거나 방치된 채 많이 남아 있으며, 16세기에 46개 성탑은 현재 26개만 남았다.
13세기의 돔 교회, 고딕 양식의 교회, 1410년에 세워진 길드 대청사, 14세기 라투스, 옛 성 등이 남아 있으며,
오늘날 탈린은 상업 및 어업 항구이고, 공업 중심지로 조선업과 기계제작업을 중심이다.
여러 분야에 걸친 기계공업과 다양한 소비재가 생산되고 있으며, 에스토니아의 문화 중심지로서 과학 아카데미,
종합기술대학, 미술대학, 사범대학, 음악학교 등이 있으며, 극장과 박물관도 여럿 있다.
구시가지에서도 가장 중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카타리나 골목’은 종교개혁 전까지 활동했던 카타리나
수도원은 없어졌지만 대신 중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재현해 놓았다.
[한자동맹(Hansa)과 길드(Guild) 역사]
1096년 시작된 십자군을 따라 나섰던 이탈리아 북부의 상인들은 아랍인들이 무역해온 후추, 향료, 신기한 동양의
물건들을 가져와서 팔기 시작했고, 서양의 모직물과 은을 동방에 팔기도 해서 이익을 많이 남겼다.
이것을 알게 된 독일북부 도시들도 무역에 뛰어들어 발트와 북해를 오가며, 무역을 해서 세력이 커지자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1241년 도시들이 맺은 동맹이 ‘한자동맹’인데 한자는 친구나 무리를 뜻하는 독일 말이다.
한자의 또 다른 해석은 북부독일에 진출했던 훈족의 투르크식 발음으로 어원은 투르크와 위구르의 칸차(Khansa)
인데 ‘장사수완이 좋다’는 의미를 가진 Khan에서 왔으며, 칸차는 상인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몽골 타타르스테이크→ 14세기경 함부르크스테이크(함박스텍)→ 1904년 센인트 루이스의 만국 박람회 독일의
미국 이민자가 함부르크스테이크를 샌드위치 빵에 넣어 햄버거(Hamburg)를 만들었고, 도박장에서 많이 먹었다
샌드위치는 카드놀이를 좋아 하던 18세기 영국의 해군성 장관이었던 샌드위치(Sandwich) 백작이 놀이를 하면서
먹도록 고안했는데 그가 제임스 쿡을 지원해서 샌드위치 섬(하와이)과 사우스샌드위치제도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한자동맹의 중요도시는 독일의 뤼베크를 중심으로 함부르크, 베를린, 노르웨이의 베르겐, 발트의 탈린과 리가이며,
100개가 넘었으면서 한자동맹 도시의 상인들은 지역의 영주와 다투기 시작했다.
도시는 봉건영주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사법권과 과세권을 갖는 자치도시로 성장하였고 상업과 무역으로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상인들에게 속해 있던 수공업자들도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려 길드를 형성하였다.
길드에 속한 사람들끼리 돈을 모아 필요한 곳에 도와주웠고, 수공업자들은 신분을 나누어 최고의 기술자인 장인은
여러 명의 직인을 거느렸으며, 도제는 장인과 직인의 심부름을 하면서 기술을 익혀서 직인이 되었다.
길드는 ‘동업조합’으로 회원 간에 경쟁을 막고, 생산과 판매에 독점권을 가지려 했으며, 장인, 직인, 도제는 스승과
제자관계였고, 한자동맹은 ‘한자회의’라는 기관을 두어 민주적으로 정책을 결정했으며, 해군력까지 갖추었다.
한자동맹은 영국과 네덜란드 등 해상강국들의 등장하면서 힘이 약해졌고 1669년 마지막 집회가 열렸는데 ‘한자는
업자의 단합, 길드는 쟁이 단합’인데 길드 건물 꼭대기에는 물건을 올리는 도르래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길드는 13세기부터 16세기 귀족 상인들의 창고가 모여 있던 장소에 지금도 다양한 장인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상업 활동을 하는 수공업의 일종으로 장인과 상업을 결합한 형태로 하나의 작품이다.
탈린에는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곳은 카타리나 길드(Katariina Guild) 이다.
독일 항공 ‘루프트한자(lufthansa)’의 ‘한자’가 여기서 유래했고, 1964년 12월 6일 단군 이래 국가 원수가 최초로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빌려 타고 간 비행기가 루프트한자 649호 기이다.
탈린에 사는 한국교민은 어린이까지 합쳐야 13명이지만 스탈린 시대에 온 고려인들은 150명이 넘으며, 탈린
시장이 고려인 3세로 미하일 콜바트 시장은 2019년 명예 서울 시민이 됐다.
미하일 콜바트 시장은 태권도 연맹 2곳의 회장인데 하나는 북한이고, 하나는 남한 것이 있는데 유럽은 실제로 싸움에
적용할 수 있는 북한 것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발트 3국의 길드 수호신 검은 머리길드 좌측 탈린 것, 우측 리가 것>
[2일] 18년 10월 18일 목요일 ●일정: 탈린 관광[1 마가레트 탑 2 성 울라프 교회 3 검은머리전당 4 네브스키 성당
5 톰 교회 6 전망대 7 부엌을 엿보라(니콜라스 교회) 8 자유 광장 9 구 시청 10 비루 거리]→ 패르누→
(2) 라트비아 시굴다→ SEGEVOLD(세게볼드)
[새벽 산책]
밤늦게 가이드를 만나 호텔로 갈 때 탈린 구시가지가 가깝다고 했는데 오늘이 여행의 첫날이어서 좀 설이는
마음에 일찍 일어나 어둠 속에 TC와 함께 탈린 구시가지로 향했고, 처음 만난 것은 마가레트 성문이다.
탈린 여행은 비루 문에서 시작하여 마가렛 성문으로 끝나는 것으로 생각해서 일정표를 만들었는데 거꾸로 해야 할
것은 같은 생각이 들었으며, 오후에는 시굴다로 떠나서 야경을 볼 수 없기에 열심히 걸었다.
3자매 건물을 지나자 성 울라프 교회의 성탑만 보였고, TC는 일행 때문에 먼저 호텔로 돌아갔는데 불행이도
지도를 안 가지고 나왔기에 알 수 없는 길 따라 올라 가다가 성벽이 나오고 조명이 너무 어두워 다시 내려왔다.
저지대로 가다가 시청도 만났으며, 위로 올라가 성 니콜라스 교회도 보았고, 자유 광장에서는 야경이 멋진 성 요한
교회(St. John's Church) 보았고, 한문으로 쓰인 노탑림(老塔林, Old Tallinn)도 보았다.
파손된 유적이 벽에 걸린 골목도 지났고, 더디어 비루 게이트가 보였으며, 이제는 돌아가야 했는데 마가레트
성문의 방향을 알 수가 없어 꽃 파는 아주머니에게 물었으나 모른다고 하였는데 물어 볼 사람이 없다.
무작정 걷다가 청소부 아저씨를 만났고, 그는 알려 주는 방향으로 가다가 다행히 마가렛 성문을 찾아 호텔로 갔다.
[마가레트 성문과 탑, 3자매 집, 픽(PIKK) 거리, 성 울라프(Olav's) 교회, Pikk Jalg(긴 다리) 관광]
우리가 묶었던 일마린(ILMARINE) 호텔의 뜻이 해안으로 서울에 4대문이 있다면 탈린에는 6대 문이 있는데
현재는 3개의 성문만 남았고, 그 중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이용했던 해안 성문이 ‘마가레트 게이트’이다.
이 성문은 해안가 북쪽 성벽에 설치된 도시방어용 포탑으로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은 상인만 아니라 해적도 있어
일반적인 성문은 높지만 잘살고 강인한 인상을 주기위해 낮고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뚱보 마가렛’으로 두께는 해안 쪽은 3m나 되며, 16세기에 축조했고, 현재는 해양박물관
(Estonian Maritime Museum)이며, 해안하고 거리는 100m 정도라고 한다.
이 성문을 통과하면 1977년 구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마가렛 성문을 통과하면 바로‘
3자매 건물(The Three Sisters building complex)’은 3자매가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3개의 건물이 나란히 있어 지어진 이름으로 15세기 건축하여 상인의 단합인 길드가 도적에게 강탈당하지
않으려고 상품을 맨 꼭대기 층에 보관하면서 그때 사용했던 도르래를 매달았던 기둥이 위에 보인다.
이 건물은 15세기에 건축된 주택의 복합건물로 중세시대의 건축양식을 잘 나타냈으며, 이 건물은 현재 국빈급
호텔로 사용하는데 당시 탈린이 너무 잘 살아서 발트 해 건너 핀란드에 헬싱키라는 도시를 세울 정도라고 했다.
무역이 쇠퇴하면서 빛을 잃었으며, 이 거리가 ‘Pikk(다리) 거리'이라 하는데 ‘톰페아 성’의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내려가는 길은 2개로 귀족들과 마차가 이용한 것은 경사가 완만한 길은 길어서 ‘Pikk Jalg(긴 다리)'라고 한다.
이 거리는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에서 ‘코투오차 전망대’ 아래까지 약 300m 이며, 다른 하나는 긴 다리라는
뜻으로 긴장화가 걸려 있는 상가 건너편 계단으로 내려가는 ‘짧은 다리(뤼히케 얄그, Luhike Jalg)’이다.
이 거리는 약 70m 정도인데 주로 평민이 짐을 나르던 길이며, ‘Pikk 거리'는 ‘코투오차 전망대’에서 ‘마가렛
성문’ 밖 큰 도로 란나메 티(Rannamae tee 10)와 만나는 거리로 약 600m의 거리를 말한다.
‘3자매 건물’에서 100m 정도가면 탈린이 가장 융성하던 시절에 정치력과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건축한 ‘성
울라프 교회(St. Olav Church)’는 건축당시 첨탑은 159m로 1549~1625년까지 세계에서 제일 높았다.
선원들이 이정표로 삼은 것은 발트 3국에는 산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 교회는 노르웨이의 왕이자 수호성인
울라프에게 봉헌된 ‘성 울라프 교회’는 침례교회로 시내 어디에서나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도시의 랜드 마크로 첨탑은 전쟁 때 파괴 된 것을 재건축하면서 높이가 124m로 낮아졌으나 첨탑 전망대는
시내조망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고, 시내건물은 이보다 더 높이 지을 수는 없다고 하며, 입장은 유로이다.
교회가 입장료를 받는 이유를 설명했는데 그들은 800년의 역사라고 하지만 독립유지 겨우는 50년 정도 되지만
나머지 750년은 남의 지배를 받았고, 독일 지배 때 들어온 가톨릭은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되었다고 한다.
스웨덴 지배 때는 루터교가 들어오고, 러시아 지배 때는 러시아 정교회가 들어왔다고 한다.
1918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했다가 1939년 소련의 다시 지배 때 공산주의는 종교를 허락하지 않았고, 이들은
노예로 종교를 가질 시간도 없었고, 지배자들이 섬기던 신을 섬길 수 없었기에 이들은 신앙심이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일본 지배 때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던 이유와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1253년부터 자기 국가를 가졌고,
국민의 75%가 가톨릭 국가인 리투아니아는 종교세를 내는 나라라고 한다.
1993년 처음으로 교황 성 요한 바오르 2세가 발트 3국을 방문했을 때 3박4일을 모두 리투아니아에서 지내면서
이 나라 빌니우스나 카우나스를 방문했을 때 인구 370만도 안 되는 나라가 10만 명이 모였다고 한다.
헬기타고 리가를 반나절 왔다가 빌니우스로 돌아갔고, 다음날 헬기타고 탈린에 왔다가 빌니우스로 돌아가 로마로
갔으며, 탈린에 왔을 때 차를 막고, 우산도 못 들게 했는데 광장에 모인 사람이 1,000명도 안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를 유지하려고 유물을 전시하지 않는 명칭만 박물관으로 하고, 첨탑을 유로 전망대로 이용하며,
이 교회는 첨탑까지 208개 계단이라 올라가기도 힘들어 입장하지 않고 다른 전망대에서 볼 것이라고 했다.
발트 3국은 유명하지 않으며, 볼 것도 없지만 복잡하지 않고 조용하게 다른 유럽에 비해 물가도 매우 저렴하게
즐길 수 있고, 기대치를 낮추면 그래도 아담하고 깨끗한 유럽 경치를 즐길 수 있다고 했다.
‘Pikk 59’라고 쓰진 건물에는 KGB라는 팻말이 달려 있으며, 이곳은 전 KGB 본부(Former KGB headquarters)로
정식명칭은 ‘국가보안위원회’이지만 ‘소련 비밀경찰’로 알고 있으며, 당시는 KGB 건물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Pikk 거리’ 동쪽으로 있는 스웨덴 대사관(Embassy of Sweden)은 1553~1710년까지 이 나라를 지배하면서
황금시기를 구가했던 나라이며, 입구 위에는 국기가 계양되어 있고, 2층은 흰색바탕에 분홍색 선이 있다.
스웨덴대사관 남쪽에 있는 ‘검은머리길드’ 또는 ‘검은머리전당’으로 부르는 건물로 리가 것이 본점이고 이곳은
분점이라고 했으며, 이 건물에도 도르래의 기둥이 있으며, 탈린에서 유일하게 보존된 르네상스 건축양식이다.
16세기 검은머리형제단이 건물을 매입해서 사용하다가 1579년 재건축했으며, 1640년 만들어진 탈린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문이 있고, 이 정문 위에는 이집트출신으로 흑인이며, 수호성인 모리셔스 얼굴이 부조 되어 있다.
흑인 수호성인을 따라 검은머리길드로 부쳐진 이름으로 그는 80~300년 사이 스위스에서 순교했다고 알려졌고,
현재는 결혼식, 파티 등이 열리는 행사장이라고 하며, 이 전당과 붙어 있는 건물이 있다.
카투트 길드 홀(Kanuti gildi hoone)로 중세시대 독일 출신의 제조부분에 종사하는 장인들의 모였던 장소이라고
하며, 1863년 영국 튜더왕조 시대의 양식으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건물 외벽에 두 남자의 조각이 있으며, 왼쪽은 덴마크의 수호성인이자 1016~35년 재위했던 크누트 왕은 영국,
덴마크 스웨덴을 합친 제국을 지배했고, 오른 쪽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이다.
1920년까지 공예기술자 조합 건물로 사용했으나 현재는 무용과 연극을 공연하는 장소이며, 카투트 길드 홀
건너편에 흰색, 파랑색, 빨강색의 국기가 있는 건물에 러시아대사관(Embassy of Russian)과 영사관이 있다.
대사관 건물은 아름다운 아르 누보(Art Nouveau) 양식의 건물로 1908년 독일이 건축했으며, 이 거리에는 많은
짐차들이 있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은 차는 문화재를 파괴할 수 있어 통제를 한다고 한다.
주민이 꼭 필요한 차랑만 허가된 시간에 들어올 수 있는데 오후 10시부터 아침 10시까지만 들어올 수 있어 가게는
밤에 장사하고 아침에 상품이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배달 차량이 몰린다고 했다.
러시아대사관 앞 길 건너에 있는 마이아스목 카페(Maiasmokk Cafe)는 탈린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The oldest
cafe in Tallinn)라고 유리창 우편 아래에 쓰여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전시되어 있다.
전시된 원형의 작품소재로 사용 된 것이 커피를 담았던 찻잔과 티스푼이었으나 언뜻 보면 잘 모르겠는데 가이드
설명을 듣고 보니 찻잔과 티스푼이 보였으며, 이 카페 북쪽엔 드라코니 갤러리(Draakoni Gallery) 가 있다.
이 갤러리 벽에 커다란 램프에 새겨진 용(dragon)에서 건물 이름의 어원이 되었으며, 아름다운 아르 누보(Art
Nouveau) 양식의 건물로 현재는 미술전시실(Art Hall)이고, 이 건물 남쪽 끝엔 초콜릿 공예 가게가 있다.
초콜릿 공예 가게의 정식이름은 칼레프 마르지판 박물관 방(Kalev Marzipan Museum Room)으로 이 가게에서
제작과정도 볼 수 있고, 케이크, 초콜릿, 캔디를 사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선다.
러시아대사관 좌측 건물이 현재는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는 대 길드하우스인데 이 건물 우측에는 길드 홀(
SUURGILDI HOONE)과 대 길드 하우스(GREAT GUILD HOUSE)라고 써진 프랑 카트가 걸려 있다.
이 건물은 중세에는 도매상 길드회의가 열리던 장소이나 보지는 못했고 1407~1410년 고딕양식으로 건축한 중세
대표적인 길드 건물로 1417년 내부 장식을 완성했으며, 1920년까지 공예가와 상인들을 위한 길드로 사용했다.
현재는 중세의 생할 기구와 갑옷, 칼, 대포 등이 전시되어 있는 역사박물관이며, 초콜릿 가게 길 건너 흰 건물이
성령교회((Holy spirit church)로 탈린에서 흰색을 가진 교회는 루터파이다.
19세기 중반 러시아가 노예를 해방하여 에스토니아 말로 첫 미사를 드린 뜻 깊은 교회이라고 하며, 벽에는 대형
이글거리는 태양무늬가 있는 벽시계는 탈린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로 돔 교회의 제단을 만든 크리스티안 아커만이
만든 작품으로 내부 제단은 화려한 목각작품이 유명하고, 에스토니아의 중세4대 예술작품에 하나가 있다.
작품이 ‘성령강림’이며, 교회는 14세기 가톨릭교회로 건축되었고, 16세기 종교개혁 후 루터교회가 되었으며,
내부는 유로이어서 들어가지 않았고, 이제는 톰페아 성으로 향하면서 ‘Pikk 1’와 ‘Pikk 2’ 번지도 보았다.
번지가 높은 곳이 빠른 이유는 AD 12세기에 도시가 높은 톰페아 성에서부터 시작하여 도시가 커지면서 아래로
향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제는 ‘Pikk Jalg(긴 다리)’ 거리로 들어섰다.
긴 부츠가 걸려 있는 상가 앞쪽에 ‘짧은 다리(Luhike Jalg)’ 거리의 팻말이 보이고, 지하계단처럼 보이는 길이
‘뤼히케 얄그’이며, 톰페아(최고봉 뜻) 50m 정도의 언덕을 경계로 고지대와 저지대로 나뉜다.
[톰 페아 성(Toompea loss),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 마리아 성당 관광]
톰페아 언덕의 똠(Toom)은 높다는 뜻으로 최고의 봉이 해발 50m이라고 하며, 뻬아(pea)는 거리라는 의미라고
하고, 이 언덕을 경계로 고지대와 저지대로 나뉘며, 톰페아 성이 건축되면서 도시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한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BC 3000년 이고, 핀란드보다는 살기가 좋은 남쪽으로 BC 800년 전 핀 민족이
배를 타고 남하했으며, 우랄알타이 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간 아시아 인종이 있다고 한다.
이 인종 중에 현재까지 존속하는 핀란드, 헝가리, 에스토니아 이 3나라는 너무 오래 전에 떨어진 관계로 유럽인에
더 가깝게 되었지만 어순(주어+목적어+동사)만은 우리와 같다고 한다.
톰페아 성 건물 중앙 3층 유리 하단 좌측에 적힌 숫자 1918은 1918년 10월 혁명에 러시아 왕정붕괴로 처음으로
에스토니아가 잠시 독립한 해이지만 1940년 다시 소련에 합병되었다고 한다.
우측의 2018로 처음 독립한지 100주년 되는 해가 바로 올해인데 이것을 나타내는 숫자이며, 가장 중요한 건물인
톰페아 성은 1277~79년 독일인이 정복한 후 요새로 지은 분홍색(이 나라에서는 연어색)이다.
빨간 지붕의 이 성은 아르 누보 양식으로 1919~1991년 독립할 때까지 법원이었고, 재건축하여 2000년부터
101명 의원이 사용하는 국회의사당으로 의원은 1만3천명에 하나 인구에 비해 의원이 너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청렴도는 세계 16위로 너무 원칙적이고 느린 불편한 점도 있지만 대신 평등하고 정의로운 것이 장점이며,
톰페아 광장에 있는 주차장입구의 바리케이드가 좀 신기했는데 차가 들어오면 내려가고, 통과하면 다시 올라간다.
광장 서쪽에는 1820년 파괴된 요새 위에 조성된 ‘총독의 정원’이 있으나 보지 못했고, 톰페아 성 위로 보이는 둥근
키다리 헤르만 탑(Tall Herman Tower)은 1371년 세워졌다고 한다.
1500년 46m 높이로 재건축했으며, 탑 위에 에스토니아 국기가 펄럭이나 750년 동안 여기를 지배했던 덴마크,
독일, 스웨덴, 러시아 국기가 걸렸었는데 에스토니아 국기는 3색이라고 한다.
3색은 에스토니아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맨 위의 파란색은 하늘을, 중간의 검은 색은 숲을, 맨 아래 하얀색은
눈 덮인 땅을 의미하는 것은 이곳은 6개월이 겨울이라고 한다.
※아르 누보(Art Nouveau): 불어로 ‘새로운 예술’의 뜻으로 19세기 말에서 1910년 사이에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장식양식으로 자연의 아름다운 곡선(덩굴, 잎 등)을 모티브로 했으나 기능성이 강조되면서 소멸했다.
11년 째 이곳에 사는 가이드는 1991년 독립한 나라가 GNP 2만3천 달러는 우리보다 더 빠른 경제 성장이라고
하며, 한해 한해가 다르게 발전했는데 6년 전 시내 중심에서 살 때 달세가 200유로했다고 한다.
지금은 3배가 올라 600유로 한다고 하며, 이렇게 발전한 이유는 유럽의 중앙지역인데 유럽연합 EU에서 발표한
것은 러시아를 합친 지리적으로 유럽 전체의 중앙은 벨루로시 수도 빌뉴스에서 북쪽 20km라고 했다고 한다.
유럽은 중세부터 이 지역을 장악해야 동서남북으로 가는 발판이기 때문인데 현재도 전 유럽으로 상품을 보내기에
제일 적합한 지역인데다가 인건비가 몹시 싸서 많은 기업체가 유통기지를 가졌다고 한다.
그중 ‘삼성전자유럽콜센터’가 이곳에 있고, 교육제도도 잘 되어 있어 학력도 높지만 교육평가 전 세계 1등 인 것은
교육평가가 바뀌면서 IT 부분이 들어간 때문이며, 한국교육원도 왔고, 핀란드도 교육을 배워 가고 있다고 한다.
2014년부터 정보국가로 벌서 4차 산업시대로 가고 있고, 2010년부터 국회는 종이 한 장 쓰지 않는 다고 한다.
국토는 남한의 1/2인 4만5천㎢에 전체 인구 130만 명에 탈린에만 45만 명 살고 있어 도시만 벗어나면 사람구경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아서 인구비율 때문에 이민은 받아 줄 수 없어 1년에 천 명 정도라고 한다.
탈린은 생각보다 위도가 높아 북위 59도로 스웨덴의 스톡홀름과 같아 오로라가 내려올 정도라고 한다.
톰페아 언덕에 오르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건물이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Alexander Nevsky
Cathedral)’으로 18세기 초 탈린을 지배하게 된 제정러시아가 힘과 정치력을 과시하기 위해 세운 성당이다.
이 성당은 러시아 정교회로 아직도 예배를 드린다고 하며, 이렇게 제일 좋은 자리에 있어도 이 나라 사람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전 국민의 30%, 탈린의 40%가 러시아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성당은 1900년 노프그로트(Novgorod) 왕자 알렉산더 아로슬라비츠 네프스키에게 헌정된 것으로 네브스키는
Nev(네바 강이 있는 지역) + Sky(~의) 즉 네바지역의 사람이란 의미라고 한다.
이 장군은 1242년 독일튜턴기사단 쳐 들어왔을 때 농민군을 결성하여 그들을 막아낸 러시아 최고의 영웅으로
그는 농민군을 결성하여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사이에 있는 유럽에서 4번째 큰 페이퍼스(Lake Peipus) 호수가
얼었을 때 얼음을 깨고 튜턴기사단을 수장시켜 그들이 활동을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또 스웨덴과 몽고의 양면의 공격을 받을 때도 잘 막아낸 러시아의 영웅으로 검은 양파 모양의 지붕으로
양파모양이 무스의미인지 몰랐는데 활활 타오르는 성령의 불꽃을 의미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제는 1233년에 세워진 ‘성 동정녀 마리아 성당(St Mary's Cathedral)’로 향했으며, 이교회를 ‘톰 교회(Toom
church)’라고도 하며, 1240년 동정녀 마리아에게 봉헌된 교회이다.
정식명칭은 ‘성 동정녀 마리아 톰키릭(Toom Kirik)’이며, Kirik은 교회라는 뜻으로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처음엔 덴마크 인들이 나무로 가톨릭성당을 세웠고, 14세기 후반에 지금의 모습으로 개축되었다.
16세기 루터파 교회가 되어 흰색으로 되어있으며, 이 나라 대통령 취임식 때 예배를 드리는 중요한 교회이나
신앙이 없어 박물관인데 내부엔 제단과 십자가상, 길드들이 사용했던 문장들이 전시되어 있고, 나무로 만든
제단은 공예가 크리스티안 아커만의 작품이며, 17세기에 만든 설교단도 정교하다고 하지만 보지는 못했다.
1770년 세워진 바로크 양식의 종탑은 높이가 69m로 시내를 볼 수 있는 전망대로 사용하며, 유료이라고 한다.
[파트쿨리 전망대 관광과 발트 해에 대한 이야기]
이제는 ‘파트쿨리 전망대’로 가는 길 좌측이 에스토니아 청사로 관공서 밀집지역인데 청사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뒤편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청사 앞에는 네덜란드 대사관과 그 좌측에는 아일랜드 대사관이 있다.
청사건물 아래에 있는 아취 문을 지나면 ‘파트쿨리 전망대(Patkuli observatory)라고 부르지만 정식명칭은 아닌
것 같고, 시청사 뒤 낭떠러지에 있는 작은 공간이며, 파트쿨리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저지대로 갈 수 있다.
다만 이곳에서는 보이는 ‘성 울라프 교회’와 원뿔형 성탑은 장관으로 탈린시가지의 1/4 일만 볼 수 있는데 우측은
건물이 있어 구 시청광장 쪽을 볼 수 없고, 좌측은 멀리 발트 해와 숲이 있어서 볼거리가 없다.
붉은 지붕의 건물은 지도에 찾아보니 탈린 시 중앙정부(Tallinn City Center Government)라고 했으며, 성 울라프
교회 앞에 작은 종탑이 보이는 곳은 주님의 변모교회(Church of the Transfiguration of Our Lord) 이다.
이 교회는 에스토니아 최초의 주교 인 Platon Revelsky 순교자의 흉상이 있고, 사도 적 정교회에 속한다고 한다.
성탑이 보이는 경관은 감탄할 만큼 아름답고 여행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곳으로 탈린은 발트의 최대
관광도시로 배로 들어오는 사람만 800만 명으로 이 나라 국민의 6배라고 한다.
북유럽을 운행하는 실자라인은 이 나라 것으로 스톡홀름에서 헬싱키로 가기 위해 탔던 배이다.
발트 해는 바다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는 이유는 첫 째로는 바다가 짜지 않기 때문인데 오늘 오후 가는 이 나라
마지막 관광도시 파루누에서 확인 해 보라고 하며, 두 번째는 바다에 해산물이 없다고 한다.
조개, 오징어, 문어, 미역 등이 없지만 하늘은 공평해서 대신 보석 호박이 나서 발트 3국은 호박으로 유명하며,
발트 바다는 본래 육지였을 때 소나무 30%, 자작나무 30%, 가분비나무 30%가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빙하가 덮치면서 바다로 변했고, 이 빙하가 녹아서 바다 물도 짜지 않다고 했는데 바다 속의 소나무 송진은 호박이
되었으나 바다 속이라 채취할 수 없지만 물보다 가벼워 물 위에 떠다니다가 바다 해변으로 올라 온 다고 한다.
이 호박을 사람들(가이드 말로는 호마니)이 바람 부는 날 뜰채를 이용해 주워 온 것이라고 하며, 지금은 기술이
발달해서 낮이 아니라 캄캄한 밤에 자외선을 비추면 호박은 빛을 발해서 찾기가 매우 쉬워졌다고 한다.
나머지는 호박 가게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며, 잠시 사진 찍을 시간을 주었다.
15~ 16세기에 건축한 4.7km의 성벽에 46개의 원뿔형의 성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1.85km 성벽에 26개의 성탑이
남았고, 그 중 가장 높은 성탑이 ‘부엌까지 엿보라’인데 이곳에 갈 것이라고 한다.
이젠 호박 선물가게에 들어가 다시 호박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투명한 호박이 세월이 흐르면 뿌연 해지기에
불투명한 것은 더 오랜 된 것으로 가격이 비싸진다고 하며, 제일 오래된 것은 새하얀 하다고 한다.
작은 것은 세공하다가 떨어진 것으로 매우 싸다고 했으나 살만한 것은 없었고, 한 사람이 너무 시간을 지체했으며,
이제는 다시 아취 문을 통과해 좌측에 있는 좁은 골목이 ‘피의 골목(Alley of blood)’ 이다.
이곳이 병사들이 주인마님을 위해 흘린 유래는 폭이 넓은 범종 치마를 입은 두 여인이 교차하지 못한 것에서
기인했는데 자존심이 강한 귀족부인들은 사병이 싸우도록 하여 이긴 편이 먼저 지나가면서 생겼다.
나이가 많은 귀족부인이 먼저 지나가도록 하여 문제를 해결한 후로는 젊게 보이려고 서로 양보했다고 하는데
골목이 생각보다 넓어 만들어진 이야기 같아 보였으며,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을 지나갔다.
[부엌을 엿보라, 덴마크 왕의 정원, 자유 광장 관광]
이제는 성벽 좌측에는 ‘처녀 탑(Maiden Tower Museum-Cafe)’이 보이고, 중앙에는 성 니콜라스 첨탑이 보이며,
우측으로 ‘부엌을 엿보라’라는 탑이 보이고 그 앞에는 코만단디 가든(Komandandi Garden)이 있다.
성벽의 높이는 약 16m, 두께는 3m으로 가장 잘 보존 된 성벽과 2개의 탑 중에 원뿔형은 너무 높아서 남의 ‘부엌을
엿보라’이며, 독일 북서부 말로 ‘키엑 인 데 쾩(Kiek in de Kok)'으로 현재는 중세시대 박물관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40m 거리에 사각형의 ‘처녀 탑’은 중세기대에 매춘부들을 수감했던 곳으로 현재는 박물관과
카페로 사용하며, 성벽 안으로 들어가면 ‘덴마크 왕의 정원(Danish King's Garden)’이 있다.
정원 뒤에 보이는 것은 안전하게 도시로 내려가는 벽 통로(Stable Tower and Town Wall Walkway)가 있으며,
수도사들의 조각이 있으나 가 보지는 못했고, 입구에 있는 합장한 수도사 조각은 멀리서 보았다.
이 정원은 1219년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가 점령하고 툼페아 언덕에 요새를 세운 자리로 탈린은 ‘덴마크(타니-
Taani)의 도시(린-Linn)’가 어원이며, 덴마크가 쳐들어 왔을 때 이곳 주민들도 만만찮게 대항했다고 한다.
덴마크가 거의 패할 때 쯤 국기가 하늘로부터 떨어져 이것을 받아 승리한 것이 덴마크 국기의 유래이지만 자기를
지배했던 민족이 만든 도시 이름을 수도로 했을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가이드는 탈린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다고 하며, 그것은 ‘딸불린’으로 ‘겨울 도시’라는 뜻이라고 했고, 발트 3국의
시작은 독일이나 다만 탈린은 다르다고 했는데 오직 이도시만 독일이 아니 덴마크가 지배했다고 한다.
덴마크도 이곳을 지키기가 힘들어지자 14세기에 은 4.5톤(Ton)에 팔았고, 17세기에 스웨덴에 넘어갔다고 한다.
우리는 입장표시를 가슴에 붙이고, ‘부엌을 엿보라’에 입장했고, 사진은 플래시를 끄고 가능하며, 이 박물관에서는
전시된 유물도 구경할 수 있지만 시내를 전망할 수가 있다고 하여 기대를 가졌다.
유물이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나 사진과 미니어처로 구성된 것이 많았고, 첫 번째 만난 것은 갑옷이었고, 그 다음은
현지 도슨트가 설명한 것은 16세기에 성벽에 있었던 성탑인데 46개는 안되어 보였다.
특이한 것은 아래층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구멍이 중앙에 뚫려 있고, 다음은 형틀이며, 다음은 탈린을 다스렸던
사람들의 초상화와 미니어처로 된 평민복장, 죽은 사람을 염장한 모습, 대포와 포탄들, 표트르 대제 초상화,
구식장총, 현대 군복, 중세 방패와 칼 등은 관심이 없었으나 마지막 층의 시내 전망만은 좋았다.
특히 덴마크 정원 쪽과 소코스 호텔 비루(Sokos Hotel Viru) 쪽의 붉은 집들은 너무 아름다웠으며, 가이드는 자유
광장의 북쪽에 보이는 성 니콜라스 교회(St. Nicholas Church)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했다.
고지대는 귀족이 살았다면 저지대인 이곳도 만만치 않는 부르주아가 살았다고 하며, 부르주아는 프랑스어로 성안
사람이라는 뜻이나 중소 상공업자를 가르치는 말로 공산주의자들이 타도할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상공업자들은 1230년 상인들의 무역선, 선원의 수호성인 성 니콜라스를 모시 위한 교회로 건축했으며, 지금은
박물관과 콘서트 연주회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1987년부터는 국제 오르간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한다.
인터넷에서는 독일 상인과 기사들을 위해 성곽이 세워지기 전까지 요새역할을 했다고 하며, 1523년 종교개혁 때
우상을 파괴할 때 이 교회는 면했으나 2차 세계대전 때 폐허가 된 것을 1980년 복원했다고 한다.
탈린에서 1번째는 성 울라프 교회이고, 2번째로 높은 니콜라스 교회 첨탑은 105m로 유료 전망대이다.
이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생상스가 영감을 얻어 작곡했다는 ‘죽음의 무도’라는 그림인데 독일 화가 베른트
노트케(1435~1508)가 30m의 폭에 그린 대형 그림으로 해골에 이끌려 가는 왕, 왕비, 교황, 영주들이 있다.
그림은 누구든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한 것이며, 죽음의 무도라는 음악은 200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여자쇼트 경기에서 김연아가 76.12점을 받아 세계 최고기록인 달성한 테마곡이다.
이제는 ‘자유 광장’으로 향했는데 좌측에 일본대사관이 있고, 앞 벽에는 ‘EESTI VABADUSSODA 1918-
1920'라고 쓰여 있는데 ‘EESTI’는 ‘동쪽나라’, ‘VABA’는 ‘자유’, ‘DUSSODA’는 광장의 뜻이라고 한다.
이곳 광장의 이름이 ‘자유 광장’이며, 숫자의 1918은 독립한 해였고, 1920은 독립을 인정받은 해라고 한다.
그 뒤에 있는 것은 독립을 의미하는 ‘독립전쟁 전승기념탑’인데 십자가 모양으로 지금은 습기가 차서 수리중이며,
흰 천으로 가려 놓았고, 이 광장을 조성하면서 우리나라 돈 2조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돈을 사용해서 국민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이 디자인 값이라고 하며,
광장에는 6개의 게양대에 모두 에스토니아 국기만 있으며, 그 뒤로 스웨드뱅크(Swedbank) 건물이 보인다.
앞 벽에는 ‘18’이라는 글자는 독립한 1918년의 뒷자리이며, ‘8’자는 ‘ㅇ’ 두개를 위아래로 붙여 놓은 것이어서
100주년 되는 뜻도 있는 것이라고 했고, 동쪽에는 루터파인 ‘성 요한 교회(St. John's Church)’가 있다.
[시청 광장, 비루 성문, 시청 약국, 카타리나 골목, 패르누(Parnu) 관광]
이젠 탈린의 가장 중심인 시청광장(City Hall Square)에 도착했고, 광장에는 구 시청, 오래된 약국과 각종 중요한
행사도 열리며, 특히 1441년부터 11월 첫 주에서 다음해 1월 7일까지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도 열린다.
광장 남쪽에는 ‘탈린 구 시청사[Tallinna Raekoda(라에코야)]’는 중앙에는 좌측의 국기와 우측의 탈린 시기가
있고, 깃발 양쪽엔 지붕 빗물이 떨어지는 ‘용머리 홈통’이 있으며, 용은 귀신을 내 쫓는 상징적인 것이라고 한다.
13~15세기 고딕식 중세 건물로 한자동맹 시의 길드 건물 표시로 도르래 기둥이 있고, 현재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탈린은 발트 3국 중에 유일하게 돌이 많아 마가렛 성문, 부엌까지 엿보라, 시청까지 회색의 석회암으로 건축했고,
다른 나라들은 돌이 없어 붉은 벽돌로 건축했으며, 대부분 지붕은 붉은 기와로 덮었다고 한다.
구 시청사는 500년 동안 단 한 번도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탈린 시가지가 비행기폭격을 면한 것은 흐린 날씨
덕분으로 구시가지가 통째로 세계문화유산에 들어가게 된 동기라고 광장 주위에는 예쁜 건물들이 많다.
인터넷은 1402~04년 건축되었고,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양식의 건물로 왕관모양인 8각형의 첨탑 높이는
64m, 평범한 시민에서 활쏘기 대회의 우승으로 영웅 된 ‘토마스 할아버지 풍향계’는 1530년에 세운 것이다.
1970년까지 시청이었으나 지금은 박물관, 연주회장, 예식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제는 비루 성문으로 향했고,
‘비루 성문(Viru Gate)’은 망루로 사용했다는 설명을 마지막으로 하고, 25분간 자유 시간을 가졌다.
25분 만에 성 니콜라스 교회를 다녀오기엔 부족하여 부르하트 가문에서 10대에 걸쳐 1422년부터 현재까지
600년 넘게 한 장소에서 영업하는 시청약국(Town Hall Pharmacy)을 다녀오기 위해 열심히 걸었다.
시청약국은 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으로 여자약사 한분만 근무하고 있었고, 약재였던 것들과 약을 제조하던
기구들을 구경하였으며, 탈린의 옛 사진 그리고 바닥엔 15세기 탈린의 구시가지 건물지도를 보고 나왔다.
약속 장소로 오는 길에 새벽에 보았던 카타리나 골목(Katariina kirik)은 중세분위기를 느끼기에 가장 좋은 거리로
1246년 건축했던 카타리나 수도원은 탈린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이었으나 종교개혁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거리에는 당시 파괴되었던 수도원의 잔해를 벽에 걸어 놓았으며, 현재는 유리공예, 도자기 등의 수공업 전문
삽이 있다고 하며, 비루성벽에 기대어 장사하는 것을 본 후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제는 점심을 먹기 위해 차를 타고 동쪽에 있는 해안도로를 달렸는데 발트 3국은 산이 없어서 해안도로가 없지만
이곳이 유일한 곳이라고 하며, 이곳은 관광도시라서 전차는 새것이라도 아주 옛날 것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가까이에 있는 카드리오르그 궁전을 못 보는 것이 아쉬웠는데 카드리오르그 궁전은 표트르 1세가 발트 지역의
라트비아 출신 예카테리나 1세를 위해 18세기에 세운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처음 일정에는 들어 있었는데...
달리다 보면 좌측에 러시아 군함 루살카 호의 침몰을 기념하여 1903년 세워졌다는 루살카 기념관(Russalka
Memorial)이 보이며, 점심을 먹은 후 이 나라의 마지막 일정인 패르누로 향했다.
패르누(파루누)는 에스토니아 서쪽 맨 아래에 있는 주로 발트 해의 패르누 만 연안에 위치하는 여름 휴양지로
시내는 제법 볼만한 것이 있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없고, 나무 가지만 풍성한 바다 해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다 물만 맛보라고 했는데 ‘바닷물이 짜다면 손가락이 짠 것’이라고 하며, 라트비아 국경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통과했고, 시굴다 남쪽 변두리에 있는 ‘세게볼드(SEGEVOLD)’라는 호텔에 들어갔다.
※예카테리나 1세(1725년~27): 그녀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하에 있었던 농가에서 태어났는데 자료에
따라 리투아니아 또는 에스토니아라고 하는데 마르타는 부모가 전염병으로 죽어 고아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마르타는 라트비아 한 가정의 하녀가 되었고, 북방전쟁 때 러시아군에
잡혀 멘시코프 원수에게 팔려가 정부였으나 원수의 결혼으로 표트르 1세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내연의 처로 있다가 1712년 정식 결혼하여 황후로 책봉될 때 얻은 이름이 예카테리나인데 문맹인데다가
음주벽까지 있었으나 표트르에게는 극진하였고, 1725년 표트르 대제가 죽었다.
대제는 황제 계승권을 받았으나 사용하지 않고 죽었으며, 그 뒤 근위부대를 이용한 멘시코프 원수 등의 책모로
로마노프 왕조의 첫 여황제에 올랐고, 스스로 정무를 보지 않아 멘시코프 등이 만든 추밀원이 실권을 잡았다.
대제의 황제 계승권을 사용하지 않고 죽어 결국 부인에게 왕위가 돌아가면서 70년 동안 여제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는데 예카테리나 1세나 2세의 공통점은 둘 다 러시아 사람이 아니고, 둘 다 심하게 남자를 밝혔으며,
황제가 될 정도의 가문은 아니어서 왕위를 찬탈 점령했다는 점이다.
※성경 안나: 낸시, 카타리나, 영어로 캐서린, 카렌, 캐시 등 프랑스에선 카트린느, 러시아는 예카테리나이다.
※추밀원(枢密院): 국가의 주권자(전형적으로는 군주)의 자문기관으로 중국 왕조의 국가기관인 '추밀원'의
어원이며, 고려의 행정기관, 영국 국왕의 자문기관, 러시아 황제의 자문기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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