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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 한(翰) |
우리 전주리씨의 시조의 휘는 한(翰)이요, 호는 견성(甄城)이다. 신라의 사공(司空)벼슬을 지냈다. 공은 원래 중국에 살았었는데 하늘이 낸 성스런 인물로 남보다 총명하시고 재질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는데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나웠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그래서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서려 있다’라고 하였다.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략을 받아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들어오니 그 때가 18세였다. 이렇게 어리셨는데도 문장이 비범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탁월한 재능과 더불어 기품이 널리 떨쳤다. 우리나라로 오신 지 얼마 않되어 명성이 조정에까지 떨쳐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사공에 임명하니 정치를 하신 지 1년 만에 나라가 태평하여 온갖 벼슬아치들이 다 화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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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전주(全州)의 연혁(沿革) 백제가 신라에게 망한 뒤인 685년(신라 신문왕 5)에 주를 두어 다시 완산주로 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지금의 전주로 개칭하였다. 993년(성종 12)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로 개칭하였다가 995년(성종 14) 12절도사를 둘 때 순의군(順義軍)이라 부르고 강남도(江南道)에 예속되었다. 1355년(공민왕 4) 원나라 사신 야사불화(野思不花)를 거두었던 곳이라 하여 강등되어 부곡(部曲)이 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 다시 완산부로 복구 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조선 태조의 본관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 1403년(태종 3) 전주로 환원, 부윤(府尹)을 두었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두었다. 그 뒤 줄곧 전라도의 감영이 이곳에 있었다. 1935년 부로 승격, 1949년 시로 개칭되어 오늘날에는 인구 30만의 도시가 되었다. 완산은 원래 전주에 있는 산 이름이었다. 전주부의 남쪽 3리에 있었던 작은 산으로 고덕 산(高德山)으로부터 갈라진 산이었는데, 전주의 안산(案山)으로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였다. 조경단은 우리의 시조 한(翰) 할아버지의 묘역(墓域) 의 이름이다. 다만 묘가 있는 곳이 불확실하여 단을 쌓아 놓고 제향을 지내니 조경단이라 하는 것이다. 고종태황제가 친히 지은 ‘조경단비음기(肇慶壇碑陰記)’에 이렇게 적혀 있다. 경기전(慶基殿) 전의(殿儀)에는 전주부 북쪽 10리에 건지산이 있으니 곧 시조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 하였고, 읍지(邑誌)에도 ‘건지산에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영조대왕 때 이르러 실제로 묘역의 경계를 조사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근방의 백성들의 무덤을 파내게 하고 감독관과 산지기를 두어 경계를 확정하고 절대로 벌목을 못하게 하였다. 동서로는 3,360척이요 남북으로는 3,520척이다. 지금부터 자자손손 억만년 영구히 전례(典禮)가 되리로다. 아, 짐(朕)이 어찌 이런 전례를 만들었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열성조께서 겨를이 없어 실천하시지 못했던 것을 오늘을 기다려 이어 행 한 한 가지 일일 뿐이로다. 우리 왕실의 관향이다. 그래서 전부터 묘석이 있었는데 모두 마모되어 겨우 7자만 볼 수 있으니 ‘完山’과 ‘己亥五月立’뿐이다. 금년은 곧 기해년이요, 단을 쌓아 마치는 일도 5월이다. 하늘의 이치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도 때가 있어 꼭 부합함이 이와 같도다. 오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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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자연(自延) |
시조 한(翰)공의 아들로 휘는 자연(自延)이며, 시중(侍中)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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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천상(天祥) |
2세 자연(自延)공의 아들로 휘는 천상(天祥)이며, 벼슬은 복야(僕射)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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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광희(光禧) |
3세 천상(天祥)공의 아들로 휘는 광희(光禧)이며, 벼슬은 아간(阿干)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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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입전(立全) |
4세 광희(光禧)공의 아들로 휘는 입전(立全)이며, 벼슬은 사도(司徒)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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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긍휴(兢休) |
5세 입전(立全)공의 아들로 휘는 긍휴(兢休)이며,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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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염순(廉順) |
6세 긍휴(兢休)공의 아들로 휘는 염순(廉順)이며, 벼슬은 생원(生員), 호장(戶長)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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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승삭(承朔) |
7세 염순(廉順)공의 아들로 휘는 승삭(承朔)이며, 벼슬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생원 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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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충경(充慶) |
8세 승삭(承朔)공의 아들로 휘는 충경(充慶)인데,《씨족원류》에는 광경(光慶) 혹은 극경(克慶)으로 적기도 한다고 했고,《목은집(牧隱集)》에도 충경(充慶)으로 씌어 있다 한다. 벼슬은 생원이다. 배위는 생원 윤자필(尹自必)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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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경영(景英) |
9세 충경(充慶)공의 아들로 휘는 경영(景英)이며, 벼슬은 생원 호장이었다. 고려?조선조에 걸쳐 두었는데 중앙 관서의 직속 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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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충민(忠敏) |
10세 경영(景英)공의 아들로 휘는 충민(忠敏)이며, 벼슬은 장사(長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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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화(華) |
11세 충민(忠敏)공의 아들로 휘는 화(華)이며, 추밀(樞密) 벼슬을 지내셨다. 종2품?정3품 벼슬이었다. 그리고 ‘대언’은 왕명을 출납하는 벼슬로 승선(承宣)이라 고도 했는데, 나중에 승지(承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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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진유(珍有) |
12세 화(華)공의 아들로 휘는 진유(珍有)이며, 벼슬은 생원 호장을 지냈다. 그러나《씨족원류》에는 일명 유진(有珍)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배위는 첨대중찬사(僉隊中贊事) 오대박(吳大朴)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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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궁진(宮進) |
13세 진유(珍有)공의 아들로 휘는 궁진(宮進)이며, 한림(翰林)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씨족원류》에는 호장을 지냈다고 하였다. 배위는 장군을 지낸 이요(李潘)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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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용부(勇夫) |
14세 궁진(宮進)공의 장남으로 휘는 용부(勇夫)이며,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씨족원류》에는 대장군 겸 태자청도솔부솔(太子淸道率府率)을 지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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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인(璘) |
15세 용부(勇夫)공의 아들로 휘는 인(璘)이며, 내시집주(內侍執奏)란 벼슬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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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양무(陽茂) [생몰 : ? ∼1231] |
16세 인(璘)공의 아들로 휘는 양무(陽茂)이며, 벼슬은 장군(將軍)을 지냈다.
그 내용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양무 장군 내외분의 묘소를 ‘준경묘?영경묘’라고 추존할 때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를 세웠는데 고종황제 어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준경묘?영경묘?재실?목조대왕구거유지 등을 합쳐 1981년 8월 5일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받았다. 그러나 영필?영밀은 자손이 없고, 영습공만 후사를 두어 선원선계 세번째 파계인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줄여서 주부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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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목조대왕(穆祖大王) |
17세 양무(陽茂) 공의 아들로 휘는 안사(安社)요, 고려 때에 벼슬하여 의주지사(宜州知事)를 지내고 원(元)나라로 들어가 벼슬하여 남경(南京) 오천호(五千戶)의 다루하치(達魯花赤 : 원나라 지방 관청의 장관직)가 되었다가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899년(광무 3) 11월 27일에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옛 살던 집터에 고종황제가 친히 쓴 ‘목조대왕 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 8자의 비를 세웠고, 1900년(광무 4) 1월 18일에는 전주 자만동(滋滿洞)에도 비와 비각을 세우고, 고종황제가 친히 ‘목조대왕 구거유지’라고 8자를 썼다. 그러나 처음에는 함북 경흥(慶興 : 孔州)의 성남(城南)에 있었는데, 1410년(태종 10)에 이곳으로 이장하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본관은 평창(平昌)이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공숙(公肅)의 딸이며 5월 15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효비(孝妃)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효공(孝恭)’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사자(嗣子)는 익조대왕이고, 차례는 넷째요, 장남은 안천대군(安川大君) 어선(於仙)이요, 차남은 안원대군(安原大君) 진(珍)이며, 3남은 안풍대군(安豊大君) 정(精)이요, 5남은 안창대군 (安昌大君) 매불(梅拂)이요, 6남은 안흥대군(安興大君) 구수(球壽)이다. 공주(孔州 : 慶興)의 성(城) 남쪽 5리에 장사지냈다. 그 후 1410년(태종 10) 경인년에 함흥 서북쪽 가평사(加平社)의 계좌원(癸坐原)으로 이장되었다. 덕릉(德陵)이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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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익조대왕(翼祖大王) |
18세 목조대왕의 제4남으로 휘는 행리(行里)요, 함경도 덕원(德源) 적전사(赤田社)에서 태어났다.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이어받고 9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태조고황제가 익왕(翼王)으로 추존하고 그 뒤 태종대왕이 ‘강혜성익(康惠聖翼)’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지릉(智陵)으로 함경남도 안변군 서곡면 능리 임좌(壬坐)에 있고 표석이 있다. 9월 2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정비(貞妃)로 추존하고 태종대왕이 ‘정숙(貞淑)’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숙릉(淑陵)으로 함경남도 문천군 문천면 능전리 갑좌(甲坐)에 있고 표석이 있다. 장남은 함녕대군(咸寧大君) 안(安)이요, 차남은 함창대군(咸昌大君) 장(長)이며, 3남은 함원대군(咸原大君) 송(松)이요, 5남은 함천대군(咸川大君) 원(源)이요, 6남은 함릉대군(咸陵大君) 고태(古泰)요, 7남은 함양대군(咸陽大君) 전(玲)이요, 8남은 함성대군(咸城大君) 응거(應巨)이다. 장녀는 안의공주(安懿公主)인데 증좌군도통제(贈左軍都統制) 주단(朱端)에게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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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도조대왕(度祖大王) |
몽고명은 패안첩목아이다. 함흥(咸興) 송두등리(松頭等里)에서 탄생하여 1342년(고려 충혜왕 복위 3) 7월 24일에 승하하니 고려 조정에서 찬성사(贊成事)를 추증하였다. 능은 의릉(義陵)으로 함남 흥남시 운남면 운흥리 임좌(壬坐)에 있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경비(敬妃)로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경순(敬順)’이라 존호를 올렸다. 5남 3녀를 낳았고 능은 순릉(純陵)으로 함남 흥남시 마전리 임좌(壬坐)에 있다. 표석이 있다. 장남 완창대군(完昌大君)은 자흥(子興)이요, 3남 완원대군(完原大君)은 자선(子宣)이며, 4남 완천대군(完川大君)은 평(平)이요, 5남 완성대군(完城大君)은 종(宗)이다. 장녀 문혜공주(文惠公主)는 대장군 문인영(文仁永)에게 시집갔고, 차녀 문숙공주(文淑公主)는 다루하치 김마분(金馬粉)에게 시집갔으며, 삼녀 문의공주(文懿公主)는 허중(許重)에게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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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환조대왕(桓祖大王) |
20세 도조대왕의 제2남으로 휘는 자춘(子春)인데 자도 자춘이다. 1315년(고려 충숙왕 2)에 탄생하고 고려때에 벼슬하여 영록대부(榮祿大夫)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삭방도만호겸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를 지냈고, 1360년(고려 공민왕 9) 4월 갑술일(《태조실록》에는 庚戌日)에 승하하니 46세였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1795년(정조 19) 영흥 본궁(本宮)에 신주를 모실 때, 대신과 예조 당상관을 보내어 4월 27일에 본궁 이안청(移安廳)에서 신판(神板)을 만들어 4월 26일 본궁 정전(正殿)에 모셨다. 3남 1녀를 두셨다. 신도비와 표석이 있다. 1900년(광무 4)에 도의 책임자에게 명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비문과 글씨를 고종황제가 친히 썼다.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봉작을 받고, 2월 24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의비(懿妃)에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의혜(懿惠)’라 더 존호를 올렸다. 1795년(정조 19)에 영흥 본궁에 신주를 모실 때 대신과 예조 당상관을 보내어 4월 21일에 본궁 이안청에서 신판을 만들어 26일에 본궁 정전에 모셨다. 1남 1녀를 낳았다. 1900년(광무 4)에 도의 책임자에게 명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비문과 글씨는 고종황제가 친히 썼다. 한 분은 이씨(李氏)로서 완풍대군(完豊大君) 원계(元桂)를 낳았고, 또 한 분은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로서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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