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교회의 손기철 장로에 이어 김하중 장로라는 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 청년 때문이었다. 어떤 도시에서 신사도 운동과 아이합(IHOP, 국제기도의 집)에 강의를 마쳤을 때 그 청년이 “혹시 김하중 장로님의 책을 보셨나요? 거기에도 그런 내용이 엄청 많습니다!”라고 했다. 직접 그 분의 책을 읽어보지 않고서 함부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돌아와서 서점에 전화하여 김하중 장로의 책을 주문했다. 도착한 책의 제목이「하나님의 대사 Ⅰ」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김하중 장로는 적어도 두 권 이상의 책을 내신 모양이다.
그의 책을 조금 읽으면서 “한국 교회에 망조가 드리웠다!”라는 한탄이 절로 나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러한 책이 한국 교회의 성도들에게서 인기를 누리는지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 솔직히 이 책을 위해 시간을 들이고 돈을 쓰는 것이 억울했다. 그럼에도 반품하지 않고 흩어보았던 것은 단지 나라도 바른 소리를 해야 한국 교회의 체면이 설 것이라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개혁주의의 은사중단론이 죽어야 진정한 예배가 살아나고 성령의 역사가 살아난다고 할 것이다. 성령의 은사와 역사하심을 부정하는 죽은 교리의 제자들은 그대로 입을 다물라! ...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알고나 말하면 좋겠다. 정확하게 말하면 “계시적 은사와 사도적 이적의 중단론”이다. 성령의 내주, 조명, 인도, 치유, 응답, 소통 ... 등의 성령의 활동이 중단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모든 은사들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경완성 이전에 주어졌는 계시와 상관되었던 성령의 은사가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의 새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구원의 복음임을 확증하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등의 사도적 이적이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그 외의 모든 성령의 역사와 은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개혁주의자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말살하려는 악날한 이단이다.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상한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영적인 현상을 무턱대고 성령의 역사라고 믿지 말고 분별해야 한다는 주장을 은사중단론자의 횡포라고 원망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더욱 더 올바른 개혁주의자가 되기를 원하는 나 자신도 성령의 은혜로 병 고침을 받아 본 적이 있고, 내가 기도하였을 때 의사의 약이 도무지 듣지 않아 고생했던 가족의 병을 낫기도 했다. 성령을 모르고, 성령을 사모하지 않고, 성령을 무시하는 목회자가 성령이 쓰시는 사람들을 핍박한다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응답받을 기도를 하면 절로 팔이 올라간다?
이제 김하중 장로의 책에 대해 이야기 하자. 발견되는 어이없고 한심한 많은 이야기 중에 하나를 소개하겠다. 2003년 1월에 김하중 장로에게서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김하중 장로가 기도할 때 기도하는 내용에 따라서 팔이 저절로 올라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떤 기도를 할 때에는 팔이 올라가지 않았다. 이상하여 김하중 장로는 일부러 팔을 들어 올리려고 시도했으나 쇳덩이를 올려놓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성령(?)이 자신의 팔을 들어 올리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도 발견했다. 기도 할 때에 팔이 올라갔던 경우는 기도의 내용이 모두 이루어졌으나, 팔이 올라가지 않았던 경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매일 수십 개의 기도 리스트를 만들어서 기도했다. 그날 만나야 할 사람들과 해야 할 일들과 당면한 주요 문제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기도 중에 팔이 올라가면 0표, 안 올라가면 ☓표 표시를 했다 ... 이러한 현상이 1년 반 정도 계속되었다. 그런데 한 시간 기도하는 동안 열 번만 팔이 올라가도 30분에서 40분이 걸렸다. 오래 팔을 올리고 있으니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투정어린 기도를 했다. ‘하나님 너무 힘이 듭니다. 우선 팔이 아프고요, 또 기도제목이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시간이 부족합니다. 가능하시면 좀 간단히 가르쳐주실 수 없으십니까?’ ... 그런데 어느 날 기도 중에 성령님께서 내 마음속에 강력하게 ‘된다’, ‘안 된다’, ‘하라’, ‘하지마라’라고 말씀하셨다.”(김하중, “하나님의 대사 1”, pp.63-65).
과연 이렇게 응답하시는 분이 성경의 하나님이시고 성경의 성령님이실까? 성경의 하나님과 성령님이 정말 저렇게 일하시는 분이실까? 최영장군, 단종임금, 관운장을 섬기는 골목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나 등장하는 저런 이야기가 어떻게 온누리 교회의 장로님의 책에서 나오는 것일까? 정말 기괴하고 이해할 수가 없다.
김하중 장로의 책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망령되이 도용되고 있었다. 성령이라는 단어도 어이없이 차용당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점입가경’이요 개와 고양이도 웃을 일들이 그럴싸하게 각색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 몸을 성전삼고 거하시는 성령님이 저런 분은 아니다. 어떤 사도가 저런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고, 교회사 속에서 어떤 믿을 만한 저런 간증을 하였던가?
오래전 TV 게그 프로그램에 “부채도사”라는 사람이 등장하였다. 부채도사는 그의 신에게 “신이시여 이것이 되겠습니까?”라고 물으면 부채가 움직였다. 이쪽 편으로 기울어지면 신이 Yes!라는 응답을, 저쪽 편으로 기울어지면 신이 No!라는 응답을 보내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개그맨의 부채가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웃었다. 온누리 교회의 김하중 장로의 하나님(?)이 바로 그런 신이란다.
신사도 운동 집회에 다니면서 같은 현상을 경험한 한 사람의 체험
최근에 각종의 사탄의 장난에 현혹되었다가 깨닫고 돌아선 한 성도의 글을 읽었다. 그 성도는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성령의 역사가 뜨겁다는 집회를 쉬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성령(?)을 받았고 다양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경험하였다. 그 분이 경험한 현상 중에 김하중 장로가 말하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난 성령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면 “네 왼쪽에 서 계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대화한다는 것은 귀로 말이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생각에서 떠오르는 말로 또는 내 입으로(육성으로) 물어보면 대답해 줄 때는 내 몸을 흔들어서 대답을 주는데, 꼭 우리가 사람하고 대화를 하듯, “응, 그래! 그래 맞아!” 하는 듯 탁탁 제 몸을 쳐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신나면 사정없이 내 몸을 흔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 그렇게 2007년 1월부터 5월까지 성령님인 줄만 알고 의심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생활을 해 나왔습니다.” http://www.cantoncrc.com/bbs/zboard.php?id=column2&no=68
김하중 장로가 기도할 때 팔이 올라가는 현상, ‘된다’, ‘안 된다’, ‘하라’, ‘하지마라’ ... 라고 마음 속으로 떠오르는 음성 등의 현상이 이 성도의 글에 동일하게 나타나있다. 같은 현상을 경험하고서 김하중 장로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흥분했고, 유명한 규장출판사의 도움을 받아 책을 내었다. 그러나 그 성도는 귀신의 장난임을 깨닫고 대적하여 물리쳤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자신처럼 우매하게 사탄에게 농락당하지 않도록 이렇게 당부했다.
“저는 이제 속지 않습니다. 사단에게 속아서 끌려다닌 지난 세월이 너무도 아깝습니다. 이제는 내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께만 모든 것을 맡기려고 합니다. 내가 내 딸 아이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너무 간절하게 소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마귀가 자신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내게 접근한 것을 나는 성령 충만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난 사단의 장난질을 통해서 더욱더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정말로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간증하신 그 성도님은 대체 어떤 종류의 집회를 찾아다니셨던 것일까? 그의 글 속에 신사도 운동가들이 일으키는 요상스런 이적들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보니 요즘 도처에서 성행하는 신사도 운동 집회였던 것이 분명하다.
“손에 금가루가 가득 묻어 있는 사람, 보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입신한 사람, 이빨이 변해서 금이빨이 되는 것도, 또 하늘 문이 열려서 천국이 보인다는 사람, 또 안수 받고 쓰러져서 울다가 이유 없이 한없이 웃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거룩한 웃음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웃는데 마음은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집회 시간에는 뜨거웠는데 집회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맹맹한 느낌이었습니다.”
신사도 운동의 영성에 매료되어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이 하나님(?)이 직접 대화식으로 말씀하거나, 하나님(?)자신의 몸을 움직여서 기도의 응답을 주는 일들이 많은 모양이다. 이전에 IHOP에 다니면서 그곳 선지자들에게서 사도적인 사역을 할 것이라고 예언을 받았던 목사님이 계셨다. 그는 IHOP에서 기도할 때에 과연 뉴욕의 어떤 교회에 부임하게 될 것인지를 하나님께 물었다고 했다.
“성도들의 2/3 이상이 지지해야하는데 60%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응답이 없었고 “70%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에도 응답이 없었다고 했다. “90% 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김하중 장로의 팔을 들어서 올리시면서 싸인을 주신 것처럼, 자신의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꺾으시면서 자신의 몸을 만지셨다고 하였다.
신사도 운동은 귀신과 동행하는 운동
사람들은 신사도 운동을 외국에서만 발생하는 특별한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힌두교의 쿤달리니 각성(Kundalini Awakening)과 신사도 운동가들의 능력의 성향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래서 “신사도 운동=힌두교의 쿤달리니 귀신장난”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오해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참 신앙을 변질시키려는 사탄의 미혹하는 운동은 태고 때부터 지속되어 왔다. 사탄은 모든 거짓 종교들과 다양한 문화 속에 인간에게 자신의 죽음과 저주의 영을 전파할 수 있는 시스탬과 체계를 구축하였다.
인간에게 영생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속이며 다가오는 사탄의 능력이 모든 종교들 속에서 들어있다. 그것이 힌두교에서는 쿤달리니라는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궁극적으로 불행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고, 질병이 치유되고, 예지예언의 초능력이 생긴다고 한다. 나는 최근에 쿤달리니에 대해서 더욱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가르치는 것을 발견했다. 쿤달리니를 전파하는 사람들 스스로 쿤달리니가 요가나 특정한 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쿤달리니는 힌두교든 불교든 또는 기독교든 토속신앙이든 특정 종교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영생을 구하거나 인간 본래의 면목을 탐구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쿤달리니는 종교를 구별하지 않고 지혜를 주고, 친절한 안내자의 역할을 하며, 강을 건너는데 안전하고 편리한 땟목 구실도 다 하였다.” Ibid.
쿤달리니를 우주에 편만한 원초적 생명에너지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쿤달리니가 존재하지 않는 곳은 우주에 없는 셈이다. 그리고 해탈과 영생과 치유와 초능력을 인간에게 주는 쿤달리니가 힌두교, 불교, 기독교, 토속종교 ... 모든 종교 속에 존재한다고 한다. 과연 인두교에서는 쿤달리니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다른 모든 종교들에서는 또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는 이 능력(power)의 정체는 무엇일까? 절대로 하나님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생과 행복을 선물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은 오직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받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종교에 걸쳐서 그 능력을 드러내는 원초적인 우주의 생명 에너지가 있다고 한다. 마귀와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을 가장하여 인간에게 영생과 궁극적인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속이면서 다가오는 사탄의 거짓 능력인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그것을 쿤달리니 각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탄이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와서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현상이다. 이때 사탄이 부분적인 치유, 환상, 초능력, 희열 등의 특이 현상들을 동반하고 들어오므로 우매한 인간은 그것이 마치 참되고 영원한 우주의 생명에너지인 것처럼, 그것으로 건강과 영생과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속는 것이다.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던 김하중 장로의 세례식
신사도 운동이란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힌두교의 쿤달리니나 무속의 신 내림이나 다른 이방 종교의 방법으로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는 현상이다. 물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였다고 믿고 있다. 김하중 장로의 책을 보면서 나는 김하중 장로가 그런 분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주위에 충고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그 본인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하나님의 대사”라는 유명한 별칭까지 얻어 도처에서 간증하는 인기 강사가 되었다. 유명한 규장출판사가 앞장서서 책을 내므로 그의 이야기가 더 널리 홍보되고 있다.
김하중 장로가 무속의 신 내림의 현상이거나, 또는 그와 유사한 과정을 통해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의심하게 하는 사례들이 그의 책 속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사례 하나를 소개하고 분석해 보고자 한다. 김하중 장로가 1995년 베이징에서 세례 받을 때에 나타난 현상에서부터 나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 책의 29페이지를 보면, 김하중 장로는 47세 생일이 되던 날 자신의 집에서 오후 6시 이후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란 교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자신의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고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예식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유가 아니고서는 교회에서 공예배 중에 해야 할 일이다. 그가 당시 죽음을 앞둔 환자도 아니었는데 목회자가 저녁 시간에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부터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김하중 장로가 자신의 집 거실에서 무릎을 꿇고서 세례를 받는 순간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목사님이 내 머리에 물을 부으면서 손을 대는 순간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며 무언가 뜨거운 것이 내 몸 속으로 확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고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참 있다가 눈을 떴다. ‘내가 지금 어디 와 있는 거지? 왜 무릎을 꿇고 있지?’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니 우리 집 카펫이 깔려 있었다. ‘여기는 우리 집인데 ... 어! 저기 집사람과 교회 분들이 앉아 있네. 아! 내가 조금 전에 세례를 받았지 ...’ 그렇게 한동안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니 모두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박 목사님도 수많은 세례를 주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신 듯 당황스런 표정이었다.”(김하중, “하나님의 대사 1”, p.29)
이 일은 김하중 장로의 신앙노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그의 신앙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 베이징21세기교회의 목회자를 통하여 세례를 받고 곧 귀국하여 서울의 온누리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물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의 역사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못 밖을 수는 없다. 성령께서는 화장실에서 힘쓰는 사람에게도 역사하실 수 있으시다. 하물며 세례받는 사람에게 특별한 역사를 못하시겠는가? 그러나 김하중 장로의 사례는 너무나도 특이한 일이다. 김하중 장로는 자신의 그 체험을 성령세례라고 설명하였다.
“아! 이게 성령세례라는 거구나. 이제부터는 진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되겠구나!”(김하중, “하나님의 대사 1”, p. 29-30)
성령세례 이론의 발전과정
본인이 그 현상을 성령세례라 이해하고 있으니 과연 성령세례가 무엇인지 한번 따져보도록 하자. 성령세례의 최초의 개념은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성화”(entire sanctification)와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에 관한 사상과 함께 시작되었다. 웨슬리는 거듭나고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일지라도 삶이 더욱 더 거룩해지고,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성도로서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임해야 한다고 했다. 이미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가 더욱 완전해지기 위해 또 다시 성령의 특별한 임재가 필요하다는 사상은 이렇게 웨슬리를 통하여 처음 등장하였다. 로버츠 리어든,『아주사 부흥』김광선 역(서울: 서로사랑, 2008), p.35.
이후 1800년대 중후반에 존 웨슬리의 사상을 이어 받은 미국의 감리교회들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난 부흥운동인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을 통하여 성령의 추가적인 은총의 개념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 운동이 후에 일어나는 오순절 부흥운동의 역사적인 토대가 되었는데, 성결운동이 추구하였던 핵심적인 내용은 성령의 추가적인 임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거룩함, 회개, 도덕적 생활, 성령의 권능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Ibid., p. 35, 49.
1900년대에 들어서 성령세례에 대한 이해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1901년 1월 3일 감리교회의 목사이며 성경운동의 주역이었던 찰스 펄햄이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다가 방언을 받으면서 성령세례는 방언과 연관되기 시작했다. 성령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라는 이론이 이때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1906년 4월 13일 캘리포니아의 아주사에서 찰스 펄햄이 흑인제자 윌리엄 세이모어 목사와 성도들이 기도하다가 방언이 크게 나타남으로 방언이 성령세례의 거의 절대적인 증거라는 이론이 교회사에 정착되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세례 운동의 시작이었고 이후 오순절 교회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1960-70년대에 성령세례 운동이 또 일어났다. 처음 시작은 1960년 4월 캘리포니아 밴 나이스의 성 마가 성공회 교회의 교구목사였던 데이빗 바넷 신부로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 5월에 데이빗 바넷 신부는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다가 방언을 받았다. 피터 와그너,「제 3의 바람」정운교 역 (서울: 하늘기획, 1993), p. 24. 이렇게 다시 시작된 성령세례 운동은 이전의 성령세례 운동이 오순절 교회에 국한되었던 것과는 달리 장로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감리교회, 심지어 천주교회(the Chatholic Church)에까지 확산되었다. 은사주의(Charismatic Movement)의 성령세례운동은 이렇게 탄생하였고 방언과 성령세례가 거의 절대적으로 연관되어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이전의 오순절 성령세례 운동과 노선이 같았다. C. Peter Wagner, the Third Wave of Holy Spirit (Ann Arbor, Michigan: Vinebook, 2008),p.17-18.
80년대 이후에 또 다시 성령세례 운동이 일어났다. 존 윔버(Johm Wimber)의 빈야드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에 의해서 제 3의 성령의 물결로 정립된 신사도 운동의 성령세례운동이다. 제 3의 성경세례는 방언을 부정하지도 않고 또한 매우 중시하지 않는다. 신사도 운동의 성령세례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성령의 이적과 은사와 능력을 동반한다고 한다. Ibid., p.18. 그 외에도 다양한 현상이 80년대 이후 제 3의 물결의 성령세례를 통하여 나타난다고 한다. 쓰러짐, 웃음 등은 각종의 기괴한 현상들도 모두 성령세례와 그로부터 나타나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현상으로 간주한다.
한국 교회의 성령세례
지금 한국 교회에 존재하는 성령세례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신자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임하심과 영혼이 거듭남 그 자체가 성령세례라는 관점이다.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성령의 역사를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은사”로 이해하는 개혁주의의 관점으로서 한국인으로서는 박형용 교수, 서철원 교수가 있고, 외국인으로서는 존 스토트 등이 있다.
둘째로, 존 웨슬리와 R. A 토레이의 사상을 계승하여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나, 방언을 성령세례를 연관시키지 않고 봉사의 능력(power for service)이 나타나는 것이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이들은 거듭났을지라도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면 무력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들이 정신이 몽롱해지거나, 쓰러지거나 웃음 등의 현상을 성령세례의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평양대부흥에 영향을 미친 초기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인으로서는 차영배 교수 등이 이러한 사상을 주장하면서 중생 이후의 별도로 성령세례로 인하여 참된 회개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외국인으로서 로이드존스(D. M. Lloyd-Jones)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배본철, 중생과 성령세례는 다른 것인가?,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5863
셋째로, 방언을 거의 절대적인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이해하는 관점이 있다. 이는 오순절-은사주의 성령세례 운동의 공통적인 특징이며, 대부분의 순복은 교회들과 다양한 교단에 속한 은사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넷째로, 방언을 절대적으로 중시하지 않고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성령세례를 주장하는 그룹이 있다. 이들은 신사도 운동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방언이 성령세례의 절대적인 현상이 아니며 그 대신 다양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들은 쓰러짐, 웃음, 방언 ... 모든 신비하고 기괴한 일들을 성령세례와 연관시킨다. 예영수 목사와 손기철 장로가 이에 해당하며, 외국인으로는 피터 와그너가 대표적이다.
김하중 장로의 체험은 신사도 운동의 성령세례에 해당
성령세례에 대해서 이처럼 장황하게 설명하고 정리해 보는 이유는 김하중 장로가 물세례를 받을 때 동시에 경험한 특이 현상을 성령세례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집으로 방문한 베이징21세기교회의 박태윤 목사에게 물세례를 받는 순간에 잠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책에서 그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정신을 잃었으니 쓰러지거나 눕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참된 자녀임을 증거하는 성령세례였다고 기술하였다. 그의 책을 읽는 많은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특별한 사람에게는 물세례를 받을 때부터 저런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구나!”라고 오해하고 있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자신들은 특별하지 못하다고 믿게 된다.
기왕에 김하중 장로 자신이 그 경험을 성령세례라고 소개하였으니 이제 그가 경험한 현상을 기존의 성령세례 이론들에 대입해 보자. 그는 과연 어떤 유형의 성령세례를 받은 것일까?
책을 보면 김하중 장로는 2001년 1월에 방언을 받았다. 미국에서 일했던 외교관의 부인이고, 요즘 워싱턴 D.C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며 예언 등의 신비한 영적인 능력이 있는 박정미라는 분과 전화로 대화하면서 방언받기를 위해 기도할 때에 방언이 나왔다고 했다.(김하중, “하나님의 대사 1”, p. 43)
김하중 장로가 중국에서 귀국하기 직전 베이징의 집에서 박태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때는 1995년 1월 9일이었다.(김하중, “하나님의 대사 1”, p. 28,29). 그러므로 김하중 장로는 방언을 받기 오래전에 물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방언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성령세례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의 성령세례는 오순절-은사주의 계열의 성령세례는 아니다. 또한 이미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난 후에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 물세례를 받다가 그 현상을 경험하였다. 이는 성령의 임하심과 중생 그 자체를 성령세례라고 보는 정통 개혁주의 성령세례에도 해당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제 남은 것은 토레이, 로이드 존스, 차영배 등이 주장하는 중생 이후에 봉사를 위한 능력을 주는 성령세례 유형과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 운동의 성령세례 유형이 남는다. 자신에게서 잠시 정신을 일고 몸이 흐트러지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니 토레이 계열의 성령세례가 보기 어렵다. 물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에육체에도 어떤 신비적인 현상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은 그런 것을 성령세레와 자주 연관시키지않았고 또한 그 시대에는 그런 일들이 흔히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들은 봉사와 헌신을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가장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한국의 손기철 장로와 미국의 신사도 운동의 대부 피터 와그너가 말하는 제 3의 물결의 성령세례뿐이다. 의식이 몽롱해지고, 비틀거리고, 쓰러지고, 정신을 잃어버리고 ... 이런 모든 현상이 신사도 운동의 성령세례에 해당하는 일들이다. 신사도 운동에서는 그 현상을 성령 안에서 안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흘러들어간다고 한다.
“손을 대는 순간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며 무언가 뜨거운 것이 내 몸 속으로 확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고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참 있다가 눈을 떴다. ‘내가 지금 어디 와 있는 거지? 왜 무릎을 꿇고 있지?’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니 우리 집 카펫이 깔려 있었다.” (김하중, “하나님의 대사 1”, p.29)
뭔가가 몸 속으로 들어오면서 취하는 느낌, 의식이 몽롱해지는 현상, 술에 취한 듯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림,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는 현상 ... 신사도 운동의 임파테이션 현상이다. 임파테이션이 성령의 능력을 전달하는 방법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귀신이 그 사람에게 들어가서 그 사람과 연합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이후 귀신의 능력이 발동하여 점(예언)하는 능력도 생기고, 방언, 방언찬양, 성령춤, 치유이적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
“굉장한 느낌의 평화가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완전히 맥이 풀려 이러다가 강의실 바닥에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나는 존 윔버가 나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생방송하듯이 설명하는 소리를 들었다.” 피터 와그너,「제 3의 바람」(정운교 역)(서울: 하늘기획, 1993), p.52.
신사도 운동의 대부인 피터 와그너도 80년대 초 플로신학교의 강의실에서 존 윔버에게서 기도를 받을 때에 위와 같은 현상을 경험했다. 그때 오래 동안 괴롭히던 고혈압이 낳았고 이후 짝다리를 교정하는 능력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후 사상이 변하여 본격적으로 신사도 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김하중 장로가 물세례를 받을 때 나타난 의식을 잃는 현상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볼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오히려 무속의 신 내림이나 힌두교의 쿤달리니 각성의 현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열심히 굿하면서 몰아지경에 이른 무녀가 갑자기 쓰러져 잠잠하게 누워있던 모습을 어린시절 시골에서 본적이 있다. 쿤달리니 귀신능력이 크게 발동하는 신사도 운동집회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들의 정신이 혼미해지는 현상이다. 그래서 그들의 부흥을 새 포도주 운동이라고 한다.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예수의 영(?)이 임한다는 한 소년이 자꾸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예수의 영이 그 소년의 몸에 임할 때에 나타나는 현상은 의식이 흐려지고 목소리가 변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사람의 정신을 빼 놓는 일은 악령의 장난이다. 결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다. 김하중 장로가 자신의 잠시 정신이 나가버린 현상이 성령세례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성경적 근거가 없다. 신 내림, 쿤달리니 등의 현상과 유사한 신사도 운동에서 성행하는 일이다.
기도하다 들리는 말을 받아서 쓰기도 한다?
나는 아무래도 김하중 장로에게 이방 종교의 영이 들어갔다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그것이 성령을 가장하여 미혹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성령을 받았다고 믿고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서 특별하고 강력한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나고 있다고 널리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염려하게 되는 또 하나의 근거는 다음의 내용이다.
“내 방에서 문을 잠그고 기도를 하는데 누가 내 뒤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시 기도를 시작하려는데 또 누가 무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서 방을 돌아보기도 하고, 벽장을 열러보기도 하고, 방에 딸린 욕실 문까지 열고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시 무릎을 끓고 기도를 하려는데, 또 누가 무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 내 안에서 들리는 말씀을 적었다. 기도가 끝난 다음에 보니 내가 중보하는 사람에 대한 것 같은데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그의 직장이나 가정의 문제, 자녀의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시작했다.”(김하중, “하나님의 대사 1”, p. 70)
어떻게 이러한 체험을 귀신과 연관시키지 않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해하는지, 더 나아가 이런 일을 통해 자신에게 무슨 특별한 은혜가 임했다는 듯이 자랑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김하중 장로는 이런 일이 무당들에게서 흔히 나타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일까?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이런 식으로 일러주신다면 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무르도록 애쓰는 지난한 노력을 지속해야 하겠는가? 삶을 성경에 비추어보며 성경을 따르기 위해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참된 영성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그리스도들의 Christianity가 아니었던가? 2,000년 간 성경을 중심으로 지속되어 온 기독교의 구조에 일대 변혁(paradigm shift)이 일어나고 중일까? 나는 그 물결에서 홀로 뒤처지고 있는 중인가?
김하중 장로의 책을 보다보면 성경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독교의 패러다임이 쓸모없는 것이라는 느낌이 생기려고 한다. 답답한 일이 생기면 그 즉시 종이와 펜을 들고 눈을 감고, 가급적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들리는 음성을 받아서 적으면 최고의 영성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사람이야 말로 가장 성장한 진정한 신앙과 영성을 소유한분이라는 착각이 든다. 더 무서운 사실을 성경을 사랑하고 가장 중시해야 할 필요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김하중 장로가 참된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의 명확하게 반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성령의 사람들은 성경과 성경 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선전하고 가장 귀하게 여기도록 만든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요 16:13,14)
오늘 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직접 받아쓰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큰 부흥운동이 일어나면 한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예언을 받는다는 사람들이 의례히 일어났으나 항상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면서 몰락하였다. 그 와중에서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상하였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서두에서 이렇게 명시하였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여러 시대에 여러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啓示)하시고 그의 교회에게 그의 뜻을 선언하시기를 기뻐하셨고, 후에는 그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하여 그리고 육신의 부패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의(惡意)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굳게 세우고 위로하기 위하여 그 계시하신 내용을 온전히 기록되게 하셨다.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요하게 만드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방식들이 지금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이 선언문은 영국, 스코트랜드, 웨일즈의 저명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153인이 자그마치 5년 동안 고민하고 연구하여 채택한 신앙선언문이다. 성경 이외의 말씀이나 문자로 하나님이 직접 지식과 정보를 성도와 교회에게 전달하지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재의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정통신학의 가장 중요한 뼈대이다. 이것을 무시하면 기독교는 부패해지거나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면 조심스럽게 그를 위해 기도하다가 받은 마음을 말해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기도 내용을 적은 종이를 주시도 했다. 말씀의 파급효과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컸다. 말씀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자리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다.”(김하중, “하나님의 대사 1”, p. 70)
김하중 장로는 이처럼 그가 기도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들을 관련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여 큰 관심과 파장을 일으켰다고 한다. 바로 이럴 때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미혹하는 영의 포로가 되어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와 과정을 통하여 사탄의 세계를 성령의 세계라고 오판하고 빠져들기 때문이다.
병이 낫거나, 환상이 보이거나, 방언이 나오거나, 쓰러지고 황홀경을 경험하거나, 고민을 알아내는 예언을 받는 것이 영혼을 사냥하는 사탄의 주된 방법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아무런 오류가 없고(inerrant), 그 모든 내용이 진실한(infallible)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도 김하중 장로가 경험한 그런 요사스러운 방식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아서 쓰는 재주를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최근 나에게 인터콥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다고 호소하는 메일을 보낸 분이 계셨다. 그 분이 보낸 메일 속에 인터콥의 강요한 선교사라는 분의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친구의 권유로 잠시 인터콥에 연관이 되었었는데 신학적인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관계를 끊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언급하지 않은 것 중의 하나는 인터콥에서 알파코스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인터콥 알파를 하기 위해서 한국까지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략) ... 그 친구가 저를 인터콥으로 초청했지요. 그 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강요한 선교사가 자기네 교회에서 밤새도록 예언하고 영서쓰고 그랬다구요.”
성경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멧시지를 받아서 쓰는 “영서”라는 은사나 그러한 종류의 성령의 일하심에 대한 내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와 은사는 절대로 성경을 초월하지 못한다. 성령은 그 능력이 무한하시나 반드시 성경의 범위 이내에서 일하시는 분이시다. 성령님은 성경의 내용을 가르치고 깨우치심으로, 성경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밝히 드러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우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은 반드시 성경에 종속되신다.
그런데 저들은 그것을 체험하고 있다. 일부 특이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영서라는 현상은 오직 그들의 체험에 근거한다. 무엇이 우리의 신앙의 근거이고 절대적인 기준인가? 오직 참되고 정확한 성경의 말씀뿐이다. 성경만이 신앙의 절대적인 근거이고 가장 확실한 믿음의 판단의 기준이다. 절대로 누구의 체험이나 나타나는 현상이 믿음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근거일 수가 없다.
거짓된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사탄을 따르는 거짓 신앙노선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들의 체험과 현상으로부터 이론을 내세운다. 그들은 자주 “성경은 하나님을 잘 믿으라고 주어진 것이고, 교리는 성경을 잘 이해하도록 만들어진 것인데, 어찌 성경이나 교리가 성령의 일하심보다 더 위에 있을 수 있겠는가? 성령이 행하시는 일을 성경과 교리로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논쟁을 버리고 진정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교리보다는 하나님과 실질적으로 동행하는 것이 더욱 가치있다!” ... 이러한 어이없는 주장을 하며 자신들의 체험에 초월적인 권위를 부여하라고 주장한다. 유명한 신학교총장 출신이 체험한 것이니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늘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난 현상이니 확실하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절대성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성경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 않고 체험과 현상으로 성경에 없는 일에까지 성령을 갖다가 붙이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울타리를 뛰어 넘어 사탄과 교제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말과 주장으로 인해 항상 연약한 영혼들이 혼란에 빠진다. 거룩하고 복된 진리가 훼손되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유일한 능력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변질된다. 누가 감히 성경에 없는 것을 자신의 체험에 근거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오도하는가? 무슨 근거로 자신을 통하여 성령이 그 일을 하셨다고 참람하게 말하는가?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 누구라도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성령의 역사이고 은사라고 주장하면 단호하게 꾸짖어 쫓아야 한다. 더러운 염병은 가급적 널리 퍼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잡는 것이 상책이다. 분명히 다시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지 않는 현상을 체험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받은 자들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도 아니다. 단지 귀신과 더불어 노는 가증한 신접한 자들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 20:6)
이루 열거할 수 없는 부끄러운 내용들의 연속
이 외에도 김하중 장로의 심각한 영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특이한 내용들이 그의 책에는 이 외에도 부지기수이다. 정상적이고 추천할만한 이야기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대략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기도할 때에 숨이 막히고 목이 졸리고 혀가 쑥 나오면서 쓰러졌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자신이 기도하는 다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반영하는 현상이라는 내용(p. 62, 63) 2)성경에서는 전혀 말씀하시지 않는 방언으로 찬양하는 현상(p. 63) 3)예비 며느리가 될 분이 방언을 받고 싶다고 하자 두 사람이 방언 받기를 위해 기도하여 불과 수분만이 방언이 터졌다는 내용(p. 240) 4)시집간 딸이 낳은 외손녀에게 먹여야 할 음식과 먹이지 말아야 할 음식의 목록을 일일이 하나님께 부채도사의 방식으로 물어서 응답받았다는 내용(p. 245) 5)기도할 때 자신의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픽 쓰러졌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자신이 기도하는 다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내용(p. 161) 6)미국에서 박정희 집사라는 분이 국제전화를 하여 통변의 은사가 나타날 것이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여 주었는데 곧 그대로 되었다는 내용(p. 68, 69) 7)자신이 기도할 때에 벽을 치는 습관이 있는 것을 미국 워싱턴에 사는 박정미 집사가 그 사실을 알고서 앞으로서는 방석을 깔고서 방석을 치며 기도하라고 국제전화를 함으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다는 내용(p. 46) 8)김지연 전도사(현재 베이징 온누리 교회의 사모)라는 분에게서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잘 안다. 나는 네가 나에게 기도하는 것을 다 보고 있다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통으로 전달하는 예언기도를 받을 때 자신의 목에서 가래와 같은 것을 내 뱉으면서 새 티슈 한 통을 모두 썼다는 내용(p. 40) ... 이러한 내용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런 신앙의 주인공이 어떻게 “하나님의 대사”라는 별칭을 달고서 도처에서 간증하는 인기 강사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이런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는지 정말 모르겠다. 김하중 장로가 저 유명한 하용조 목사가 세운 온누리 교회의 장로라는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다. 손기철 장로를 치유사역자로 키웠고 지금도 공적으로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온누리 교회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었는데, 김하중 장로에 대해서 알고 나니 그 의구심이 더욱 깊어지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