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수영>신문 2019년 12월호
빵천동에서 / 남정언
빵 굽는 마을이 있다. 도시철도 남천역과 금련산역 홀수 출구로 나오면 광안리 바다 쪽 골목마다 빵집이 자리 잡았다. 학원이 밀집된 동네라 자연스럽게 빵집이 들어섰는데 빵천동이라 부른다. 어쩐지 “빵천동”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금방이라도 오븐에서 빵이 나오고, 고소한 빵을 먹는 사람들이 웃는 얼굴로 마주 보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부산에서 이름난 지역은 해운대 광안리 바다와 회 센터, 금정산이라 생각하지만, SNS를 즐기는 젊은이들은 광안리 바닷가를 찾아올 때 빵천동을 많이 검색한다. 새로운 빵집을 개척하듯이 찾아내 블로그에 올리면서 스스로 광고 효과를 낸다.
남천동 빵집은 가게마다 내세우는 브랜드가 다양하다. 유기농 재료를 사용하는, 소라 빵이 유명한, 식빵으로 소문난, 바게트가 맛있는, 국적 불명 퓨전 빵을 만드는 여러 빵집이 우리를 궁금하게 만든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외지사람들이 빵집 정보를 줄줄이 꿰고 찾아와 실제 거주하는 주민에게 오히려 정보를 알려준다는 점이다.
담백한 빵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흐른다. 천천히 골목을 걸어 좋아하는 빵집 간판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간다. 빵을 구경하다 맘에 드는 빵을 담는다. 차를 주문해 놓고 잠시 기다린다. 후각과 미각이 자제되지 않는 아찔한 순간에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른다. 사실 남천동은 내게 가슴 아린 추억이 있는 곳이다.
사십 년 전에 우리 집이 이곳에 있었다. 약한 체질로 태어난 나는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여고 1학년부터 목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병명이 없었다. 육 년 동안 병원에 다니며 치료와 수술을 했지만, 재발을 거듭해 생사의 고비를 힘들게 넘기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집을 팔아서라도 막내딸의 목숨을 살려내겠다고 마지막 수술에 동의하는 결단을 내리셨다. 기적같이 완치되어 내 생명줄이 연장되었다. 꿈이 많아야 했던 십 대 시절은 밋밋했지만, 나로서는 생의 치열한 시기를 어머니가 지켜주신 덕분에 살아났다. 그런 기억 때문에 세월이 지난 후 남천동에 살지 않아도 관심이 저절로 생긴다.
그 무렵 남천동은 대단지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자 주택가 골목에 학원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학원을 오가던 학생들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빵집과 떡집이 하나씩 생겼다. 그 빵을 먹고 자란 아이들이 멀리 서울의 대학에 진학했다가 부산에 오면 그리움이 담긴 빵집을 찾아왔다. 그렇게 한두 개 있던 빵집이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얼마 전부터 빵집이 즐비한 골목으로 바뀌었다.
빵천동은 젊다. 전포동 카페거리처럼 오가는 사람들도 젊다. 학원에 다니는 인근 초중고 학생들, 근처 대학가와 광안리 바닷가를 찾는 젊은 관광객이 주로 찾아온다. 큰길을 건너면 성당과 교회, 소극장이 있고,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자리하여 인문학 거리를 조성한다. 젊은 거리에서 달콤한 빵은 입안에 군침이 가득 돌게 만들고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내가 어릴 적 간식거리는 주로 집에서 만들었다. 달고 짠 가게의 음식보다 가정에서 만든 밑간이 씀씀한 엄마표 간식이 보통이었다. 어머니는 자주 밀가루 반죽에 막걸리를 넣어 발효시킨 영양빵을 쪄 주셨고, 팥을 넣은 찐빵이나 돼지고기와 채소가 듬뿍 들어간 만두를 만들어 주셨다. 친구들이 놀러 오면 특별히 쌀가루를 빻아 호박을 넣은 떡을 쪄 주신 기억이 난다.
나는 어머니가 챙겨준 건강한 먹거리 덕분에 작은 키가 조금 자랐다. 교복 치맛단을 내려도 맞지 않아서 새로 교복을 맞추었다. 여고 시절엔 하굣길 버스에서 내려 남천동 골목에 들어서면 바닷물 냄새 미역 냄새가 묻어났다. 지금은 그때처럼 바다 냄새는 느껴지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바다 내음 대신 고소한 빵 냄새가 풍겨 나온다.
커피 한 잔과 빵 하나는 한 끼다. 빵은 육천 년 인류의 역사를 통해 탄생하고 성장하고 소멸하는 순환 구조로 되어 있다는 책을 읽었다. 철학이 빵을 굽지는 않지만, 빵을 굽게 만드는 의지를 갖게 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빵은 ‘생명’이다. 그런 의미로 접근하면 빵천동 거리는 발전 가능성이 크다.
수영구에서 조사한 빵천동 거리에 빵집은 현재까지 서른일곱 개다. 전국 어느 곳을 가더라도 특정 지역에 이렇게 모여 있는 곳은 보기 드물다. 빵이 매개체가 되어 색다른 마을 분위기를 만든다. 앞으로 빵집이 더 늘어나 남천동의 새로운 전통이 되기를 바란다. 가게마다 특별한 빵이 사람들을 부른다면 현대적인 전통마을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것이다. 맛있는 빵과 고소한 냄새의 추억과 오래된 감성까지 묶어서 팔면 더 좋을 것 같다. 대표 브랜드가 건강한 빵, 다양한 종류의 빵, 가격마저 좋은 빵에 친절이 넘친다면 빵천동은 분명 부산을 대표하는 행복한 마을이 될 것이다.
광안리 바다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첫 집이 빵천동 1호인데 팥빵이 유명하다. 주민 센터를 지나면 맛 좋은 초콜릿 빵이, 해변시장으로 통하는 길에는 도넛이, 벚나무 길을 걸으면 선물하고 싶은 치즈케이크가 기다린다. 거리를 감싸는 빵 냄새와 건강한 웃음소리가 넘치는 빵천동에서 덤으로 마음의 여유까지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추억이 살아있는 빵집이 대를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더불어 내 목숨과 맞바꾸었던 옛집이 그 골목에 그대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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