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 길
안봉자
아버지의 산소에 성묘하러 가던 날은 새벽부터 부슬비가 내렸다.
아침 아홉 시 반쯤에 우리는 전날 준비한 술, 북어, 과일, 향 등의 간단한 제물들을 챙겨 들고 성묘길에 올랐다. 서울 외곽의 길가 어느 화원에서 탐스러운 노랑 실국화 화분도 하나 샀다. 남편과 내가 한국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9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이날 우리와 동행하기로 한 목동 막내아우네와는 지역적인 편리 상 음성 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윽고, 어머니와 우리 두 부부 그리고 남동생 부부를 태운 차는 서울을 빠져나와 비 내리는 중부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5년 전, 영구차를 타고 아버지의 운구 뒤에 앉아서 줄곧 손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 달렸던 그 길을, 이번에는 동생네 차 뒷좌석에 깊숙이 앉아서 감회에 서린 눈으로 창밖에 펼쳐지는 가을 경치를 담담하게 내다보며 달렸다. 9월의 끝자락인데도 아직 추수하기엔 좀 일렀던지, 아니면, 농촌에 일손이 달려서인지, 논바닥엔 누렇게 익은 벼들이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흠뻑 젖은 채, 조용히 수확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로 주변은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특히 작은 마을들 앞을 지날 때마다 길 가 양변에 가꿔 놓은 예쁜 코스모스와 붉은 칸나의 무리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찰깍! 하며 예쁜 사진 한 장이 찍혔다.
떠난 지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차는 음성 휴게소에 도착했다. 일요일 오전인데도 넓은 주차장은 이미 차들로 꽉 차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금방 봤는지 막내아우네 네 식구가 우르르 몰려왔다. 특히 어린 두 조카가 내 손을 잡고 깡충거리며 반가워했다. 이 아이들은 지난여름 방학 동안 자기 엄마와 함께 영어 연수차 밴쿠버에 왔을 때 우리 집에서 한 달 동안 머물다 간 일이 있어서 그렇게 반가웠던 게다.
우리는 휴게소 안에 들어가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어머니를 부축하며 건물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그 커다란 규모와 그 안에서 술렁거리는 인파에 놀랐다. 그곳은 마치 큰 축제라도 벌어지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오징어, 땅콩, 군밤, 붕어빵, 호두과자 등을 파는 소상인들과 신문, 잡지, 껌, 담배를 파는 편의점 등, 건물 안을 가득히 메운 크고 작은 업체들… 특히 휴게소 한편의 식당 코너에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처럼 붐볐다. 아마도 도심의 혼잡을 피하려고 일찌감치 서울을 떠나온 그들이 이곳에서 늦은 아침을 먹는 모양이었다. 식탁마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은 그릇 속에 머리를 반쯤 박은 채 무언가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참, 잘도 먹네. -- 머릿속에서 또 한 장의 사진이 찍혔다.
약 30분쯤 지났을까? 커피 한 잔씩을 마시고, 조카들에게 줄 음료수와 호두과자 두 봉지를 사 들고 건물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그사이 거짓말처럼 파랗게 개어 있었고, 갓 목욕한 산천초목 위로는 바야흐로 눈 부신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지척에 누워계신 아버지의 영혼이 우리를 반기시는 표시인 것만 같아 가슴 속이 찌르르 저렸다.
거기서부터 차는 중부고속도로를 벗어나서 작은 국도로 접어들었다. 비 그친 정오의 황금빛 들판, 찬란한 햇빛 속에서 은어 비늘처럼 반짝이며 소슬바람에 파르르 떠는 미루나무의 치자 빛 작은 잎새들, 그리고 멀게 가깝게 황소들처럼 누운 단풍 든 고향 산…산…산…, 또 찰깍. 찰깍.
아버지의 산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산등성이에 자리한 안 씨 문중 선영 앞자락에 모셔져 있다. 아버지께서 아직 생존해 계실 때, 아버지는 이곳에 오실 때마다 외아들인 남동생에게 늘 말씀하셨다고 한다.
“내가 죽거든 저 건너 가엽산 (일명, 가섭산이라고 불림) 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눕게 해다오.”라고.
비가 안 올 때는 차를 산자락 바로 밑까지 댈 수 있다지만, 이번 초가을 장마에 개울물이 붇고, 또 논과 밭 사이로 난 좁은 경운기 길이 곳곳에 헐려 나간 데가 있어서, 우리는 산 밑 3백 미터쯤 밖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어떤 곳에서는 한 줄로 죽 서서 걸었다. 도랑이 넓은 곳은 맏사위인 나의 남편과 막냇사위인 동생의 남편이 번갈아 어머니를 업어 건너드리면서, 우리 일행은 구수한 벼 냄새와 비 끝에 향긋한 산초 향내를 맡으며 아버지의 묘를 향해 산자락을 올랐다. 산 주변엔 5년 반 전 그날, 구름같이 하얀 꽃들을 매달고 있던 아카시아들이 얇은 콩깍지같이 생긴 진갈색 씨방들을 바람결에 태워 사방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마침 추석 끝이라 조상님들의 묘들은 모두 단정히 손질되어 있었다. 우리는 우선 술 두 잔을 가득히 부어 산의 이곳저곳에 뿌린 뒤, 할아버님과 할머님, 그리고 아버지의 순서대로 준비해 간 제물들을 차려 놓고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아버지, 제가 왔어요.’
‘오- 그래, 잘 왔다. 먼 데서 오느라 수고 많았구나.’
아버지의 음성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콧등이 찡- 아리며 목젖이 뻑뻑해 왔다. 평생을 공직에 몸담고 계시면서, 언제나 댓 쪽같이 곧게 사셨던 나의 아버지. 청렴결백하신 성격 때문에 비리와 알력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직책을 아무 탈 없이 정년퇴직하실 때까지 지키신 분. 스스로에겐 칼날같이 엄하시면서도, 정작 남에겐 영 모질지 못하셔서 당신 평생에 두 번이나 친한 사람들 사이에 거액의 빚보증을 스셨다가 두 번 다 배신당하시고 큰 손해를 보셨던 분이다. 그중 한번은 도망간 채무자를 수소문 끝에 찾아내긴 하셨는데, 그 사람 사는 모습이 하도 딱해 보여서 나중에 돈 벌면 꼭 갚아 달라는 말씀만 남기시고 돌아오셨다고 한다. 물론 그 돈은 끝내 못 받으셨다고-
생전엔 꽃을 무던히도 좋아하셔서 뜰에는 갖가지 꽃나무들을 심으시고, 분합 문 아래 섬돌에도 올망졸망한 화분에 꽃들을 가꾸시며, 항상 주위에다 꽃을 놓고 사셨다. 그런 아버지 눈에 이 못난 맏딸이 그렇게도 대견하셨던지, 나는 그분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어릴 때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귀한 선물들을 사다가 베개 밑에 넣어주시곤 했는데, 서양 인형, 고급 하모니카, 삼백육십오 쪽마다 외국 배우들의 사진이 인쇄돼 있던 일기책 등, 그 당시엔 모두 무척이나 귀한 물건들이었다. 내가 결혼 1년 후 캐나다에 이민 온 뒤론 외국에 나가 사는 자식은 죽은 자식이나 다름없다 하시면서, 종종 허전해하셨다는 나의 아버지…
이제 세월은 가고, 그 아버지는 원하시던 대로 고향 산에 잠들어 계시는데, 장례식 때 한 번 와 뵌 후, 지금에야 겨우 다시 찾아와 엎드려 어깨를 떠는 나는 얼마나 어쭙잖은 불효자식인가?
예를 마친 후, 돗자리 위에 둘러앉아 과일들을 깎아 먹으며 잠시 환담하다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본 뒤에 차마 안 떨어지는 발길을 돌려 오던 길을 내려오는데. ㅡ 이게 또 웬일인가? 갑자기 머리 위로 회색 구름이 몰리는가 싶더니, 후두두-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이 어머니를 부축하여 허둥지둥 차로 돌아와 차 속에 막 자리 잡았을 때쯤엔, 이미 굵은 장대비로 변해있었다.
5년 반 전, 아버지의 장례식 날에도 오늘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그때, 나는 그 비가 틀림없이 이생을 하직하시는 아버지의 마지막 작별의 눈물이라고 생각하여, 돌아오는 영구차 안에서 덩달아 펑펑 눈물을 쏟았는데. ㅡ 그런데 오늘은 왜 저렇게 우시는 걸까?
돌아오는 길에는, 점심을 먹으려고 차가 음성 휴게실 못미처 길 가 어느 음식점 앞에서 멈출 때까지, 나는 벙어리처럼 시종 말이 없었다.
*밴쿠버 한인 문인 협회 (현, 한국문협 캐나다 밴쿠버 지부의 원조) 2003년 <신춘문예> 등단 작 -수필 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