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이 사적인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온전한 내 생각도 다른 사람과 사회, 역사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성된 ‘공유된 기억과 경험’에서 비롯된다. 개인의 기록물이 지닌 공공성에 주목하는 까닭은 기록이야말로 우리의 ‘공유 기억’을 만드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공유의 틀을 만들어 사람들이 더 나은 미래와 인류의 삶을 꿈꾸도록 돕는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돌아보기, 보통 사람들의 느린 아카이브를 제안한다… 아카이브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경쟁을 멈추고 함께 돌아보게 한다… 부분적인 쓰기 행위와 그로 인한 결과물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누구와 함께하고 있는가, 무엇을 추구하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답이 저절로 구해진다. 아카이브는 나의 성장과 시대적 흐름을 한 타래로 엮는 일이다. /안정희,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 중에서
아키비스트(archivist). 우리말로는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이다. 아직은 낯설다. 도서관의 사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큐레이터에 견주면 이해가 쉬울까. 적어도 그 비슷한 전문직에 속한다. 국내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1999년. 공공기록물관리법이 생기면서다. 그 후 700여개 공공기관에서 저마다 아키비스트를 두기 시작했다. 거기에 필요한 전문 인력을 길러내기 위해 국내 대학원에도 기록학 전공 과정이 생겼다. 15년이 지난 지금. 그런 과정이 전국에 걸쳐 약 16곳에 이른다.
기록이라고 하면 우리 문화에도 장구한 내력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둘만 해도 세상에 유례를 찾기 힘든 거질 아닌가. 크고 작은 개인 문집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기록의 현대적 의미를 새삼스럽게 조명한 책이 나왔다.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 제목은 다소 감상적이다. 하지만 담긴 내용은 알차다.
너, 나, 우리의 사소한 일상의 기록들이 모여 어떤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는지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저자에 따르면, 기록을 남기고 기록물을 살피는 행위야말로 자신을 만들고 가꾸는 과정이다. 나아가 그것이 종국에는 공동의 문화가 되고 집단의 역사를 구성한다. 그러니까 아카이브는 ‘나의 성장과 시대적 흐름을 한 타래로 엮는 일’이다.
저자와 만나, 디지털 시대의 기록하는 인간, ‘호모 아키비스트’란 무엇인지 생각을 더 들어봤다.
-‘호모 아키비스트’라고 부제에 썼더군요. 아카이브나 아키비스트라면 아직도 생소하게 들리는데요?
어떤 일을 하면 문서를 작성하게 되잖아요. 그렇게 생산되는 공공기록물을 아카이브라고 해요. 그런 공적인 기록물은 언제까지 반드시 보관해야 한다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어요. 1999년에 생긴 공공기록물관리법 말입니다.
그 법이 생긴 뒤로 공공기관에서는 어디나 아키비스트를 두도록 돼 있어요. 국내 대학원에도 그런 과정들이 생겼고요. 이 책에서는 사적인 일상의 기록이 갖는 공공의 가치를 이야기해봤어요.
-그쪽 공부를 하셨나요?
저는 그 과정을 거치지는 않았어요. 대학 때 전공은 법학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쪽 일을 하게 되셨지요?
원래 책을 많이 좋아했고 읽기도 해서 잡스럽게 여러 분야 책을 알고는 있었어요. 하지만 정작 대학 졸업 후에는 일반 회사에 들어갔어요. 해외 영업 일을 오래 했어요. 10년 정도 일하다가 무역회사를 창업해서 꾸려 가던 중에 다리를 다쳐 큰 수술을 받게 됐어요. 그렇게 해서 사업을 접게 되자, 출판사를 하시는 아는 분이 번역 일을 제의해 오셨어요. 원래 책을 좋아하는 데다, 제가 그 동안 해외 영업을 하면서 영어를 많이 썼거든요.
‘에이프릴 풀스 데이’ 같은 외서를 번역하다가 소개를 받아 도서관 일도 하게 됐어요. 경기도 용인의 느티나무도서관에서 기획상임이사를 맡아서 작년 7월까지 근무했어요. 지금은 도서문화재단 씨앗이라는 곳에서 에코라이브러리 설립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책은 어떻게 내시게 됐지요?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자료를 아카이브하는 작업을 하던 중이었어요. 기록학 전문가인 이영남 교수님을 알게 됐어요. 국가기록원 학예연구관으로 일했고 참여정부 때 청와대 기록관리비서관실에서 기록행정관을 지낸 분인데 지금은 한신대 한국사학과 초빙교수로 계세요.
이 분이 ‘기록과 한국 현대사’ 과목을 가르치는데, 기록학 전공 대학원생들을 데리고 와서 도서관 자료를 가지고 실습 수업을 할 때 저도 참관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아카이브 기초 업무를 배웠어요.
이 교수님이 민간 단체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기본 용어와 방법으로 아카이브를 할 수 있게 알려주셨어요. 그분은 “기록물 속의 사람을 보라”고 하시더군요. 그 뒤로 기록물에서 사라진 삶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공개 워크샵을 열었어요. 도서관의 자료가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만의 기록이 아니라 공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지요. 그때 어떤 기록물을 어떻게 관리하고, 해석하고 폐기할지 같이 공부해보자고 홍보를 했더니 예상치 않게 여러 단체에서 참가 신청들을 해왔어요.
-어떤 곳들이었나요?
NGO(비정부기구)나 NPO(비영리조직), 대안학교 같은 곳들이 많았어요. 이런 곳이 대개 10년 정도 된 단체들이다 보니까 기록물이 꽤 쌓였을 때지요. 이걸 정리도 하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일을 해 나가야 할지 고민도 하고 있었던 거죠. 여러 곳에서 참가 신청을 해와서 2013년 말 석 달 반 10회에 걸쳐 워크샵을 했어요.
워크숍을 할 때 사전 예비 강의를 했어요. 아키비스트나 아카이브라는 말을 어렵고 생소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쉽게 설명했지요. 우리가 아는 주변의 문학들, 자서전 쓰시는 분들의 기록물들이 다 그런 이야기라는 것을 강의했어요. 그 내용을 ‘보통 사람들의 생활 아카이브’로 써보자는 제의가 있어서 글을 고쳐 써봤어요.
-강의 내용을 책으로 내신 거군요.
원래 원고는 도서관이나 단체에서 어떻게 자신의 기록물을 관리할 것이라는 방법론적인 것들이 많았는데, 책을 내면서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단체보다는 개인의 기록물이 가지는 의미에 초점을 맞췄어요.
-국내 기록관은 어디에 얼마나 있나요?
국가기록관의 경우엔 경기도 성남에 하나가 있고, 부산에도 하나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두 군데 다 가보긴 했습니다.
-잘 운영되고 있던가요?
제가 그 방면의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어서 말씀드리긴 조심스럽습니다만, 기대보다는 못했어요. 가령 최민식(1928-2013) 사진작가 분이 돌아가시면서 2008년에 유작을 모두 국가기록원에 기증하셨잖아요. 그 자료가 어떻게 돼있는지 알고 싶어서 찾아 보게 됐는데, 그게 아직 채 다 분류가 되지 않은 상태로 있었어요.
저도 도서관에서 일을 해봐서 사정이 짐작이 되지만, 아마 인력 사정이 못 따라가거나 업무 편성이 잘 안 돼서 그런 것 같았어요. 자료가 수만 장이고, 필름 상태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한데, 분류 정리만 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더군요. 그런 자료를 국가기록관에 기증할 때는 국민들이 그걸 마음껏 찾아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안타깝더군요.
반면에 부산 기록관을 방문하는 길에, 인근의 최민식 갤러리(사립)를 들렀는데 거기에는 사진이 많지는 않지만 젊은이들이 많이 와서 관람을 하고 있더군요. 국가기록관도 그런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좀 더 열린 공간으로 다가가고 기록물들도 활용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요즘 기록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아진 것 같은데요?
1, 2년 사이에 관심이 어마어마하게 커졌어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가요? 어떻게 알 수 있죠?
제가 전국 도서관을 다니면서 강연을 합니다. 월 10회 정도 다녀요. 지금까지 100곳은 넘는 것 같아요. 그 외에도 지역의 기록을 쓰시는 분들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도서관 주변 문화유적 같은 곳도 탐방해요. 그런 곳에서 의외로 자신의 삶이라든가 지역이라든가를 기록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많이 볼 수 있어요.
지방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들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하는데 참가자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처음엔 선뜻 하시겠다고 하다가도 막상 기록이 돼서 책으로 나오게 되면 자식들이 보면 체면 깎는 일이라며 거부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많이 바뀌었어요. 이제는 내가 기록하지 않으면 이런 기록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기록이 갖는 사회적인 의미 같은 것들에 대한 생각도 많이 생겼구요. 어떤 분들은 어머니 환갑 선물로 자서전을 써드려야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기록에 대한 관점, 태도들이 몇 년 사이에 많이 발전한 것 같아요.
명지대에서 ‘당신의 하루를 보관해 드립니다’ 같은 프로젝트만 봐도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보내와요.
안 씨의 책에는 국내외 고금의 흥미로운 아카이빙 사례들이 잘 나와 있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희춘은 1513년 전라도 해남에서 태어나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그의 일기가 ‘미암일기’다. 조선 시대 개인 일기 중에서 가장 방대하다. 여기에는 조선 중기 양반 아내의 실제 삶이 나온다. 유희춘은 결혼 후 처가에 살았는데 당시로선 특별할 게 없었다.
아이들도 외가에서 자랐고 아내는 친정과 시댁 제사를 번갈아 지냈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 장기를 두고 시문을 지어 나누며 애정을 표현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살림살이, 나들이, 재산 증식, 부부 갈등, 노후 생활 등을 세세하게 의논했을 뿐만 아니라 관직 생활에 대해서도 자문했다.
2014년 3월에 출간된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에서도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유교적인 전통’은 조선 시대 후기인 18, 19세기 이후의 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의 전형으로 알고 있던 가부장적 가족, 유교적 틀에서 여성을 바라보던 역사는 생각보다 짧았다. 생활사 기록들을 펼쳐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기록한 민간인도 있다. 한양사람 오인문이다. 그는 한양을 떠난 1591년 11월 27일부터 환도한 다음 날인 1601년 2월 27일까지 만 9년 3개월간 일기를 썼다. 그 책이 쇄미록(瑣尾錄)이다. ‘자질구래하고 하찮은 기록’이라는 뜻이다.
유성룡과 이순신이 기록한 징비록과 난중일기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전쟁 당시 민간인의 고초와 생활상이 꼼꼼히 기록되었다. 이 책을 통해 거창한 역사책에서 소외되었던 가족들과 헤어지고 군사징발과 군량 조달로 고난을 겪은 일반 백성들의 이야기가 드러났다.
◆미국 여성의 일상을 기록한 울리히의 ‘산파일기’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할로웰에 살았던 마서 밸러드는 산파였다. 로렐 대처 울리히는 27년 동안 쓴 ‘산파일기’를 번역해 1991년 퓰리처상을 받은 데 이어 밸러드에 관한 연구로 하버드대 교수가 됐다.
밸러드는 아이를 800여명 정도 받은 산파이자 마을에서 존경 받는 어른이었다. 실생활에서도 남편과 집안일을 대등하게 책임지는 당당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이 일기가 없었다면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일기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고손녀 메리 호버트였다. 1844년 의대생 시절 증조할머니로부터 책을 물려받은 그녀는 의학적으로 가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해 메인 주립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일기를 두 번째 발견한 사람은 메인 도서관 사서 내시였다.
내시는 낡아서 알아보기 힘든 일기를 멀리 보스턴까지 가서 손으로 일일이 베꼈다. 어떤 부분은 빠뜨리고 어떤 부분은 잘못 필사하기도 했다. 이런 밸러드의 일기를 세계 역사의 주요한 자리에 올려놓은 사람은 울리히였다.
일기의 내용이 특별하거나 극적이지는 않다. 산파로서의 수입과 지출 등 경제적인 내용과 가족 행사, 날씨 변화, 원예, 이웃을 방문한 일 등 그야말로 지루하고 지속적인 일상을 기록했을 뿐이다.
하지만 울리히는 지루한 일상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정확하게 포착했고, 그로 인해 그동안 초기 미국 역사에서 완전히 배제된 여성의 삶을 되살려냈다.
◆위안부 사건의 우회적 기록, 이창래의 ‘척하는 삶’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인 이창래가 위안부 사건을 접한 충격으로 쓴 ‘척하는 삶(A Gesture life)’은 역사적 사건이 소설에 힘입어 어떻게 우리에게 공명의 시간을 부여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이 소설에서 위안부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더 잊을 수 없고 더 멀리 퍼지는 방법으로 사라져 가는 기억을 복원했다. 이 작품은 미국의 4개 주요 문학상을 받았다.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의료기기 가게를 운영하던 닥터 하타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실 어떤 세상에도 속하지 않은 채 부유한다. 입양한 딸 ‘서니’와도 부녀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노후에 찾아온 연인과도 속내를 나누지 못한 채 헤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으로 참전한 그는 위안부 ‘끝애’를 사랑하고 그녀를 차지했다. 그는 전쟁을 자신이 일으킨 것이 아니듯 ‘끝애’를 향한 감정은 다른 군인들처럼 단순히 성욕을 채우기 위한 폭력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격이 있는 사랑을 했노라며 어떤 세상도 똑바로 보지 않은 채 손해도 보지 않고 상처도 주고받지 않으며 고결함을유지하는 척한다.
하지만 결국 그는 세상을 마주 보지 못한 비겁자였다. 작가는 직접 위안부를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더 노골적이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악이 눈앞에 있을 때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악은 거듭 창출된다고. 소설은 그 어느 기록보다 더 깊고 날카롭게 ‘위안부의 상처’를 새겼다. 상처가 기록으로 나아가고 기록이 역사가 되며 역사가 다시 문화로 정착한 사례다.
5월 12일이면 영국 서섹스대에는 수많은 일기가 도착한다. 대학은 2011년부터 매년 5월 12일 하루 동안의 일기를 영국 전역에서 받아 자체적으로 구축한 일상 아카이브에 보관한다. 1937년 인류학자 세 명이 관찰자, 자원봉사자, 작가 등으로 팀을 꾸려 1950년대까지 영국인의 일상을 기록화한 것을 보고 시작한 프로젝트다.
2013년 5월 12일 명지대 디지털 아카이빙연구소 역시 ‘당신의 5월 12일을 보관해 드립니다’라는 문구로 일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유치원생은 그림일기, 할아버지는 전화 녹음, 주부는 사진, 중고생은 낙서, 군인은 입소 때 엄마에게 보재는 소포에 함께 넣은 쪽지 등 수집을 광범위하게 하되 연령층과 대상에게 맞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하루 동안 먹은 음식, 입은 옷, 만난 사람, 했던 생각을 저마다 다른 방식, 다른 내용으로 담을 수 있게 한 결과 불과 2주 만에 600여건이 모였다. 모인 내용은 방식만큼이나 다양했다. 이렇게 모인 자료를 통해 본 대한민국의 일상은 예상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가공된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일상이 드러났다.
광주비엔날레 시민참여프로그램 참여단체인 ‘광주 1930’은 시간을 거슬러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활동하던 시절의 동네 양림동을 기록한다. 버드나무가 숲을 이뤄 ‘양림동(楊林洞)이라 불리는 이 동네는 선교사 마을로도 불렸다. 1904년 미국인 선교사들이 공동묘지인 이곳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종교 박해가 심했던 시대에 묘지터는 유교로부터 시선을 피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토지 가격도 저렴한 적지였다. 덕분에 이 동네에는 광주 현존 최고의 서양식 건물 우월순 사택을 비롯해 110년이나 된 양림교회, 1911년에 세워진 기독교 학교 수피아 여중고 등 한국의 근현대사를 기념하는 건축물들이 나란히 세워졌다.
이곳에는 이 외에도 최승효 가옥과 이장우 가옥 등 개화기 한옥의 모습 또한 잘 보존돼 있다. ‘광주 1930’은 최승효 가옥 바로 옆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소식지를 통해 양림동의 1930년대 역사와 현재 소식을 전한다. 동네 지도를 만들고 양림동 4.7km를 걷는 ‘청춘달빛투어’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댓글도 책이 된다: 공동 기록 활용한 출판
2013년 여름 출판사 열린책들 공식 페이스북에 ‘전국의 책벌레 여러분, 심장이 쫄깃해져서 밑줄 좌악 그은 문장을 댓글로 적어주세요’라고 요청했다. 9일 만에 모두 706개가 달렸다. 출판사는 이를 모아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고전 명작 속 한 문장’으로 책을 출간했다.
모인 댓글 문장을 통해 사람들이 어떤 책을 보는지 책 속에 어떤 문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기록물이 탄생했다. 사회학자라면 이 기록을 통해 2013년도 풍속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고, 작가들은 이렇게 골라진 문장들을 통해 독자들이 어떤 문장에 마음을 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세상 사람들의 현재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서태지 팬들은 20년 동안 서태지 활동 자료를 모아 디지털 기록보관소인 온라인 박물관에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히스토리, 음반, 발매 영상, 공연, 프로모션, 광고, 각종 언론에서 서태지에 대해 언급된 자료(TV, 라디오, 신문, 댓글까지), 팬아트, 팬사인회, 팬클럽 활동, 용어집까지 갖췄다. 놀라온 사실은 이 자료들의 출처가 세계 곳곳이라는 것이다. 전 세계 서태지의 팬들이 온라인상에 자료를 모으고 있다. 지금도 자료가 업데이트된다.
다음세대재단은 정기 강좌, 강연 등 오디오 콘텐츠와 기획 대담, 인터뷰 시리즈, 가치 있는 소리의 수집과 기록 보존 활동을 하는 ‘소리 아카이브’를 운영한다. 이 모든 것이 디지털 기기가 발달해 대용량 저장이 가능해진 덕분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최소화한 덕분에 무엇이든 만들어내고 저장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것을 모두 기록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책에서 주로 평범한 개인들이 남기는 일상적인 기록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지요. 왜 중요한가요?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목소리니까요.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 글을 쓰잖아요. 블로그에 글도 올리고. 저도 그렇게 하는데. 이런 것들이 그냥 자기 생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속에 함께 공유되는 생각들이 다 들어 있다고 봐요.
단순히 혼자만의 생각이라는 것도 기록을 하게 되면 객관적인 거리감 같은 게 확보가 되거든요. 그 속에서 사회적인 의미나 다른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의 생각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지요.
자기가 쓴 것도 다시 보고, 어떤 기록이 남아야 하는지, 왜 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자기 생각이나 행동 속의 이기적인 욕망들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사실 그런 것은 기록할 때보다, 그 중에서 뭔가를 삭제하거나 폐기하려고 할 때 더 하게 되지요.
-안 선생님 자신은 기록을 잘 해오신 편인가요?
중, 고등학교 때는 대부분의 여학생처럼 일기를 썼고, 나중에 사회에 나오게 되면서 인터넷 블로그를 만들어서 글을 계속 써왔어요. 하루에 한 편 정도는 쓰는 편이예요.
-주로 어떤 내용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사사로운 여러 가지 일들이예요. 그때그때 지향하는 삶에 따라 바뀌는 것 같아요.
-기록을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좋은가요?
가령 아이 얼굴을 꾸준히 찍어서 아카이빙을 해보세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때 표정이 점점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실제로 주변에서 그렇게 해본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체로 어두워진다고들 해요. 왜 그럴까, 자문하고 해법을 찾아볼 수도 있죠.
내가 어떻게 키웠고 어떤 교육을 하고 있길래 아이의 표정이 어두워지는가 생각하게 되지요. 그런 식으로 기록을 하면 대상화가 가능해지고 시간에 따른 미세한 변화를 읽어낼 수 있어요. 자신을 객체화해서 거리감을 두고 보면 변화를 읽고 개선을 생각해낼 수 있어요.
저는 식구들 이야기를 블로그에 꾸준히 기록해 왔어요. 자연관찰 일기 같은 것도 있어요. 아이들하고 같이 발견한 사마귀에 대해, 어디서 어떻게 발견했고, 그때 아이들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런 걸 적어두는 거죠. 그때그때 아이들 관심사도 알 수 있구요.
-사적인 내용도 블로그에 공개합니까?
어느 정도는요.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면 블로그 타이틀을 바꾸곤 해요. 제 블로그는 그 정도로 유명 블로그는 아니지만. 알려졌다 싶으면 블로그 이름을 바꿔요.
-그러면 굳이 왜 남들이 볼 수 있는 블로그에 올리지요?
개인적인 글을 쓸 때에도 자신을 견인할 만큼의 제 3의 공적인 공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순전히 나 혼자서만 쓰고 보는 일기장에 글을 쓰면 지속적으로 쓰기가 어렵거든요. 완전 독백도 아니고 완전 공개도 아닌, 중간쯤에 있는 곳에 나를 두는 게 적절한 긴장도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자신과 적당한 거리를 두되 완전히 나를 내어 놓는 방식은 아닌, 그런 공간을 확보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흥미로운 말씀이군요. 소셜미디어를 보면 익명성 뒤에 숨어서 온갖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기과시나 자아도취의 공간이 됐다는 말도 합니다. 상처를 입고 고민하는 사람도 있고...
강의해보면 그런 질문이 많아요. 왜 사생활을 그렇게 드러내려고 할까 하구요. 단순히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글쓰기가 자신을 견인해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를 새로 발견하기도 하거든요. 그런 부분이 의외로 커요.
그래서 온라인 공간에서도 적절한 시간과 공간의 간격이 필요한 것 같아요. 무슨 글이든지 곧바로 ‘좋아요’를 누르거나 반박성 댓글을 다는 식의 즉자적 반응은 좋은 사용법이 못 된다고 생각해요.
-기록 과잉의 시대라고도 하고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지요.
사실 이것저것을 다 기록하는 것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는 것과도 같아요. 우리가 기록하는 이유는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잖아요. 기록은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을 줍니다. 그 중에는 과거의 시간에 묻어야 할 기억과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걸 폐기해야 할까? 혼자 생각해보게 되지요. 기록을 해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살펴봤을 때는 지워도 될 것들이 보입니다. 기록의 분류와 폐기 과정에서 스스로 삶의 가치를 되묻게 되지요. 그래서 사실 기록보다 더 어려운 게 삭제와 폐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우기가 어려우면 분류부터 해보는 것도 방법이에요.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리도 되지요. 수많은 기록 중에서 결국 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게 그때 자기 삶의 가치를 말해 줍니다. 어떤 기록을 채택하는가가 지금 그 사람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려주지요.
-기록의 구체적인 노하우 같은 것도 강의를 하세요?
작은 도서관 같은 데 가면 그런 것들을 많이 해요. 부산 맨발동무도서관도 제가 했던 아카이브 워크숍에 참가했는데, 사진 아카이브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강의를 들으러 오셨어요. 대천마을 안에 있는 도서관에요.
대천마을이라는 곳이 신시가지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었어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입주자들과 옛날 골목 주민들 사이에 갈등의 소지가 있잖아요. 맨발동무도서관에서 제안을 했어요. 동내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도서관에 초청해서 자신들 옛 이야기를 들려주게 한 거죠.
이야기를 하는 중에 개인 사진을 꺼내 보여주는데 대천마을의 강이 보인다던가 하는 식이예요. 그 이야기를 아파트의 아이들이 듣는 거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소통의 장이 마련되고, 어르신들도 도서관에서 하실 일들이 생겼고, 마을의 역사와 정체성도 이어지게 된 거죠. 마찬가지로 개인 차원에서도 그런 일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라도 아카이빙에 관심이 생긴 분께 요령 같은 것을 말씀하신다면?
나이가 있는 분의 경우에는 일일이 쓰기보다 녹취를 하는 방법도 있어요. 제일 편리한 것은 사진인 것 같아요. 요즘 스마트폰이 다들 있고 찍기도 쉽고 해서 기록을 체계적으로 해나갈 수 있어요. 대부분은 사진들을 찍은 후에 분류를 안 해놓는데, 일정 주기를 두고 1년이나 석 달씩 주제별로 분류를 해 두면 좋아요.
요즘은 컴퓨터에 저절로 연도순으로 저장되는데 이걸 주제로 하는 거죠. 분류를 하면서 제목을 뭘로 할까 고민을 하면서 기록물도 다시 보게 되지요. 비슷한 것은 삭제도 하고, 삭제를 할 때는 어떤 걸 남겨야 할지도 생각하게 되고.
그런 식으로 아카이빙이 돼 있으면 나중에 따로 뽑아서 누구 생일이나 특별한 때에 선물로 줄 수도 있고, 거실에 전자액자 같은 것으로 활용해서 볼 수도 있고요.
-책 제목을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로 붙였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개인의 상처도 밖으로 드러내야 치유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제 경우만 해도 그래요. 고향이 포항인데, 남녀차별이 심한 집에서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서 자랐어요. 아버지께서 저한테는 고등학교도 상고를 가라고 했고, 대학도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결국 고3 때 집을 나와서 대학에 들어갔어요.
-그 정도였나요?
오빠가 먼저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오빠가 안내를 해줘서 간신히 서울에서 지원한 대학에 가서 시험도 보고 했어요. 오빠로서는 미안했던 거죠. 아버지는 평소에 가장 똘똘한 아이를 대학에 보낸다고 하셨는데 사실은 제가 똘똘한 편이었거든요.(웃음) 하지만 오빠가 대학을 먼저 가게 되면서, 저는 속으로 ‘아, 이제 나는 대학에 못 가겠구나’ 하면서 고1, 고2 때 방황을 심하게 했어요. 아마 그래서 오빠가 저한테 잘 해줬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입장이 다 이해가 가요. 늦게 결혼하셔서 저를 낳으셨고, 항만 노동자로 일하셨는데 자식들 학비가 들어갈 때 은퇴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였죠. 경상도에서 아들 교육을 우선할 수밖에 없었던 거겠죠.
그 과정에서 제가 받은 상처를 나중에라도 드러내지 않았으면 원망으로만 남았을 텐데 기록을 했어요.
-어떻게요?
대학에 들어가서 2학년 올라갈 무렵이었는데, 혼자 아버지 삶을 기록으로 정리해봤어요.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서 전쟁을 겪고 평생 노동자로 일하신 분이었어요. 옛날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그런 일생을 써내려 갔어요. 그렇게 기록을 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했고 그렇게 해서 저도 치유가 된 것 같아요.
안 씨의 책 말미에는 빛 바랜 사진 한 장이 실려있다. 포항시 홈페이지 자료실에 올라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 뒤에 자신의 소회를 적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어떻게 기록에 대한 생각으로 발전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아버지와 형을 일찍 잃었다.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농지도 잃었다. 십대에는 한국전쟁을 치렀고 결혼과 동시에 도시에 나와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1968년 2월 1일 착공)과 각종 지방 국도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1968년 포스코(당시 포항종합제철)가 포항에 세워지던 해 첫 아이를 낳고 철강도시 포항의 항만노동자가 되었다. 둘째를 낳던 해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고, 일용노동자였다가 항만노동자로 다시 철강노동자로 숨 가쁘게 사시다가 제7차 국가경제발전계획이 끝나던 해에 생을 마감했다.
도로를 건설하고 부두에서 철강을 나르며 국가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느라 영혼이 피폐해진 사람은 사라졌으나 포항은 여전히 개발 중이며 새마을운동은 아프리카나 동남아의 나라로 수출되고 철강기업 포스코는 여전하다.
(하지만) 저 사진 속에는 개발과 발전과 속도가 있을 뿐 사람은 없었다. 아카이브를 공부하고 난 후에 저 사진을 다시 봤다. 어린 자식에게 화석과 별을 보여주며 너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아버지는 항운노동조합원으로 포스코에서 삼 교대로 근무하면서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볼 시간을 잃었다.
자전거가 오토바이와 자동차로 변했고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경쟁시켰다. 모든 말과 행동이 돈을 향했다.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지 왜 변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자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시절을 잊고 출세와 투자와 성공을 주문했다. 그의 영혼의 속도는 삶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채 끝이 났다… 기록하지 않으면 삶은 다시 전복될 것이다.
-명함에 북큐레이터라고 쓰셨더군요. 어떤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서 북큐레이션에 관한 책을 내려고 쓰고 있어요.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책이 좋은 책이죠. 대개는 남이 좋다고 하는 책들을 보잖아요. 자기 인생에 필요한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많이 노출된 책, 읽기 편한 책, 읽지 않으면 소외될 것 같은 책을 주로 찾는 것 같아요. 읽는 방식도 자기 방식으로 읽지 않고 서평 중심으로 읽는다든지 하는 것 같아요
-얼마나 읽으시지요?
하루에 한 권 정도는 읽는 것 같아요. 잡다하게 읽어요. 추리소설을 제일 좋아하고 생태에 관한 것을 좋아해요.
-직업상 봐야 할 책이 많을 것 같군요.
매일 아침 3개 신문을 구독해서 보고 스크랩을 해요. 일주일에 한 번은 도서관에 가서 잡지책도 다 보구요. 매일 밤 목록을 업데이트하는 식으로 주제별로 스크랩을 해요. 지금까지 스크랩북이 18권쯤 돼요. 제 나름대로는 ‘책 나무’라고 해서 책의 계보를 엑셀에다 기록하는 게 있어요.
‘정원’ 하면 정원에 관한 책들이 도서명, 저자명 쭉 나오는 식이죠. 사람들에게 어떤 주제에 관해서는 책을 알려줄 수 있을 만큼 목록들을 만들죠. 자기계발서나 경제경영 책은 잘 안하고 나머지는 거의 다 해요.
-최근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어떤 게 있습니까?
일본 작가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양의 노래’를 꼽고 싶습니다.
-학부모들은 자녀 독서법에 관심이 많습니다. 조언하신다면?
아이들에게 뭘 읽으라고 하기보다는 본인이 읽고 싶은 책을 찾아서 정말 즐겁게 읽으면 아이들도 따라 찾아 읽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은 강요되는 게 많은데 책까지 강요하면 곤란해요.
우리나라 교육 과정이 여러 종류의 책들을 보면서 과제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교과서만 집중하도록 돼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여러 책을 읽고 참조하는 방식으로 독서 습관이 발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런 상황에서 집에 와서 엄마가 무슨 책을 읽으라고 하면 정말 화가 난대요. 머리도 쉬어야 하는데. 뭐든 즐겁게 체험한 경험이어야 나중에도 오래가고 지속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잘 먹던 당근도 영양가 많으니까 꼭 먹으라고 하면 잘 안 넘어간다잖아요.
제가 이런 답을 해드리면 질문하신 부모님의 표정이 냉랭해지는 경우가 많아요.(웃음)
-요즘 북큐레이터라는 직업에도 관심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폭발적으로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은평구립도서관에서 올해 5월부터 20회차로 북큐레이터 양성 과정을 진행했는데 다 찼어요. 2시간짜리 20회로 총 7개월짜리인데 수강생이 20명으로 제한돼 있었어요.
오늘 저녁에도 마포 가톨릭청년회관에서 하는 과정 강의를 가야 해요. 총 7회차 중에서도 오늘이 3회째예요. 은평구 프로그램 경우에는 무료지만 구민이어야 하고, 오늘 것은 유료인데 아무나 신청할 수 있어요.
-어떤 분들이 참가하나요?
도서관에서 일하는 분들, 서점에서 일하는 분들도 계시고, 독서 동아리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현역이신 입장에서 직업으로서는 어떤가요?
수입이 많지는 않아요. 하지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이면서 제가 좋아하는 책에 관한 일을 하는 거니까 좋은 거죠.(웃음)
“글을 고쳐 쓰는 동안 포항에는 달팽이라는 이름의 작은 서점이 생겼다. 독립출판물과 인문학책을 판매하는 동네 책방인데 ‘달팽이 트리뷴’이라는 소식지를 발간한다. 지역 사람들과 역사를 공부하며 지역의 이야기를 생산하고 기록하고자 한다 했다. 속도를 늦춰야 사람이 보인다. 기록은 삶을 느리게 하고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들여다보게 한다. 삶의 속도가 영혼의 속도에 맞출 시간을 선물한다…
다른 이들도 이 글을 읽고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을 시작하면 좋겠다. 에필로그에 실린 내 아버지의 사진이되 나의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한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듯이 보통 사람들의 생활 기록물 안에서 사회 공공적 가치가 있는 기록물을 고르거나 가치를 부여하거나 재해석해서 광장으로 가져나와 이야기를 들려주길 희망한다.
상처를 드러낼 때 반드시 그 손을 잡는 이가 있고 그 이야기를 소설로 영화로 예술작품으로 형상화하거나 디지털 기기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가 출현한다. 상처가 기록이 되고 기록이 역사가 되고 그 역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도록 이제, 아카이브를 시작할 시간이다.”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 마지막 단락 중에서
◆안정희
북큐레이터. ‘도서관에서 책과 연애하다’와 경기도서관총서 공모당선작 ‘책 읽고 싶어지는 도서관 디스플레이’를 썼고 ‘가이와 언덕지기 라이’를 번역했다. 서울도서관 등 100여 개 도서관에서 책과 책 읽기에 대해 강의한다. 은평구립도
서관, 인천계양도서관 등에서 북큐레이터 양성과정 프로그램을 기획, 강의하고 있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국경을 넘어서는 역사대상 어린이청소년역사책’ 심사위원, 도서문화재단씨앗의 에코라이브러리 장서개발 및 주제도서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인천광역시도서관발전진흥원의 계간지 ‘도서관, 말을 걸다’에 ‘미술관 옆 도서관’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