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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과 통전적 성경해석
성종현 박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2005년 4월 13일
연 동 교 회
내 용
Ⅰ. 서론
Ⅱ. 학자들의 다양한 해석학적 입장
1. R. 불트만과 진보적-자유주의적 성경해석
2. G. 마이어와 보수적-복음주의적 성경해석
3. P. 슈툴마허와 중도적-복음적 성경해석
4. 춘계 이종성의 개혁신학적-통전적 성경해석
5. 박수암의 중도-통합적 성경해석
6. 안병무의 사회학적-민중신학적 성경해석
7. 박형용의 정통-보수적 성경해석
Ⅲ. 복음적-통전적 성경해석
1. 오늘날 성경해석의 문제점
1.1. 이성주의적 비판의식
1.2. '역사적 예수'의 증발
1.3. 정경으로서 성경의 계시성과 영감설 부인
2. 성경의 독특성과 역사적 형성 배경
2.1. 성경의 톡특성
2.2 신약성경 형성의 역사적-전승사적 배경
Ⅳ. 복음적-교회 중심적 성경해석(결론)
Ⅰ. 서 론
기독교 성경해석은 약 2,000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성경이 기록된 이후 수많은 해석자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성경을 해석해 왔고, 그 해석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성경해석은 18세기부터 시작된 성경해석의 거대한 물결 즉, 역사적-비판적 해석방법론(historisch-kritische Methode)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고 있고, 20세기 후반부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새로운 사조 속에서 다양한 해석방법들이 선보이고 있다.
모든 해석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성경을 보다 잘 해석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성경해석이 깊은 혼란의 늪에 빠져 있다. 오늘날 성경해석이 직면한 이러한 문제는 성경학자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성경은 변함이 없지만, 학자와 학설은 수없이 바뀌며 새로운 문제들을 쌓아가고 있다. 과연 어떤 해석이 가장 바람직한 성경해석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현대 성서학계의 다양한 해석학적 입장을 살펴보고, 그 문제점을 파악한 후에 나름대로 새로운 해석의 방향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Ⅱ. 학자들의 다양한 해석학적 입장
1. R. 불트만(Rudolf Bultmann)과 진보적-자유주의적 성경해석
불트만은 20세기 성경학 분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서, 그 이전의 역사비평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경해석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는 초기에는 K. 바르트(Karl Barth)와 함께 '변증법적 신학'(Dialektische Theologie)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K. 바르트와 신학적 노선을 달리하였다. 성경해석과 관련해서 K. 바르트는 역사 비평방법보다는 차라리 고전적인 성경 영감설을 선호한 데 반하여, R. 불트만은 18세기 이후의 자유주의적인 역사 비평학적 방법들, 특히 종교사학파(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한 그 자신이 새로운 역사 비평학적 방법을 개발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가 선호한 방법은 M. 디벨리우스(Dibelius)와 함께 개발한 '양식사적 연구'(Formgeschichtliche Untersuchung)내지 '양식 비평'(Formkritik) 방법이다.
여기에서 불트만은 모든 초점을 다양한 기독교 신앙전승의 출발점인 초기 교회들에게 맞춘다. 불트만은 신약성경의 본문들을 문학적인 장르(Gattung)에 따라 분류하며, 본문의 전승과정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전승의 최초의 형성단계인 초기 교회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추적한다. 그는 최초의 기독교 신앙양식(Form)들이 예배하고, 전도하고, 교육하고, 봉사하고, 친교하는 초기 교회들의 삶의 현장에서 생성되었다고 보고, 그 신앙양식과 교회의 삶의 자리의 상관관계를 규명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양식사적인 연구의 대표적 저작물이 바로 '공관복음 전승사'(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이다.
불트만의 성경해석의 기본방향과 관련해서 중요한 또 한 가지 점은 그의 '비신화화 작업'(Entmythologiesierungsprogramm)이다. 그는 현대인들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약 2,000년 전에 기록된 성경 속에 등장하는 신화적인 요소가 커다란 장애요인이 된다고 지적한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신약성경이 증거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이지, 그 의미를 증거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구시대적, 신화적 언어나 표상이나, 세계관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현대 성경해석자들이 성경 속의 신화적인 요소를 현대인이 이해하기 쉬운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성경 속의 신화적인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대개, 그가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힘든 이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에 관한 진술들이다. 그 과정에서 불트만은 자신이 신화적이라고 이해한 성경의 언어를 M. 하이덱거(Heidegger)의 실존주의 철학의 언어로 재해석하였고, 이러한 재해석의 결과가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또 다른 이해의 장벽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불트만은 자신이 추진했던 비신화화 작업의 과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한다: "비신화화의 과제는 성서의 신화론적 세계관과 자연과학적 사상에 영향을 받은 현대 세계관 사이의 충돌과 갈등에서 시작된다. 신앙 그 자체는 인간의 사고에서 발생한 모든 세계관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한다. 모든 인간적 세계관들은 세계를 물상화하고, 우리 실존에서의 만남의 의미를 간과하거나 배제한다. 이러한 갈등은 우리 시대의 신앙은 바른 표현 형식들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 또 우리 시대는 행동하는 하나님의 피안성과 은폐성을 아직도 실제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신화화는 해석학적 방법 즉, 해석 내지 주석의 한 방법이다. 비신화화가 해석의 방법으로 필요한 것은 신약성서의 우주론은 성격상 본질적으로 신화적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중심이고,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지하 세계 이렇게 3층 구조의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다. 이것은 현대인에게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신화적 세계관이 케케묵은 것임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성경해석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18-19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자유주의적 역사 비평방법의 발전 계승의 성격을 띠고 있고, 그 밑바닥에는 초대교회의 역사적 신앙 문서로서의 성경에 대한 철저히 객관적이고 분석적이며, 회의적인 비판의식이 깔려 있다. 재구성과 해석의 큰 틀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러한 불트만의 입장은 때로는 교회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또 때로는 충격적이고, 신앙 파괴적인 부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그의 해석학적 입장은 오늘날까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계승되고 있다.
2. G. 마이어(Maier)와 보수적-복음주의적 성경해석
20세기 불트만과 그의 제자들의 철저히 회의적-역사비판적 성경해석에 가장 강력히 반발한 보수계열의 성경해석자가 바로 G. 마이어(Maier)이다. 그는 대학 울타리 밖에서 경건주의-복음주의적 흐름 속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학자로서, 오늘날 보수진영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마이어는 "신학자는 어떤 구절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자기 분수를 넘어 성급하게 배제하지 않도록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여지를 방법론적 원리에 마련하여야 한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처음부터 특정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방법론적 '광각 관점'(Weitwinkel-Einstellung)이다. 역사비평 방법은 역사-성경적 방법에 의해 대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이어는 성경해석자의 기본 입장을 다음과 같이 주문한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경우,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든 그가 원하시는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에 속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 신적 권위를 갖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확신이 아니요, 오히려 신적 계시가 스스로 드러나는(laut werden) 곳에서 우리는 경청해야 한다."
마이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계시성을 중시한다:
"신학은 남김없이 자신을 맡기는 순종으로만, 계시를 통해 지정되는 토대 위에만 자신을 정초할 수 있다. 이것은 계시에 대해 '먼저 신뢰하고 들어가야 한다'(Vertrauens-Vorgabe)는 방법론적 의무조항이다. 모든 비평의 '먼저 확인하려는 자세'(Vorwegfeststellen-Wollen)는 여기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이 이러한 만남에서 임의조치권(Verf gungsrecht), 지적 유보권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조차 동일한 수준에서, 말하자면 대등한 상대로서 성사시킬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미리 제한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러한 해석학적 기본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마이어는 요한복음 7장 17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올바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굳게 붙잡을 때이다. '사람이 그의 뜻(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이것은 계시 영역에서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유일한 방법론적 원리이다. 이 원리는 오직 순종으로부터 지식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계시에 상응하는 것은 순종이요, 결코 비평이 아니라고 앞서 말한 사상을 확인해 주며, 또한 유추의 척도나 다른 곳에서 시험해 본 척도들을 가지고 계시를 가려내어 손아귀에 넣으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선언한다."
마이어는 성경의 계시성 외에도 신 구약 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으로부터 인식하게 되는 것은 계시에 대한 유일한 규범적 근원적 해석은 계시 자체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성경의 자기 해석은 확실성 부여라는 성경의 목적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사가들의 판단 즉, 신앙하며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항상 성경 전체를 하나의 통일체로 체험하였다는 판단을 반박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개신교에 속한 모든 교회들의 역사에서 분명히 드러난 사실이다. 이와 같은 체험이 단지 성경 사용에서 기계적으로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계시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바로 성령의 내적 증거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은 실상 성경의 계시적 성격과 통일성과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인식에 미치는 생동적인 작용에 대해 증거한다."
마이어는 18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자유주의적인 역사 비평방법들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보수진영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그는 성경의 계시성과 통일성을 중시하는 역사적-성경중심적 성경해석을 주창하며, 무엇보다도 성령의 조명과 내적 증거를 통한 영적인 성경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3. P. 슈툴마허(Stuhlmacher)와 중도적-복음적 성경해석
불트만과 마이어가 18세기 이후 세계 성서학계의 두 물줄기 즉,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을 대표하는 현대 성경해석자라면, 슈툴마허는 A. 슐라터(Schlatter), J. 예레미아스(Jeremias), L. 고펠트(Goppelt) 등으로 이어지는 중도-온건한 성경해석자들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튀빙엔(T bingen) 대학교 신학부 소속 신약학자이다.
그는 튀빙엔 구약학자 H. 게세(Gese)와 함께 '성경중심 신학'(Biblische Theologie)의 주창자로서, 무엇보다도 신 구약 성경의 통일성을 중시한다. 슈툴마허는 불트만과 그의 제자들의 성경해석의 문제점과, 또 그것이 교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성경해석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모든 기독교적 성경해석은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덕을 세우고, 유익을 주는 해석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는 기독교 성경해석자는 단순히 학자적 관심이나 역사가적인 비판의식으로만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되고,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교회 및 신앙 긍정적인 성경해석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슈툴마허의 해석학은 따라서 해석자와 본문의 이해의 일치를 중시하는 '동의의 해석학'(Hermeneutik des Einverst ndnis), 혹은 '공감의 해석학'(Hermeneutik der Sympatie)이라 불린다. 그는 게세와 함께 신 구약 성경의 유기체적인 통일성(Einheit)을 중시하며, 신약성경을 구약과 유대교 묵시 문학의 전통 속에서 전승사적으로 연구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그는 역사 비평학의 공헌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교회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중시하고, 그것을 교회건설적인 신학의 관점에서 극복해 나가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슈툴마허는 교회의 성경해석의 구조와 과제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한다: "신약과 구약으로 된 교회의 성서 즉, 그리스도교의 정경이 생긴 이래 명백히 눈앞에 보이는 교회의 성서해석의 과제는 이러하다. 즉, 성서 해석은 교회의 진리탐구에 봉사해야 하고, 또 해석을 방법론적으로 성서의 전통을 꿰뚫고 들어가서, 성서의 영의 증거와 또 성서 진술의 학문적 명확성에 대한 요구를 똑같이 만족시켜야 한다."
그는 성경해석자가 교회의 성경해석 전통과의 대화 속에서 본문을 해석하여야 함을 중시하고, 특히 종교개혁적 성경해석의 정신에 입각한 해석을 강조한다: "종교개혁적으로 볼 때, 교회의 성서해석은 교회에게 역사적으로 미리 주어진 성서의 영의 증언을 학문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형식으로 처리되어야 하는데, 실은 다음과 같은 교회의 신앙고백 및 신앙선교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 즉, 이제는 성서해석이 전적으로 신학적인 진리 탐구의 방도가 되었다는 것, 또한 성서의 증언은 성서 밖에서나 성서를 넘어서가 아니라, 성서 자체의 근원적인 복음 증언의 원문 가운데서 인식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성서를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 그 자체 안에 모순이 없는 영의 증언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성서의 중심인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하여 말하였고, 또 신약과 구약의 개개의 책들 사이나 성서의 정경문서와 외경 문서들 사이를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구별하였다. 이러한 성서이해에 의거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성서 자체 안에서 비판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과 율법, 영과 영이 아닌 것,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 근원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사이를 구별짓는 책임을 신학적 성서해석의 과제로 부과하였다."
역사적 예수 이해에 있어서도 슈툴마허는 불트만과 다른 입장을 취한다. 그는 불트만과 달리 나사렛 예수를 공생애 시작 때부터 메시아적 자의식을 가지고 활동하신, 구약에서 예고된 메시아적 화해자(Messianischer Vers hner)로 이해한다: "내가 위에서 성서는 우리 그리스도교적 생존의 토대라고 말했을 때, 나는 구약과 신약으로 된 성서는 실제로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떨어질 수 없는 통일성을 나타낸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또한 나는 석의가로서도 그리스도교 선교는 이 성서의 표준적인 중심으로 입증될 수 있다는 견해에 머물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스스로 지탱력이 있는 우리 신앙의 토대인 성서의 정경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성서의 지배적인 표준적 중심인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없이 신약의 핵심 요소는 화해자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중심적인 증거이다. 우리의 화해자요 동시에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에서 모든 그리스도교 고백형성의 중대한 본래의 중심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주신 구원의 기초일 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미래이기도 하며, 실제로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슈툴마허의 해석학적 특징은 첫째, 교회의 해석전통, 특히 종교개혁 전통에 충실하고자 하는 데 있고, 둘째, 교회와 기독교 신앙 건설적인 해석학적 입장을 추구하는 데 있으며, 셋째, 신 구약 성경의 계시사적(offenbarungsgeschichtlich)이며, 전승사적인(traditionsgeschichtlich) 다양성과 통일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중도-복음적인 성경해석에 있다.
4. 춘계 이종성의 개혁신학적-통전적 성경해석
현대 한국 조직신학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종성은 성경해석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성서 안에는 역사적 기록과 신앙적 고백과 상징적 예언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각각 다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구약에 있는 역사서와 사도행전과 대다수의 바울의 서한은 역사서로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역사적 사실과 주관적 확신이 함께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 전체를 객관적 사실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런가 하면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은 다니엘과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환상을 인간의 말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그 말이 담고 있는 본래의 뜻과는 다른 상징적 의미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직설법적으로 기록하기보다 가설법적으로 기록했다. 그러므로 거기에 나타나는 인물이나, 동물이나, 상황이나, 숫자는 대체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자적(如字的) 또는 문자적 해석은 그러한 다양한 기술방법을 고려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가르치기 때문에, 신자들을 설득시키는 데 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바른 성서 해석은 어떠한 것일까? 첫째 사람의 종교경험을 인간의 말로 기록한 것이다. 둘째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는 교회의 작품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긴 시일을 거치면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인간의 실수에 의한 오류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는 성서원본(지금은 상실됨)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단지 종교인들이 자기들만의 종교체험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힘의 사역과 접촉하면서 자기들이 체험한 내용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초자연적 세계가 담겨 있다. 여기서 말하는 초자연적 힘이란 어떤 물리학적 우주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 인격자에 의한 사역을 의미한다. 그 힘을 성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실존적이고 실제적인 관계에 관한 기록이다. 넷째로, 성서의 궁극적이고 최고의 해석자는 성서자체다. 이 때까지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은유적 방법, 여자적(如字的) 방법, 유형적 방법, 양식사 비판방법, 비신화화 방법, 토착화 방법 등 많은 방법을 써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써는 성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음을 알게 된다.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은 성서가 성서자체를 해석하는 방법이다. 그 방법은, 먼저 성서 전체의 중심 메시지(구속사역)를 발견하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불가분리의 관계(약속과 성취)를 견지하면서, 상호보완적으로 이해하되, 신약성서(그리스도)의 빛을 통하여 구약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이다(고후 3:14-16)."
이종성은 또한 성경 문자주의를 뛰어넘어, 칼빈이 말한 바 '성령의 내적 증거'에 충실한 성경해석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한다: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성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거기에 기록된 하나 하나의 명령을 지키려고 하는 입장(유럽주의)과, 그것을 하나의 지혜로운 교훈집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 있다. 또는 성서를 종교적 서적으로 보아 교육의 좌우명으로 삼기도 한다. 또는 성서는 그의 대부분이 신언이기는 하나, 어떠한 부분은 인간의 말로 되어 있다고도 한다(부분 영감설). 그러나 가장 정당한 해석은 성령이 성서해석의 주인이라고 하는 해석이다. 물론 성령이 해석한다 해도 그것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애매한 점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성령이 도움 없이는 성경을 절대로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다. 성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살아 있는 면을 포착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해에 있어서 너무 무모하게 문자 맹종하지 말고, 그 문자에 활력을 제공해준 성령에 의존해야 한다.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칼빈의 원칙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Spritus sancti internum)에 따라 하나님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도록 해야 한다."
이종성은 역사 비평학을 뛰어넘는 성경 자체의 권위와 신학의 규범성을 중시한다: "성서가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교리 판단의 표준이 된다는 것은, 현대신학자들, 특히 개혁교회의 전통에 속한 신학자들에 의해서 재강조되고 있다. 신앙고백서가 규범한 규정(norma normata)인데 비하여, 성서는 규정하는 규범(표준, norma normans)이라고 한 푈만(H. G. P hlmann), 그리스도가 '카논 안에 카논'이라고 한 루터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성서의 표준성을 주장한 벨카우어(G. C. Berkouwer), 성서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근원인 동시에 표준이라고 한 벌코프(H. Berkhof), 그리고 성서 안에 인간적 견지에서 볼 때 많은 문제점과 해석의 다양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초월적 규범(transcendent norm)이라고 주장하는 블뢰쉬(D. G. Bloesch) 등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백방으로 성서의 상대성을 증명하려는 것과는 달리, 성서의 권위와 함께 신학의 규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학자는 아니지만, 오늘날 한국 조직신학계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이종성의 성경해석은, 성경의 권위성과 표준성에 바탕을 둔 개혁신학 전통의 통전적인 성경해석이라 하겠다.
5. 박수암의 중도-통합적 성경해석
박수암은 역사비평적인 방법들을 성경해석에 사용함에 있어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사용해야함을 역설한다. 성경에 대한 역사적-비판적인 연구는 필연적이지만,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와 계시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용 가능성의 이중적인 성격은 오늘 우리의 견해 즉, 이 방법(=역사비평방법)을 사용하기는 하되 신중히 사용해야 하며, 신학적인 방법과의 연결 하에서 사용해야 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성서가 하나님의 감동과 인간의 유기적인 노력의 산물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성서는 역사적인 문서인 동시에 신학적인 문서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합리적이고도 객관적인 연구를 위한 역사적인 방법을 취하는 것과 동시에 신학적으로도 책임을 지는 방법론을 요구한다. 성서의 신학적인 내용과 역사적인 내용은 서로 독립된 두 가지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두 가지 측면을 지닌 하나의 실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서로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중 어느 하나만을 주장할 때 그것은 잘못된 방법론이 된다. 그리하여 필슨(F. V. Filson)은 주장하기를 현대의 해석은 그가 계시에 대한 주장을 받아들이고, 성경을 계시에 비추어 해석할 때에야 비로소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성경은 그 근본적인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자에 의해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것은 역사적 과학적 방법론뿐 아니라, 신앙의 응답까지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비평법을 사용하기는 하되, 과격한 역사주의나 역사적 실증주의에 빠지지 않고 교회의 신학적인 전통을 고려하면서 신중히 사용하는 것이다. 역사비평법 전제가 성경이 초자연적으로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을 배격하는 과격한 역사주의나 역사적 실증주의일 때(unbelieving interpreter의 경우), 그것은 우리 모두 배격해야 할 위험한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역사비평법을 사용하되 적절하게 신중히 사용할 것이며, 복음과 교회에 봉사하도록 사용해야 할 것이다."
박수암은 오늘날 다양하게 실험되고 있는 새로운 성경해석방법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오늘날에도 우리 성경해석자들의 주된 과제는 성경 본문 원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히 밝혀내는 것이지, 현대 독자가 본문 속에서 임의대로 의미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 오늘날 시험 중에 있는 최첨단 해석이론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적합한 해석법은 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법이 될 수는 없다. 성서 본문에서 원래 저자의 의미를 꺼내는 석의(exegesis)가 아닌, 새로운 의미를 산출하기 위해 새로운 의문을 가지고 본문에 들어가는 주입해석(eisgesis)은 교회가 배격해야 할 알레고리적 해석과 같은 것이며, 예수, 바울, 초대교회, 종교개혁자들을 잇는 해석 전통과도 맞지 않는 것이다. 원래의 저자가 의도한 것과 다른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수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성서해석 방식이 진보를 포기하는 것이 된다."
박수암은 바른 성경해석의 원리들을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성경은 신적인 관계의 빛 아래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책으로서, 신앙과 행위에 있어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구약성경이 권위가 있는 책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참되다고 생각했다. 교부들과 종교 개혁가들에 있어 신 구약성경은 그 계시성, 신언성, 영감성, 무오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성경의 권위가 사상뿐 아니라, 단어들에까지 존재한다고 믿어야 한다.
2)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하신 책이며, 모든 부분에 있어 진실됨으로 그 교훈의 통일성이 반드시 추구되어야 하며, 초자연적 요소들이 인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은 반드시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하며(Scriptura Scripturae interpres),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기본적인 교리를 파악하고, 그 빛 아래에서 부분을 해석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은 통일성 있는 책들로 이해되며, 개인의 경험이나 철학, 세상적인 사조, 이데올로기 등 성경 외적인 어떤 도구에 의해서도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성경의 모든 구절은 보다 명백하고, 보다 기초적인 말씀과 성경 전체의 빛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체는 부분들에 의해 다시 확인이 된다.
3) 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예수님과 사도들,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했다. 그들은 구속사적 입장에서 구약과 신약을 예언과 성취, 모형과 대형의 빛 아래에서 이해했으며, 예수 그리스도 즉,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관점은 성경의 모든 내용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해석의 원리이다.
4) 성경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의 기본 저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성경은 바로 해석되지 못한다.
둘째, 성경은 인간적인 관계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한다:
1) 해석의 제일 목적은 저자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2)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의미를 택할 것이다.
3) 어떤 진술도 한 의미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4) 한 저자를 일관성 있게 해석토록 해야 한다.
5) 한 구절의 역사적 상황에 유의해야 한다.
6) 문맥의 빛 아래에서 해석해야 한다.
7) 단어들은 저자 당시의 의미와 맞게 해석해야 한다.
8) 한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 그 구절의 문학적 특성을 잘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경해석의 한 모델을 제시받게 된다. 박수암의 성경해석은 전반적으로 볼 때, 역사비평방법을 수용하되, 또 동시에 그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며 경계하는 중도-통합적 성경해석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6. 안병무의 사회학적-민중신학적 성경해석
안병무는 한국 민중신학의 주창자로서, 철저히 사회학적이고 민중신학적인 성경해석을 강조한다.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해석(existenzielle Interpretation)과 타이센(G. Theissen)의 사회학적 해석(soziologische Interpretation)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성경해석의 기본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편자들은 한 개인들이면서 개인들이 아니었다. 저들은 교회를 대변했다. 그런데 교회는 세계 안의 존재다.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들도 세계 안의 존재로서 단순히 교회 내의 조건에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먹고 입고 사는 사회적 조건들에서 영향을 받은 존재들이다. 다시 말하면 저들은 믿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는 것이 문제가 되며, 그런 조건들 아래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찾아 묻고 대답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영역 또는 교회의 영역을 그 밖의 세계의 여러 조건들과 유리시켜 본다는 것은, 교회적 고백의 실상을 부분적으로 밖에 밝힐 수 없다. 성서의 사회학적 물음은 바로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성서에 대한 학문적 노력이다. 성서는 대부분 어떤 개인들의 문학작품이 아니라, 공동체들의 생활기록이다. 비록 문학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들도 있으며, 뚜렷한 저자들의 '작품'도 있으나, 그 저자들은 서구에서 발달한 의미의 '개인'이 아니고, 공동체의 일원들로서 그 공동체를 대변하고 있으며 문학형식을 띤 것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사변에 의한 착상적 산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의 서술이며 고백이기 때문에 집단성을 지닌다. 구약의 전승주체는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이다. 그 집단성의 외적 조건들에 따라 그들의 신조가 이변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이변 속에서의 연속성이다. 구약과 신약성서 사이에는 단절의 시기가 있다. 그 단절은 민족공동체의 이스라엘의 주권상실과 그것에 따른 민족의식의 혼미성과 관련이 있다. 신약성서의 기점은 물론 예수 운동의 사건이다. 그런데 그 운동은 한 개인 전기적 사건이 아니라, 민중사건이다. 계보상으로 볼 때 정신적 차원에서는 묵시문학계에 속하며, 운동의 차원에서 보면 탈(脫)예루살렘계에 속한다. 예수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예루살렘에서 멸시하는 소외된 지역인 갈릴레아를 그의 활동무대로 삼되 외국화(헬레니즘화)된 도시가 아니라, 농촌에 한정했던 사실이나, 그가 마침내 예루살렘에서 지배자들에 의해 정치범으로 처형되었다는 사실 등은 바로 탈예루살렘파들과 같은 반열에 섰음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개괄할 때, 사회학적 시각에서 물음을 제기하지 않고는 그 참모습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진술은 계속된다:
" 그런데 70년대에 들어오면서 사회적 조건서술, 사회사적 관찰 그리고 마침내 사회학적 방법으로 성서를 연구하는 경향이 진행되므로, 많은 새로운 사실을 발굴해 내고 있다. 그중에 사회학적 방법을 엄밀한 의미에서 적용하고 있는 신약학자 타이센은 이 방법을 양식사적 연구와 비교하여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문학사회학은 본문들의 '삶의 자리'를 전체사회의 틀 안(im Rahmen der Gesamtgesellschaft)에서 해석하려는 것이라고 한 점이다. 이 말은 양식사 연구는 교회라는 일정한 틀에 그 관심을 국한했다는 것과 대조시키는 것이다. 이 전체 사회의 틀에서 보는 시각으로 다음 네 가지를 설정한다. ① 사회 경제적 요인, ② 사회생태학적 요인, ③ 사회정치적 요인, ④ 사회문화적 요인 등이 그것이다.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 관심이나 전제가 묻는 자의 삶과 최단 거리에 있으면 있는 만큼 그 물음이 진실하며, 그것에서 얻은 대답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된다. 현대인은 이른바 종교적 영역이라는 고유한 '게토'에 있을 수 없고, 사회제반 조건들 밑에 아무런 완충지대도 없이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회학적 언어가 바로 현대인의 언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사회학적 언어가 현대인의 삶에 가장 가까운 언어라는 말이다."
안병무는 성경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민중신학적인 관점에서 민중의 눈으로 읽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러한 억눌린 민중의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했을 때, 성경의 핵심 주제가 '해방'(Befreiung)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서남동 목사와 나의 경우는 교권이라는 걸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캐논이라는 개념을 인정 안 해요. 내게는 성서의 외적 권위는 중요하지 않아요. 단, 성서라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인정해 줄게 있는데, 그 자체가 내용상으로 중요하거나 아니거나, 캐논이라는 것이 성립돼서 그것을 중심으로 전개된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걸 존중해야지요. 그 역사를 무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민중신학은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읽죠. 이 말은 성서에 의해서 성서를 비판한다는 루터의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성서의 본질은 성서의 민중사건에 있어요. 그것이 하나의 맥을 이루어 신 구약성서를 관통하고 있어요. 바로 이 맥에서 성서를 봤을 때, 이제까지 각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가려졌던 것들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죠.
신학자로서의 나는 성서의 전거에 의해서 신학적 공헌을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있지요. 그러나 가령 어떤 민중 사실이 전거와 맞지 않을 경우 다른 전거에 의해 설명하려고 할지 몰라요. 그때는 나는 민중신학자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론자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에요. 내가 민중신학자인 것은 한국사이든 교회사이든 성서를 전거로 해서 반성해서 동의하기 때문이에요.
'성서는 우리에게 이때는 이래라, 저때는 저래라 하고 세밀한 지시를 하지 않는다. 시대적인 거리도 있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성서로부터 우리의 행동지침이나, 사회 윤리를 직접 끌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점에 대해선 나는 불트만에 동의합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고, 현장으로 밀어냅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성서는 함구합니다. 그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성서로부터 유리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는 내게 계속 사랑과 정의의 행동을 하라고 요구해 오는 것입니다.
성서의 핵심은 '해방사건'이라고 봅니다. 그 동안 민중신학에서 가장 많이 언급했던 성서 구절들이 바로 그 해방사건의 맥에 속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맨 처음부터 가장 우리의 주의를 끌었던 것은 루가복음 4장 18-19절입니다. 마르코는 예수의 선포의 핵심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1:5)로 보았는데, 루가는 그것은 바로 해방을 뜻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을 핵으로 하니까 자동적으로 성서의 출발은 엑소더스에 두게 됐습니다. 엑소더스는 히브리의 해방운동이었다는 지식을 얻어냄으로써, 그 의미는 더욱 중요하게 됐습니다. 히브리는 한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억눌린 계층의 이름이라고 보았을 때, 그 탈출의 뜻은 더욱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착취와 권력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사건이 바로 엑소더스입니다. 끝으로 그러면 성서를 보는 열쇠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민중편에서!"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을 '당하는 자'의 편에서 보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주류를 이루는 커다란 맥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당하고 있는 자의 해방'이 성서의 핵심되는 목적이라고 보는데, 참 해석은 이런 해방사건에 참여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병무는 이러한 사회학적이고, 민중신학적 성경해석을 통하여 역사적 예수를 당시 고난받던 민중의 메시아로 정의하고 있고, 또 고난받는 민중(오클로스, o;cloj)의 탄식이 있는 곳에서는, 그 곳이 어느 사회이든지 간에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해방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이 해방역사의 과정에 또 다른 민중의 메시아가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안병무는 민중신학적 성경해석은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성경해석(existenzielle Interpretation)과 타이센의 사회학적 성경해석(soziologische Interpretation) 외에도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적(Befreiungstheologie) 성경해석과 구라파의 정치신학적(politische Theologie) 성경해석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하겠다.
7. 박형용의 정통-보수적 성경해석
한국 보수진영의 성경해석의 기본 입장이 박형용(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과 이환봉(고신대)의 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박형용은 "성경과 성경해석"이라는 제목 하에 「신학정론」에 발표한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우리가 왜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해야 하는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을 부인하고, 성경에 설명된 초자연적인 내용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이 이성이 체험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성경의 가치를 인정하려 한다. 결국 자유주의 신학은 기록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합리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우리들이 왜 신정통주의 신학을 배격해야 하는가? 자유주의와는 달리 신정통주의는 초자연을 인정하지만, 초자연적인 간섭이 성경의 문자 안에 매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신정통주의는 기록된 성경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괴리를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가 가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의 오류는 자기들 나름의 신학적인 전제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성경 속에 담겨 있는 뜻을 왜곡시키는 데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고 전달하실 수 있다고 믿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해석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의 내용을 왜곡하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환봉도 자유주의적 역사 비평학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계시성과 정확무오성을 강조한다.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은 19세기의 합리주의에 기초한 파괴적 고등비평을 성경연구에 도입함으로, 성경을 단순한 인간의 종교적 경험의 산물과 인간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한 역사적 고대문서로만 생각하였다. 이것은 성경의 무오에 대한 명백하고도 공개적인 공격이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구원내용은 무오하지만, 역사와 과학적 사실에는 오류가 있다고 하는 신학적 주장은 성경의 완전영감을 부인하는 것이며, 논리적 타당성도 없다. 역사적인 사실에 오류가 있다면 구원교리에 관한 것에는 오류가 없다는 것이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성경 기록에 유기적으로 반영된 인간 저자의 내적 인간성(저자의 성격과 기질, 은사와 재능, 교육과 교양, 용어와 문체 등)이 성경의 유오성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의 유죄성을 필연적으로 내포하지 않는 것처럼, 성경의 인간성이 필연적으로 성경의 유오성을 내포한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의 현상 중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병행 구절, 신약 저자들의 구약 인용에 나타난 차이점 등)에 직면할 때에라도, 그리고 설혹 그 모든 경우에 만족할 만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파괴적인 성경비평가들처럼 "이것이 바로 오류이다"라고 외치거나 혹은 인위적인 조화를 위해 부당한 조정자가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성경이 침묵할 때 우리도 따라서 침묵하면서 성경의 무오를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와 함께 끝까지 지키고 또한 신뢰해야 한다."
"또한 성경이 시간성과 문화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성경의 현상을 오늘 우리 시대의 문화, 언어, 사상, 과학 등의 표준으로 척도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만일 이러한 인위적인 표준으로 성경을 판단할 때, 성경에 많은 오류가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오류는 성경 자체의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잘못된 표준이 조작해 낸 오류이다. 만일 성경의 완전 무오성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제한되고, 무시되거나 혹은 성경 자체와 배치되는 진리의 방식으로 상대화된다면, 성경의 권위는 필연적으로 손상을 당하게 된다."
성경해석에 대한 이러한 단호한 입장들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 신학계 보수 진영의 해석학적인 기본 입장을 엿볼 수 있게 된다.
Ⅲ. 복음적-통전적 성경해석
1. 오늘날 성경해석의 문제점
1.1. 이성주의적 비판의식
18세기 계몽주의 물결과 함께 성경해석의 분야에서도 인간의 이성(Vernunft)을 모든 가치 판단과 분석의 척도로 삼는 새로운 성경해석의 물고가 터졌고, 이러한 흐름은 19세기 F. D. E.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튀빙엔 학파(F. C. Baur, D. F. Strauss)와 종교사학파(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 H. 궁켈, W. 브레데, W. 부세트) 그리고 20세기 불트만 학파(Bultmann Schule)를 거쳐 오늘날까지 도도히 흘러내려오고 있다.
전통적인 문학-자료비평, 양식비평, 전승비평 등 통시적인 석의방법 외에도, 오늘날은 신(新)문학 비평, 수사비평, 설화비평, 구조비평 등 공시적인 방법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포스트모더니즘 물결과 함께 각종 새로운 첨단 석의방법들이 실험되고 있다. 이러한 현대 석의 방법들의 밑바닥엔 대부분 이성주의적 비판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석의자는 철저히 객관적이고, 분석적이고, 비판적이기를 요구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학적인 기본자세는 계시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본질에 합당하지 않다. 본문에 다가가는 석의자가 교회의 일원이요, 기독교 신앙의 소유자라면, 그는 결코 신앙 밖의 제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 비판의식이나, 안티파티(Antipathie)만으로 성경 본문에 다가갈 수 없는 존재이다.
성경이 신앙인으로서의 오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말씀이라면, 이러한 말씀에 대한 접근 자세가 기본적으로 회의적-분석적-비판적이라는 것은 성경의 본질에 어울리지 않는다.
1. 2. '역사적 예수'의 증발
오늘날 성경해석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역사적 예수(historischer 혹은 irdischer Jesus)가 증발되어 버린 것이다. 불트만(R. Bultmann)은 그의 저서 「신약성서신학」(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에서 역사적 예수는 신약성경신학의 전제이지, 그 대상이 아니라고 선언함으로써 역사적 예수를 포기하고 있고, 이러한 경향은 그의 제자들의 성경해석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불트만은 기본적으로 복음서에서 증거되고 있는 예수는 역사적(historisch) 내지 지상적(irdisch) 예수가 아닌, 초대 교회에서 주님으로 고백되는 케리그마(Kerygma) 속의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그는 복음서 기자들 자체가 역사적 예수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들이 현재 교회에서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신앙 속의 예수의 그리스도를 세상의 주와 구원자로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불트만은 역사적-지상적 예수와 초대교회 케리그마 내지 신앙고백 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시켜 버린다. 복음서는 역사적 예수의 공생애에 대한 사실적-객관적 보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 자체가 그 복음서가 쓰인 교회의 신앙고백적 선포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또 독자들을 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초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저히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역사적 예수관은 자유주의적-진보적 성경해석자들의 모든 해석 밑바닥에 깔려있고, 따라서 그들은 역사적 예수 없는 성경해석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하여 양식비평자들은 모든 초점을 최초의 기독교 신앙양식(Formen)이 생성된 초대 교회(Urgemeinde)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맞추고 있고, 편집 비평학자들은 모든 초점을, 성경을 오늘의 형태로 최종적으로 편집하고 작업한 최종편집자(Redakteur)에게 맞추게 된다.
이와 같이 오늘날, 그것이 통시적인 방법론이든, 공시적인 방법론이든, 대부분의 현대석의 방법들이 '역사적 예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는 점이 현대 역사 비평학의 가장 큰 약점이자,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겠다.
1. 3. 정경으로서 성경의 계시성과 영감설의 부인
성경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담고 있는 영감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다. 이 계시성과 영감설을 전제하지 않는 모든 기독교적 성경해석은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성을 지니고 있다. 성경은 또한 A. D. 393년 힙포레기우스 대회와 397년 칼타고 서방 교회 대회에서 신약성경 현 27권이 '신약정경'으로 공식 인정됨으로써, 이 세상 모든 다른 문서들과 구분되는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인된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일원이요, 신앙인으로서 이러한 모든 교회의 정경화 과정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 것으로 믿고 고백하고 인정하고, 거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인정되지 못할 때, 여타 모든 문헌들과 구분되는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는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고, 성경은 다른 신앙 문서들과 차별화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기록되었으며, 교회로부터 '정경'으로 공인된 신 구약 성경은 다른 여타 종교 문헌들과도 구분된다. 성경은 교회로부터 최종적으로 정경으로 인정되고 선포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이요, 하나님의 결정으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그 어떤 개인도, 공동체도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와 영감을 주장하며 성경을 새로이 써나갈 수 없고, 그 어떤 해석자도 성경 원저자의 말하는 것 이상을 말할 수 없다. 성경 자체보다 더 정확하고 훌륭한 해석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 이상을 말하는 해석,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을 말하는 해석, 성경본문보다도 저자의 의도를 더 잘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해석, 성경의 다양성과 다원성만 인정하고, 통일성과 중심을 인정하지 않는 해석, 어차피 객관적이고 일치적인 해석이 불가능하니 읽는자 각자가 주관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이해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해석 등은 본질에서 벗어난 잘못된 해석들이다. 성경해석자는 일차적으로 경청하는 자이지, 자기 말을 하는 자가 아니다. 해석자의 주된 역할은 들은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해석하며 전달하는 것이다. 성경해석자는 본문 위에 설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해석자에게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겸허하고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자 하는 자세이지, 본문을 임의대로 주관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임의대로 비판분석해서 자기의 말을 하려는 자세가 아니다.
오늘날 성경해석의 혼란은 이러한 기본적인 것들이 전제되지 못하고 있는 데서 야기되고 있다.
2. 성경의 독특성과 역사적 형성 배경
2.1. 성경의 독특성
오늘날의 혼란스러운 해석학적인 상황 속에서 성경을 가장 바르고 정확하게 해석하는 길은, 먼저 성경이 어떠한 성격의 책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 역사적 형성과정을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 모든 책들과 구분되는 유일무이한 책으로서 독특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계시성과 초월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성경을 여타 모든 문헌들과 구분되게 하는 첫 번째 요소이다. 그래서 해석자는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본래의 뜻과 의도를 찾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인간에 의해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역사적 문헌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에서, 천상의 언어로 기록되어 하강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와 같은 신앙인들에 의해서 최선을 다해 기록된 역사적-신앙문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석자는 이러한 성경의 역사성과 인간적 요소를 전제로 하여야 한다.
둘째, 성경의 저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인데 여타 문서들과 달리 성경은 이 부분에 있어서도 독특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저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 내지 성령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원저자이신 하나님의 음성에 늘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성경 각 책은 하나님에 의해서 택함받은 인간(신앙인)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즉, 성경 각 책은 동시에 인간 저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 성경을 기록한 인간 저자의 의도와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왜 누구에게 언제, 어디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셋째는 성경의 내용과 관련된 것이다. 성경 66권은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특별한 책이다. 성경 속에는 한 편으로는 저자의 다양한 신학적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다. 크게는 구약성경의 메시지와 신약성경의 메시지가 다르고, 적게는 신약성경 안에서도 예컨대, 바울이 증거하는 내용과 마태복음이나 야고보서가 증거하는 내용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각 책이 기록된 역사적 상황과 배경이 다르고, 각 책의 기자가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다양성과 차이점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놀라운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각 책 66권의 다양성 속에서도 그 모든 책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심주제가 있고, 주인공이 있다는 것이다. 신 구약 성경의 주인공은 하나님, 특히 하나님의 아들되시고,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구약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 되시고,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역사이다. 약속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와 십자가 및 부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말론적 인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다양성과 통일성은 개별 신학적인 주제나 본문을 해석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성경 각 책이 기록된 역사적 배경과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넷째는 성경의 이해와 관련된 것이다. 성경은 한편으론 아주 쉬운 언어로 이야기 책처럼 기록된 책이다. 이것은 성경의 저자가 성령이시라는 사실과 관련된 문제이다. 성령의 언어의 특징은 분명하고 간단명료한 데 있다. 네 개의 복음서 중 가장 쉬운 언어로 기록된 책이 바로 요한복음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것처럼, 요한복음은 그 내용에 있어서 가히 복음서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가장 깊고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는 것이 없고, 배운 것이 부족한 시골의 촌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은혜 받아 구원에 이르게 하도록, 하나님은 성경을 쉬운 언어로 쉽게 기록하셨다.
성경은 성경의 언어로 해석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성경을 해석하면서 성경 밖 현대 학문분야의 복잡한 학술 전문용어들을 끌어들여 어렵게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늘날 해석학의 문제점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기록되게 하셨는데, 오늘날 해석자들은 거의 전문가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용어로 난해하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론 이 세상 모든 책 중에 성경보다 더 어려운 책은 없을 것이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담겨 있고, 깊고 심오한 구원의 원리, 인간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가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인간의 제한된 이해력과 통찰력으로 그것을 다 깨달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읽고 또 읽고, 배우고 또 배워도 그 깊고 심오한 의미를 다 깨달을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성경해석 자체나 해석에 사용하는 언어가 어렵고 전문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그 자체가 깊고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기록될 때 쉽고 명료한 언어로 기록된 것처럼, 오늘의 해석자는 성경 속에 내포된 다양한 의미를 현대인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해석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2.2. 신약성경 형성의 역사적-전승사적 배경
이러한 독특한 성격의 책인 성경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특히 신약성경의 역사적 형성과정과 신앙전승사적인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A. D. 30년 십자가와 부활 사건, 성령강림과 마가의 다락방 교회 탄생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급성장을 하였고, 이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는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렸고, 성례전을 베풀었으며, 새신자들을 교육하였고, 유대인들을 상대로 예수의 복음을 전파했다.
교회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던 이 예루살렘 신앙 공동체에서 최초의 기독교 신앙전승들이 형성되었다. 30~40년대의 구전전승 과정을 거쳐, 40-50년대부터 여러 신앙전승이 단편적으로나마 문서화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문서화된 전승은 예수의 수난사였고, 뒤를 이어 부활 전승, 기독론적 신앙고백 전승, 성만찬 전승, 세례 전승, 비유말씀 전승, 이적 전승 등 다양한 신앙 전승들이 문서화 되는 과정을 거쳤으리라 본다.
사도행전 6장 1절 이하에 의하면,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처음부터 출신, 성향, 언어, 문화 그리고 신앙의 형태가 조금씩 다른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히브리파 유대 기독교인들과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들로 불리던 유대인 크리스찬들로, 이들에 의해서 최초의 기독교 신앙전승들, 구전 전승들과 문서화 전승들이 생겨나게 된다.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를 지도자로 한 보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성향의 팔레스틴계 유대 기독교인들은 아람어를 일상용어로 사용하였고, 이방인에 대해서 보다 폐쇄적이었으며,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대 신앙 전통, 예컨대 율법준수나 성전 제의에 대해서 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모세 율법의 유효성과 성전 예배의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행함과 실천을 강조했다. 반면 스데반을 중심으로 한 일곱 집사 그룹을 지도자로 하여 형성된 헬레니즘계 유대 기독교인들은 당시 세계적인 언어였던 헬라어를 일상용어로 사용하였고, 이방인 우호적 내지 개방적 성향의 기독교인들로서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가장 먼저 유대 전통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들은 모세 율법이나 예루살렘 성전 제의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과,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성도의 예배를 더 중시하였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였다.
A. D. 30년대 중반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왜 하필 스데반이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는가에 대한 답이 여기에서 나온다. 그는 모든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특히 유대 전통에 비판적이었던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순교 후 다른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중의 일부가 시리아의 안디옥에 정착하여 헬레니즘계 교회를 탄생시켰다. 안디옥에서부터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가 이루어졌고, 바나바와 바울을 지도자로 한 안디옥 교회는 급성장하게 된다. 이 때 안디옥 교회에서 최초의 헬레니즘계 기독교 신앙 전승들이 형성되었고, 이 신앙 전승들(Paradosis)을 토대로 바울신학의 그 기본틀이 갖추어지게 된다. '오직 믿음을 통한 구원'과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바울 서신은 전승사적으로 보았을 때, 최초의 헬레니즘계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와 그 이전 예루살렘 모교회의 신앙고백 전승의 영향 아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반면 마태복음이나 야고보서는 예루살렘에서 뻗어나간 팔레스틴계 교회의 신앙전승의 영향권에 있다. 60년대 중반 유대 독립전쟁 와중에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히브리파 유대 기독교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고, 그 중 일부는 요르단 동쪽 펠라(Pella) 지역 은둔 생활 속으로 들어가고, 또 다른 일부가 팔레스티나 변방에서 팔레스틴계 교회를 탄생시킨다. 누가 이 교회의 창설자이고, 이 교회가 어디에 위치했었는지는 정확히 확인될 수 없지만, 이들도 나름대로 예배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새신자 교육 등을 시키며, 교회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팔레스틴계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며 사용한 신앙 전승들(Glaubenstradition)은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신앙 전승들이고, 여기에 팔레스틴계 교회 특유의 새로운 신앙 전승들이 추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태복음과 야고보서는 바로 이러한 팔레스틴계 교회의 신앙 전승의 영향 아래 기록되었고, 전승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예루살렘 교회 신앙 전승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약성경의 다양성과 통일성의 한 예를 보게 된다. 신앙 전승사적으로 볼 때, 서로 다른 교회의 영향권에 있는 마태복음과 야고보서, 바울서신은 그 신학적인 진술에 있어서는 서로 차이점을 보이고 있지만, 계시사적이고 전승사적인 뿌리에 있어서는 예루살렘 모교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역사 속에 나타난 다양성과 통일성의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바울신학(바울서신)은 마태신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마태신학(마태복음)은 바울신학을 배척할 수 없다. 이 두 신학이 그 진술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상당한 다양성과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할지라도, 이 둘은 A. D. 30년 이후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 전승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이 최초의 기독교 교회 안에서 형성된 모든 신앙 전승의 생성과 계승 과정에 한 성령이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양성과 통일성을 전제로 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 안에서의 통전성을 보게 된다. 그들은 서로 한 성령의 역사하심 안에서 메시아시요, 구주되신 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를 증거하고 있다. 그들의 증거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성은 따라서 성령이 허용하시고, 인정하신 다양성이라 할 수 있겠다.
동시에 신약성경 27권 안의 다양성은 다양성으로만 머물지 않고, 이 27권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역사하신 한 성령 안에서 통일성을 갖게 된다.
Ⅳ. 복음적-교회중심적 성경해석(결 론)
오늘날 다양한 성경해석과 구체적인 본문 석의 과정에서 극도의 혼란상이 표출되고 있다. 18세기 이후 구라파를 중심으로 해서 시작된 역사적-비판적 성경해석의 방법들이 한국 교회와 신학계에서 충분히 논의되고 공감되고 소화되기도 전에, 포스트모더니즘 물결과 함께 새로운 첨단 석의 방법들이 수입돼 들어와 그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혼탁한 현 상황에서 올바른 성경해석을 위한 우리의 기본적인 입장을 재정리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해 보인다. 어떻게 하면 성경을 성경답게 가장 잘 해석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기본 방향을 발제자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해 보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신적 권위와 계시성, 그리고 영감설이 인정되어야 한다. 이 전제 없는 성경해석은 결국 성경을 많은 고대 종교 문헌 중의 하나로 전락시키고 말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는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위대한 성경해석자이셨던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본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당시 성경전문가였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문자 이면의 의미와 정신을 찾아서 하나님의 본래의 뜻을 밝히는 방향으로 해석하셨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인간(생명) 사랑 중심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메시아적 자의식을 전제로 한 메시아 중심적인 성경해석을 하셨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사건 이후, 그 이전의 바리새파의 율법주의적 성경해석을 버리고,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십자가의 복음중심적인 해석을 함으로써, 그의 성경해석은 비로소 기독교적인 성경해석이 될 수 있었다. 약 2,000년의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개종 후 사도 바울의 정신으로, 성경을 철저히 십자가의 복음 중심적으로 재해석하였고, 이로써 계시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신적 권위를 회복시켰다. 오늘의 해석자에게는 예수님, 바울, 종교개혁자로 이어지는 성경해석의 기본정신을 이어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셋째, 기독교 성경해석은 교회의 덕을 세우고, 교회의 지체들인 성도들의 신앙에 유익을 끼치는 해석이어야 한다. 성경해석은 전문가나 학자들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성경해석의 언어가 명료하고 평이해야함을 의미한다. 전문가만을 위한 성경해석, 성경 언어세계 밖의 언어, 특히 타학문의 전문적인 학술용어들을 도입해서 전개되는 성경해석, 교회를 의식하지 않고 순수학문 탐구 위주로 치닫는 성경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쉬운 본문은 더욱 쉽게, 어려운 본문은 그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밝혀주는 것이 해석자의 사명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가급적으로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여야 한다.
성경해석의 방법은 여러 가지일 수가 있다. 따라서 다양한 성경해석 방법들을 통전적으로 체계화하여 건전하고, 복음중심적인 해석체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2,000년 기독교 성경해석 전통과의 대화도 중요하다.
모든 기독교 성경해석은 궁극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데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올바른 기독교적 성경해석은 그것이 교회의 시녀가 되어서도 안되겠지만, 또 동시에 교회를 방치하고, 상아탑의 전문성 속에서 홀로 달려가는 학문탐구 지향적 성경해석이 되어서도 안된다. 21세기 한국교회가 필요로 하는 성경해석은 동반자적 자의식으로 교회와 보조를 맞춰가며 함께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고자 하는 복음적-교회중심적 성경해석이다.
첫댓글 복음적 교회중심적 성경해석의 결론 좋습니다.
자료잘 보고 갑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