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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랑 여름호 원고인데, 29쪽이나 되어, 앞부분 만 수록하고, 전문은 이 곳에 소개합니다.
유럽, 예술에 취하다
서 원 생
1, 설렘을 안고
흔치 않은 일이다. 요즘 젊음이 들 중에 유럽여행을 가지 않았다고 말하면 사람 측에 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만큼 유럽은 우리 삶에 어느덧,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 여행이 재미가 있든, 재미가 없든 한 번쯤은 다녀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 행운이 정년퇴직을 1년 앞둔 공로연수 기간에야 올 수 있었다.
동기 들 중에 마음에 맞는 사람과 계모임을 하고 있는데 1년 간격으로 퇴직시기가 맞지 않고, 여행을 즐겨하지 않는 사람을 제외하고 보니 두 가족으로 축소가 되었다. 마음을 모아 2년 동안 적금을 넣다보니 어느덧, 천만 원 가까이 모아 한꺼번에 내는 부담을 덜었다. 다음은 어느 국가를 가느냐가 문제였다. 천신만고 끝에 서유럽으로 가기를 결정하고, 가격이 저렴하고 시기적으로 알맞은 적기를 골랐다. 비수기에서 성수기로 넘어가는 시기가 여행의 맛을 즐기기에 알맞았다.
출발일 10일 전에 여행 일정이 나왔다. 몇 번 여행을 다녀보니까 여행은 즐기기보다는 오히려 고생이었다. 비교적 싼 상품을 잡다보니 4개국에서 3개국으로 줄었고, 숙식에 조금 질이 낮아 보였다.
출발 당일은 공주에 있는 시골집 수리 문제로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공사업체에 맡기고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일행 중에는 해외여행이 두 번째로 낮 설은 가족도 있었다.
당일 날이 돌아오자 동행가족은 새벽부터 분주하여, 동도 트기 전인데 벌써 공항 역에 나와 있는지, 여러 개의 카톡이 찍혀 있었다.
아내는 공항으로 출발하는 버스 속에서도 외손녀를 자기 침대에 잘못 뉘고 나왔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딸과 사위에게 전화를 해도 안 받으니까 아파트 관리실에
전화를 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천안 정도까지 가서 휴게실에서 딸과 통화를 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진정이 되는 모양이다.
가방도 적정량으로 줄였다고는 하지만 두 개를 준비하고도 모자라 내 배낭까지 휴대했다.
평일 아침이라 고속도로의 통행량은 비교적 한산했다. 3시간이 넘어 도착하리라는 예상을 했는데 두 시간 조금 더 소요되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작년 동남아 여행 때는 경전철로 이동하여 비행기를 탔는데 제2터미널은 그럴 염려가 없어 좋았다. 수속을 밟는 과정에서 잘못 걸려 통과하지 못한 짐을 되돌릴 때도 현장에서 다시 보낼 수 있어 안심이다. 늘 여행 할 때마다 한 가지씩 공항에서 걸리더니 이번에도 연필 깎는 칼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지만 통과하는 데는 방해가 되지 않았다.
로마행 비행기는 대한항공이었다. 여행사의 대표가 검찰에 소환 되느라 떠들썩했지만 여행하는 여행객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정말 긴 여행이었다. 처음 호주여행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번 유럽여행은 더 긴 여행이었다. 오금이 절이고, 어깨가 아팠다. 어는 정도 왔겠지 하고 시간을 물어보면 절반에도 못 왔다.
일행 가족은 그래도 운이 좋아 빈 뒷좌석을 이용할 수 있어 눕고, 앉고 하는 것을 보니 부러웠다.
우여곡절 끝에 로마에 도착한 것은 로마 시간으로 19:30분, 저녁이었다. 그 사이 시차가 일곱 시간 뒤로 밀려 이른바 과거를 두 번사는 셈이 되었다.
로마에서 우리를 처음 반긴 것은 비였다. 적게 내리면 그냥 비를 맞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였지만 워낙 세차게 내려 우산을 써야 했다. 국내에서 우산과 우의를 준비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늘 그렇듯이 내릴 때의 수속도 복잡했다. 많은 여행사가 한꺼번에 몰리다보니 사람 숫자가 많았다. 또 출구 쪽에서의 길게 늘어선 행렬 때문에 시간소요가 많다보니 우리 일행이 공항을 빠져 나올 때는 이미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멈추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미리 준비한 관광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KRT 여행사에서 이번 유럽여행은 인원을 A, B팀으로 편성했다고 한다. 똑같은 여행지에 인원이 많다보니 항공기는 같이 타고 왔지만 관광차는 나누어 타고 가이드도 한 사람씩 배치가 되었다.
45명이 정원인데 25명이 타나보니 여유 있는 버스좌석이 많았다. 항공기에서 너무 고생을 많이 했던 터라 2인용 좌석을 한 명이 앉는 사람들이 많았다.
호텔은 3성급 수준의 숙소였다. 여행 상품이 워낙 저렴하여 기대를 많이 하지 않고 오기 했지만 춥고, 온수가 잘 나오질 않아 첫날부터 불평불만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40세 초반의 여성 가이드가 불만을 소화하기에 벅찼다. 더더욱 숙달된 가이드가 아니라 여행 중에 일정이 변동 될 때마다 당황하고 시간이 없어 가이드가 점심을 굶는 사례도 발생했다.
아내는 그나마 전기매트를 가져와서 잘 잘 수 있었지만 나는 추워서 여러 겹의 옷을 끼어 입고 잤다. 전기도 110볼트를 사용하여 멀티 캡까지 준비했다. 국내에서 멀티 캡을 준비를 했지만 부족하여 가이드 것을 한 개 더 차용했다.
2. 첫째 날 투어
어젯밤에는 시차적응 때문에 고생했다. 게다가 호텔까지 추워 몇 번을 잠을 설쳤더니 눈에 피곤이 몰려왔다.
첫째 날 관광은 로마시내 관광이다. 유럽에 일찍 다녀 온 딸은 별로라고 하면서도 첫째 날이라 물음표 표시를 해 놓았다. 남들은 다 하는데 선택 관광이라도 첫날부터 예의가 아니라는 표시였다. 그래서 이번 선택 관광은 베니스 여행할 때 두 개 선택 관광 중 한 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관광을 하기로 했다. 유럽까지 이왕 어렵게 왔는데 돈 좀 쓰고 가자는 요량이다.
45인승 버스가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로마시내가 복잡했다. 그래서 로마시내 관광은 리무진을 이용하기로 했다. 비좁은 시내에서 이것만큼 적합한 이용수단이 없어 보였다. 특히 관광지가 비좁은 골목길이 많았다. 리무진은 6명 정도 탑승이 가능한 봉고차였다. 친구 부부를 포함하여 4명이라, 다른 여자끼리 온 두 명을 추가하여 1개조로 편성했다. 총 4개조 중에 우리는 2조 였다. 가이드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마다 인원파악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했다.
로마의 명소인 판테온 신전과 트레비 분수, 스폐인 광장 계단 위에 토리니타 데이몬티 성당, 베넷치아 광장, 그리고 원형 경기장인 골로세움과 산타 마리아인 코스베딘 성당을 관람했다. 이탈리아는 유난히 성당이 시내에 많았다.
중세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기독교를 공인하고부터 로마는 물론 정복국가마다 기독교 신앙을 전파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성당이 세워졌다. 로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트레비 분수는 도시로 알려진 로마의 분수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하단다. 흰 대리석 작품으로 개선문을 본 뜬 벽화를 배경으로 거대한 한 쌍의 반인반수의 해신 트리콘이 이끄는 전차 위에 해신 넵투누스상이 거대한 조개를 밟고 서 있다.
주위의 거암거석 사이에서 물이 흘러나와 연못을 이룬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판테온 신전이다. 로마제국의 현존하는 건축물 중 가장 보존이 잘 되었다고 한다. 판테온은 그리스어로 “모든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이라는 뜻으로 로마 전역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은 위해 세운 성전이라 한다. 기본 구조를 이룬 반구는 우주를 상징하고 돔의 정상에 뚫린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은 내부를 고르게 밝혀 주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비추는 각도가 변한다. 마치 하늘이 신전의 내부 공간에 스며들어오는 듯 한 느낌이 들게 한다. 판테온 신전 앞 높은 탑의 분수대, 탑의 끝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잠시 영화≪시네마 천국≫으로 유명한 베네치아 광장 전망대에 올라 로마시내를 둘러보고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70년 경 베스파시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80년에 건축이 끝나 100일 축제기간 동안 그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개막식을 올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플라비아누스 원형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이곳에서 열리는 검투사 경기를 보러 찾아드는 5만 여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 들 중에서 운동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졌는데 서로 결투를 하다가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관중을 즐겁게 해 주었다고 한다. 대결이 끝나면 승자는 패자를 죽여야 할지, 혹은 살려야 할지에 대한 관중들의 결정, 또는 황제가 그 자리에 있다면 황제의 결정을 살폈다고 한다. 오늘 날 매우 유명한 엄지손가락을 올리거나 내리는 제스처를 통해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스폐인 광장에는 관광객이 많았다. 17세기 교황청 스폐인 대사가 이곳에 본부를 두면서 스폐인 광장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로마의 휴일≫에 등장하여 더욱 유명세를 탔다. 계단에 올라가면 트리나타 데이 몬티 교회가 있다. 계단은 17세기에 트리니타 데이 몬티의 프랑스인 주민들이 교회와 스폐인 광장을 계단으로 연결시키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광장 주변에는 바르카치아 분수가 있다. 바르카치아는 “쓸모없는 오래된 배”를 의미 한다고 한다.
중식은 중식으로 때우고 로마 안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 바티칸 시국으로 향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교황이 통치하는 도시국가 바티칸 시국은 인구가 약 천명, 영토는 로마의 테베레강 서쪽 바티칸 언덕과 그 앞 인근에 성베트로 대 성전, 사도궁전과 시스티나 성당, 그리고 바티칸 미술관 등의 건물들이 세워진 평원 0.44㎢이란다.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살던 옛 나라 에트루리아의 “비티쿰(정원)”이란 마을지역이었고, 서기 64년 로마 대 화재이후 그리스도인 순교 장소였다고 한다.
네로의 원형경기장과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바티칸 언덕, 그리고 원형 경기장에서 순교한 베드로가 묻혀 있다고 여겨지는 곳 위에 건설된 성 베드로 대 성전이 있다. 높다란 벽 아래로 바티칸 미술관 입구가 보이고, 그 앞 조그만 광장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 오래된 성벽 같은 것이 바티칸 시국의 경계표시란다.
무선수신기를 받아들고 2층으로 줄지어 올라가니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이 모여 가이드들의 설명에 귀를 모은다. 가이드의 열정적인 설명이 이어진 후 드디어 입장이다. 눈앞에 수많은 조각상과 그림들이 스쳐 지나간다. 하나하나마다 의미가 많지만 자세히 볼 틈도 없다. ≪아테네 학당≫같은 작품이 있는 라파엘로의 방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관광객이 붐빈다. 벨베데레 정원의 ≪라오콘≫이나 ≪아폴론≫같은 조각상 주변에는 더욱 관광객이 많았다. 천장 중앙에 9개의 창세기의 장면이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걸작들이 있는 시스티아 성당에서는 빼곡히 들어찬 관람객들 속에 숨소리마저 죽이고, 사진도 못 찍게 한다. 필자는 모자와 선글라스까지 벗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세계걸작을 현지에서 볼 수 있다는 감격에 모든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감탄할 수 있는 표현을 찾지 못해 그냥 천장만 바라보니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이 직접 미사를 집전하는 성당이고, 교황을 선출할 때 사용되는 예배 실이니 더욱 엄숙하다.
흐르는 강물처럼 인파에 밀려가는 중에도 아리찌의 회랑에 걸려 있는 ≪예수님의 부활≫이란 태피스트리 작품이 눈길을 끈다. 예수님의 생애를 묘사한 대형 벽걸이 직물공예로 16세기 플랑트드 화가 피터 반 알스트 공방의 작품이란다.
세로 562㎝, 가로954㎝에 달하는 그 작품에 표현된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며 걸어가니까 예수님이 나를 응시하며 따라오고, 얼굴과 몸까지도 같이 방향을 옮기는 듯 하여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한참을 많은 작품들에 쓸려 지나갈 무렵에 성 베드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긴 엄청난 규모의 대 성당은 정말 거대하다. 크기도 놀랍지만 그 큰 공간의 구석구석을 메운 조각상과 아름다운 장식에 넋을 잃을 지경이다. 성당의 맨 앞쪽, 높이 솟은 제단 위 천장을 장식하는 창문에서는 이탈리아 특유의 강렬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 빛은 성당내부의 어두운 공간을 서치라이트처럼 밝힌다. 그러면 관람객들은 그 빛 속을 거닐며 신비감에 사로잡힌다.
그 뿐이 아니다. 성당 구석구석에 마련된 채플실에는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걸작 품인 조각상과 벽화들이 즐비하다. 미켈란젤로가 직접 조각한 《피에타》도 바로 이곳에 있다.
바티칸 시국을 관람하고 나올 때는 해가 늬엇느엇 질 때였다. 아직도 많은 작품 들에 머리가 혼란이 되어 꿈속을 나는 것처럼 어지럽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이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전혀 없을 정도였다. 그 빈혈 같은 증상은 호텔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제 정신이 돌아오지 않을 정도였다.
석식은 모처럼 한식 비빔밥이 나왔다. 모처럼 한국에 온 감정을 위가 경험했으리라! 오늘은 호텔을 이동하지 않고 어제처럼 그 방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어제 춥고 온수의 불편함을 경험한 터라 가이드나 관광객들은 무척 긴장했다.
3, 둘째 날 투어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약 3시간이 소요 되었다. 오늘 일정은 주간에는 토스카나의 중심도시 피렌체를 구경하고, 다시 약 3시간을 이동하여 베네치아의 상인으로 유명한 베니스로 이동하여 베니스의 야경을 감상하는 일정이다. 르네상스 문화의 흔적이 잘 남아있는 도시, 영화≪냉정과 열정사이≫의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한 피렌체는 주요 관광지간 거리가 짧아, 걸어서 5분~10분이기 때문에 대부분 도보로 이동하였다.
피렌체 여행의 필수코스인 두오모 성당, 미켈란젤로 언덕, 베키오 다리를 만나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사상가인 탄테와 미켈란젤로외의 많은 예술가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두오모의 정식 명칭은 산타마리아델 피오레 대 성당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대리석 외관이 굉장히 화려한 곳이다. 그러나 내부는 굉장히 소박한 편이다. 두오모는 아프놀포디 캄피오에 의해 1296년부터 무려 140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이 되었다고 한다. 피렌체 시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좋고, 둥근 돔 위의 쿠폴라에 오르면 시내를 내려 볼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두오모 옆에는 조토의 종탑이 있는데 탑에 오르면 두오모의 아름다운 돔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두오모 성당인근의 신곡의 저자, 단테의 생가를 찾아 사진을 찍고, 단테의 성장배경을 탐색했다. 그리고 아르노 강위에 위치한 다리 중에 가장 오래된 다리인 베키오 다리를 관광했다. 단순한 다리가 아닌 다리위에 건물이 세워졌는데 1345년 건설된 다리로 원래는 푸줏간, 대장간, 가축처리장이 있던 곳이란다. 하지만 페르네난도 1세가 악취가 난다며 그들을 추방하고 그 자리에 금세 공업자 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도 보석가게들이 다리 위 상가에 들어서 있어 반짝이는 보석을 구경하며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피렌체의 낭만이 흐르는 미켈란젤로 언덕을 관광했다. 아르노 강 오른 쪽에 위치한 곳으로 미켈란젤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다비드 상 복제품이 광장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언덕에 위치한 광장에서 피렌체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데 해질녘 일몰을 보고 야경을 즐기면 더 없이 좋은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라는데, 다음 일정인 베니스의 야경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다시 약 3시간을 이동하여 석식을 하고나니 현지 가이드가 바뀌었다. 식당에서 작은 신장이 유난히 눈에 띤 가이드는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언변이 유창한 가이드다. 얼마나 말을 재미있게 하는지 차 안에서도 배꼽을 잡을 만하다.
베니스. 일명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하나 둘, 석양과 함께 은은한 조명이 바다 위를 수놓았다. “계속해서 오라”라는 뜻의 베네치아는 바다위의 로멘틱 한 물의 도시로 118개의 섬, 150개의 크고 작은 운하, 400개의 다리로 이루어진 도시란다. 그 한가운데를 흐르는 대운하를 따라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베네치아 대운하를 따라 배로 이동하기로 했다. 사전에 우리는 수상택시는 선택
관광에서 제외하고 곤돌라만 타기로 했기 때문에 수상버스를 이용했다. 수상버스와 수상택시의 차이는 배와 유람선의 차이였다. 유람선인 수상택시는 작기 때문에 아무래도 도시 외곽을 자유롭게 돌며 스릴을 느낄 수 있다.
B팀의 절반이 수상버스를 타고 먼저 섬에 도착했다. 약 15분정도 자유 시간을 갖고 나니 수상택시 관람을 마친 인원들이 도착하여 산 마르코 광장에서 합류했다.
산타루치아 역에서 아름다운 베네치아의 풍경을 즐기며 걷다보니 리알토 다리를 만났다. 1591년 완공된 리알토 다리는 1854년 아가세미아교가 놓을 때까지 베니스 운하를 가로지르는 유일한 다리였다고 한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다리로 멋진 외관과 아치모양의 아름다움, 다리 위에 자리한 점포들의 조화만으로도 베테치아를 대표하기에 충분했다.
베네치아의 인상 깊게 관람한 곳은 산 마르코 광장이었다. 나폴레옹은 이곳을 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ㄷ자 모양의 건물과 넓은 광장이 매력적인 곳이다. 주변으로는 산 마르코 대 성당과 두칼레 궁전이 있고, 사자상과 성 체오도르 상이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 성경의 신약성서 최초의 복음서를 쓴 마가의 유골을 모시기 위한 납골당으로 세워진 산 마르코 대 성당은 두 명의 상인이 이집트에서 가져온 유골이라고 한다. 굉장히 독특한 외관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성당이다. 비잔틴 건축을 대표하는 양식으로 십자형의 바실리 카가 돔을 받치고 있는 구조이다. 아름답고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과 황금빛 배경의 모자이크 벽화가 유명해서 시간의 여유가 없는 관광이 아쉽기만 하다.
베네치아 도시의 구석구석을 살피기 위해 곤돌라를 탔는데 5명씩 조각배를 탑승했다. 우리일행과 대담하게 여자 혼자 유럽여행을 온 여자 한 분이 우리와 함께 배에 올랐다. 곤돌라는 배로 여행할 수 없는 좁은 운하를 유유히 떠다니며, 여행할 수 있어 베네차아의 내부까지 알 수 있는 교통수단이다. 베네치아 도시인의 조용한 품성을 온몸에 느낄 수 있어 큰소리로 이야기 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베네치아에서 주어지 시간이 풍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내에서 익히 듣던 부라노섬과 무라노섬은 포기하기로 하고 다시 배를 타고 나왔다.
아쉽지만 현지 가이드와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4. 넷째 날 투어
이탈리아 북서부 라스테치아 지방의 친퀘테레는 “5개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땅이란다. 실제로 5개의 각기 다른 개성의 해변마을은 파스텔톤의 집과 좁은 골목길, 동화 같은 포구와 소담스런 레스토랑이 어울어져 있다. 마을은 절벽 위의 좁은 길로 연결되어 있어 자동차가 닿지 못하고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오늘은 그중에 리오마조레 마을을 탐방하기로 했다. 리오마조레 마을로 가기 위해 약 4시간을 이동했다. 그 중에는 열차여행도 빼 놓을 수 없었다. 대서양에 연해 있는 가파른 절벽 해안가 협곡을 따라 북쪽에 있는 작은 어촌 중에 가장 남쪽에 있는 첫 번째 마을이다. 13세기 초부터 이곳에 마을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전해지며 오래된 고성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협곡의 비탈을 개간하여 포도를 재배하고 건조한 해붕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이 유명하단다. 집들은 해안가 절벽 바위 위에 지어져 있고, 연한 붉은 색과 노란색, 분홍색 등 파스텔풍의 색채로 칠해져 있어 이색적인 풍경이다. 라스페치아에서 철로가 연결된 라오마조역이 있다. 해안선을 따라 절벽에 비탈진 길이 있는데 “사랑의 샛길”이라고 불리는 “델이모레”는 친퀘테제중 리오마조레와 마나롤라를 연결하고 있다.
마을의 중심지인 콜롬보 거리에는 많은 음식점, 술집. 기념품 상점과 카페들이 줄지어 있었다. 마을 자체의 길이 좁기 때문에 도보로 이동했다. 우리 일행은 가는 곳마다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절벽으로 내려가면 자갈밭 해변이 있어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간식거리를 찾다가 입맛이 맞는 음식도 별로 없고, 앉아 먹을 만한 장소도 협소하여 간단하게 맥주 한 캔씩 먹고 일어났다.
오늘 일정 중에는 유람선 관광이 계획되어 있었으나 취소되어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5. 넷째 날 투어
오늘은 잠시나마 이탈리아를 벗어나 조금 남쪽으로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그동안 중세도시 이탈리아에서 머리가 쥐가 날 정도로 역사공부를 했다. 그렇잖아도 학창시절에 중세 역사공부를 하면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취미가 없었는데 이탈리아에서 중년이 되어 다시 공부를 하자니 재미가 없었다. 다행히 오늘은 따뜻한 남쪽나라를 관광하기로 했다. 국적도 남 프랑스 여행이란다. 코트다쥐르의 보석 같은 9개 마을 중에 오늘은 집중적으로 니스와 모나코를 관광하기로 했다.
전 세계의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최고의 휴양 및 관광지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마을 코트라쥐르는 지중해의 꽃으로 불리는 니스, 그리고 아름다운 지중해 연안을 따라 위치한 모나코를 뜻하며, 코트라쥐르에는 세계적인 부호들의 저택이 몰려 있는데다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하는 곳이란다. 연 평균 15도의 기온을 유지할 만큼 연중 고르게 온난하고 풍경이 아름다워 전 세계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란다. 별장, 호텔, 정원, 산책로 카지노 등 위락시설이 정비되어 있고, 인접한 모나코, 밭과 더불어 각종행사도 많이 열린단다.
남프랑스의 코스다쥐르로 가는 길은 좁고 해안을 끼고 있어 차들이 많이 밀렸다.
해안도로를 따라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도시 모나코 공국이다.
그레이스 켈리의 나라, 세계부자들이 모여 드는 나라 등 수식어가 즐비하다. 높은 지형에 워치 한 아파트 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모나코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지하 주차장에 버스를 주차하고 연결통로 위로 올라가면 모나코 해안 절벽에 위치한 해안 박물관이 나온다.
곳곳엔 모나코 왕비인 그레이스 켈리의 이야기가 담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헐리우드 톱 여배우였고, 히치콕 감독은 그녀에게 “늘 주인공으로 살라”라고 말했다고 하니 그녀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배우로서 정점을 찍고 난 후엔 한나라의 왕비로 전 세계의 관심을 받으며 산 그녀가 이 나라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고 한다.
해안 박물관 옆 공원에서 내려다 본 모나코의 뷰, 프랑스 코르다쥐르에서 인생에서 볼 화려한 요트를 다 볼 수 있었다.
해양 박물관 옆으로 걷다보면 모나코 대 성당이 나온다. 모나코 대 성당 안에는 모나코 왕실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성당은 특히나 화려했다. 높은 천장과 창으로 성당 안을 비추는 빛이 아름다웠다.
그레이스 켈리의 무덤, 50대 초반에 교통사로로 생을 마감한다.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아 프랑스로 편입될 위기에 처 했던 모나코 왕국, 모나코 왕인 레니에 3세와 허리우드 톱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으로 모나코는 세계 제일의 관광국이 되었다. 그녀의 삶은 영화로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
온 나라가 번쩍 거리고 금테 두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현지인이 사는 동네는 그래도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긴다.
모나코 대공 궁전은 요새 터에 지어졌다. 궁전이 있는 언덕 위에서 보는 모나코의 전망이 정말 최고였다.
모나코는 언덕이 많아 전망을 보기 좋은 위치가 많은데 특히나 인기가 있다. 매일 오전 11:55분에 근위병 교대식이 있다고 한다.
프랑스 은행이 모나코에도 있다. 모나코는 통화, 언어뿐만 아니라 마트나 은행도 모두 프랑스와 동일하게 쓰인다. 분명 모나코는 하나의 나라다.
비좁은 그리고 비탈진 골목들이 미로 같은 중세도시 에즈는 니스 근교 마을 중 가장 알려진 명소이다. 로마시대의 주요 도시였으며 중세에는 제노아와 모나코의 지배를 받다가 이탈리아 사르데야 왕국의 속국이 되기도 한다.
1861년에 비로소 프랑스령이 되었다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가듯이 마을은 적침을 막기 위해 고지대에 새의 둥지처럼 성벽을 돌려만든 요새마을이다. 마을은 작지만 해변까지 이어지는 니체 산책로와 독특한 모양의 선인장 들이 촘촘히 심어져 있는 열대 식물원이다.
니체는 1883년 4개월간 에즈에 머물며 그의 대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완성했다고 한다.“잘 자고, 많이 웃고, 환상적인 활기와 인내심을 얻었다.”고 말했다.
에즈 열대 식물원은 12세기 에즈의 시장이었던 르제지양통이 모나코 식물원을 설립한 장 가스타드의 도움을 받아 조성한 에즈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아프리카, 남미, 지중해 등 세계 각지에서 공수해 온 수백 종의 희귀한 아가브와 선인장, 알로에로 이루어진 에즈의 식물원은 무너진 중세 성채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뒤로 훌륭한 높은 절벽이 있어 북풍을 막아주어 더운 기후의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는 조건도 갖추었다.
에즈의 골목길을 한참 올라가다보면 해발 고도 429m에 위치한 식물원에서 보는 파노라마 전망도 에즈 열대 식물원의 자랑이다.
니스는 프랑스 남쪽 지중해 연안에 있다. 예전부터 유럽 귀족 특히 영국 귀족들의 휴양지로 유명하다. 니스에 머물면서 아름다운 바다와 햇살을 즐기는 것이 그들의 휴가 보내는 방법이라고 한다.
해안을 따라 3.5㎞의 긴 산책로가 있다. 니스 해변 가는 해운대처럼 백사장이 아니라 작은 자갈들로 되어 있어 걷기에 편하다. 여기에서 수영도 하고 썬텐도 하고, 책을 읽고, 일광욕도 하는 사람도 많이 보인다.
니스여행은 천천히 바다와 전망을 둘러보는 게 매력적이다. 해안 도시답게 구시가지에서 음식을 먹고 감상에 젖어 볼 만하다.
우리는 중식으로 현지 식을 먹기로 되어 있었지만 언어 통화도 어렵고, 음식문화도 몰라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도 익숙한 맥도날도 음식을 먹기로 했다.
하지만 음식을 주문하는 것부터 쉽지 않아 가이드와 동행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볼 뻔 하였다.
넷째 날까지 이탈리아와 남프랑스 투어를 마치고 내일은 스위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스위스 물가가 비싸서 그런지 호텔은 스위스 인근의 밀라노에 숙소를 잡았다. 버스를 타고 밀라노에 이동하여 현시 식으로 식사를 했다.
6. 다섯째 날 투어
드디어 여행 중에 별미인 스위스로 국경을 넘는 순간이다. 스위스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알프스의 설원으로부터 뿜어 나오는 공기가 차갑고 청결한 나라라는 인상을 풍겼다. 산과 호수에서 풍겨 나오는 깊숙한 멋을 느꼈고 이탈리아와는 달리 고산이 많고 고산을 뚫어 만든 터널이 유난히 많았다.
산과 호수를 주위로 하여 빨간 가옥들이 성냥갑처럼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포근한 도시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배산임수의 천혜적인 위치를 끼고 있는 스위스 사람들의 조용한 정취를 느끼면서 버스는 인터라겐으로 달렸다.
중간 중간에 공사를 하고 있는 구간이 많아 예상시간보다 아주 늦게 도착하여 가이드는 바쁘게 서둘렀다.
비교적 가이드 경험이 적은 여자 안내자라 그런지 일 처리 능력이 조금 미숙했지만 정이 많은 여자이다. 우리에게 빨리 서둘러야 융프라우로 가는 산악열차를 탈 수 있다고 신신 당부를 하였다.
중식도 모처럼 한식의 갈비탕으로 나왔다. 버스가 식당 바로 앞에 내려 준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주차를 하기 안전한 곳으로 내려주어 5~10분을 걸었다.
바삐 움직이느라 모처럼 한식을 즐기는 기회를 허용하지를 않았다.
갈비탕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를 분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냥 떠 넣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기차역으로 갔다.
외국인인 운전기사는 약간 뚱뚱한 40대 중반의 남성인데 주차를 거리에 잘못하여 딱지를 떼였다고 투덜거렸다.
같은 동행한 친구는 스위스 거리가 깨끗하고 마음에 든다고 칭송이 입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융프라우 산악등정을 위해 열차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설산 아래는 따뜻한 4월초의 날씨인데 융프라우에 오르는 기차를 탄지 얼마 안 되어 완전한 겨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냥 기차를 타고 올라갈 뿐인데 창 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경치에 감탄사만 나올 정도였다. 우리나라도 산이 많긴 하지만 확실히 스위스의 알프스는 거산이라 그런지 느낌이 달랐다.
그린델발트를 비롯하여 몇 번의 정차 후 드디어 융프라우 오르기 전에 마지막 정차 하는 역인 클라이네 사이데크에 도착했다. 여기서 부터는 동굴 같은 느낌의 컴컴한 길로 올라가기 때문에 차창 밖의 멋진 풍경은 볼 수 없다.
간간히 알프스 설원을 즐기기 위해 스키를 타러 온 사람들이 보였는데 나이 많은 노인이나 아이들 할 것 없이 즐기는 모습이 너무 여유롭고 한가해 보였다.
드디어 유럽의 지붕이라는 융프라우에 도착했다. 높이가 3 천 미터가 넘는 높은 곳이기 때문에 고산지대에서 겪는 현상도 잠시 경험했다. 별로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숨이 가쁘고 비행기 안에서와 같이 귀가 먹먹하고 머리가 띵했다.
융프라우에 올라오니 배가 출출하다는 것을 느꼈던지 가게에서 한국의 신 라면을 팔고 있었다. 관광객마다 여행사를 통해 라면을 준비해 온 경험을 했던 까닭일까 현지 상술이 대단하다. 라면 값 따로, 온수 값 따로, 젓가락 값 따로 받는데, 라면과 젓가락은 대부분 준비할 수 있는 까닭에 온수 값이 제일 비싸다. 뜨거운 물 값만 해도 4.3프랑이다. 신 라면 가격이 7.9프랑이니까 총 금액의 절반에 해당하는 가격이다. 정말 무서운 스위스 물가에 놀랐다.
고산 3571m에 올라 스핑크스 전망대의 바깥모습을 보았다. 정말 너무너무 멋진 설산이 펼쳐쳐 장관을 이루었다. 4월초의 날씨라고 하기에는 인터라겐의 날씨와 너무 대조적이다. 밖에 나가자마자 롱 패딩을 잠그고 장갑을 끼는 등 완전무장을 했다. 이곳 날씨가 원래 한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 만년설이라 여름에도 이와 비슷한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추위 때문에 오랫동안 스위스 설산을 즐기기엔 무리였다. 다시 실내로 들어와 실내 투어를 시작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실내 볼거리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알파인 센세이션, 융프라우 철도 100주년을 기념해서 2012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250m 길이의 긴 터널이다.
그중에서도 아기자기 하게 만든 대형 스노우 볼은 동화속의 느낌 그대로다.
융프라우 철도 역사에 대해 전시해 놓은 부분도 있다. 이곳에서 열심히 일했던 노동자들, 그리고 융프라우 철도를 처음 만들기로 했던 아돌프 구에즈를 기리는 공간도 있다.
여러 얼음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는 얼음궁전도 또한 볼거리이다. 다양한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모두 얼음도끼와 톱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손으로 직접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어느새, “틀라토 전망 데라스”에 도착했다. 스위스 국기 밖에 없는데 다들 스위스 국기와 함께 인증 샷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동참하기로 했다. 한 컷 스마트 폰에 담고 나니 비로소 알프스를 지배한 사람인양 뿌듯하다.
복귀는 알프스의 다른 코스로 내려왔다. 똑 같은 것을 싫어하는 한국정서를 배려한 것 같이 고마웠다.
인터라겐의 여행숙소는 중식을 한 근처에 있었다. 석식을 현지 식으로 했는데 가이드는 이곳이 처음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미숙했다. 식당을 찾는데 이리저리 방황했다. 융프라우의 깊은 인상이 지워질 만큼 인내심이 필요했다.
겨우 찾은 식당은 파스타와 함께 쏘세지 요리가 나왔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생맥주를 시켰다. 가족들도 모처럼 지친 참에 한국 정서에 맞는 생맥주가 나와서 그런지 두 병씩이나 마셨다.
그동안 소주를 한국에서 여 덞 병이나 사왔지만 안주가 좋지 않아 절반도 마시질 못했는데 모처럼 안주도 맞아 술이 잘 받았던 것 같다.
저녁 여덟시가 되도 이탈리아와는 달리 많은 상가가 철시를 하질 않았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근처에서 쇼핑을 하기로 했다. 이른바 저녁 자유시간도 모처럼 갖게 되었다. 필요한 것을 여러 가지를 사고 숙소에 들렸다.
이탈리아에 머문 숙소에 비해 점점 좋아지는 환경에 기분이 좋았다.
7. 여섯 째 날 투어
오늘은 짐을 싸들고 스위스의 수도인 베른의 구 시가지로 이동하는 날이다.
스위스에서 이틀 투어를 하지만 저녁에 프랑스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수도인 까닭에 차량이 출근시간에 근접하여 밀리겠지 생각했는데 일찍 출발한 때문인지 도로가 한산하고 상가는 거의 열지 않았다. 이 도시가 일찍 철시를 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늦게 상가를 열지 않는 것에 의아했다.
베른은 스위스의 수도이자 도시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름다운 도시이다. 비교적 도시가 작아서 여유도 있고 하여 중심가는 전부 도보로 이동을 했다.
조금 특이한 것은 도로 같지 않는 보도블럭 위에 빨간 색깔의 트램이 사람도 겁내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이 이색적이다.
장미정원으로 올라갔더니 베른시내 전망이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4월 초순에서 중순으로 접어들었는데도 약간에 춥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와 별 차이 없이 벚꽃도 군데군데 피어 있다. 정원에는 벤치와 동상이 있었는데 아인슈타인 동상이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스위스 베른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당시에 살았던 생가도 베른이 있다는데 그래서인지 시내 전경을 아인슈타인 동상과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
베른의 중심지를 도보로 이동했다. 귀여운 기념품들이 정말 많고, 스위스 국기처럼 빨간색으로 되어 있었다.
또 시내 중심을 흐르는 알레강과 도시가 참 잘 배경이 맞다. 베른이라는 이름 자체가 도시를 세운 체링겐 가문이 곰 사냥을 해서 시작됐다는 전설이 내려올 만큼 곰이 도시의 상징이다. 도시의 시계탑에서 도보이동을 종료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호수의 도시인 루체른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루체른은 도시를 감싼, 아름다운 호수를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중세풍의 건물들이 어울어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도시이다. 중세와 자연이 조화를 이룬 도시, 루체른은 문화와 자연미, 통일성과 20세기의 문명의 이기가 잘 결합되어 있다.
알프스의 산과 물이 빚어낸 낭만의 도시 루체른은 스위스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루체른 크루즈 관광까지의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 루체른에서 유명한 명소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다리인 카펠교와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적인 바위, 반사의 사자 상을 감상하기로 했다.
카펠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다리란다.
1993년 화재로 거의 소실되었던 것을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직선의 다리가 아니라 한번 꺾이는 모양이라 독특한 곳이다. 강가에는 오래된 호텔과 식당이 있다. 우리는 중식메뉴로 한식을 한참 찾다가 포기하고, 가장 간편한 빵으로 거지 식사를 마쳤다.
다음 여행은 반사의 사자 상이다. 프랑스 혁명 중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머물고 있던 궁전을 지키다가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스위스 용병들을 상징하는 사자가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이 묘사 되었다고 한다.
15:00 정도가 되어 배에 올랐다. 처음에는 기대를 하고 2층에 올라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감상할 요량으로 갔다가 추워 혼났다. 담요를 덮고 해도 추워서 모두 1층 객실로 이동하여 감상 했다. 호수를 연하여 성냥갑 같은 모양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조용하고 고풍스럽다. 멀리 리기산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호수와 어울어져 정말 빼어난 절경이다.
이렇게 한 시간을 크루즈 관광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인 프랑스 파리로 이동하기 위해 약 3시간을 이동했다.
벨포트에서 TGV열차로 프랑스로 이동해야 했는데 가이드는 연장자가 있어 염려가 되었던지 굉장히 겁을 많이 주었다. 커다란 가방을 들어 2층까지 운반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력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협동심이 필요했고, 순발력이 요구 되었다. 그러나 상황이 닥치자 기습작전을 하듯이 25명이 순식간에 짐을 들고 2층 계단까지 올라가 탑승 하는 데는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이드도 이렇게 순발력을 발휘할 줄을 몰랐던지 굉장히 당황해 했다.
파리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잠을 청했지만 시차 때문에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일행 친구도 자꾸만 차창을 보며 파랗게 펼쳐지는 초원을 향해 스마트 폰을 누르면서 때로는 감탄을 하고 있다.
약 10여년의 호주 여행이 생각난다. 처음 필자는 선진국 여행을 할 때 느낌이 새롭다. 차창에 펼쳐지는 초원이 왜 그렇게 신기하고 부럽던지 감탄을 연발했다. 지금 친구의 생각도 아마 나와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
파리는 20:45분이 되어 도착했다. 다시 숙소까지 이동하여 도착해 보니 22:30분이다. 호텔 열쇠를 받아 들 때 약간의 고성도 있었다. 연장자를 배려한다고 1층에 방을 배정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한두 번을 할 때는 이해를 했는데 매번 특혜를 주니까 감정이 폭발한 것 같다. 배정하는 가이드도 당황했다. 이것저것 씻고 잠을 청하니 24:00가 거의 다 되었다. 다음 날은 여행 마지막 일정이 파리 관광이 기다리고 있다.
8. 일곱 째 날 투어
파리투어는 어제 늦게 잔 까닭에 한 시간 정도 늦게 출발했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출근시간과 겹쳐 파리 시내 진입이 너무 어려웠다. 차들이 거의 기어가듯 했다. 마치 한국의 아침 출근길을 연상했다. 하는 수 없이 현지 가이드와 연락하여 일정을 급히 바꾸었다.
현지 가이드는 파리 시내 진입과 동시에 만났다. 오십대 초, 중반의 베테랑 가이드라 언변도 능숙했다. 처음부터 가게로 인솔 하는 것이 미안 했던지 전후 사정을 이야기 하며 양해를 구했다.
우리는 가뜩이나 유로로 바꾼 돈이 많고 한국에서 부탁 받은 선물이 많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우리가 파리 시내에 들어 와 처음 접한 곳은 약국과 화장품 가게이다. 여자들이 특히 민감한 화장품 가게는 마치 돈을 쓰러 외국에 온 손님들처럼 적극적으로 지갑을 열었다. 내 아내는 핸드폰에 저장된 부탁 받은 물품을 공격적으로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가하여 동반자와 남은 유로를 풀기 시작했다.
나와 친구는 별 관심도 없어 밖에 나와서 투어 시작 전을 몸을 풀기 위해 화장실에 들렀다. 그런데 화장실 사용료로 2유로를 요구하였다. 이탈리아에서 1유로를 지불하고도 아까웠는데 두 배씩이나 주고 볼일을 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화장품과 약국에서 나와서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 바티칸 시티의 바티칸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1190년 지어졌을 당시에는 요새에 불과했지만 16세기 중반 왕궁으로 재건축 되었다고 한다. 1793년 궁중 일부가 중앙 미술관으로 사용 되면서 박물관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5세기 동안 유럽의 다양한 지역에서 수집한 회화, 조각 등 수많은 예술품은 오늘날 30만 점 가량에 이른다고 한다.
시간의 제약으로 작품 몇 가지만 보기로 했다. 전시관은 1층에서 3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구분되어 있었다.
1층에는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밀로의 비너스》도 이곳에서 만났다.
2층에는 이탈리아. 에스파냐, 영국의 회화 및 19세기 프랑스 회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헬레니즘 조각의 걸작인 《사모트라게의 니케》, 레오나로도 다비치의 《모나리자》도 전시되어 있었다.
3층엔 프랑스 회화를 시대별로 전시해 놓았다. 2층과 함께 관람객이 무척 인기가 있는 곳으로 렘브란트, 루벤스, 반다이크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의 관람을 마치고 현지 식으로 중식을 했다.
식사는 달팽이 요리와 소고기가 나왔다. 입맛이 맞지 않을 것 같아 와인 한 병을 추가로 구입했더니 먹는 부담이 적었다.
오후에는 파리의 대표적인 명소인 개선문과 상제리제 거리, 에펠탑을 탐방하기로 했다.
파리 시내 북서부, 샤를 드골광장 중앙에 서 있는 개선문은 에펠탑과 함께 파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명소이다.
개선문이 있는 광장은 도로가 별과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이전에는 에투말(별) 광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1970년 샤를 드골 광장으로 개칭 되었다고 한다.
개선문은 이름대로 프랑스 군의 승리와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나폴레옹 1세의 명령으로 걸립 되었다고 한다. 공사는 1806년에 시작 되었다고 하지만 격동의 시대를 거치느라 1836년에 완성 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1세의 유해가 1804년 개선문 아래를 지나 파리로 귀환해 앵발리드에 매장되었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시신이 개선문 아래 매장 되었다고 한다.
개선문으로 행진을 허락한자는 영웅들뿐인데 파리도 1945년 파리를 해방시킨 샤를 드골장군이 개선문 아래로 행진 했다고 전한다.
개선문 내부 벽면에는 128번의 전쟁과 참전한 장군 55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개선문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상젤리제 거리와 그랑드 아즈매를 연결하는 북쪽의 지하통로뿐이라고 한다.
개선문 앞쪽으로 에펠탑의 위용이 드러났다. 저녁과 야간은 에펠탑을 즐기기로 했다.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 혁명 100돌 기념 “파리 만국 박람회” 때 세워진 것이란다. 높이 320m의 격자형 철탑으로 탑의 이름은 프랑스 건축가의 이름을 따라 에펠이라 불렀다고 한다. 건립될 당시의 탑의 놓이는 300m로 1930년 크라이스러 빌딩이 완공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고층건물이었고 꼭대기에 철탑, 안테나까지 포함하여 320m,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 탑은 적은 노동력과 싼 비용으로 25개월 만에 세워졌다고 한다. 1985년 야간 조명시설이 설치된 이후 파리의 아름다운 야경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으며 1991년에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에펠탑의 야경을 보기 위해 그간 간절히 원했던 한식을 빨리 먹고 나올 정도로 흥분이 되었다.
석식으로는 순두부 찌게가 나왔는데 모처럼 얼큰한 찌개가 나와 소주도 먹고 싶었지만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감상하기 위하여 포기했다.
에펠탑 승강기 탑승을 위해 자국이나 외국인 관광객이 긴 줄을 서야 했다.
특히 시간상으로 꼭대기에서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는 흥분 때문에 긴 줄이 지루할 줄 몰랐다.
우리는 320m 중에 170여m까지 올라가 시내 야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승강기는 긴 줄의 갈증을 이해 한다는 듯 한번에 50명을 실어 날랐다.
고층에서의 날씨는 한 겨울처럼 많이 추웠지만 일몰과 시내 관광을 위해서는 참아야 했다.
다음 크루즈 여행을 위해 아쉽지만 에펠탑 투어는 여기에서 마쳐야 했다. 가이드는 크루즈 여행에서 다시 에펠탑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시키고 강행군을 시켰다.
크루즈 예약시간이 21:00라면서도 20:50분이 되었는데 포기할 줄을 몰랐다. 다음 배를 위하여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피곤하고 귀국 때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 좋게 크루즈가 예상시간보다 15분이나 연착하는 행운을 잡았다. 그래서 겨우 떠나기 3분전에 배에 올라 투어를 하게 되었다. 루체른에서 추위의 고통을 느끼었던 터라 2층에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1층에서 제한된 관광을 했다. 창밖을 한참 보고 있는데 갑자기 관광객들이 웅성거리며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마침 배가 에펠탑 근처에 와 에펠탑에서 뿜어 나오는 관경이 장관이기 때문이다. 순간 추위도 잊었다. 나도 그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과연 에펠탑의 장엄함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었다. 마치 사람 몸에서 반사되는 불빛 같았다. 레이저 광선까지 시내로 쏘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배 한쪽으로 기울 듯이 관광객들이 한쪽으로 쏠려 핸드폰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그간 10일 동안의 유럽여행의 불편함을 참았다. 이제는 그 공통이 이 에펠탑의 장엄함 앞에 눈 녹듯 쓸려 나갔다. 나도 너무 많이 찍었다고 할 정도로 노력을 아끼지 않고 담았다. 눈으로, 핸드폰으로, 감성으로 담았다.
배가 돌아갈 때까지 관광객들의 시선이 에펠탑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에펠탑과 작별하고 마지막 파리의 밤을 보냈다. 그 흔한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청했다. 늦은 밤에 도착했는데도 여운이 남아 피곤하질 않았다.
9.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귀국하는 날이다. 섭섭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같이 숙식을 해온 일행과 여행사의 사정으로 둘로 나뉘어 귀국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아침 출발조로 편성이 되었고 나머지 절반이상은 저녁 출발조로 편성이 되었다. 조금 서툴렀지만 정이 들었던 가이드는 석별의 정 앞에서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참고 참았던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는 인내하며 박수를 보내면서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파리 공항의 출발은 08:00로 09:00에 도착했다. 출발할 때보다 귀국수속이 조금 복잡했다. 우리는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귀국 수속을 밟았다.
경전철을 타고 이동하여 M25 게이트에서 13:10분 비행기에 탑승했다. 공항에서 선물을 사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복잡한 귀국 수속 때문에 시간을 너무 많이 소모해서 포기 했다. 친구는 유로화를 다 쓰고 가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운 것 같다. 어디 그뿐이냐! 소주, 준비한 음식물 등 빡빡한 일정 때문에 절반을 남기고 다시 가져온 여행 가방에 넣어야 했다.
귀국은 출국 때보다 기류의 영향 때문에 시간이 덜 걸렸다. 출국 때의 지루한 고통이 남아 있어 걱정을 했는데 편하게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오히려 인천공항에서 대전으로 리무진이 도착하는 당일이 토요일이라 교통체증으로 인하여 시간 소요가 많고 지루했다.
대전에 도착할 때는 점심이 다 된 12:00였다. 친구는 시간도 되고,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웠는지 주변에서 중식으로 얼큰한 것을 먹고 헤어지자고 제안했다.
배가 나온 여행 가방을 들고 시내를 활보할 수 없어 사위를 불렀더니 승용차를 가지고 나왔다. 짐을 실려 보내고 가까운 식당에 가서 그야말로 얼큰한 육개장을 시켰더니 10일 동안의 느끼했던 음식이 한꺼번에 내려갔다.
10일 동안 외국인으로 살다가 다시 한국인으로 돌아온 느낌이 난다. 집에 도착하니 눈에 밟히던 외손녀가 품에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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