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초등학생)의 추억들
김 영 호
얼마 전 지인의 팔순연이 있어서 고향에 다녀온 적이 있다. 초등학교 근처에 이르니 졸업식 노래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음 책으로 공부 잘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 있어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문득 지나간 대월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가슴에 이름표 달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학교 정문을 들어서던 코흘리개 시절이 떠올랐다. 해방되고 얼마 되지 않아 자원이 부족했던 시절이어서 농촌에서는 자연 미국의 구호품을 많이 받아 생활하였다.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전지분유나 구호물자인 옥수수가루 우유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학교 앞의 초지 천 다리는 흙과 나무로 얼키설키 만들어졌는데 장마만 지면 무너져버려 어느 여름날 하천을 건너던 경철이가 센 물살 때문에 떠내려가는 것을 동내 어른들이 구하던 기억이 새롭다. 인근에 넓은 하우스의 채소밭을 보면서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려본다. 여름방학 때 어느 날 밤에 우리는 수박밭으로 몰래 들어가서 수박과 참외를 주인 몰래 따먹으려 했다가 주인에게 발견되어서 야밤에 두손들고 벌쓰고 반성문을 써서 아저씨에게 드렸다.
생활이 힘든 시절이어서 우리의 처지를 아는 아저씨는 잘 익은 수박 두통을 주면서 “너희가 수박을 따가야 얼마야 따가겠느냐? 기껏 한 두통 따가지만 한두 사람이 그래야지, 수박밭 망가지고 많은 수박이 밟혀 깨지면 나는 손실이 너무 크다. 수박 먹고 싶으면 낮에 와라. 수박 줄게? 학교에서 배웠지?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 하시면서 반성문을 돌려주셨다. 우리는 아저씨에게 연방 고맙다고 머리를 숙이고 재현 이 와 현성이 철호 현석이 두성이 와 함께 경호네 밭으로 향했다. 경호네 밭둑에는 벌들이 큰 집을 지어 놓았는데 며칠 전에 보니 커다란 대야만 한 벌집이 보였다. 우리는 우의를 겹겹이 두르고 머리는 방독면 비슷한 걸 뒤집어쓰고 철사로 둥그렇게 만든 솜에 아주까리기름을 적셔서 벌집 앞에 불을 댕겨 집어넣으니 아닌 밤중에 침입자를 만난 벌들은 벌집 앞으로 떼를 지어 나오고 일부는 우리에게 덤벼든다. 완전히 무장한 우리에게 벌이 달려들어야 별로 소용이 없다. 일부분이 벌에게 쏘일 때도 있지만, 벌집은 우리 손에 들어온다. 벌집을 뜯어내면 수많은 애벌레가 나오는데 이들을 준비한 들기름에 튀겨서 먹으면 바삭바삭하고 고소하고 얼마나 맛이 잇든지, 그 맛은 먹어본 사람만이 안다. 벌 튀김 후에 먹는 수박 맛의 후식은 배고 품속에서 초딩의 시절을 보낸 지난날 나의 추억의 앨범 속에 아련하게 남아 있다. 그 시절에는 겨울철에 눈이 너무나 많이 내렸다. 장독에 수북하게 쌓인 새하얀 눈을 아침마다 쓸어내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2학년의 겨울 방학 때 우리는 마을 앞 진명 산으로 토끼와 고라니를 잡으러 갔다.
어린애들한테 무슨 무기가 있을까? 가냘픈 두 주먹과 혹시 만날지 모르는 멧돼지를 위해서 몽둥이와 우리의 든든한 보호 견 경철이네 검둥이와 우리 집의 불도그 을 데리고 7명의 전사는 의기양양하게 산으로 올라갔다. 진명산은 멧돼지가 우는 산이라서 붙여진 이름만큼 멧돼지가 많이 살고 있었다. 한 키가 넘는 눈을 푹푹 빠지면서 올라가는데 옆에서 경철이가 야! 산토끼다 하며 소리친다. 내가 어디야? 하고 부르니 눈앞에서 먹이를 찾던 토끼 세 마리가 보였다. 우리는 양쪽으로 포위하면서 토끼를 우리가 처 놓은 덫으로 유도했지만, 꾀 많은 토끼가 엉성한 우리한테 잡힐 리 없다. 토끼들은 굴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토끼 굴에 한참을 불을 짚여 넣으니 꾀 많은 토끼가 한참 후에 퀙퀙 하며 튀어 나온다.
눈먼 토끼 한 마리를 잡고서 두 마리를 쫓아가는데 갑자기 참나무 뒤에서 커다란 물체가 우리에게 덤벼든다. 철수가 멧돼지다! 도망가! 하고 소리쳤다. 우리는 한 마리 토끼마저 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36개 줄행랑을 쳐서 6.25 때 파놓은 방공호로 달려가 숨었다. 재빨리 문을 닫고 겁이 나서 웅크리고 있는데 멧돼지가 캑캑 거리고 씩씩거리며 머리로 받고 발로 차며 들어오려고 한다.
밖에서는 경철이네 검둥이와 우리 집 독 구가 멍멍 거리며 멧돼지를 향해 짓고 난리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는데 밖에서 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밖으로 나가니 멧돼지가 쓰러져 있고 검둥이와 독 구가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우리에게 달려온다. 개들이 놀라서 멍멍 짖으며 집으로 달려와 위험을 눈치챈 동네 사람들이 허겁지겁 산으로 달려와 멧돼지를 발견해서 경철이 아버지가 엽총으로 멧돼지를 잡을 수 있었다. 그날 산에서 잡은 멧돼지는 60킬로였다. 온 동네 사람들이 멧돼지 고기 파티를 하고 있는데 옆의 순철이 아버지가 한 말 하신다. “이놈들아! 멧돼지 맛이 그렇게 좋아! 또 한 번 산에 갔다간 몽둥이맛 보여 주마 얼마나 맛있는지, 산토끼 잡으러 갔다가 인 토끼 잡을 뻔했잖아! 너희 멧돼지 밥 되지 않은 것 다행으로 알아! 하시며 혼을 내주셨다. 얼마 전 마을에서 아저씨를 만나서 막걸리를 대접해 드리면서 그 말씀을 드리니 껄껄 웃으시면서 “네가 벌써 이렇게 나이가 들었느냐? 참 세월도 빠르지? 하시며 나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셨다.
삼 학년이 되자 우리 학교의 20대의 여 선생님께서 발령받아 오셨다. 선생님의 인기는 학교에는 단연“ 짱” 이였다. 선생님께서 우리 반 단임을 맡으셨으니 우리 반은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급이 되었다. 학급 반장이었지만 수줍음을 잘 타고 남의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늘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다. 체육 시간에는 반장인 나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고 나의 주관으로 급우들이 운동 하게 만들었다. 나는 누나 같은 선생님께서 단임으로 계신 것이 좋아서 학교생활이 즐거웠다. 그해 학교에서 학년별 글쓰기 대회가 있었는데 나는 2학년 겨울방학 때 진명 산에서 경험한 “산토끼 사냥과 멧돼지의 추억” 을 글로 썼는데 내가 1등을 하였다. 선생님은 급우들 앞에서 나를 매우 칭찬해 주시며 여러 가지 문학관련 책들을 나에게 읽으라고 주셨다. 학교 안에는 멀리 사시는 선생님들을 위해서 관사가 있었는데 세분의 선생님들이 생활하고 계셨다. 나는 틈만 나면 선생님 댁에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밑반찬을 갖다 드리고 글쓰기 지도를 받았다. 문학에 취미가 있으신 선생님 덕분에 나의 글 실력은 나날이 늘어갔다.
4학년이 된 어느 날 나는 우울한 소식을 접해야 했다. 선생님께서 서울 학교로 전근을 가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많은 사람이 서운하고 안타가워 했지만, 선생님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선생님은 조용히 나를 관사로 불러서 말씀 하셨다. 영호야! 너를 본지도 벌써 1년이 넘었구나? 나도 학교에서 너희하고 선생님 하고 정이 듬뿍 들었는데 떠나기가 싫구나? 너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으니 열심히 노력해서 이다음에 훌륭한 시인이나 수필가가 되길 선생님은 바래! 잘하겠지 하시며 등을 두드려 주셨다. 어린 마음에도 헤어짐이 안타까워서 나는 선생님! 이제 가시면 언제 뵈어요?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관사를 나서는데 선생님께서 교문 밖에까지 나와서 저 멀리서 나를 한동안 쳐다보고 계셨다.
어린 나에게 누나 같은 친근감으로 많은 가르침을 안겨주신 선생님! 선생님의 자상하고 인자한 모습들이 나의 머리를 한동안 맴돌고 있었다. 내가 지금 글을 조금 쓰는 것도 그 당시의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에 대월 초등학교는 아담한 학교였다. 헌 마르바닥인 교실은 학기 초만 되면 장학사의 방문 때문에 들기름과 초를 가지고 걸레로 반들반들하게 닦던 기억이 난다 .
철판과 나무로 지어진 학교 옆으로는 실개천이 흐르고 가을에는 코스모스, 봄에는 봉선화 진달래 수국 민들레 과꽃이 만발한 화단 위에 작은 관사가 있고 한쪽에는 커다란 종이 있어서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을 기능직 아저씨가 울리곤 했는데 언제나 마지막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를 우리는 제일 좋아했다. 지금은 현대식 콘크리트 지붕에 바닥은 시멘트로 지어서 생활하기는 편하지만, 그 옛날의 아기자기함과 정겨운 운치는 사라진 지 오래다. 학교 곁을 지날 때마다 옛 추억에 향수에 젖어들곤 했는데 오늘 운동장에서 졸업식을 하는 후배들의 모습을 보니 그 옛날의 추억의 언덕들이 더욱 새로워진다. 졸업식이 끝나고 배웅하는 선생님과 후배들의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리던 추억의 초등학교 교정 그때의 코흘리개 초딩 학우들과의 만남을 기대해본다. 반세기 세월의 뒤안길에 서서 언제 한번 시간을 내어 초등학교를 방문해 보고 싶다. 지금은 없어진 교실이지만 그때의 그 언덕 아래 소박하게 서 있었던 널빤지 교실에 내 책상에 않아서 초딩 들과의 아련한 추억을 회상해 보고 싶다.
첫댓글 얼마전 친지의 팔순연에 가는길에 어린시절의 초등학교를 지나면서 어린시절을 회상하며쓴글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1.10.07 23:27
흘러간 초등학교 시절 가끔씩 생각납니다.. 살기는 어려웠지만 이웃간의 정이 넘치던 그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이 종종 있어요..^^ 박학재 준비위원장님 !!! 수고 많으셨어요..^^
글 쓰시는 솜씨가 대단하시내요 옥수수 강냉이죽은 서울학교에서도 마찬기였죠 배급받아갖고 한 500m 즘 떨어진 반에 둘이서 들고 가다면 빠께쓰에 윗부분은 굳지요 그러면 살짝 배껴서 먹으면 얼마나 고숩고 맞나던지? (경동53회) ----- 새삼그리워지내요 우리는 이곳이 고향이라 2달에 한번씩 만나요 한4 -5십명씩 만나죠 글 잘읽었습니다 다음에도 계속부탁합니다
어려운 시절 이었지만 흘러간 추억은 너무나 아쉬웁고 그래서 아기자기 하고 재미 있는것 같아요..^^
저는 생각 자체만으로 번지는 미소는...어느날 운동장이 누가 짤라먹은것처럼 손바닥만해진걸보고 세월이 갔음을 ...참말로 어릴때 추억은 잊지못하겠죠???저도 추억으로 갑니다
그만큼 즐거운님도 지나간 추억이 아직도 마음속에 살아 잇는 것 같아요..^^ 그래서 추억은 즐겁고 아쉬움이 남는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