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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Review (2007, 5월) 이순구
우리는 의사소통의 매개체로 표정과 행동을 우선 보이지만, 가장 합리적인 표현방식으로는 언어와 글자를 사용한다. 글자는 언어를 정리한다. 언어에는 형상성이 없다. 또는 아주 많이 내재한다. 그러나 언어의 형상성은 구체적인 특징이 정해져 있지 않다. 과일과 과일즙은 같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나 과일즙에는 과일의 생김새를 떠올리게 하고 그 향기를 간직한다. 그림을 말한다는 것은 아마 이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 글들을 쓰면서, 결국에는 개인의 시각이 드러나겠지만 최대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를 노력하며, 양념이 가미되지 않은 과일즙을 만들고 싶다. 그렇게 찬찬히 그림들을 쉬운 언어로 읽어보고 싶고 다가가고 싶으며, 또 그렇게 지면에 약속을 드려보자.
이 지면에 서술하는 그림읽기의 중심이 되는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창작정신의 참신성과 진보성
2. 지역화단의 문화적 위상성과 세계화단을 넘나드는 진취성
3. 전통에서의 새로움의 발견과 정당한 전통성의 표방
4. 조형형식에서의 표현역영과 기법의 독창성에 의한 개별성과 창의성
5. 대전문화와 조우하는 역동성
6. 인간적 삶과 예술적 인생관
위와 같은 기준아래 전시회의 리뷰를 시작할 것이라는 지침을 세우다.
이천칠 년 오월.
1. 신중덕 전 2007.5.3-5.9 이공갤러리
「생명의 율동 -그 비가시적 의미망」
형상성이 곧 생명성으로 인식한 시대가 있었다. 현재에도 우리사회의 곳곳에 볼 수 있는 이미지에 대한 환상이 바로 여기에 기저를 두고 있다. 거기에 테크놀로지의 활용에 힘입어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환상성'을 유발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작가의 작품에는 춤추듯 떠도는 형상들이 배치되었고, 그것을 떠받치는 베이스에는 모과편에서 시작된 도형들이 겸침과 나열을 반복한다. 바탕을 형성하는 도형들에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한 줄들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줄들은 미세하게 펼쳐진 바탕의 세포들이라 여겨진다.
예로부터 그림에서의 바탕은 많은 기법의 시도들의 대상이 되었으며 「피부」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바탕은 그 자체가 작품으로 끝을 내는 작품들도 있듯 텍스추어로서의 많은 역할을 담당한다. 얇게 칠해도 깊이를 나타내고, 두껍게 칠해도 얇아 보이는 현상이 되기도 하는 효과를 얻는다.
「생명률?The Rhythm of Life」에는 모과편의 도형과 겹침의 바탕에서 그 생명력은 출발한다. 도형의 안과 밖, 밖과 안의 어울림이 비가시적인 울림으로 바탕에 존재한다. 비가시적인 어울림은 춤을 추듯 바탕을 유희한다. 그러나 그 유희는 엄격한 조직망에 잘 직조된 울림으로 우리의 시각에 비춰준다. 그 위에 부드럽게 모호한 형상들이 각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때로는 덩어리로, 또는 부드러운 일루 전으로 재인식하도록 꽃잎과 조각배, 토르소와 새는 그 위를 유영한다. 작가의 이번작품의 전반기가 이러하다면, 후반기의 작품에는 이러한 덩어리와 형상들이 바탕에 녹아 스며드는 자연스러움으로 진행한다. 한편으로 바탕의 어울림에는 전후의 공간을 주고, 훨씬 더 많은 변형된 조각편들은 평면 안에서 이중의 시각을 유발한다.
면과 면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다. 대부분 시각현상에는 주체가 되는 형태에 먼저 집중하는 시각의 주관성이 있다. 반대로 주체이외의 공간은 빈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생명률」에는 이 두 사이의 간격의 역할이 동일하게 작용한다. 이러한 면의 공간구성이 작가가 말하는 '비가시적 의미망'의 구조가 아닐까. 가시적 상태의 혼재에서 나오는 착시적인 이중구조의 의미망은 결국 조형요소에서 전반적 틀을 제시하며 감상자에게 하나의 일률적인 구조로 보이게 된다. 우리의 시각은 그 그물망에 걸리게 되고, 그 사이 새로운 화면의 생명력으로 우리 앞에 '아름답다', '진득하다', '평화롭다' 등의 언어적 표현으로 다가온다.
「생명률?The Rhythm of Life」은 화면 안에서의 자족적인 생명력과 전반적으로 아우러지는 관계에서 획득되어지는 리듬적인 회화의 효과를 끌어낸 전형적인 유채의 화면이 한데 집약된 전시회였다. 면과 면의 조우에 의한 '비가시적 의미망'에 존재하는 생명의 리듬을 다음번에도 한껏 기대해본다.
2. 임미림 전 2007.4.19-4.25 이안 갤러리 「경작」
순수 색면에 관한 작품을 오랜만에 접해보았다. 색면은 곧 경작지의 분할과 분할 속에 나눠진 농작물의 종(種)과 가축의 종류와 같은 의미이다. 예로부터 경작지는 새로운 경험을 갖게 한다. 지형과 날씨와 그 사용 용도에 의해 조성되었던 농경의 기본 유형들은 자연적인 곡선에 따라 형성된 형태를 띠고 있다. 경작은 문화라는 용어와 관계가 있다. 문화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cultural에서 파생한 culture를 번역하면 본래의 뜻은 경작이나 재배였는데 후에 교양 ? 예술 등의 뜻을 가지게 된다. 그도 그럴듯한 것은 자연채취에서 벗어나 구획을 나누어 경작을 한다는 행위는 대지를 대상으로 하나의 창의적 생산 활동의 원천적인 발현이라는 점에서 문화의 발생인 것이다.
면의 분할과 서사적인 이미지 넣기의 그림방식은 고대 이집트의 벽화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벽면에 체계적인 이야기 그림을 넣고자 칸을 구획하고, 화면 전체에 빽빽하게 형상들을 배치하는 유형이다. 칸은 공간의 개별성과 시간의 분절을 나타낸다. 「경작Ⅰ」에서는 단순한 면 분할과 밭갈이 형태를 연상하게 하는 띠들로「경작」을 연상케 하며, 「이야 이야 오!」「부농의 아침」등에서는 섬세한 시각과 평화로운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늘 추상작업에 익숙해 있던 나는 그렇게 면의 분할로 시작을 하면서 조금씩 농장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농장에서 자라는 동물, 식물, 그리고 사람에게 관심이 가고 조심스럽게 그 나이브한 모양을 직설적으로 도입하면서 새로운 회화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라는 고백에서 땅에 대한 애정과 공백에서 찾아낸 '그림 그리기'에 대한 평온한 접근을 읽을 수 있다.
작가로서의 출발은 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요즈음은 많은 수가 대학원까지 학업을 연장하고 대부분 데뷔전을 이때 치르게 된다. 사실 이 시기에는 작가의 본질적인 작품의 경향을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기존 미술계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주목해야한다. 유행적인 시류나 그림외적인 일들에 휩쓸리는 일이 없이 작품의 주관성을 키워나가게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젊은 작가다운 새로움의 발견과 창의적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어야 할 것이다. 학연과 지연에 관계없이 찬사와 비평이 있어야할 것으로 생각되며 아직은 조금은 서툰 부분이 있지만 따듯한 시선이 필요로 할 때이다.
3.주선화 전 2007.5.10-5.16 롯데화랑 「실상과 허상」
젊음에는 의욕이 넘쳐나기도 하지만 또한 삶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스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계속되는 시기이다. 모든 우주는 나로부터 발생하고 나로부터 소멸한다. 때로는 육체와 정신은 별개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의 속에는 샴쌍둥이와 같은 두 개의 구조가 분명히 내제한다. 우리는 태어나서 처음 거울을 보고 느꼈던 나르시스의 첫 장면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점차 의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춘기의 언제쯤에 재인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러한 인식들이 그림으로 구체화된 경우는 많이 있다.
주선화의 그림은 신화적 요소가 아니다. 본인의 겉의 모습과 그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또 하나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동안 꾸준히 갈고닦았을 소묘력을 바탕으로 본인의 인물이 묘사되고, 옆에는 조소의 뼈대와 같은 그물망의 형상이 자리한다. 어느 것이 본질일까? 그림이라는 체계는 모두가 허상이지만 작가는 재현체계에 따른 형상성을 실상으로 내세우고 있다. 전시장에는 형상성에서 튀어나오는 '드로잉 구조'가 시간적 차이를 두고 만들어진 작품도 있었으며, 투명 아크릴판에 선묘된 구조들이 있었다. 긴 파충류의 표피와 같은 작용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것은 세로로 길쭉한 작품들에 관여하여 전시장 공간에 매달려 있었다. 투명한 허상의 표피이다.
작가의 작품들 속에는 인물들의 표정이 돋보였다. 일정한 희로애락의 극대적인 표정은 없고, 그저 직시하거나 감정의 노출이 전혀 보이지 않는 냉철 성을 간직한 점이다. 또한 뒷모습에서 보이는 절제된 감정은 자아를 찾는 젊은 작가로서의 진지한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었다.
색체에서는 흰색과 검정색을 주로 사용되었는데, 색체 사용법에서 흰색에 흰색을 쌓는 기법은 세련미를 더했으나 검은색에서는 일부 매끈한 텍스추어를 살려내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캔버스 안에 나도 모르게 내 모습을 채워나갔다. 이러한 시도는 나와 내안의 또 다른 나의 존재를 따로 분리하여 여러 가지 모습을 화면에 보여주기"위한 주선화의「실상과 허상」은 젊은 작가의 끊임없는 자아 성찰과 그에 따른 삶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일환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성찰을 계기로 그림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이 생성되기를 기대해 본다.
4.유후선 전 2007.5.10-5.16 이공갤러리
'수집'이나 '집적'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현상이다. 우표를 수집하거나 사진을 앨범에 모아 놓는 일 등이 그것이다. 박물관이나 전시관의 형태가 우선은 '집적'을 볼 수 있는 장소이다. 시간의 흐름에 의한 문화현상을 체계적으로 모아놓는 일은 역사를 연결하여 우리 곁에 있도록 하는 일이기도하다. 미술에서의 '집적'형태는 콜라주의 등장으로 직접적인 표현방법이 되었다. 콜라주 방법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계속 반복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기법과 글자의 반복에 의해 보이는 이미지 등 그 기법은 다양하다.
유후선의 그림에는 이러한 '집적'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그녀의 선배 또는 선생의 영향이 있었을 거라는 선입견도 들지만 새롭게 해석했다는 의미에서 진취성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선 대학주변에서 찍어낸 무작위의 사진들을 한장 한장 나열하여 유화로 그려 넣었다. 유화의 색채별 진득한 특성을 살려 서로 호응하며 조화를 이룬다. 또한 벚꽃이나 매화꽃을 대상으로 분절과 중첩의 사진을 이용하여 커다란 풍경을 만들기도 한다.
유후선의 이번 전시에는 2005년 작품부터 나와 있었는데 초기에는 뚜렷한 주변의 영향력이 보였고, 후반기에는 좀 더 다른 경향으로 달라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젠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였음을 생각하며 앞으로 제작될 작품들에 새로운 기대를 해 본다.
마지막으로 좀 다른 이야기. 한국에는 유난히 '대교(大橋)'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 크기에 의해 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닌 그 당시로서의 큰 다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하긴 한국의 다리라는 것이 뚜렷이 만들어진 지금까지 남아있는 몇몇의 유수한 돌다리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징검다리나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새마을' 사업이후 시멘트로 다리를 만들면 대부분 "○○대교(大橋)"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더욱 크고 긴 다리를 보지 못했으며 그러한 기술력이 부재한 탓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런 다리에 가보면 어릴 적 넓디넓게만 느껴지던 초등학교운동장 같이 초라하고 조막 조막하다.
가끔 한국의 미술계를 생각해본다. 화가 스스로 신화성 스토리를 만들고, 서사구조의 개인사를 만드는 자서전적 이야기들을 부담 없이 드러낸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여 과장에 의한 자기광고 시대라 한다 하여도, 과거에 부르짖던 정신세계는 말끔히 땅 끝으로 쏟아져 내린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젠 몇몇의 '대교(大橋)'들에게는 적절한 이름을 지어야하며, 번득이는 예지와 끊임없는 끈기를 내세워 무한히 그림 작품에 전념하는 작가들의 작업실이 많은 그런 미술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그림1] 신중덕,「생명률 ? The Rhythm of Life」72.7×90.9cm, oil on canvas, 2007
[그림2] 신중덕,「생명률 ? The Rhythm of Life」112×291cm, oil on canvas, 2007
[그림7] 유후선,「무제」91×65cm, 2006
[그림8] 유후선,「무제」65×53cm, 2006
[그림]임미림,「맥다날 영감의 농장」160×130cm, 2007
[그림]임미림,「경작Ⅰ」40×40cm#2, 2006
[그림5] 주선화,「실상과 허상」162×60cm, 2007
[그림6] 주선화,「실상과 허상」61×41cm,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