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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박선생행장(嘯皐朴先生行狀) 스승인 박승임(朴承任)의 행장(行狀)이다. |
(嘯皐朴承任先生行狀) 소고 박승임선생 행장
선생(先生)의 성(姓)은 박씨(朴氏)이고,
휘(諱)는 승임(承任)이며,
자(字)는 중보(重甫)이시고,
호(號)는 소고(嘯皐)이시다.
세계(世系)가
전라도(全羅道) 반남(潘南)에서 나왔는데 고려(高麗)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 상충(尙衷)의 후손이고,
조선조(朝鮮朝)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좌의정(左議政) 평도공(平度公) 은(訔)이 바로 공의 6세조(世祖)이시다.
고조(高祖) 휘(諱) 규(葵)는 호조참판(戶曹參判:正3品)이며,
증조(曾祖) 휘(諱) 병균(秉均)은 사온서 영(司醖署令)으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추증(追贈)되셨고,
조(祖)의 휘(諱) 숙(䃞)은 충의위 부사직(忠義衛副司直)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고(考)의 휘(諱) 형(珩)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知事:從2品)에 추증(追贈) 되였는데,
세 분의 증직(贈職)은 모두 선생이 존귀(尊貴)하게 됨으로 내려진 것이다.
참판공(參判公)이 예안(禮安) 김만일(金萬鎰)의 따님에게 장가 들었는데 통례원찬의(通禮院贊儀:正5品)
홍(洪)의 손녀(孫女)이시다.
명(明)나라 정덕(正德) 12년 정축년(丁丑年 중종12, 1517) 11월19일 인시(寅時)에,
선생이 영천군(榮川郡) 두서리(斗西里) 의 집에서 태어났셨다.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빼어나고 특이하였으며 총명과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다.
어린아이 였을 적에 장난하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대인(大人)의 기상(氣像)이 있음을 벌써알고,
뒷날의 성취(成就)를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가정(嘉靖) 병술년(丙戌年 중종21, 1526)에 선생의 나이 열살로 사략(史略)을 읽으셨는데,
은(殷)나라와 주(周)나라의 기록에 이르러 묻기를 무왕(武王)이 이미 천하(天下)를 위하여 포악한 주(紂)를
정벌(征伐)하였다면 어찌하여 은나라의 종실(宗室)인 미자(微子)같은 이를 왕(王)으로 세우지 아니하고,
곧 스스로 그 자리를 차지하였습니까? 하였다.
당시 참판공이 안동(安東) 가구촌(柯丘村)에서 상(喪)을 당하여 상복(喪服)을 입고 있는 중이라서
선생이 백씨(伯氏)인 승인(承仁)과 함께 글을 배웠는데 그 기억하고 외우기를 날마다 충실하게 하며 강독하고 토론하는데
투철하고 뛰어나 너무나 보통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였으므로 온 집안의 기대와 희망이 근소(近小)한데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엄정(嚴庭:아버지)의 끊임없는 교육과 지도가 다른 자식들보다 더욱 증가되었다.
그리고 자부인(慈夫人:어머니) 및 백씨(伯氏) 중씨(仲氏) 또한 모두 경계하고 신칙하는데 법도(法度)가 있었다.
그리하여 가르침을 익히기를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하여 마음은 침착하고 의지는 굳센 기국(器局)으로 성취되였다.
젊어서부터 부박(浮薄)하고 방탕(放蕩)하거나 인격 수양에 보탬이 없는 놀이는 즐기지 않았으며,
동배[제배(儕輩)]들 가운데서 일찍이 재주를 믿고 교만하거나 오만하다는 나무람은 들은 적이 없으셨다.
글을 짖는 솜씨가 일찍이 성취되어 바야흐로 열네 살이였을 적에 향시(鄕試)에 응시하려고 하자,
참판공이 그것을 중지 시켰더니 선생이 아뢰는 글을 지어 외삼촌[구씨(舅氏)]에게 글을 올렸는데 거의 50여 구절이였다.
낙봉(駱峰) 신광한(申光漢)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박 아무개의 시문(詩文)이 고상하게 성취되었는데
어찌 대가(大家)나 선배(先輩)에게 밑돌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여러번 향시에 수석(首席)으로 합격하여 명망과 칭찬이 날마다 드높았다.
나이 스물 네 살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는데,
셋째 형(兄) 승간(承侃)과 함께 급제하였으니 바로 경자년(庚子年 중종35, 1540) 봄이였다.
그 해 4월에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正9品)에 임명 되였다.
3년 뒤인 임인년(壬寅年 중종37, 1542)에 예문관 검열 겸춘추(藝文館檢閱兼春秋)에 임명 되였으며,
계묘년(癸卯年 중종38, 1543) 여름에 대교(待敎:正8品)로 승진하였다가 얼마 뒤에 봉교(奉敎)로 승진하였고,
겨울 10월에 승정원 주서 겸춘추(承政院注書兼春秋:正7品)에 임명 되였다.
그리고 갑진년(甲辰年 중종39,1544) 홍문관 정자 겸 경연전경춘추(弘文館正字兼經筵典經春秋:正9品)로 옮겼다가
이어서 호당(湖堂) 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몇 달이 지나 홍문관 저작 겸 경연 설경 춘추(弘文館著作兼經筵說經春秋:正8品)로 승진 되였다.
당시 어버이 연세가 70세에 가까웠으며 자부인(慈夫人)은 고질병에 걸린지 오래였으므로,
매번 정위(庭圍:어버이가 거처하는 내실)에서 보낸 편지를 보고서 번번이 문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여러 해 동안 벼슬살이 하면서 너무 오래 어버이의 슬하(膝下)를 떠나 있었다.
고향 가까운 고을의 수령이 되어 봉양(奉養)하는 것도 쉽게 이루기가 어려우니 당장이라도 빨리 지방의 교관(敎官)이
되도록 도모하는 것이 낫겠다. 하셨으니,
그 벼슬하면서 진취하기를 서둘지 아니하고 화려하고 높은 관직(官職)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인종[인묘(仁廟)]원년(元年)인 을사년(乙巳年 1545)에 선생이 십점차(十漸箚)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격열하고 절실하여
임금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지만 가을이 되어 갑작스럽게 인종이 승하(昇遐)를 당하게 되였다.
명종(明宗)이 즉위(卽位)하자 원종공신(原從公臣)에 참여하여 한 자급(資級)이 보태지고,
홍문관 박사 겸 경연사경춘추(弘文館博士兼經筵司經春秋:正7품) 에 임명되였으며,
조금지나 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춘추(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春秋:正6品)에 임명되고,
겨울 10월에 이조 좌랑(吏曹左郞:正6品) 으로 임명되였다.
이듬해인 병오년(丙午年 1646) 정월에 명(明)나라 사신에 이르자 선생이 원접사 종사관(遠接使從事官)이 되였는데,
지나가는 길의 정관(정관)에 전혀 시(시)를 지어 써 붙이지 않았으며 비록 더러 시(시)를 지어 주고받는 것이 있다하더라도
일체 널 조각에다 새겨 달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것은 실상 그의 재능을 알리려고 하지 않으려는 것이였다.
여러 고을에서 행자(行資:노자(路資)를 주면 모두 거절하였는데 유독 친한 친구의 강요에 못이겨 옷 한 벌을 받아
자부인(慈夫人)에게 드리면서 말하기를 상관(上官)과 동료(同僚)가 주는 것을 받는 무렵에 모두들 그대로 따르기를 모면히지
못하였으며 혼자서 거절하기도 어렵기에 어버이를 위하여 억지로 이 한가지 물건을 받아 오기는 하였습니다만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이대단합니다. 하였다.
자부인이 나이가 어린 임금을 섬기면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슬하(膝下)를 떠나 멀리서 벼슬살이하면서 언제나 부모(父母)마음을 저의마음으로 삼아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사사로이 서로 왕래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였다.
정미년(丁未年 명종2, 1547) 봄 정월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正6品)으로 옮겼다.
이조(吏曹)에서 당시 동료인 윤춘년(尹春年)을 전관(銓官)으로 추천하므로 선생이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선생이 체직(遞職)되어 떠나자 윤춘년을 대신하게하였다.
5 월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정6품)으로 체직 되었으며 6월에 이조정랑(吏曹正郞:正5品)에 임명 되였다.
그리고 8월에 파직(罷職)되였는데 당시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던 진복창(陳復昌)이 선생의 명망이 정중하다는 것으로,
끌어들여 자기에게 붙따르게 하려는 마음이 대단하여 직접 평상시에 초청한 횟수가 잦았으며 다른 사람들도 간혹 만나 보기를
권하는 자가 많았지만 선생은 마음은 방정하게 행동은 원만하게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지조 지키기를 확실히 하면서
기꺼이 나아가 만나지 아니하였다.
미원(薇院:사간원(司諫院)의 별칭)에 있을 적에 진복창이 대사헌(大司憲)으로 세력이 바야흐로 대단하였는데,
선생이 혼자서 그를 탄핵하고 논박하는 의논을 꺼냈지만 동료들이 따라주지 않으므로 이튿날 사직(辭職)하고 낙향 하였다.
그러자 진복창이 이기(李芑)에게 부탁하여 장차 무거운 형률(刑律)로 조치하게 하였는데,
이원록(李元祿)이 극력 구원하여 파면(罷免)으로 끝나게 하였다.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이 그 사실을 듣고 말하기를 박 아무개의 조심하는 자세를 가지고도 역시 이런 화(禍)를
모면하지 못하는가? 하였다.
무신년(戊申年 명종 3, 1548)10월 내우(內憂:어머니의 상(喪)를 당하고 이듬해인,
기유년(己酉年) 6월에 외우(外憂:아버지의 상(喪)를 당하였으며 신해년(辛亥年 명종6, 1551)에 상복(喪服)을 벗었다.
이해 8월에 현풍현감(玄風縣監)에 임명되였다.
이듬해인(壬子年)과 그 이듬해인 계축년(癸丑年) 사이에 하도(下道)인 경상도(慶尙道)에 전염병이 매우 성하여 백성들이
모두 굶주려 쓰러지는 실정 이였으므로 관찰사(觀察使)가 선생을 진휼도관(賑恤都官)으로 삼자,
선생이 여염(閭閻:민가(民家)의 병든 자와 죽은자의 시체 사이를 드나들면서 마음을 다하여 구제하고
진휼(賑恤)하여 살려낸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토호(土豪:지방의 호족(豪族))들이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하는 것을 꺼려서 거짓말을 퍼트려 인심(人心)을
선동(煽動)하였는데 마침 정언각(鄭彦慤)이 감사(監司)가 되자 그 세력에 의뢰하여 상대방을 기울이고 빠트리려고 하며
형세가 장차 모면하기 어렵게 되였다.
그러나 마침네 공론(公論)에 저지(沮止)를 당하여 정언각도 손을 쓸수 없게 되였고 토호들도 그들의 계책을 행할수 없게 되다.
병진년(丙辰年 명종11, 1556)에 파직 되였다가 이듬해인 정사년(丁巳年) 정월에 직강(直講)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윤원형(尹元衡)이 조정의 요직(要職)에 있으면서 권세를 부림으로 선생이 출입을 끊고 주역(周易)을 읽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6월에 사예 지제교(司藝知製敎)가 되였고 7월에 경상도 재상어사(慶尙道 災傷御使)가 되였다.
이듬해인 무인년(戊寅年) 12월에 풍기군수(豊基郡守)에 임명 괴였는데 군의 재정(財政)이 조잔(凋殘)하고 피폐(疲弊)하기가
가장 심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의 수령(守令)이 되기를 모면하여 회피하려고 하였지만 선생은 싫어하는 기색도 없이,
수레를 타고 출발하도록 명하기를 마치 낙지(樂地)로 부임하는 것 같이 하였다.
조정에서 국사(國事)를 논의하는 재집(宰執)이 말하기를 고을의 부족한 곡식을 전직(前職)수령에게 당연히 징수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선생은 끝내 거기에 대하여 입을 열지 앖으셨다.
그 고을에 부임한 지 몇 달이 되자 재정이 점차로 풍성하게 되였으므로 쌓여 있는 지난날의 관아(官衙)곡식을 축낸 문서를
태워 버렸다.
그리고 행정을 함에 있어서 청렴하게 하고 안정 되게 하였으므로 세속(世俗)에 물든 관리들과는 그 과제(科題)를 달리하였으며,
공무(公務)의 일과(日課)가 끝이 나면 번번이 경전(經傳)을 연구하는 것을 일삼았다.
이듬해인 기미년(己未年)에 겸춘추 편수관(兼春秋編修官)이 되였고 계해년( 명종 18,1563)에 임기가 만료되어 채직되였다.
이듬해인 갑자년(甲子年)에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從4品)에 임명 되였으나 취임하지 아니하였다.
8월에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사은(謝恩)하였으며,
12월에 승문원 판교 겸춘추관 편수관 교서관 판교(承文院判校兼春秋館編修官校書館判校:正3品 당하관)에 임명되였다.
이듬해인 을축년(乙丑年) 8월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승하(昇遐)하자 선생이 국장도감 도청(國葬都監都廳)이 되셨으며,
9월에 절충장군 부호군(折衝將軍副護軍)에 승진 되였고,
10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正3品 당상관)의 자급(資級)에 제수되고 병조참의 지제교(兵曹參議 知製敎)에 임명되였다.
병인년(丙寅年 명종 21,1566) 정월에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正3品)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知製敎兼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正3品)에 임명되였다가 7월에 체직되어 상호군 겸 오위장(上護軍兼五衛將)에 임명 되였다.
10월에 다시 진주목사에 임명되였는데 진주에는 본래 토호(土豪)가 많아 의지할 데 없는 약한 자들의 재물을 서로 빼앗아
챙기는 실정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토호중 한 사람이 소장(訴狀)을 올리기를 아무개가 잇달아 돼지와 호랑이를 잡아 관청에 바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그 사람을 중법(重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하는 것이였다.
선생이 그것이 자신을 시험하는 의도임을 알고 바로 그 소장에 대한 제사(題辭:관부(官府)의 판결(判決)이나 지령(指令)를
내리기를,
지리산(智異山)의 날 짐승과 길 짐승에 대하여 관아에서 그 숫자를 장부에 적어 가까운 시일에 자세하게 사열(査閱)할 것이다.
만일 본래의 숫자에서 줄어든 경우는 당장 징수할 터이니 우선 물러나서 기다리도록 하라. 하면서,
법을 어기는 사례가 있으면 단호하게 조처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이로부터 토호의 무리들이 스스로 못된 짓을 중지하고
마침내는 감히 세력을 부리지 못했다.
융경(隆慶)원년(元年)인 정묘년(丁卯年 명종22,1567)에 명나라 황제의 등극(登極)을 알리는 사신이 이르자
선생이 제술관(製述官)으로 부름을 받아 나갔으며 융경 2년인 무진년(명종22, 1568)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기사년(己巳年)여름에 겸오위장(兼五衛將)이 되셨으며,
8월에 동지부사(同知府事)로 북경(北京)에 갔으며 이듬해인 경오년(庚午年) 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보다 먼저 명나라에서 홍려경(鴻臚卿)을 음관(蔭官)으로 보임(補任)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사신들이 단지
예부(禮部)에서만 상견례(相見禮)가 있었고,
홍려시(鴻臚寺)의 경우는 그런 의식이 없었다.
그런데 융경황제(隆慶皇帝)가 홍려시는 예모(禮貌)를 관장하는 곳이라고 하여 바로 문관(文官)을 홍려경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니 홍려경에 대한 예의(禮儀)는 달연히 변통(變通)하는 바가 있어야 하는데도 사신(使臣)이 옛날의 전례대로 시행하자
홍려경이 상견례를 하지 않는데 대하여 노여워 해서 우리나라 사신의 반열(班列) 차례를 낮추어 여러 잡류(雜類)들의
아레에다 배치(配置)하였는데도 사신 일행들이 머리를 숙이고 그 낮춰진 반열에 나아갔으면서 즉시분변하여 바로잡지
못하고 돌아 왔었다.
이 때에 이르러 선생이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오가면서 진언(陳言)하고 분변하게 하며 심지어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하여
마침내 회복시키고 바로잡게 되였는데 서장관(書狀官)이 사건을 생략해 버리고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상(聖上)께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중국 조정의 조보(朝報)를 보고서 조선(朝鮮)의 배신(陪臣)이 실례(失禮)하여 반열(班列)의 차례를
뛰어넘었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이른 연후에야 성상께서 그 연유를 하문하자 전후(前後)의 역관들이 모두 뒤에 간 사신의
실수라고 모호하게 변명을 하였지만 성상의 감식(鑑識)으로 환히 알고서 일월(日月)의 선후(先後)를 근거하여 드디어
앞서간 사신 일행을 처벌하였는데 선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스스로 변명하는 말이 없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 아량에 감복(感服) 하였다.
그때 예부에 올린 글은 지금 선조실록(宣朝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5월에 승정원 우승지(承政院右承旨)에 임명되고 10월에 병조참의(兵曹參議:正3品 당상관)가 되었으며,
융경 5년인 신미년(辛未年 선조4, 1571)에 외직(外職)으로 나아가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였다가
이듬해인 임신년(壬申年) 9월에 도로 좌승지(左承旨) 에 임명되였다.
그러다가 만력(萬曆) 원년인 계유년(癸酉年 선조6, 1573) 정월에 도승지(都承旨)에 승진하여,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知製敎 兼 經筵 參贊官) 춘추관 편수관(春秋官 編修官) 예문관 직제학(禮文官 直提學)
상서원 정(尙瑞院 正)이 되였다.
9월에 병조참지(兵曹參知:正3品)가 되였으며 만력 2년인 갑술년(甲戌年 선조7, 1574)에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였다.
부내(府內)에 있는 집경전(集慶殿)에 조선태조(朝鮮太祖)의 영정(影禎)을 봉안(奉安)해 놓았는데,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보고 싶으면 번번이 집경전의 문을 여는 잘못된 풍습이 이미 이루어 졌으므로,
선생이 그 무람없이 구는 것을 미워하여 바로 영(令)을 내려 봉심(奉審)하는 외에는 사사로이 열어 볼 수 없도록
법식(法式)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신라(新羅) 때의 원유(苑囿)로 씨앗 20 여곡(斛)을 신을 수 있는 땅이 지금 채소밭이 되어 있는데,
옛날부터 40결(結)을 가진 민부(民夫:민간의 노동자)에게는 부역(賦役)을 면제하여 경작하고 김을 매게 하였으므로
그 체소와 과일이 흔하게 써도 다 함이 없었다.
그래서 선생이 민부와 채소밭을 줄이고 그 나머지를,
둔전(屯田)으로만들게 하니 주민들이 그제야 온편하게 여겼다.
만력 3년인 을해년(乙亥年, 1575) 7월에 정부인(貞夫人)의 상(喪)을 당하여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얼마 있다가 파직을 당하였으며 만력 4년인 병자년(丙子年)에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였다가 체직(遞職)을 당하였다.
10월에 병조 참지로 조정에 나아가다가 길에서 임금이 부르는 전지를 받았는데 바로 도승지에 임명하는 내용이였다.
12월에 사은(謝恩)하였으며 만력 5년인 정축년(丁丑년)에 강화부사(江華府使)에 임명되고,
6년인 무인년(戊寅년) 3월에 자급(資級)이 강등되여 통훈대부(通訓大夫:正3品 당하관)가 되였는데,
그것은 을사년(乙巳年 인종1, 1545)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서 삭제되였기 때문이였다.
9월에 다시 통정대부(通政大夫:正3品 당상관)로 승급되고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임명되였는데,
서원(書院)과 모재 김선생(慕齋金先生)의 사당[묘(廟)]을 창건(創建) 하였다.
강(江)가에 진상(進上)하는 마[서여(薯蕷)]의 늪이 매우 넓고 큰 곳이 있었는데 전임(前任) 목사(牧使)가 그 늪 가운데를
경작하게 하여 일백여 곡(斛)을 수확하여 관용(官用)에 더하고 보충한 것이 가장 많았었다.
그러나 선생은 진상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늪을 만든 것은 저절로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니 만약 그 보탬이 되는 것만 이롭게여겨
해마다 점차로 경작하고 개간한다면 그 늪의 기능은 장차 다할 것이기에 의리로 보아 불가하다고 여기고 즉시 영(令)을 내려
나무를 심게하여 쟁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시골의 주민 가운데 곡식 수백여 곡을 저축해 두고서 그의 어미에게 야박하게 굴며 전혀 돌보거나 봉양하지 않으므로
선생이 온 고을의 부로(父老)를 초청하고는 친히 그 집에 가서 그의 창고를 봉(封)하여 버리고 그 사람을 결박하여
뜰로 끌어내반복(反覆)하여 경계하고 채칙질 하였는데 해가 지고서야 그만 두었더니,
그 주민이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물러났는데 이로부터 제어미 섬기기를 지극한 효성으로 하였다.
어사 정이주(御史 鄭以周)가 백성을 잘 다스린 공적(功績)이 제일이라고 아뢰자 상(賞)을 내리고 전지(傳旨)에 이르기를,
그대의 행정(行政)이 간결하고 세금을 박(薄)하게 부과하여 진휼(賑恤)하기를 극진히하여 관할하는 온 지경이 기뻐하니
내가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하였다.
만력 8년인 경진년(庚辰年)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만력 9년인 신사년(辛巳年 1581)에 춘천부사(春川府使)에 임명되였고,
만력 10년인 임오년(壬午年) 정월에 병(病)으로 파직 더였다가 10월에 공조참의(工曹參議:正3品 당상관)가 되였으며,
황자(皇子)의 탄강(誕降)을 알리는 명나라 사신이 이르자 선생이 제술관(製述官:正3品 당상관)으로 부름을 받아 왔으며,
만력 11년인 계미년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 되었다가 8월에 좌천(左遷)되어 창원부사(昌原府使)가 되였다.
선생이 비록 좌천되여 내쫓겼으나 조금도 원망하거나 울적해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관무(官務)를
처리하면서 부지런히 힘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간혹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는 경우가 있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임금의 은혜가 한이 없다. 고 하였다.
문생 소자(門生小子)가 조용히 질문히기를,
지금의 조정에 드러나게 피차(彼此)의 당(黨)이 나뉘어져 있는데 모르기는 합니다만 누가 옳고 누가 그릅니까?
그리고 또 이이(李珥)의 사람됨이 과연 어떤 인물입니까? 하였더니, 선생께서 잠자코 계시면서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억지로 청원하는데 이르러서는 말씀하기를 조정의 일은 초야(草野)에 있는 후생(後生)들이 미리 알 바가 아니다.
더구나 옳고 그른 것은 한결같이 후생에게 말할 수 없으니 지금 늙은이[노자(老子)]의 이야기를 듣고 비록 더러는 늙은이의
옳고 그름을 가지고 너희의 옳고 그름으로 삼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뒷날 별도로 너희 무리의 옳고 그름이 생겨나
나의 오늘날 옳다 그르다한 것도 비웃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느냐?
그러니 이는 진실로 너희 무리의 학업(學業)이 부지런히 진취(進就)하여 각각 마음의 눈을 밝혀서 스스로 그 옳고 그름을
결정하여 늙은 나의 오늘날의 일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하시면서. 끝내 어느 쪽이 검고 어느쪽이 희다고 하지 않으셨다.
만력 13년인 을유년(乙酉年 선조18, 1585)에 용서를 받아 체직되어 돌아왔다.
이듬해 만력 14년인 병술년(丙戌年)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심기(心氣)가 불편하여 술을 가져 오라고 하여 큰 잔으로 마시고는
이어서 뜰 가운데를 이리저리 거닐면서 연세가 많은데 대한 한탄이 있는듯 하였는데 평소에는 그렇게 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얼굴빛이 붉었으므로 별로 염려할 것은 없었다.
수삼일(數三日)이 지나자 고질병[심고(沈痼)]이 점점 심해졌다.
문생(門生)과 자제(子弟)가 문병(問病)을 하면 대답하기를 울적한 마음이 쌓인 지 이미 오래였는데 이제야 드러나는 것이다.
어떻게 구료(救療)할 수 있겠는가? 하시더니,
6일 인시(寅時) 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집안 일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으셨으니,
향수(享壽)가 70 이셨다.
5월 초3일((丙戌)에 군(郡)의 동쪽 15리(里)지점인 임구촌(林丘村) 태좌진향(兌坐震向:서쪽을 등을진 동쪽 방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10월에 정부인(貞夫人) 예천권씨(醴泉權氏)의 묘소를 옮겨다 부장(祔葬)하였다.
권씨는 통훈대부(通訓大夫)사헌부집의(司憲部執義)오기(五紀)의 따님이며 수헌선생(睡軒先生)오복(五福)이 중부(仲父)이다.
조고(祖考)는 중훈대부(中訓大夫)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인 선(善)이고,
증조(曾祖)는 부사직 겸 사헌부감찰(副司直兼司憲府監察)인 유손(幼孫)이다.
그리고 야로(冶爐)의 명망이 있는 성씨(姓氏)인 생원(生員) 송석충(宋碩忠)은 바로 정부인의 외조부[비지고(妣之考)]이다.
계미년(癸未年 중종18, 1523) 8월 8일 에 부인이 태어나서 을해년(乙亥年 선조 8, 1575) 7월 10일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때의 연세가 53세로 선생보다 일곱 살이 적었으며 선생보다 10 년 먼저 돌아가셨다.
그분의 행적(行跡)을 살펴보면 유년기(幼年期)에는 혼자 되신 어머니를 받들며 규중(閨中)에서 효녀(孝女)로 알려졌고,
출가(출가)해서는 시부모[구고(舅姑)]를 섬김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무슨 물건이든지 반드시 갖다 바쳤으며,
무슨 일을 만나게되면 번번이 아뢰어 일상생활에서 하는 일이 옛날의 여훈(女訓)과 가만히 부합되지 않음이 없으셨다.
그리고 선생을 받듦에 있어서는 순종만 있고 어김은 없었다.
집안을 꾸려가는 계책이 짜여지지 못하고 어설퍼서 항상 식량이 떨어짐을 걱정하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에 들어내지 않아
선생이 모르도록 하였으며 모든 음식과 의복을 갖추어 제공하는데는 오로지 선생에게만 힘을 다하여 마치 여유가 있는 듯
하였지만 스스로 자신의 몸을 가꾸는데는 너무나 박(薄)하게하여 심지어 의상(衣裳)이 겨우 한두 벌이 있는 정도였으며,
비단 같은 화려한 장식은 정혀 없었다.
그리거 성품(性稟)이 극도로 자상(慈詳)하였으며 집안의 부녀자(婦女子) 단속은 언제나 조용하고 엄숙하게 하도록 힘 쓰셨고
규범(規範)을 준수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종하거나 거만하게 굴지 못하게 하였으며 어루만지며 양육하기는 비록
후(厚) 하게 하였지만 그들의 실수를 저질렀을 적에는 일찍부터 용서하지 않으셨다.
상사(喪事)를 당하면 반드시 몹시 슬퍼함이 예의(禮儀)에 지나칠 정도였다.
모부인(母夫人)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연세가 거의 40세가 가까워 젊은 장년(壯年) 같지 않았는대도 오히려 정(情)에 따라
상주(喪主)노릇을 하다가생명을 손상시키게 됨을 모면하지 못하게 되여 고질(痼疾)을 이루게되어 마침내 세상을 떠나셨다.
세상을 떠나자 염습(斂襲)할 도구가 없어 자녀(子女)의 옷을 거두어다 썼으니 그 지조가 굳고 마음이 맑은 자질과
효도하고 공경하는 덕망과 대범하고 아담한 아름다움은 실제로 선생의 배필(配匹)로서의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였으니
선생께서 집안에 물려주신 것은 역시 상상할 만하다.
장자(長子) 어(漁)는 일찍 죽었고 의금부 도사(義禁莩事)인 녹(漉)이 그 다음이며 그리고 진사(進士)인 조(澡)가
그 다음인데 선생보다 1년 먼저 죽었다.
측실(側室)의 아들 (漑)는 늦게 때어났다.
장녀(長女)는 충의위(忠義衛) 이복원(李復元)에게 출가(出家)하였고 차녀(次女)는 별좌(別坐)인 전극례(田克禮)에게 출가했다.
녹(漉)은 생원(生員) 허사겸(許士兼)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두었는데,
남(男)은 회무(檜茂), 종무(樅茂)는 진사이고 찰방(察訪)인 김기선(金幾善)은 바로 그의 사위이다.
조(澡)는 충의위 신란(申灤)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는대,
남(男)은 재무(梓茂)이고, 딸은 이경윤(李慶胤) 에게 출가하였다.
이복원은 5남 3녀를 두었는데참의(參議)인 지(遲)와 준(遵),적(適),형(逈)이며 건(建)은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하였다.
딸은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된 고종후(高從厚)와 학생(學生) 이근곤(李根坤)과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인
김극전(金克銓)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전극례는 두 딸을 두었는데 장녀는 사인(士人) 홍처약(洪處約)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무과 선전관(宣傳官) 김기선(金起先)에게 출가하였다.
선생은 풍채가 장대하고 도량이 넓으며 준엄하고 침묵하며 말수가 적고 기쁜 기색이나 노여워하는 기색이
얼굴에 들어나지 않으셨다.
그래서 일찍이 빠른 말씀이나 갑작스런 행동이 있지 않았으며 항상 조용히 앉아 자신에게 질병(疾病)이 있지 않으면
조금도 게을리 하거나 태만하게 하는 모습이 없으셨다.
그러므로 바라보면 염연(恬然)하고 의젓하지만 다가가서 보면 온화(溫和)한 기상이 풍겨 나왔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 넓은 아량을 엿보지 못하였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청직(淸職)과 현직(顯職)에서 차례로 드날리면서도 교유(交遊)를 함부로 하지 않으셨고,
논의(論議)도 경솔하게 하지 않으셨으므로 한 시개의 인물(人物)의 우열(優劣)과 고하(高下)를 품평(品評)하는데
첫번째로 지목하여 명성(名聲)이 빛이 나고 의지하며 소망함이 높고 정중하였다.
그러나 뜻이 경솔하거나 들뜬것을 싫어하여 자취를 감추는 일을 숭상하였다.
처음에 활쏘기하는 시험에서 뽑힌 것 때문에 활과 화살을 다루는 일에 종사(從事)하게 됨을 면하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벼슬살이에 종사하였다가 얼마 지나서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활을 잡지 않는것 처럼 벼슬에서 물러났다.
평생 동안 특별하게 즐기거나 좋아하는 것이 없으셨고 오직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이 떠날 때가 없었으며,
책이라는 책은 열람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그 중에서고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어류(朱子語類) 및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여러가지 서책과 통감강목(通鑑綱目) 등에 가장 힘을 많이 쓰셨으며 논어(論語)에는 더욱 마음을 가라앉혀 부지런히 읽기를
만족해 하지 앖으셨다.
그리고 만일 그 사이 여러 서책에서 의심이 나거나 구애되었던 곳에서 이해를 하게 되면 번번이 기록을 해 두셨다.
그래서 일찍이 퇴계 이선생(退溪李先生)에게 직접 대면(對面)해서 질정(質正)하여 명백하게 이해한 것이 많으셨다.
만년(晩年)에 이르러 모아서 저술(著述)한 것이 두 가지 있었으니 강목심법(綱目心法)과 공문심법(孔門心法)이다.
특히 주역(周易)에 정통(精通)하고 어린 아이나 몽매한 사람을 일깨우는데 투철(透徹)하여 간혹 퇴계선생의 저술 가운대서
의문으로 전해지는 내용을 가지고 와서 질문하면 명쾌하게 분변하고 해석하지 않음이 없어 아무리 초학(初學)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의혹이 확 풀리게 하셨다.
그리고 일월성신(日月星辰)에 관한 천문학(天文學)은 정력(精力)을 쏟지 않은 부분인데도 남목래 깨달아 일찍이
서재(書齋)의 상면(上面)에다 천문도(天文圖)를 마치 하늘이 덮고있는 형상처럼 붙혀두고 우러러 관찰하기도 하며 더러는
가끔 밤을 틈타 혼자 밖으로 나가셔서 까마득한 천체의 현상을 가리키기도 하고 시절(時節)이 옮겨가는 것을 징험하며 살폈다.
그리고 그 곱하거나 나누며 더하고 빼는 등의 계산하는 법은 비록 옛날의 신묘(神妙)하다고 이름이 난 사람아라 하더라도
더 뛰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다가 의례경전(儀禮經傳)을 보고난 뒤 부터는 오로지하여 거기에 대한 공부에 착수하요 그 절문(節文)과 의칙(儀則)을
연구할 뿐만이 아니고 반드시 자신이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셨다.
그리고는 매번 회재(晦齋) 퇴계(退溪) 두 현인(賢人)의 학문을 칭송하고 감탄하며 이어서 회재의 기질(氣質)은
정명도(程明道)와 같고 퇴계의 기질은 정이천(程伊川) 과 같다고 감탄하면서 스스로는 일찍부터 벼슬살이 하느라 진실된
학문에 관한 사업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을 한탄하였다.
집안에서 일상생활을 할 적에는 효도와 우애가 순수하고 지극하여 새벽이면 부모님의 밤사이 안부를 여쭙고 저녁이면
이부자리를 깔아드리는 등의 자식으로서 해야 할 직분을 어렸을 적부터 혹시 조금이라도 게을리 함이 없었다.
그런데 중씨(仲氏)가 지방의 수령(守令)이 되자 항상 경계하며 넌지시 말씀하기를,
어버이를 위하여 지방의 수령이 되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어떻게 청렴이 손상되는 것을 따지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선조(先祖)를 받드는 정성은 늙어서도 더욱 돈독하였으며 심지어 가옥(家屋)이 훼손되거나 무너진 곳이 있으면
반드시 제때에 수선하고 다듬으며 말씀하시기를 선인(先人)이 남겨주신 집이 무너진 것을 차마 볼수 없다. 고, 하였다.
백씨(伯氏)가 일찍이 세상을 떠났기에 과부(寡婦)가 된 형수(兄嫂)가 가난하게 살면서도 자녀(子女)들의 장가 보내고
시집 보내는 일을 모두 제 시기를 놓지지 않았는데 선생께서 돕고 보호한 힘이 아님이 없었다.
그리고 계씨(季氏)가 비교할 데 없을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였는데 선생이 우애하는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돌보고
구휼(救恤)하였으며 젊었을 적부터 늙어서 까지 그를 보기를 슬하(膝下)의 어린 자녀와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 자제(子弟)를 대우(待遇)함에 있어 매우 지나치게 감독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거만하거나 버릇이 없는데는
이르도록 하지 않았으며 늘 사소한 잘못은 보더라도 즉시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시고 천천히 훈계(訓戒)하여 그가 알아듣고
깨달으며 뉘우치게 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진실로 대단한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엄한 말씀으로 호되게 꾸짖으시며 마치 다시는 용납하지 않을 것같이 하셨다.
그리고 후진(後進)을 가르치시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시어 아무리 겨우 갑을(甲乙)을 분변할 정도인 사람이라도 책을 끼고
배우러 오면 정성을 다하여 교육(敎育)하지 않은 적이 없으셨다.
그러다가 그들 중에서 재주가 성취될 만한 자가 있으면 장려하고 권면하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반드시 예(禮)로서 인도하여
자기의 처신과 일을 행하며 남을 대우하고 사물을 접(接)함에 반드시 마음을 성실(誠實)한데 두고 조금도 거짓으로
꾸미는 일이 없도록 하셨다.
그러다가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수령이 됨에 이르러서는 또 충직(忠直)하며 용서하는 것으로 주장을 삼자 위엄스럽게
하지 않았는데도 엄정해져 아전과 주민들이 두려워 하면서도 아껴 주었기에 혁혁(赫赫)한 명성이 없었는데도,
체직되어 떠난 뒤에 사모하는 사람이 많게 되였다.
그리고 구제하고 구휼하는 밑천을 반드시 가난한 친구와 곤궁한 친족에게 우선했으며 중앙의 요직에있는 재상[재집(宰執)]이
청구하는 바가 있어도 조금도 생각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비난과 칭찬이 분분하였으며 사람들이 간혹 그의 고루하고
막힌 것을 경계하면 웃어 넘길 뿐이였다.
그리고 주민들 가운데 토호(土豪)로 교활하게 굴며 권세에 기대고 있는 자에 대해서는 또한 조금도 용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실정과 다른비난을 불러들이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은 움직일 수 없었다.
또 음식(음식)은 간단하게 하셨으니 정하고 거칠거나 맛나고 맛없는 것을 묻지않고 오직 제공한 대로 드셨으며,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도록 하지 않으셨고 일찍이 그 맛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않으면서 비록 입에 맞지 않더라도
굶주림을 모면하는 정도로 드시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셨다.
그리고 늘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는 음식이 너무 사치스러워 공사(公私)를 허비하게 되니 매우 한탄스럽다. 고 하셨다.
그리고 집안 살림의 경영(經營)에 대해서는 생각을 끊으시고 간혹 벼슬살이 하실 때나 간혹 고향으로 내려가실 때
거처하는 곳에 따라 길거(拮据:많이 긁어 모으려고 부지런히 일함)하는 계획은 전혀 없었으므로 시골의 집은 울타리가
허물어져 쓸쓸하게 되였고 서울의 거처는 셋방살이로 옮겨다니느라 일정한 곳이 없으셨다.
그래서 직질(職秩)이 높은데 이르러 녹봉(祿俸)이 비록 쓰고 남는 것이 있어도 끝내 기꺼이 계책을 마련하거나 경영하지
아니하고 서책을 구입하거나 더러는 자제(子弟)들에게 나누어 줘버렸다.
그러다가 늙어서 벼슬을 그만 두고 물러남에 이르러 집이 군성(郡城)에 가깝다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항상 반곡(蟠谷)의
하한정(夏寒亭)에서 거처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선생의 아들 녹이 지은 것으로 하한정 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선생이시다.
늘 조용하게 기거(起居)하시면서 좌우(左右)에 도서(圖書)를 붙여 두시고 남의 장점과 단점을 논(論)하지 않으셨고,
집안 사람의 생산(生産)을 돌보지 않으셨으며 시골의 후생(後生)들이 찾아오면 젊거나 어른이거나 따지지 않으시고
반드시 예모(禮貌)를 갖추셨으며 비록 더러 거스르고 업신여기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일찍이 그와 계교(計較)하지 않고
또 일찍이 마음에 두지 않으시다가 그가 스스로 뉘우치고 행동을 고치는데 이르러서는 그를 만나면 더욱 곡진하게 대해 주셨다.
젊어서부터 문장(文章)을 잘 하셔서 흥취(興趣)를 타고 붓을 잡게 되면 물이 흐르듯 도도(滔滔)하게 다함이 없어 마치 하늘이
도와주듯 신명(神明)이 도와주듯 하여 비유하건데 마치 잔잔한 물결과 위태로운 물결이 치렁치렁하게 출렁이면서
용솟음 치기기도 하며 아득하게 연속되어 그 끝이 어딘가를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진귀(珍貴)한 물고기와 괴상한 파충류가 한없이 넓은 물 속에서 층층이 생겨나고 겹겹이 나타나서 엄폐하려고
하여도 엄폐할 수가 없을 정도여서 우주(宇宙)에 빛이 나고 금석(金石)에 운치(韻致)가 났지만 그 마음속에 있는 한없는
취미는 실제로 이보다 더욱 더 뛰어났다.
그러나 중년(中年) 이후로는 시(詩) 짓기를 즐겨하지 않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시(詩)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뜨고 경박한데
이르도록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절대로 오로지 일삼아 하는 것은 불가하다. 고, 하셨다.
그래서 그 제술(製述)한 바가 비명(碑銘), 묘지(墓誌), 기문(記文), 서문(序文)에 지나지 않았으며,
당시의 이름난 부류들이 청원한 것을 거기에 응한 것일 뿐이였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그의 선대(先代)의 비명을 청원하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오늘날 글 잘하는 문장의 솜씨로
산소를 빛나게 하여 후세(後世)에 전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이로는 박 아무개 만한 이가 없다.
내가 나의 어버이를 위하여 비문(碑文)을 구하려는데 이 사람을 버려두고 누구에게 구하겠는가? 하였으니,
선생이 문장의 대가 (大家)에게 정중한 대우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그리고 항상 스스로 글씨 쓰는데 서툴다고 여겨 그리 대단하지 않는 편지라도 반드시 해정(楷正)하게 쓰셨으며,
언제나
동명(東銘)과 서명(西銘)을 펼쳐 놓고 보시면서 그 글자의 체(體)를 익히셨는데 늙어서도 그만 두지 않으셨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 그 책상과 함(函)을 보았더니 모두 글자를 익히느라 휴지(休紙)에 쓰신 유필(遺筆)들이였으니
여기서도 역시 그의 독실한 의지를 볼 수 있었다.
선생께서 원래 군(郡)의 동쪽에 있는 집에 사셨는데 뒤에는 소나무 동산이 있었으며 동산 가운대는 깍아지른 듯한
산기슭이 있었으므로 일찍이 아침 저녁으로 오르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무릇 근심스럽거나 즐겁거나 슬프거나 기쁨이 마음으로 느껴질 때면 번번이 하늘을 쳐다보며 천천히 휘파람을
불어 소리가 나면 멈추는 것이 바로 그 본래의 성격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호(號)를 소고(嘯皐)라고 하였다.
아아!!
선생의 학(學),
선생의 글(文),
선생의 덕(德),
선생의 도량이여!!
천학비재한 소자가 경솔히 입을 놀리게 되였음은 선생의 백씨(伯氏),
중씨(仲氏) 및 문인(門人) 과 자제(子弟)가 기록한 내용을 가지고 차례대로 서술하여 대인(大人),
선생(先生)에게 나아가 만에 하나라도 질정(質正)하는 작은 자료로 삼으려 한다.
[호당(湖堂:독서당(讀書堂)을 달리 부르느 이름.
독서당은 조선조 4대 세종(世宗)이 장의사(藏義寺)를 집현전(集賢殿)의 제신(諸臣)에게 내어 주어
독서하도록 명하면서 붙인 이름.
9 대 성종(成宗)이 독서당을 용산(龍山)으로 옮겨 세우면서 호당이라고 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시대 문관(文官) 중에 학문이 뛰어난 사람에게 휴가를 주어오로지 학업을 닦게한 제도.]
[진휼(賑恤:흉년(凶年)에 곤궁(困窮)한 백성(百姓)을 구원(救援)하여 도와줌. 진구(賑救).]
[홍려시(鴻臚寺:중국 관아의 이름. 외국(外國)에 관한 사무 곧 조공(朝貢) 내빙(來聘)에 관한 일을 취급하였음.]
[둔전(屯田: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軍糧)이나 관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경작하는 전지(田地).
국둔전(國屯田),군둔전(軍屯田), 관둔전(官屯田), 궁둔전(宮屯田)의 구별이 있음.]
[동명(東銘:송(宋)나라 때 유학자(儒學者) 장재(張載)가 그의 학당(學堂) 동쪽 문에다 써 붙인 명(銘).
내용이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한다는 정평이 나있음.]
[서명(西銘:송(宋)나라 때 유학자(儒學者) 장재(張載)가 그의 학당 서쪽 문에다 써 붙인 명(銘).
내용이 미련함을 깨우치게 한다는 정평이 나있음.]
<<13세손 김태동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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