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를 날리며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아가1:12-14)
구원받은 자들의 예배는 왕을 모신 어전 회의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왕 앞에 뵈옵는, 왕을 면대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 가정적으로 말한다면 내외간이 한 식탁에서 하는 식사에 비길 수도 있다.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의 말은 주님 세상에 계실 때에 어떤 여성도가 주님의 몸에 기름을 부어 그 연석에 향기가 가득하였던 일에서 응하였다.(마26:6-13, 막14:3-9, 눅7:36-50, 요12:1-8)
오늘 우리 예배에 있어 우리 주, 우리 왕 앞에서 그를 뵈옵고 그 말씀을 받는다. 그 받은 사죄의 은총에 감격한 속죄 받은 자의 그 진지한 태도, 자세, 우리 주님께 흐뭇한 향기가 되어 질 것이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10:39-40) 주님은 마리아의 말씀 듣는 그 자세를 향기롭게 받으셨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2) 마리아의 그 향기는 실로 왕의 상에 날리는 향기였다. 오늘 우리의 찬송, 기도, 말씀 듣는 자세에 있어 주님 말씀대로 빼앗기지 아니하는 그 향기를 날려야 할 것이다.
구약에 벌써 신랑, 신부의 그 서로의 흠향하던 향기가 신약에 와서 여성도의 한 일에서 나타났거니와 오늘 우리의 여러 모임에서 주님 맡으시기에 흡족한 향기를 드리어 만족하련만 어떤 때에는 몸은 모임에 참예하였지만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387장 1절)의 찬송가 가사 대로 그 마음은 멀리 떠다니는 양상이 단상에서 목사의 눈에도 심정에도 느껴진다면 우리 주님께서 그 예배를 향기로 흠향하실까, 자못 민망한 일이 있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그 여성도의 한 일을 배워 본받아 향기를 날리어야 할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이는 성도로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모습으로 나타남이다. 몰약은 썩지 않게 시체에 넣는 약품이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드린 예물 가운데 몰약이 있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십자가에 희생하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그 몸이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라 하심은 십자가 그 몰약 향주머니를 품에 품고 사는 일이기도 하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439장 후렴)의 찬송도 때로 부르거니와 나 위하여 죽으심으로 내 죄를 속하신 그 몰약의 향기를 나는 품에 주 앞에 살아야 할 것이다. 말로만 십자가를 부를 것이 아니라 그 희생의 향주머니를 내 품에 품고 산다. 언제나 그 향기를 맡으며 삶을 말함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포도원은 교회의 상징이다. 신부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인 포도 동산에서 자생한 고벨화 송이로 향기를 날리는 꽃송이라고 비유한다. 한 꽃송이 한 송이의 그 향기는 온 포도원에 향기를 풍긴다. 우리 성도들은 내 교회에서 고벨화 송이 같이 향기가 날려질 때 우리 신랑의 그 흐뭇함은 지극한 것이다.
교회에 출입하는 자세며 앉아서 드리는 예배와 그 찬송이 그 기도가 그 말씀을 경청함에 있어 고벨화 송이 같이 덕이 있다. 향기가 있다면 과연 초신자에게 크나큰 감화를 줄 수 있으나 향기가 없다면 남에게 덕을 끼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분량에 차기까지 성도들 서로의 도움이 고벨화 송이의 향기로 보아 마땅하다.
“왕에게 향기를 풍겨 드리자. 나도 향기를!”
“몰약 향주머니를 지니고 십자가의 향기를 맡으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