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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면은 일월산의 지맥이 서진하고 강물이 북방으로 역류하고 있는 특색을 띄고 있다. 산세가 오묘하게 군립하고 있어 풍수지리상 봉화 8대 명산이 재산에 있다는 선인들의 예언이 있다고 전한다. 재산면은 옛날에 덕산부곡이라 명명되어 왔는데 고려 26대 충선왕의 딸인 경화옹주의 시댁이 이곳에 있다는 이유로 재산현으로 승격시켰으나 현감은 배치하지 않았다. 안동부의 관할로 내려오다가 1895년 한말 행정구역 개편시 봉화현에 편입되었다. 당시의 관할구역은 현재의 재산면과 명호면의 북곡, 고계의 2개이동까지 재산면현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한일합방 후 전국의 행정구역 개편시 북곡과 고계리를 명호면에 편입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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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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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내골 : 옛날 이 마을에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마을 앞으로 냇물이 흐른다고 하여 대내골이라 불렀으며 지금도 마을 뒷산에는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 이 마을은 당초 坡平尹氏(파평윤씨)가 개척하여 한때는 20여 가구가 살았으나 점차 이농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3가구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깊고 울창한 숲 사이로 흐르는 계곡의 물은 혹서기에도 손이 시리고 물이 맑고 깨끗하여 여러 종류의 민물고기가 살고 있으며 주민들의 피서지로도 활용되며 옛날에는 경치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나 당숲 근처에서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대추는 씨가 작고 당도가 높아 약용으로 쓰이며 진상품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한다. 소용동 : 이 마을 뒷산 고개인 松用峴(송용현)을 넘어가는 어구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松用洞(송용동)이라고 불리우다가 후에 소용동이라 불렀다 하고 마을의 규모가 적다고하여 小用洞(소용동)으로 불렀다는 설도 있다. 면소재지인 坪地(평지)와 인접해 있으며 마을 주민 대부분이 고추, 담배 등 밭작물에 의존하며 생활하고 있다. 평지(坪地) : 재산면 소재지에서 가장 넓고 지형이 평탄하여 여타 부락의 중심이라고 하여 자연스럽게 붙여진 지명인데, 이 마을은 시가지를 형성하여 1,000여명의 주민이 생활하며 시장이 번창하여 많은 장사꾼들이 모여들던 곳으로 일명 縣洞(현동)으로 불리워지며, 이곳에는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파출소, 우체국 등 공공기관이 형성되어 있고 학교가 모여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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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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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마 : 재산면 소재지를 형성하면서 가장 넓은 분지가 되어 평평한 지역이라 해서 平地(평지)란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현동1리와 함께 재산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재산농협과 재산파출소 및 복지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농현상으로 매년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과인마 괭이마을 : 마을과 주변 농토가 조성될 때 나무 덩굴을 치고 잡목을 제거하는데 괭이를 사용하였는데 부자가 같이 일을 하다가 강 건너편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괭이를 던져 달라고 하여 아들이 힘차게 던지자 공교롭게 아버지 머리에 맞아 즉사하였는데 그 이후부터 이 마을을 괭이마을(과인마)이라 부르게 되었다. 농경지는 기름지고 평평해서 일제 때 일본인들이 경지정리를 하고 뽕나무밭을 조성하여 잠업소득이 많았다고 한다. 구장터 : 신시장에 대한 말로서 재산 현동리 소재지가 형성되면서 영양과 통하는 길목에 있어 등짐 장수들이 유숙하는 주막과 함께 간이 장터가 형성되어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그 옆에 재산중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검바위 : 재산 소재지에서 1.5Km정도 동쪽에 위치한 이 부락은 마을 뒤편에 검은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보통 바위는 겉은 검어도 속은 흰데 반해 이 바위는 속까지 검어서 검바위라 불러오고 있으며 이 바위의 돌 옷은 색깔이 선명하고 활착이 좋아 화단 장식용으로 널리 쓰였다고 하며 벼를 주로 재배해 생활이 윤택한 마을이다. 복골(腹谷) : 골의 형체가 소의 누운 상태의 배(腹<복>)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동면1리에 있는 큰 복골과 현동4리에 있는 작은 복골을 합쳐 모두 복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한때는 10여 가구가 계곡에 살았으나 지금은 4가구만이 전작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으나 계곡에 경사가 심하고 교통이 불편하여 생활하기 힘든 마을이다. 도만당 (道滿堂) : 옛날 斗溪洞(두계동)에 살고 있던 신들린 사람이 이곳으로 도망을 왔는데 여기서 더 이상 갈곳이 없자 이 신들린 사람이 堂(당)을 하나 세우자 사람들은 이 당을 길의 끝임을 의미하는 도만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당을 세운 사람이 죽자 당이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지금 그 당의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옛날 독수리봉 주위로 30여 가구가 살 때는 검바위에서 통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내왕이 없이 길이 없으며 2가구만이 전작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다. 갈부내 갈분내 (葛汾川) : 옛날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할 당시 오랫동안 흉작이 되어 식량이없어 칡뿌리를 먹고 생활할 때에 칡뿌리에서 나오는 하얀 칡 가루가 내를 타고 흘러 葛汾川(갈분천)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마을을 갈부내라 하는데 웃갈부내와 아래갈부내로 나누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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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3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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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드골 : 마을 입구에 고인돌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고인돌이 구전되면서 곤드골로 변형된 것으로 추측된다. 오랫동안 고추를 주로 생산하였으나 최근 들어 수박 재배 면적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여러 성씨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살고 있으며 마을 뒤편 띄밭양지라고 하는 펄에는 띄가 무성하다. 욋골,외골 입석(立石) : 곤드골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앞 건너편에 선돌이 있었다고 하여 욋골이라 불리우며 고추와 담배가 주 생산물이며, 특산물로 수박 경작 면적이 늘고 있다. 현재 4가구가 모여 사는 조그만 마을이다. 새터마 : 약 200년 전 한 두 집이 모여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여 생활을 시작할 무렵 인근 마을에 먼저 정착하여 살던 명장골, 욋골마을 사람들이 새로운 터에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새터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동다리 東橋(동교) : 이 마을은 현동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 이곳 마을 앞 하천에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그 모양이 동쪽에 달이 뜬 지형이라 하여 동다리라고 하며, 주산물은 고추, 담배이며 여러 성씨가 골고루 분포되어 살고 있다. 돌골,돌곳 : 새터마에서 면사무소쪽 100m부근에 좌측으로 난 조그만 농로를 따라 올라가는 골이다. 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인데 동네 어귀에서 부터 골 끝까지 마을전체에 많은 돌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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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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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실 이림곡 (伊林谷) 인곡(仁谷) 인금(仁今) : 옛날 안동을 통하는 길목으로 장사꾼이 많이 다녔는데 안동에서 물건을 훔친 도둑이 냉대로 생활하지 못하였는데 이곳에 덕망있는 사람이 유숙을 시킨 것이 유래가 되어 仁谷(인곡)이라 했으며, 근래에 이름실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천애수 (天涯水) 천하수 (天河水) : 청량산 天涯峰(천애봉)에서 흘러 내리는 물이 마을로 들어온다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신선이 하강하여 냇가 바위위에서 놀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골이깊고 인적이 드물며 지금은 1집만이 외롭게 생활하고 있다. 새마을 섬밧재 : 한 부자가 고개에 한섬의 씨를 뿌려 혼자서 경작할 만큼 많은 밭을 일구어 붙여진 지명이다. 그후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의 화전민 이주 정책에 따라 지금의 스레이트 가옥이 함께 정착하면서 새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안동과 경계지역으로 현재 5가구가 한집처럼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청량산 중간지점의 산간지역으로 담배, 옥수수를 많이 경작하고 있으며 소지명이 없는 마을이다. 솔등지 당나무 : 마을 동산에 당집이 있고 당집 앞에는 큰 소나무가 자라 솔등지라 칭하게 되었다. 지금은 솔이 위치한 동산이 잘려서 포장도로가 나있다. 양지바른 언덕배기에 10여 호의 가구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고추, 담배를 경작하고 있다. 모 천 (茅川.毛川) : 이 마을은 띠(茅<모>)가 마을 주변에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많아 모천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茅川(모천)의 모를 茅(모)와 毛(모)를 같이 쓰는 사유는 음이 같아 쓰기 쉬운 글로 자주 쓰다보니 毛川(모천)이라고도 쓰게 되었다. 합수(合水) : 이 마을은 재산면 동면리와 남면2리 경계인 독골에서 흘러오는 개울물과 영양군과 재산면의 경계지점인 논골에서 흐르는 지점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0년대에는 많은 가구가 살았으나 이농현상이 한창이던 70년대에 대부분 도시로 떠나고 6가구만 살고 있다. 논골 답곡(畓谷) : 이 마을은 군경계 지점으로 재산면 소재지에서는 최남단에 위치하며 영양군 청기면과 봉화군과의 경계지점으로 현재 4가구가 고추, 담배농사를 위주로 하여 생활하고 있으며 오래 전에는 논이 없었으나 50년대에 밭을 논으로 만들어서 논이 없던 골에 논이 생겨 논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 앞에는 300여년 묵은 느티나무가 있어 지금도 마을 수호목으로 고사를 지내고 있다. 돛골 저동(猪洞) : 이 마을은 골짜기의 형상이 돛돼지 같이 생겼다고하여 옛부터 돛골이라고 불러오고 있으며 한자어로 猪洞(저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은 골짜기에 개간을 하여 밭이 많으며 논은 많지 않으나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되어 7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30여 호의 주민이 옹기종기 살고 있었으나 대도시로의 이농현상이 이곳 마을에도 불어닥쳐 대부분이 떠나버리고 노인가족3가구만 마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신월곡 (新月谷) 신달골 : 이 마을은 영양군과 봉화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풍수 지리설에 의하여 마을의 생긴 형상이 달이 동산에 떠오르는 형국으로 반월과 비슷하다고 하여 언제부터인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월곡 또는 신달골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도 70년대 이전에는 여러 호가 살았으나 이농 현상으로 모두가 떠나고 현재 한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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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면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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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내골 (小內谷) 소천(小川) : 마을 안에 작은 계곡이 있고, 그 사이로 내(川)가 흐르며, 지형을 보면 소가 누운 형상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밤나무둥지 율구(栗邱) 하신촌 (下新村) : 마을과 뒷산에 밤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지명이다. 또한 위치가 아래쪽이어서 下新村(하신촌)이라고도 부른다. 담배, 고추가 주산물이었으나 새로이 일교차를 이용한 수박재배에 성공하여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소개골 : 소개(솜)를 담아 놓은 형상과 같다고 하여 소개골이라 불리워졌다 하며,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임진왜란 때 덕산고을 주민이 피난간 곳이기도 하며 주작물로는 고추와 담배를 재배하며 생활하고 있다. 부리실 북실,북곡 사곡(梭谷) : 마을 뒷산에 玉女(옥녀)가 배를 짜는 형의 좋은 묘터가 있는데 이 마을의 형상이 베틀 북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양봉과 송이버섯으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조부리실과 하부리실은 위쪽과 아래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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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면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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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밭 두전(斗田) : 마을의 지형이 되처럼 사각형으로 생겼으며 말 5필이 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말밭이라 불리운다는 이야기와 말을 많이 먹이던 곳이라는 설도 있다. 구렁마 중신촌 (中新村) : 마을의 위치가 구렁진 곳이라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또한 동면2리의 자연마을 가운데 중심 된 지역에 위치하였다 하여 중신촌이라고도 한다. 마을 중앙에 동면초등학교가 있으며 얼마 전부터 수박재배에 성공하여 농가당 2천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상신골 상신촌 (上新村) : 마을 가장 위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마을 입구에 큰바위(자라바위)가 3개 있으며, 예전에는 아주 산골로 교통이 불편하였지만 지금은 도로사정이 좋아 송이 약초 등의 특산물을 재배하여 고속득을 올리고 있다. 바드실 바디싯골 : 마을 모양이 베틀의 바디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안동권씨들이 많이 살았으나 지금은 각 성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고추와 담배를 많이 경작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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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산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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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마 : 재산 소재지로 부터 1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갈산의 여러 동네중 가장 큰 동네라 하여 큰마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동네 뒤에는 높은 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고 앞에는 큰 개울이 흐르고 있어 농사짓기에 알맞으며 마을이 평지이고 전답이 많아자연 사람들이 모여들어 큰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고추와 담배를 주로 재배하며 인심도 좋아 살기 좋은 마을이다. 학다리 : 연대 미상으로 영양의 안동권씨가 天子公(천자공)의 벼슬을 하고 죽음으로서 풍수에게 묘터를 알아본 즉 갈산 1리 학다리 마을 뒷산에 묘를 쓰면 자손대대 번창한다고 하여 묘를 쓰려고 삽질을 하니 그 밑에 딱딱한 암석이 받혀 그 암석을 파내려고 두드려 보니 그 속에서 학 4마리가 나왔는데 한마리는 옥쇄로, 두번째는 묘곡으로, 세번째는 성황당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마지막 학을 덮쳐 다시 그 바위에 넣고 그 위에 묘를 쓰니 자손대대로 번창하였는데 그 곳을 학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도가못 : 권학달씨가 약 1910년경 이곳에 술도가를 설립. 운영하면서 한 두집 모여 마을이 형성되면서 이 마을을 도가못이라 불려지게 되었으며 갈산 큰마와 학다리 사이 도로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8가구가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고 있다. 정자(亭子)마 : 갈산 큰마와 마주보고 있으며 조선 순조 병조참판을 지낸 葛川(갈천) 金熙周(김희주)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져 정자를 건립한데서 부터 정자마라 부르게 되었으며, 앞에는 葛山川(갈산천)이 유유히 흐르고 뒤에는 전답이 많아 전형적인 농촌 풍경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정자가 葛川亭(갈천정)인데 정자 앞에는 200년 이상 된 물프레 나무가 한결 옛 정취를 더해주고 있는 이 마을은 벼와 고추를 주로 재배하며 8가구가 모여 풍요롭게 생활하고 있다. 잿마 현촌(峴村) : 갈산 서쪽 산비탈에 위치한 마을로 이 마을을 가려면 才山川(재산천)을 건너 작은 재를 넘어야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아래에는 재산천이 흐르고 있다. 이 마을은 북향을 향해 있으며 병풍처럼 드리워진 큰 산 앞면에 위치해 있다. 골이나 특이한 지명도 없으며, 예전에는 많은 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5가구가 고추와 담배를 재배하며 생활하고 있으며, 앞에는 재산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더욱정취를 더하고 있다. 공이(公利) 공리곡 (公利谷) : 公利(공이)에 대한 정확한 유래와 생성 년대는 알 수 없으며, 이곳에는 좋은 묘터가 있어서 마을 전체를 안위하는 형상을 이룬다하여 公利谷(공리곡)이라 불렀으며, 선내천이 흐르고 산능선을 따라 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재를 아래공이 재라 하고 현재의 공이재와 합해서 양공이재라 불러 왔으며, 그 사이의 마을을 공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재산면 갈산리와 소천면 임기리를 연결하는 919지방도가 지나는 교통의 아주 중요한 곳이며 아래공이 4호와 웃공이 8호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구수가 점차 줄고 있는 실정이다. 쇠실. 상금곡(上金谷) : 옛날 이곳에서 나온 광물이 금과 같이 귀하게 평가되어 金谷(금곡)이라 불렀으며 또한 쇠실이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30여 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많이 떠나고 10여 호가 드문드문 생활하고 있으며 고추와 콩을 재배해 근근히 생활하고 있으며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겨울에도 세찬 바람은 불지 않은 곳이다. 새골,새봉 봉곡(峰谷) : 정확한 년대는 알 수 없으며, 바람이 적고 기후가 온화하여 새들의 서식지로 알맞아 새들이 많이 서식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당시 어떤 새들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지금은 13가구가 모여서 주로 담배, 고추를 재배하며 이농현상으로 농가가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무너무 : 정확한 유래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갈산천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데 폭이 좁아 장마철이나 폭우로 물이 자주 넘어 내왕을 할 수 없었다 한다. 물이 자주 넘어 처음 물너머 동네라고 하다가 쉬운 발음으로 변하여 무너무로 되었으며, 지금은 큰 다리가 놓여져 있어 물이 넘는 일이 없으며 예전에는 20여 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4가구만이 전작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산간 오지마을이다. 골내골 화천(華川) : 냇가와 산기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이 곳은 강변에 진달래 꽃이 많이 피었는데 그 진달래 꽃잎이 하천을 따라 아래로 흘러 강물 위에 어리어 꽃 냄새를 낸다 하여 골레골이?라 불렀다고도 하며, 또 달리 전하는 바에 의하면 통일신라 후기 국운이 기울어 가는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될 태자가 천년 사직을 고려에 넘겨 주어야하는 비운을 짊어지고 백성들에게 신의를 지키기 위해 마의를 걸치고 금강산으로 가기 위해 청량산을 거쳐 이곳을 지나가던 도중 남루한 옷을 입고 빨래를 하는 처녀의 평온한 모습을 보고 일국의 태자보다 꽃잎이 그윽한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처녀가 훨씬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진달래 꽃이 가득한 개울을 보고 골레골이라고 하였다 한다. 당시 17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모두 떠나 버려 폐허로 변해 버렸으며 전답은 모두 황무지로 변한지 오래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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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산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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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잠(尾岑) 머지무 : 옛부터 이곳에 머주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머주무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현재도 몇 그루 남아 있는 이 마을은 주로 산 8부 능선을 따라 가옥이 산재되어 있고 이농현상으로 인해 현재 15가구가 이곳 저곳에 흩어져 마을을 형성하고 있으며, 산간 지방이라 주로 고추. 담배 등을 재배하며 봉화 특산물인 대추와 송이버섯 채취 등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 마을은 누가 언제부터 생활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7~8년 전 고려청자 10여 점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을 형성하여 살아 온 것으로 추정된다. 용구(龍邱) 용두들 : 옛날에 용이 등천한 곳이라 하여 용두들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용두천을 중심으로 북쪽과 서쪽에 9가구가 모여 살며, 주작물은 고추와 담배를 재배하여 생활하며 봉화 특산물인 대추, 송이버섯 채취 등으로 많은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우련전 (雨蓮田) : 풍수설에 의하면 이곳에 연화 부수형의 명당이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60년대 말에는 68세대가 거주하였으나 화전민 철거정책에 따라 많이 줄어 지금은 18가구가 살아가고 있으며 주로 고랭지 채소와 산채를 재배하는 산간 오지로서 고랭지 채소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특히 산채는 일교차가 크므로 향기가 강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진 특산물로 자리잡고 있다. 산막(山幕) : 옛날 화전민들이 산막을 치고 화전 농사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할 때에 생긴 지명이며 아연광을 할 때에 사람이 많았으나 지금은 폐광으로 동네에 2가구만이 염소와 고추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생활하고 있으며, 교통이 불편한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대곡(大谷) 한골 : 갈산 4리에 있는 계곡 중 가장 큰 계곡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이 마을 부근에서 가장 넓은 벌판에 위치하고 있으며 각 성받이 16호가 모여 고추, 담배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으며 교통이 좋지 않았으나 지금은 31번 국도가 개통되어 교통이 아주 편리하게 되어 새로이 약초, 특용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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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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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곡(卯谷) 묘골 : 본 마을은 재산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km 쯤 떨어져 있으며, 마을은 남향으로 마을 뒷산의 형태가 토끼의 형상을 하고 있어 卯谷(묘곡) 이라 부르고 있으며, 재산면 8명산 중 하나인 왕오설이란 자리가 있으며, 현재 밀양박씨. 경주정씨들이 주류를 이루어 살고 있으며 담배와 고추 재배가 주산물이며 27가구가 모여 사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음지마 : 양지마와 음지마를 합하여 余退(여퇴)마을이라 하며, 여퇴 남쪽 응달에 위치해 있어 음지마라 부르며, 북쪽에 있는 양지마와 힘을 합해 외병을 물리쳤다 하여 余退(여퇴)라고 부르며, 주작물은 고추, 담배이며 특산물로는 송이가 유명하여 농가소득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자연부락으로 전작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양지마 : 재산 소재지에서 2Km 북쪽에 위치한 부락으로 여퇴 북쪽 양지 바른 산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어 해가 떠서 질 때까지 햇빛을 받는다고 하여 양지마을이라 하며, 바람이 적고 기후가 온화하여 고추, 담배 농사가 잘되며, 현재 이 마을에는 20여 가구가 전작에 의존하는 살기 좋은 마을이다. 옥동(玉洞) 구수동 (九水洞) 구수골 : 옛날 옹기 그릇을 만들 때 이곳 흙으로 만들어야 옹기를 곱게 만들 수 있다 하여 옥동이라 불렀으며 물이 아홉 구비를 돌아서 흐른다 하여 구수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 때는 30여 가구 100여 명이 살았으나 교통이 불편하고 워낙 산간 오지라서 현재는 4가구 9명이 고추, 담배 등 전작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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