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의 사색
남진원
고려말에서 조선 초, 원천석의 시조 ‘흥망이 유수하니’는 매우 잘 알려진 작품이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 겨워하노라.
흥망에는 수가 있다는 말은 운수가 있다는 말이다. 오백년 고려 왕조 또한 운세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세월의 흐름이고 운세의 흐름이 아니던가.
가을 풀밭에 쓰러져 나뒹구는 고려 왕조 잔해의 모습을 보고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 겨워 하여도 세상의 흐름을 어찌 막을 것인가?
때가 그르쳐 그리 된 것이야 탓해본들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랴마는 그래도 아쉬워하는 것이 인간적인 모습일진대, 원천석의 마음 씀이 참으로 따뜻하다고 할 수 있다.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 던고
굽을 절이면 눈 속에 푸르르랴
아마도 세한고절(歲寒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 시조는 태종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고 고려의 충정을 지키려던 자신의 모습을 비유하였다고 볼 수있다. '눈맞아 휘어진 대'에서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지조를 지키려는 선비의 뜻이 시류에 편승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이 될 수 있다.
왕조 시대에는 지조가 매우 필요하고 정치사에서도 그런 분은 높이 평가되었다. 허나 뜻을 품은 선비나 정객은 그 지조가 어느 한쪽 면 만을 대신하는 정도이지 원융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한쪽에선 환영을 받지만 다른 쪽에서는 배척을 받는다. 요즘에는 사람들을 선비라고 부르지도 않지만 ….
선비의 뜻과 지조는 너무 논리에 얽매여 있다. 죽음도 불사한다. 그러나 죽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뇌출혈로 죽는 것도 흔하다.
사람은 선비이든 뭣이든 정이 있는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
무정한 세월은 흐르고 사람은 오고 또 간다. 선비정신의 유무를 떠나, 그저 흐르는 대로 무욕으로 살다간 정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기억되지 않을지라도 그분들의 삶은 어떤 훌륭한 성인에 못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