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대학교 과제로 새싹보리를 키울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교수님이 손수 농사를 지어 가져오신 새싹보리를 나누어주셨을 때 말 그대로 맑은 자연을 선물 받는 기분이었다. 교수님의 흙처럼 순수한 마음이 새싹보리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과제도 과제지만 1년째 콩나물이랑 숙주나물을 키워먹는 나에게는 새로운 시도이기도 해서 가져온 그날 바로 트레이에 상토 흙을 넣고 파종을 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궁금증으로 수경재배와 물에 15시간 불린 후, 씨앗 그대로 상토 흙에 3가지 버전으로 파종을 했다. 새싹보리 씨앗은 하루 만에 수경재배가 가장 먼저 하얗게 새순을 틔웠다. 그리고 흙에 불린 보리와 바로 흙 위에 뿌려 둔 보리에서도 이틀간격으로 곧바로 하얀 순을 삐죽 내미는 모습이 조그만 병아리 부리처럼 신기하면서도 오묘한 느낌이었다. 어찌 이리도 자연은 정직하고 신비로운지 새싹보리를 키운 열흘은 매일 아침저녁 분무기로 물주는 것이 내게 하루의 신성한 의식이 되었다.
보리를 키워본 것도 처음이었지만 보리 종자를 본 것 역시 처음이었던 나는 보리 순이 그렇게 파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푸르른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에 파아란 싹을 보는 것은 사춘기 첫사랑을 훔쳐보는 것만큼 가슴 두근거리며 설레는 일이었다. 행여나 싹이 자라다 죽을까봐 노심초사하며 아침저녁으로 물주기에 부지런을 떨었더니 이슬보다 영롱한 물방울이 잎 끝에 보석처럼 열렸다. 발표시간에 교수님께 질문을 드렸더니 수분이 너무 많을 때 잎 끝에 물방울이 맺히는 현상이라는 답을 주셨다.
새싹보리는 꼭 열흘 만에 키가 20센티 가까이 자랐다. 기대했던 수경재배가 싹은 가장 먼저 틔웠지만 잎사귀의 넓이는 가장 가늘고 성장은 5센티 이상 더디게 자랐다. 그에 반해 상토 흙에 불린 새싹보리를 파종한 것과 씨앗 그대로 파종한 새싹보리는 시간과 상관없이 똑같은 굵기와 비슷한 길이로 자랐다. 굳이 수경재배나 불리는 수고 없이 키우기 쉬운 작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노화방지, 혈관건강 개선, 간 기능 강화 및 체중 조절, 장 기능 개선, 면역력 강화, 당뇨예방, 뼈 건강 강화까지 좋다고 하니 말 그대로 보약이 따로 없다.
드디어 수확의 시간. 잎사귀를 자르려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만큼 무성하게 자랐고 눈이 부실만큼 생생한 파란 잎은 자르기마저 아까웠지만 보리가 자라는 모습이 신기하고 놀라워서 몇몇 단톡방에 올렸더니 지인들이 먼저 연락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4월 1일 회사 창립 기념일 날 나이 많은 큰언니를 위해서는 막걸리와 궁합이 맞은 새싹보리 전을, 우울증을 앓고 있는 둘째 언니를 위해서는 알록달록한 잡채에 파란 새싹보리를 듬뿍 넣고 항상 씩씩한 작은 언니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새싹보리를 넣은 불고기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소중한 하루를 보냈다.
비록 열흘에 걸친 짧은 시간이었지만 콩나물이나 숙주를 키우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코로나 시대에 우울을 떨쳐내는 좋은 경험이었다. 더구나 물만 줘도 쑥쑥 자라는 놀라운 성장 속도와 무엇보다 잎사귀에 맺힌 영롱한 물방울의 자태는 어디서도 보지 못한 힐링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거실 창가에 두고 트레이 받침대에 물을 흥건하게 채워두니 하루 이틀은 따로 물을 주지 않아도 하루에 2센티 가까운 성장으로 자라는 모습은 트레이 아래 물구멍을 통해 수많은 잔뿌리가 트레이를 감쌀 만큼 뻗어나는 놀라운 생명력 또한 감탄스러웠다.
자연은 참 멋진 존재다. 조그만 입자의 흙에서 비롯한 겨자씨만한 새싹 보리가 피워내는 싱싱한 생명력은 놀라운 기적이다. 더구나 반드시 쌀쌀한 겨울을 거쳐야만 싹을 틔울 수 있는 적산온도의 신비는 더더욱 신비로운 일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 집 식탁 위 까만 트레이에 까만색의 쥐 눈이 콩 그리고 노란 꽃을 피울 녹두 마지막으로 눈이 부실만큼 파랗게 자라는 새싹보리 3총사가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나의 정성과 노고를 먹고 무럭무럭 자랄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좋은 사람과 보낼 즐거운 시간에 행복한 미소가 차오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싹보리를 키우면서 오래전 중학교 수업시간의 들었던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한다.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의 일화 중 하나로 1952년 12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부산 대연동의 유엔군 묘지 방문이 일정에 있었다. 미군은 묘지를 새롭게 단장하고자 공개입찰을 했고 공사는 어렵지 않았지만 한겨울에 파란 잔디를 깔아줄 것을 요구했다. 그때만 해도 엄동설한에 잔디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은 때라 그 당시 정주영 사장은 미군 장교를 찾아가 대통령이 지나가면서 보기에 파란 풀만 나 있으면 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정주영 회장은 낙동강 변 보리밭을 사들인 후 30대의 트럭으로 단 5일 만에 유엔묘지를 녹색바다로 만들었다.
유엔 사절단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묘지위의 푸른 식물이 잔디인지 보리인지 알지 못한 채 헌화한 후 돌아갔고 미군은 대만족과 함께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정주영 회장은 공사비를 입찰 금액의 3배를 받았다. 그 이후 미8군의 공사는 당연히 정주영의 것이 된 것은 물론이다. 푸른 잔디가 꼭 잔디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멋지게 깨고 세계의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니 추운 겨울의 이겨내는 새싹보리의 무한한 생명력만 봐도 당연한 결과이지 싶다.
**** 예누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