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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 왕조 ┓♥ 스크랩 세종대왕
윤대화 추천 0 조회 289 12.09.07 10: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세종대왕                   世宗大王

 

 

 

 

 

 

 

 

 

 

 

 

성군(聖君) 또는 대왕(大王)이라고 호칭이 붙는 세종(世宗. 1397~1450)은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당대에 이미 ' 해동요순 (海東堯舜) '이라 불려 지금까지 비판(批判)이 금기시(禁忌視)되다시피 하였으며, 초인화(超人化), 신격화(神格化)된 부분마저 있다. 그러나 신격화의 포장을 한 겹 벗겨버린다고 해도 세종(世宗)이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儒敎政治)와 찬란한 민족문화(民族文化)를 꽃피웠고, 후대(後代)에 모범이 되는 왕이었다는 사실에 반론(反論)이 제기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조선의 4대 왕, 세종(世宗)의 이름은 ' 이도(李淘) ',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諡號)는 장헌(莊憲)으로, 정식 시호는 '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이다.  1418년 6월 3일, 조선의 제 3대 임금, 태종(太宗)은 세자 ' 이제(李悌 ..양평대군) '를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왕세자로 삼았다.

 

 

태종(太宗)은 '태종실록(太宗實錄)'의 기록을 통해 '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대소신료(大小臣僚)가 청하였기 때문에 ' 세자(세자 ..양녕대군)를 폐하고, 반면에 ' 충녕대군(忠寧大君)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자못 학문을 좋아하며, 치체(治體 .. 정치의 요체)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意 ..윗 사람에게 의견을 아룀)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 '하기에 왕세자로 삼는다며 그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두 달 뒤 태종(太宗)은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 앉았다. 주상(主上)이 장년(壯年)이 되기 전까지 군사(軍士) 문제는 직접 결정하고, 국가가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와 6조(曺) 그리고 상왕(上王)이 함께 의논한다는 조건부(條件附) 양위(讓位)이기는 하였지만 전격적인 결단이었다.

 

 

그렇게 조선의 제4대 임금에 오른 세종(世宗)의 나이는 당시 22세, 어린 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갑자기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는 바람에 준비가 부족하였다. 집권 초기 대부분의 사안(事案)에 대하여 ' 상왕(上王)의 뜻이 이러하니 ... '또는 ' 상왕(上王)께 아뢰어보겠소 ..'라는 말을 반복해야 될 만큼 어려운 입장이었다. 엄한 아버지의 시험을 치루는 갑갑하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 세종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무섭게 공부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마련한 정권의 안정

 

 

  

 

장자(長子) 상속의 원칙이 자리잡아가던 조선 초기, 세종의 아버지 태종(太宗)은 기왕에 세자(世子)로 책봉된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廢)하고 궁궐 밖으로 내친다. 그리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 (忠寧大君)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충녕대군이 바로 후일의 세종(世宗)이다. 오직 정의롭고 평화로운 다음 시대를 열기 위한 용단(勇斷)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갈 세종(世宗)에게 방해가 될만한 세력들을 찾아서 모두 극형(極刑)으로 처단한다. 아들인 세종의 왕비(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인 심온(沈溫)도 그 차원에서 사약을 내려 죽이고 말았다.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다음 시대의 왕(王)인 세종(世宗)의 치세(治世)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을 것으로 확신이 들었을 때, 왕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태종은 52세의 나이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세자로 책봉하고, 불과 두 달만에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병(病)도 없었다. 그리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나지만, 병권(兵權)만은 내놓지 않았다. 세종이 무서웠을까 ? 아니다. 세종이 오로지 국가경영에만 힘을 쓸 수 있도록 세종을 뒤에서 도와주기 위해서이었다. 태종(太宗)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면서 세종(世宗)을 불러서 말한다. ' 천하의 모든 악명(惡名)은 이 아비가 가지고 갈 것이니, 주상(主上)은 만세(萬歲)에 성군(聖君)의 이름을 남기도록 하라 ' 

 

  

자신의 뒤를 이을 세종(世宗)이 마음놓고, 수성군주(守城君主)로서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길을 닦아놓은 창업군주(創業君主)로서의 면모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조선의 역대(歷代) 왕(王)들 가운데 스스로 왕위를 물려준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는 왕위에 집착하지 않고,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는 넓은 안목으로 세종에게 왕위를 스스로 물려주며, 뒤에서 세종을 조용히 도와준다.

 

 

조선의 역사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싸움이었다. 그는 강력한 왕권(王權)을 세우기 위하여 신권정치(臣權政治)를 주장하는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 등을 죽이거나 몰아내고, 또한 그의 이복형제(異腹兄弟)와 4명의 처남(妻男) 더욱이 세종(世宗)의 장인(丈人)이자 자신의 사둔인 '심온(沈溫)'까지 죽이게 되는 것도 단순히 권력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조선을 굳건히 세우고자 하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 세종(世宗)의 자질을 믿고, 그가 국정을 충분히 보살필 수 있도록 외척(外戚) 세력을 배척한 것이다. 세종(世宗)의 치적(治蹟)은 아버지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 만들어 놓은 토대위에서 꽃 피웠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책을 읽어대던 호학(好學)의 군주(君主)이었다. 세종의 독서(讀書)는 유학(儒學)의 경전(經典)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역사(歷史), 법학(法學), 천문(天文) ,음악(音樂), 의학(醫學) 등 다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쌓았다.  

 

 

 

                                     호학의 군주                    好學의 君主

 

 

 

 

세종 스스로 경서(經書)는 모두 100번 씩 읽었고, 딱 한 가지 책만  30번을 읽었으며, 경서(經書)외에 역사서(歷史書)와 기타 다른 책들도 꼭 30번 씩 읽었다고 한다. 몹씨 추울 때나 더울 때에도 밤새 글을 읽어, 나는 그 아이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하였다 그런데도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는 태종(太宗)의 말이 전할 정도이었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들은 정리하고 비교하는 능력까지 갖추었다. 사실 세종(世宗)은 그저 경전(經典)의 문구나 외워 잘난 척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였다. 그 내용과 이치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더 깊은 생각을 하라고 학자들에게 주문할 정도이었다.

 

 

1422년 태종(太宗)이 죽고 재위 4년 만에 전권(專權)을 행사하게 된 세종(世宗)은 아버지 태종(太宗)이 만들어놓은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力量)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하였다. 테종(太宗)이 잡아놓은 국가의 골격(骨格)을 완성해 나가는 방법으로 세종(世宗)이 택한 방법은 매우 학구적(學究的)이다.

 

 

선현(先賢)의 지혜를 신뢰하였던 세종(世宗)은 우선 유학(儒學)의 경전과 사서(史書)를 뒤져 이상적(理想的)인 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골격만 갖춰진 제도를 세부사항까지 규정해 나갔다. 작은 법규(法規)를 하나 만들 때에도, 그 제도에 대한역사를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長短點)을 분석한 뒤 그 단점(短點)을 보완하는 방안, 다른 제도와의 관련성, 현재의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였다.          

 

 

 

 

 

 

 

 

 

 

 

 

 

 

 

 

 

                                           태실지                   胎室址

 

 

 

이곳에는 세종(世宗)의 태(胎)가 봉안되어 있었다. 예로부터 태(胎)는 생명을 준 것이라 하여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특히 조선 왕실은 국운(國運)과 관련이있다고 하여 태(胎)를 더욱 소중하게 다루었다. 조선 정부는 새로 태어난 왕실 자식들의 태(胎)를 묻기 위하여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이 기구에서는 태(胎)를 봉안할 명당(名堂)을 물색한 다음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그곳에 묻게 하였다.

 

 

세종대왕의 태(胎)는 이러한 절차에 따라 왕위에 오른 해인 1418년에 이곳(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이 태실(태실)은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적(倭賊)에 의하여 크게 훼손되었다. 조정은 선조(宣祖) 31년인 1601년에 대대적으로 이곳을 보수하였고, 영조(英祖) 10년인 1734년에는 다시 비석을 세우면서 정비하였다.

 

 

그러나 뒷날 왕실의 태실(태실)이 길지(길지)에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일제(일제)는 1929년에 조선왕조의 정기(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에 산재(산재)한 왕실의 모든 태실(태실)을 겨이도 양주(양주)로 옮기고, 태실(태실)이 있던 땅을 모두 민간에 팔아버렸다. 이곳에 있던 세종(세종)의 태실(태실)도 이 때 양주(楊州)로 옮겨 갔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민간인의 무덤이 들어서 있다. 다만영조(영조) 때 세운 비석(비석)과 주변에 흩어져 있는 석조물(석조물)을 통해 이곳이 세종대왕의 태실지(태실지)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세종의 형제들

 

 

 

 

 

세종(世宗)은 1397년, 당시 정안공(定安公)이었던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안공(定安公)이 왕세자(王世子)가 되면서 잠재적 왕위계승권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1408년 12살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1412년, 16살에 둘째 형 '효려운(孝寧君)과 함께 대군(大君)으로 진봉되어 ' 대광보국 충녕대군 (大匡輔國 忠寧大君) '이 되었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그는 형(형)들을 일종의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형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세자(世子)의 자리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욱 독서와 학문연구에 정진하기도 한다. 넷째 동생으로 병약(病弱)한 성녕대군(成寧大君)에게는 동기간 중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유난히 각별했는데, 그러나 '성녕대군'는 일찍 죽고 말았다.

 

 

실록(實錄)에는 충녕대군의 도발적(挑發的)인 행동도 기록되어있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은 '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 '라는 어느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太宗)에게 전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세자인 이제(李悌 .. 양녕대군)에게 ' 마음을 바로 잡은 뒤에 몸을꾸미라 '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충녕(忠寧)은 세자(世子)이자 형(兄)인 양녕대군과 관계가 악화(惡化)되었다.

 

 

후 1418년에 태종(太宗)이 맏형이자 동복형(동복형)인 이제(李悌 ..양녕대군)를 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에서 '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여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 '라고 하며 김한노(金漢老)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非行)으로 왕세자에서 폐위(廢位)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黃喜)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22살의 충녕대군을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제'를 양녕대군으로 강봉(降封)하였다.

 

 

부왕(父王)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세자(世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이제'는 충녕대군에게 세자(世子)의 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결국 부왕이 금지한 불교(佛敎)에 호감을 갖다가 심취하게 된 '효령대군'은 바로 출가(出家)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양녕대군은 경기도 광주(廣州)로 내쳐졌다. 

 

 

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세자(世子)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 해 8월 8일 태종은 왕위를 왕세자에게 물려주고 연화방(蓮花坊)의 옛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충녕대군은 이를 거두어줄 것을 여러번 청하였지만 태종의 결심이 굳건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바로 세종(世宗)이다.               

 

 

 

 

 

 

 

 

 

 

 

 

 

 

 

                                          세종실록                    세종실록

 

 

 

 

 

 

 

 

 

 

 

 

 

 

 

 

 

 

 

 

 

 

 

 

 

 

 

 

세종은 조선시대 왕 가운데 가장 뛰어나 능력을 가졌고,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세종이 위대(偉大)한 성군(聖君)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세종은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한 어진 왕이었다. 

 

 

 

                                         제도와 학문, 예술의 기틀을 잡다

 

 

 

 

1422년 태종이 죽고 재위(재위) 4년 만에 전권(전권)을 행사하게 된 세종(세종)은 태종(태종)이 만들어 놓은 정치적(정치적) 안정(안정)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다. 태종이 잡아놓은 국가의 골격(골격)을 완성해 나가는 방법으로 세종(세종)이 택하 방법은 매우 학구적(학구적)이었다.

 

 

선현(선현)의 지혜를 신뢰하였던 세종은 우선 유학(유학)의 경전과 사서(사서)를 뒤져 이상적(이상적)인 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골격(골격)만 갖춰진 제도를 세부(세부)사항까지 규정해 나갔다. 작은 법규를 하나 만들 때에도, 그 제도에 대한 역사를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장단점)을 분석한 뒤 그 단점(단점)을 보완하는 방안, 다른 제도와의 관련성, 현재의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였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다 보니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우선 제도(제도) 연구의 기본이 되는 사서(사서)들이 부족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세종은 고려사(고려사), 고려사절요(고려사절요)를 비롯한 사서(사서)들이 더 정확하고 풍요해지도록 학자들을 다그쳤다. 중국의  사서(사서)도 열심히 연구하였다. 대표적인 역사서인 ' 자치통감 (자치통감) '의 완질(완질)을 구해 읽고 학자들을 동원하여 이애 대한 주석서(주석서)인 ' 자치통감훈의 (자치통감훈의) '를 편찬했는데, 이 주해보(주해본)은 중국에서 간행된 것보다 완성도가 더 높다는 평을 들었다. 

 

 

경전(경전0과 사서(사서)에서 찾아낸 제도(제도)를 적용하려면 우리 땅에 대해서도 보다 정확하게 알 필욕 있었다. 세종(세종)은 지방관(지방관)들에게 각 지역의 지도(지도), 인문지리(인문지리), 풍습(풍습), 생태(생태) 등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였고, 이를 수합하여 편찬하였다. 많은 자료를 간행하려다보니 인쇄술(인쇄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세종 치세(치세)에 인쇄 속도가 10배로 성장하였다.

 

 

물론 이렇게 많은 내용을 세종 혼자 연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종은 집현전(집현전)의 연구 기능을 확대하여, 정인지(정인지), 성삼문(성삼문), 신수주(신숙주) 등 당대의 수재(수재)들에게 연구를 분담시켰다. 이렇게 해서 윤리(윤리), 농업(농업), 지리(지리), 측량(측량), 수학(수학), 약재약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편찬하고, 관료, 조세(조세), 재정(재정), 형법(형법), 군수(군수), 교통(교통) 등에 대한 제도를 새로 정비하였다. 

 

 

 

이 때 정해진 규정(규정)들은 나중에 조선에서 시행된 모든 제도(제도)의 기본(기본)이 되었다. 세종은 과학기술(과학기술)과 예술(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세종 초에 천문학(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서운관)을 설치하였으며, 혼천의(혼천의), 앙부일구(앙부일구), 자격루(자격루)를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박연(박연)을 등용하여 아악(아악)을 정리하고 맹사성(맹사성)을 통해 향악(향악)을 뒷받침하여 조선에 적합한 음악(음악)을 만들기도 하였다.               

 

 

 

                                              위대함, 애민(愛民)정신에서

 

 

 

 

세종은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恩典)을 베풀었고, 사면령(赦免令)을 빈번히 내렸으며, 징발된 군사(軍士)들은 늘 기한(期限) 전에 돌려보냈다. 노비(奴婢)의 처우를 개선해주기도 했다. 주인이 혹형(酷刑)을 가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실수로라도 노비(奴婢)를 죽인 주인은 처벌하도록 하였다. 이전에는 겨우 7일에 불과했던 관비(官婢)의 출산휴가(出産休暇)를 100일로 늘렸고,

 

 

그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다. 더욱이 출산(出産) 1개월 전에도 쉴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왕(王)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이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며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세종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다. 관대하고 은혜로운 왕이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도 이러한 애민정신(愛民精神)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다. 세종(世宗) 최대(最大)의 업적이면서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 구체적인 창제 동기가 무엇인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전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세종의 단독 작품인지, 집현전(集賢殿) 학자들과의 공동작업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엄청난 반대(반대)를 예상한 세종이 비밀리(秘密裏)에 작업한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다만 '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律文)에 이거하여 판단을 내린 뒤에야 죄(죄)의 경중(輕重)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율문(律文)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 큰 죄(罪)의 조항(條項)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吏讀文)으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나 '... 라는 세종의 말과 '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들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칭단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 '라고 훈민정음 서문(序文)에 정인지(鄭麟趾)가 쓴 글을 종합하여 훈민정음 창제의 실제 목적을 짐작해 볼 뿐이다. 

 

 

 

 

                                          집현전                   집현전

 

 

 

 

1392년( 태조 원년) 7월에 제정된 관제(관제)에 따르면, 고려(고려)의 제도를 도습하여 보문각(寶文閣), 수문전(修文殿), 집현전(집현전) 등이 그대로 존치되어 있었으나, 세종(세종)이 즉위하자 집현전(집현전)을 확대하여 실제의 연구기관으로 개편하였다.

 

 

 

 

 

 

 

 

집현전(집현전)은 학자(학자) 양성과 학문 연구를 위한 기관이었다. 집현전의 가장 주요한 직무는 경연(경연)과 서연(서연)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경연(經筵)은 왕과 유신(유신)이 경서(경서)와 사서(사서)를 강론하는 자리로 국왕이 유교적(유교적) 교양을 쌓도록 하여 올바른 정치를 ㅎㄹ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서연(書筵)은 장차 왕(왕)이될 세자(세자)를 교욱하는 것이다.

 

 

집현전관은 외교문서(외교문서) 작성도 하고 과거(과거)의 시험관으로도 참여했으며, 집현전이 궁중에 위치하고 있고, 학사(학사)들이 문필(문필)에 능하다는 이유로 그들 중 일부는 사관(사관)의 일을 맡았다. 그리고 중국 고제(고제)에 대하여 연구하고 편찬사업을 하는 등 학술사업을 주도하였다. 세종(세종)은 학사(학사)들의 연구에 편의(편의)를 주기 위하여 많은 전적(전적)을 구입하거나 인쇄(인쇄)하여 집현전에 보관시키는 한편, 능력있는 소장 학자에게는 사가독서(사가독서)의 특전을 베풀었다. 이로써 수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하여 배출되었다. 

 

 

세종(세종) 20년대부터 집현전은 정치적(정치적)인 역할도 수행하게 되었다. 세종은 1442년에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여 세자(세자)가 서무(서무)를 처결하게 하였다. 이때 첨사원(詹事院)의 관원(관원) 후보(候補)로는 서연관(서연관)이 가장 유리하였다. 서연관(서연관)은 모두 집혀넌관(집현전관)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집현전관'은 첨사원(詹事院)을 통해 정치(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1443년부터는 세자(세자)의 섭정(섭정)이 이루어졌으므로 '집현전관'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종(문종)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집현전관'의 정치기관으로의 진출이 늘어났다.

 

 

이곳에서 이룩한 업적은 학문(학문) 연구와 편찬(編饌)사업 등이다. 편찬(編纂)사업으로는 고려사(고려사), 농사직설(農事直說),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 삼강행실(三綱行實), 치평요람(治平要覽), 동국정운(東國正韻),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한국 문화사상 황금기를 이룩해 놓았다.

 

 

37년간 존속하였던 기관이지만, 조선의 학문적 기초를 닦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많은 학자적 관료를 배출하여 세종대 뿐만 아니라 이 이후의 정치, 문화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게 하였다. 후에 집현전과 같은 기능은 홍문관(弘文館)에서 대신(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1456년(세조 2), 단종(단종)의 복위를 꾀?의 사육신(사육신)을 비롯하여 반대파 인사가 집현전에서 많이 나오자, 세조(세조)는 집현전을 페지(廢止)하는 한편 소장된 서적은 예문관(藝文館)에서 관장하게 되었다.

 

 

세종은 즉위하자 집현전을 확대하여 실제의 연구 기관으로 개편하였다. 그 직제는 겸관(兼關)으로 영전사(領殿事) 2명, 대제학(大提學) 2명, 제학(提學) 2명과 전임관(專任官)인 부제학(副提學) 1명, 직제학(直提學) 1명, 직전(直殿) 1명, 응교(應敎) 1명, 교리(校理) 1명, 부교리(副校理) 1명, 수찬(修撰) 1명, 부수찬(副修撰) 1명, 박사(博士) 1명, 저작(著作) 1명, 정자(正字) 1명이 있었다. 그 인원은 몇 차례 변경되면서 운영되었으며 1436년 20명으로 확정되었다.                        

 

 

 

 

 

 

 

 

 

 

 

 

 

 

 

 

 

 

 

 

 

 

 

 

 

 

 

 

 

 

 

 

 

 

 

 

 

 

 

 

 

 

 

 

                                                영릉              영릉

 

 

 

 

 

 

 

 

 

 

 

 

 

 

 

 

 

 

세종대왕은 1418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在位) 32년만인 1450년 54세를 일기(일기)로 승하하였다. 그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는 4년 전인 1446년 먼저 죽은 후 경기도 광주(廣州)에 묻히며, 그 곁에 따로 우실(右室)을 만들어 놓아 세종(世宗)의 사후(死後)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세종(世宗)이 죽은 후 미리 준비한 이 우실(右室)에 묻히게 되었다.

 

 

세종이 죽은 후 조선에는 좋지 않은 일이 계속되었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文宗)은 즉위 2년 만에 죽고, 그 아들 단종(端宗)은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 ?겨나 결국 죽음을 당하는 등, 크고 작은 사건이 많아 세조(世祖)는 세종(世宗)의 능(陵)이 길지(吉地)가 아니라면서, 천장(遷葬 .. 왕릉의 이장을 천장이라고 함)을 검토하지만, 서거정(徐巨正) 등 신하들의 반대로 좌절된다. 

 

 

 

 

                                      영릉가백년                    寧陵可百年

 

 

 

 

세조(世祖)가 죽고 예종(睿宗)이 즉위하면서 다시 천장(遷葬)이 거론되었다. 1468년 예종(睿宗)은 노사신(盧思愼), 서거정(徐巨正) 등 신하를 여러 곳에 보내어 천장(遷葬)할 곳을 물색하도록 명하였다. 광주(廣州), 이천(利川) 그리고 여주(驪州)의 땅을 보고 돌아온 신하들은 예종(睿宗)에게 보고한다. 이계전(李季甸)의 무덤이 있는 곳이 자손이 번창하고,만세(萬歲)에 업적을 계승할 땅입니다. 세종(世宗)을 모실 장소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습니다 '

 

 

이 보고를 받은 '예종(睿宗)'은 결심하고 이계전(李季甸)의 후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금의 이곳으로 천장(遷葬)을 추진하였다. '이계전'의 후손들은 벼슬을 높여 주었다. 이계전(李季甸)의 후손(後孫)들이 이장(移葬)을 하려고 산소를 파서 유해(遺骸)를 들어내니, 그 밑에서 글을 새겨 넣은 작은 비석(碑石)이 나왔다. 

 

  

 

 

 

 

 

 

그 비문(碑文)에는 ' 여기서 연(鳶)을 날리어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이 연(鳶)이 떨어지는 곳에 이 묘(墓)을 옮겨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여러 후손들이 신기하게 여기어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연(鳶)은 바람에 날리어 약 10리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곳으로 이장(移葬)하였고, 자손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연(鳶)이 떨어진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이 '연주리'가 되었다. 영릉가백년(英陵可百年)이라는 말이 있는데, 세종(世宗)이 이곳에 묻힘으로써 조선(朝鮮)의 역사(歷史)가 100년 더 연장(延長)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세종대왕기념관                      세종대왕기념관

 

 

 

 

 

 

 

 

 

 

 

 

 

 

 

 

 

 

 

 

 

 

 

 

 

 

 

 

 

 

 

 

 

 

 

 

 

 

 

 

 

 

 

 

 

 

 

 

 

 

 

 

 

 

 

 

 

 

 

 

 

 

 

 

 

 

 

 

세종(世宗)은 재위(在位) 초반에 장녀(長女) 정소공주(貞昭公主)가 요절(夭絶)하고, 재위 후반에는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잇따라 요절을 하게 되어,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佛敎) 사찰을 찾아단며 이들의 명복(冥福)을 비는 등 불사(佛事)를 주관하기도 했다.이어 소헌왕후(昭憲王后)마저 승하하면서 그는 생애 후반 불교(佛敎)에 귀의하게 된다.  

 

 

 

                                                      세종의 말년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儒敎) 성리학(性理學)이었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셋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불사(佛事) 중창(重創)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太宗)의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國政)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악화되었다. 

 

 

중풍(中風), 임질(淋疾 .. 지금의 요로결석), 노안(老眼) 등 각종 질병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몰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世子) '향(珦 .. 후일 문종)' 의 섭정(攝政)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珦 ..후일의 문종)'에게 섭정(攝政)하도록 하였다. '세종실록'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이러한각종 질병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溫泉)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걸린 중풍(中風)은 현대의학 용어로는 뇌경색(腦硬塞)과 뇌출혈(腦出血)을 포함하는 용어로서, 뇌경색(腦硬塞)은 비만(肥滿)으로 인한 혈관 내 콜레스테롤 수치 증가로 인하여 발병하며, 뇌출혈(腦出血)은 뇌경색 직전인 상화에서 고혈압이 있으면 발병하게 된다. 1450년 음력 2월 17일(양력 4월8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4월 8일), 세종(世宗)은 54세를 일기로 승하(昇遐)하였다.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文宗) 원년 3월 10일, 시호(諡號)를 '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人聖明孝大王) '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이라고 정하였다. 5월 21일 좌의정 황보인(皇甫仁)이 길복(吉服)을 입고 빈전(殯殿)에 나아가서 시호(諡號)의 책보(冊寶)를 올렸는데, 그 시책(諡冊)은 다음과 같다.  

 

 

 

 

 

 

 

 

세종(世宗)은 죽어서도 부왕(父王)인 태종(太宗)의 곁에 있고자 하였으나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손자인 예종(睿宗) 시절에 경기도 여주(驪州)로 천장(遷葬)되었다. 그러나 천장(遷葬) 후 1년도 안되어 예종(睿宗)이 갑자기 사망하여 흉지(凶地)가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으나 곧 무마(撫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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