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교회는 굉장한 세력으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꽃이 피고 열매가 채 맺히기 전에 이미 가을을 맞이한 노목(老木)과 같다"고 누군가 평하는 소리를 들은 듯하다. 신랄한 이야기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2천 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무엇인가 새로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유폐(幽閉)한 교회는 여전히 샤머니즘과 독선과 파벌과 광란의 잡음이 그칠 날이 없다. 한국교회가 새로운 의미에서 개혁을 요하는 필연성을 우리는 본다.
오늘의 우리의 현실은 날마다 그 모습과 성격을 달리 할 정도로 급격히 변천하고 있다. 거기에 발을 맞추어서 교회가 그 부가된 책임을 제대로 수행해야 마땅하다. 우선 내일의 교회는 오늘의 이 유폐한 상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그 운명이 결정된다고 본다. 그 속박에서 풀려나야 한다. 그 딱딱한 껍질을 깨뜨리고 새 역사의 흐름의 대열에 함께 참여하여 진행하는 자각과 용기를 지니는 일이 시급하다.
활발하게 가슴을 헤치고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이해와 아량이 필요하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서로 통하고, 교회와 세속이 피차 주고받는 대화가 필요하다. 유폐한 교회란 대화가 단절한 교회나 단단한 껍질 속에 독존하는 집단이다. 그것은 이미 생명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교회다. 유폐의 벽을 부수고 교회를 화석시키는 껍질을 깨치는 일이 새 시대에 교회가 사는 일이다.
형제교회가 35년의 교회역사를 뒤로 하고 이제 '평화를 만드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첫 삽을 뜨게 되었다. 이름에 걸맞게 이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기를 바란다. 먼저 교회로서의 독특한 권위를 세워가기 바란다. 그것은 세상의 집권자들이 지닌 명령자, 지배자로서의 권위가 아니라 섬기는 자의 권위, 티 없는 사랑을 지닌 자의 권위, 이 땅에 평화를 이루어 가는 권위를 의미한다.
둘째로 새 옷을 갈아입는 교회는 교회의 바탕에 언제나 그 지역사회의 요구를 의식하고 그 지역사회에서 자체의 존재이유를 설정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의 입장과 성격 등을 점검하고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처해 있는 지역사회와의 깊은 유대감, 연대감 속에서만 자체의 존재 이유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교회는 모름지기 민족 전체의 진로와 방향에 깊은 역사 감각을 지녀야 한다. 그 일을 염두에 두고 선교활동을 펼 때 교회는 비로소 정치와 교육과 문화 등에 빛을 던져주는 등불의 역할을 다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김동완 목사님 부부와 함께. 앞줄 가운데 계신 분이 장모님이시다. ⓒ박철
끝으로 '평화를 만드는 교회'는 이 땅에 진정 가난한 자들, 소외당한 자들의 계층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순한 구두선 같은 형태만이 아니라, 그러한 불행과 약자들과의 동질감, 일체감을 구체적으로 교회의 계획과 예산 속에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가지셨던 삶의 설계요, 사명감의 표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형제교회는 지난 35년 동안 '형제'라는 이름으로 풍미해온 시대정신이 있다. 아쉽지만 이제 그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평화를 만드는 교회'라는 새 옷을 갈아입으려 한다. 오늘 우리 사회와 지구촌의 가장 큰 이슈는 '평화'다. 교회는 거창한 슬로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평화를 만드는 교회'라는 이름답게 이 시대의 맥을 잘 잡아 이 땅에 평화를 진작시키고 새로운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오 주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아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를 용서하며 다툼이 있는 곳에는 화목케 하며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알리고 회의가 자욱한 곳에 믿음을 심으며 절망이 드리운 곳에 소망을 주게 하소서…. (성 프란시스. 평화의 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