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진원 문단 5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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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과 꿈의 이미지를 통해 본 ‘호수’를 소재로 한 작품
남진원
호수는 땅의 바닥이 둥글고 크게 파인 낮은 곳에 많은 물이 고인 곳이다. 산 정성에 호수가 있는 것은 산 가운데가 푹 파였기 때문이다. 한라산 백록담이나 백두산 천지 호수는 그 예라고 하겠다. 이러한 호수는 옛사람이나 문인들로부터 경이와 시적 대상이 되었다.
어느 분은 우리 민족이 바이칼 호수 부근에서 살다가 동남쪽으로 이주한 민족이라고도 한다. 사실 그곳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들의 얼굴과 많이 닮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호수의 작품으로는. 조선 시대 강릉의 시인 박수량의 한시 호수를 들 수 있다. 매우 유명한 작품이다. 호수 옆에 지어놓은 관동 8경의 하나인 ‘경포대에 올라’ 라는 작품으로 경포 호수를 쓴 작품이다.
강릉의 위인 중에 선하게 살다 가신 분으로 박수량이란 분이 있다. 참으로 깨끗한 성품으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좋은 본이 되는 분이다.
연산조 10년에 사마시에 등과하였고 용궁현감을 지냈다. 현감으로 지낼 때에는 인과 덕으로 다스리고 청렴한 관리로 그 이름이 빛났다. 강릉 12 향현의 한 분으로 관직에 있은 지 30년이지만 집 한 채 장만하지 않으신 청렴한 분이었다.
박수량 선생께서 ‘경포대에 올라서’라는 시를 지었는데, 시를 보면 그의 인품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등경포대登鏡浦臺
박수량
鏡面磨平水府深 (경면마평수부심) 깊은 물 경호는 그림 같은데
只監形影未監心 (지감형영미감심) 아름다운 겉모습 마음까지 비칠 수 있으랴
若敎肝膽俱明照 (약교간담구명조) 사람의 깊은 마음 비춰 보인다면
臺上應知客罕臨 (대상응지객한림) 경포대 오를 사람 몇이나 될까.
선생은 호를 삼가三可라고 하는데 세 가지 가하다는 뜻이다. 그 세 가지 중의 첫째는 학문이 없으면서도 사마시에 올라 욕되지 아니하니 가하고 둘째는 전답이 없으면서도 하루 두 끼를 굶지 아니하니 가하다고 했으며 셋째는 어질고 지혜롭지도 못한 사람이 산과 물을 벗할 수 있으니 속되지 않아서 가하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지초와 난초 같은 삼가 박수량 선생의 고아하고 담백한 인품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찌 오늘 작은 욕심에 연연해하는 우리들에게 큰 위안이 되지 않을 분인가!
나는 그분의 청렴함과 도덕성에 손을 모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조 한 수를 지었다.
박 수 량
참으로 곧은 마음 청렴으로 빛나셨네
선함을 실천하여 만세의 거울 되고
덕으로 베푼 선정은 청사 속에 우뚝하오
박수량의 ‘호수’는 인간의 반성에 댜한 도덕성을 표현한 작품이다. 시적 상징에서, 호수를 ‘마음을 비추는 반성의 거울’로 본 것이다.
1975년, 내가 쓴 졸저, 동시 ‘호수’는 어린이의 희망과 꿈을 그린 작품이다. 1975년 태백시 화전에서 강릉의 호수를 떠올리며 처음 쓴 작품이 ‘호수’였다.
호 수
남진원
쑤욱 쑥 나무들
누구 키가 더 크나
들여다보고
울긋불긋 나무들
누가 더 예쁜가
들여다보고
볼 때마다
커지는
나무들의 꿈
클 때마다
보고 싶은
나무들 마음
그때마다
빙그르
바람 따라 웃고
그때 마다
방글
해님 따라 웃는
나무들의
꿈이 크는
호수
(강원아동문학 제3집. 1975)
위의 작품은 75년 8월 15일 강원아동문학 3집에 수록되었다. 문학지에 게재된 첫 작품이었다. 이 동시를 쓸 때에는 경포의 호수를 떠올렸다. 호수 속에 거꾸로 잠긴 물상들이 보였다. 여기에 상상력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마음을 호숫가에 서 있는 나무들로 여겼고 그 모습을 그대로 거울처럼 보여주는 호수는 인자한 선생님이나 어머니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강원아동문학회의 가입은 최도규 선생님 덕분이었다.
경포 호수는 강릉의 바닷가에 인접해 있다. 호수가 보고 싶으면 거침없이 차를 타고 내달린다. 경포도 가는 버스도 많고 택시나 콜밴도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는 것이었다. 호수 주위를 걷고 있으면 호숫가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나무들이 모두 모습을 호수에 드리우고 있었던 것. 그걸 보고 있으려닌 희망을 품고 자라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떠오르곤 하였다. 그러니, 호수는 단순한 호수가 아니라, 어린이들의 꿈의 거울이었고 나무들은 푸릇푸릇 자라는 어린이들의 모습처럼 보였다.
지금도 강릉의 경포 호수를 거닐 때면 그런 모습을 떠올리곤 미소 짓는다. 내 시의 처음 꿈이 자랐던 곳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실렸던 동시 ‘뒷걸음질’은 한 겨울 남대천을 걷다가 얻은 착상이었다. 대관령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서워 뒷걸음질을 하며 남대천 강변을 걸었더. 시의 중요한 재료가 나에게는 ‘물’에서 얻은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