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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창조주신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우스' 땅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학자들이 말하기를
팔레스틴 남동부에 위치한 곳, 가나안 동북의 하우라(바산),
사해 남동의 에돔, 아라비아 사막북부(갈대아와 접경 지역)로
추정되는 '우스 땅' 이라고 한다.
내가 직접 성경을 찾으면서 인물대로 기록을 해봤다.
하지만 동명이인도 있고 같은 사람이라도 이름이 약간 다르게
표기되어 있을 때는 그 사람이 맞다고 기록할 수가 없어서
어느 정도 틀만 잡아본 것이다.
저 도면에서 보다시피 가운데로 족보가 이어진 것이 유다족이다.
예수가 태어나야 할 족속.
주변은 아브라함의 서자들의 역사도 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의 형 에서족 역사도 있다.
유다족만 천국에 가야하고 아브라함의 서자들이나
에서족속 들이나 유다의 다른 형제들의 족속은
지옥에 가야 하고가 아니다.
그냥 세계사적 역사 기록일 뿐이다. 유대인 위주로의 기록.
저 도표가 맞다면 욥은 에서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욥은 우스땅에서 살던 사람으로 기원전 2천년 경 아브라함과
동시대 사람으로 기독교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나 나름 성경을 뒤져 아브라함 족보를 작성해보니
아브라함의 서자 중에 '수아' 라고 나오고,
'에서족'에서 '엘리바스'와 '데만'이 나오고
'소발'도 나오고 '우스'도 나온다.
이때 당시는 사람들이 산하제한 없이 출생하면서 여기저기
살 곳을 찾아 이동하는 때라 누군가 어느 곳에 정착해서
그 땅을 차지하고 이름표를 달 때 나의 이름을 쓴다.
'우스' 라는 사람이 정착하고 '우스땅'이라고 부른다.
가인이 성을 쌓고 아들 이름인 '에녹성' 이라고 부른다.
욥이 정말 에서의 후손 중 하나인지 타 민족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욥은 유다의 후손이
아니므로 그는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이다.
기독교에서 욥을 기독교 선배 대접을 해서 정말 선배인줄 알았다.
그는 그냥 자기 부족의 신을 섬기는 무속인일뿐이다.
성경은 유대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유대교인의 선배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유대교인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의 선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전 세계인 중에 아무나 대표격을 말하는 것이다.
■(욥 1:2)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욥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는데, 어떻게 키웠는지
성경에 자세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결과로 알 수는 있다.
그들은 항상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며 포도주를 먹었다.
그들은 집도 각각 있을 정도로 거부였기 때문에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돌아가면서 맞는 형제들의 생일잔치이며 먹고
마시는 즐거운 생활이었다.
성경에서 '포도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정말 포도주 술을
먹었다는 것일 수도 있고, 풍요로움의 즐거움을 말 하는
경우도 있고 향락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아버지가 거부인 욥의 자녀들은 이 모든 생활을 했을 것이다.
아버지 욥이 신을 철두철미하게 경외했다고 해서 아내까지
자녀들까지 다 똑 같다고 보면 오산일 수도 있다. 자상하게
잘 이끌었던 남편이라면 아내나 자녀도 같이 좋은 마음일
수가 있다.
하지만 바늘로 찔러도 피도 안 나올 만큼 옹골진 마음으로
자신만의 어떤 주장으로 했다면, 오히려 더 반감을 사게 된다.
더 싫어하게 된다. 더 뛰쳐나가게 된다.
그렇다고 집을 뛰쳐 나가기에는 욥 남편과 욥 아버지가
너무너무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부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너의 신을 욕하고 죽으라!"고 한다.
이 때 당시는 딸에 대한 이름도 없고 아들에 대한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 자녀들은 성경에서 그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에 대한 중요성도 없었고
자녀라고 해도 예쁜 마음을 가지고 키운 것도 아니다.
죽을 만큼 힘든 인생을 거치고 나니 마음이 유해지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된 것이다.
자녀에 대한 예쁜 마음도 생겼다. 그래서 욥기 뒷부분에는
욥의 딸 이름도 기록이 되며 그들은 그 지역에서 가장
예쁘다고 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큰 자녀들은 얼굴도 밝고 예쁘고
자신감도 있고 활동성이 있게 된다.
■(욥 1:3)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이 가축들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얼마인지 모르겠다.
현재 소 한 마리가 300만원 이라고 치고, 500겨리이면
1000마리라는 것이다.
3,000,000원 ×1,000 마리 =3,000,000,000 원이다.
소만 있어도 떼 부자인 것이다. 거기에 양에 낙타에 암나귀에
그 가축들을 치려면 수많은 종들도 있어야 한다.
게다가 욥은 가장 훌륭하다고 한다.
이 훌륭하다는 단어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인격도 됐고
성품도 좋고 타인에게 존경도 받고 사는 것인 줄 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격이 됐다는 것인 줄 알았는데 욥기를 끝까지 읽어보니 아니다.
신께서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고 저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
하시기에 진짜 제대로 존경 받게 살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욥의 부모는 가난했는데 욥이 괜찮아서 부자로 살게 된 것인지,
욥의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이 그렇게 많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부자이면서 훌륭하기까지 하기가 힘들다. 부자이면서 훌륭할 수도 있고,
정직할 수도 있고, 인격이 좋을 수도 있고, 바른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정말 창조주께서도 "됐다"고 하실 만큼 겸손할 수는 없다고 본다.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왕 같은 부자라면, 나의 어떤 권위나 위엄이나,
나의 품위 값이나. 나를 넘보면 안 된다는 마음이나, 내 위에 올라서면
안 된다는 마음이나, 나한테 까불면 안 된다는 마음이나, 나의 말을
건방지게 끊지 말라는 마음이나, 나한테 네가 먼저 인사해라 라는
마음이나, 나를 보면 일어나서 인사해라 라는 마음이나, 내 앞에서는
겸손한 자세로 임하라는 마음이나, 없는 주제에 나서지 말라는 마음이
나의 속마음 깊이 아주 단단하게 반석으로 깔려있게 된다.
사람은 이런 마음들이 원래 있지만 아래에 있을 때는
사용하지 못하다가, 위로 올라가면 사용하게 된다.
욥의 그 바위덩어리 위엄과 권위와 품위는
그의 눈길과 느낌과 온 몸에서 발산됐던 것이다.
그 때 당시 무법시대에 사람들이 다 똑같은 값이라면 그래도 그 정도
부를 누리는 것은 창조주 신의 뜻으로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현재도 우리가 볼 때 인격이 안 좋은 것 같고, 이상한 사람 같고,
나쁜 사람 같은데 부를 누리는 것은, 창조주 신의 뜻으로서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계산 되어서 땅바닥으로 쳐박힐 지언정.
■(욥 1:4)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10명의 자녀들이 생일잔치를 거나하게 했을테니 1년에 10번에
부모 생일까지 12번이다. 우리도 형제도 많고 평생 일은 안 해도 되고,
돈은 너무 너무 많고, 종들도 많고 하다면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먹고 마시고 놀러가고 사 입고 돈 쓰기 바쁠 것 같다.
지금의 사업가들이야 사주도 바쁘고 자녀들도 그 사업 물려받느라고
바쁘다. 물론 상류층으로서의 엄청난 포도주도 있다.
그러나 욥의 시대는 가축을 치거나 농사를 짓거나 할텐데 종들이
그렇게 많은데 욥의 자녀들이 나가서 일을 했을리 없다.
딱히 할 것이 없을 듯 싶다. 먹고 마시는 것 외엔.
■(욥 1: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신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은 얼마나 신께 철저하려고 했던지 자녀들이 잔치를 끝내고 나면
마음까지 흥청망청일까봐 그 명수대로 신께 번제를 드렸다.
자녀들이 잘못해서 신께 혼날까봐였다.
신께 혼날까봐 걱정인 것이다. 욥은 신이 두려웠지만
자녀들도 신을 두려워했는지는 모른다.
다 죽여버리신 것을 보면 그들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욥 아버지 잘못만으로 자녀들 10명을 다 죽이시는
신이 아니신 것을 보면 자녀들은 많이 잘못을 저지른 것 같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면서. 입으로 떠들면서.
입으로 마구 마구 떠들면 멸망 밖에 올 것이 없다.
평상시 자녀들의 삶을 보아서 알고 있는 욥은 자녀들이 말에도
실수를 많이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품행이 방자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막아보려고 그 일로 신께 혼나지 않게하려고
제사를 철저하게 지냈던 것이다.
한마디로 신께 뇌물을 바치고 잘 봐달라고 비는 것이었다.
이것을 지금의 기독교예배로 착각하면 안되지만 비슷하긴 하다.
내가 삶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예배만 드리면 만사형통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살든지 말든지 내가 사업을 차렸으니 잘 봐달라고
고사를 지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 똑같다.
나의 자녀를 어느 정도 파악해 보면 품행이 옳은지 방자한지
잘 알 수 있다. 그런 행위가 옳은지 나쁜지도 모르는 부모가 있다.
그런 것이 예쁜 부모도 있다. 그만큼 부모가 고생한다.
욥은 자신의 자녀들 품행이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걱정이었다. 신께 혼날까봐.
제사장 엘리의 자녀들이 품행이 못 됐다고 언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 못된 자녀의 아버지인 엘리는 "얘들아 그러면 안 된다.
그러면 쓰냐" 라고 타이르는 척만 했다.
그러다 두 자녀가 다 죽고 엘리도 죽는다.
노아가 홍수에서 살아남고 얼마 후 포도주에 취해서 벌거벗고 잠을
자는 동안 함이 흉을 얼마나 보았는지, 함의 아들 가나안이 얼마나
할아버지 흉을 보았는지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노아가 깨고 나서
노발대발을 하며 그렇게 저주를 퍼부을 수가 없다. 그래도 손주인데.
조신하고 품행이 바른 자녀들을 욥 아버지의 죄 때문에 그렇게 무참하게
죽여 버리셨다면 신이 나쁘다. 불법의 신이고 불의의 신이다.
그런 창조주신 이라면 우리가 믿고 따르고 섬기고 찬양할 필요도 없다.
(에스겔 14:19~22) "가령 내가 그 땅에 전염병을 내려 죽임으로
내 분노를 그 위에 쏟아 사람과 짐승을 거기에서 끊는다 하자,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
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에 피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들이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니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볼 때에 그들에 의해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창조주께서 각 사람들에게, 각 가정들에게, 각 나라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 누구만의 넘치는 죄 때문에 자녀까지 덤으로 재앙을
내려 덮어버리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노아나, 다니엘이나,
욥이 자기의 죄 때문에 자기의 그런 삶이 오게 된 것이고,
그 자녀들이 그 재앙에서 건져지지 않은 것은 부모의 잘못으로가
아니라 그 자녀 스스로의 죄가 넘쳤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욥도 욥의 죄로만 자녀 10명이 다 죽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과 소행이 창조주께 재앙을 받을 만 했다는 것이다.
욥이 목숨을 건지고 몸만 종기로 재앙을 받은 것은 그래도 욥은
창조주께 건짐 받을 만한 자기의 공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신의 재앙이 임했을 때, 나도 고통스럽지만 자녀들까지 잡혀서
끌려나오는데, 그들은 나의 죄 때문에 부모의 죄 때문에 잡혔나보다
하면서 부모가 괴로워할 수도 있지만, 자녀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 자녀들의 죄가 컸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부모의 잘못인가보다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부모로서 잘 양육하면
그런 자녀까지 고통 속에 들어가는 재앙이 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정직과 바른생활을 물려줘야 한다 자녀에게.
에스겔 14장에 보면 창조주신은 이유 없는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고 몇 차례에 걸쳐서 말씀하신다.
■(욥 1:6) "하루는 창조주신의 아들들이 와서 창조주신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그런데, 어느 날 천상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 부분은 영의세계법으로 기록하셨다.
이 부분을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부분을 오해해서 창조주신과 동등하다고 보는
사탄(이름은 루시퍼)의 존재가 생긴 것이다.
욥에 대해서만 천상에서 회의가 열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 현재도 '나에 대해서' '너에 대해서' '가정에 대해서'
'회사에 대해서' '지역에 대해서' '나라에 대해서'
천상에서 회의가 열리고 있다.
이런 것도 정말 니 생각과 쟤 생각을 참고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의 계산의 절차를 표현하신 것 뿐이다. 재판과정이다.
나중에 죽어서 가는 천국과 지옥이 아닌 지금 현 시대와 맞물려서
일어나고 있는 영의세계가 있다. 인간의 삶을 계산하신다.
이런 것도 신의 계산의 과정 표현이실 뿐이다.
(열왕기상 22:19~22).
전지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잘 모르셔서 이 천사 저 천사의 말을
참고하시려고 회의를 여시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께서 보셨고
계산하시고 재판하시고 결정하시고 명령을 내리시고 하는 모든
것을 사람들의 입장에서 알 수 있도록 기록하신 것 뿐이다.
현재의 재판소에서도 변호사의 변론이 있고 검사의 지적이 있고
판사의 판결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창조주께서 회의를 여셨는데, 창조주의 아들들이 좌우편으로
섰는데 '사탄'도 왔다.
여기에 온 사탄은 창조주와 대항하는 존재가 아니라
욥의 죄로 형성된 영의세계의 '욥의 죄값'의 모습이다.
사탄이라고 하니까 창조주와 대결하는 존재 같고,
사람들을 지옥도 보낼 수 있는 존재 같이 느껴지는데 아니다.
창조주와 대등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영의세계에도 없고
육의세계에도 없다. 사탄이 공격하고 창조주는 구조하시고
절대로 그런 것 없다.
이름의 느낌이 쎄다고 해서 창조주께도 강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때리시고 싸매시고의 영의세계 모습이다.
신께서 사람을 다스리시기 위한 주변기기들을
영의세계의 단어로 '사탄' 이라고 하신다.
사람인 나도 '사탄' 사람의 죄성 성격도 '사탄' 사람의 죄도 '사탄'
그 죄를 적발하러 다니는 존재도 '사탄' 그 사람을 징계하러 오는
존재도 '사탄' 그 징계 도구도 '사탄',
몽땅 '사탄' 이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창조주의 영의세계는 모든 관리 도구들이 분업화가 잘 되어 있다.
한 사탄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것도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딱 여기까지 거기까지 자기의 임무가 있다.
단어별 형상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천사도 마찬가지다. 딱 거기까지의 일이 있다(스가랴 2:3).
영의세계의 진행되는 모습을 단어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세계는 사람들의 죄를 찾고 재판을 열고 징계하러 가고
도구들을 떨어뜨려 징계를 하고 하는 모든 것들이 완전 자동시스템이다.
욥기에 나오는 창조주의 아들들이 있고 사탄도 있는 청문회는
욥의 '축복'과 '징계'를 계산하는 장면이다.
축복의 값 보다 징계의 값이 클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징계'를 당하게 된다.
육의 세계 사람들의 삶의 값으로 '창조주의 법'과 '죄의 법'이
형성 되는데 서로 상계시키는 것을 인간의 모습으로 볼 때는
전쟁하는 모습 같다.
내가 선함의 행위가 많았다면 '창조주의 법'이 이기는 것이고,
내가 나쁜 행위가 많았다면 '죄의 법'이 이기는 것이다.
계시록 12장 7절에서
창조주의 법이 이기면 '미가엘' 천사장과 그의 사자들이
상층으로 올라가고, 용과 그 사자들이 하층으로 쫓겨
내려오는 것이고,
'죄의 법'이 이기면 용과 그 사자들이 상층으로 올라가고,
'미가엘' 천사장과 그의 사자들이 하층으로 쫓겨 내려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도 말타고 나와서 싸운다.
이 모습은 진짜 예수는 아니고 '최고 축복의 모습'이다.
용과 미가엘의 싸움 이 정도의 모습은
개인적이 아니라 나라적이고 세계적인 모습이다.
'최고 징계의 모습'이다.
영의세계를 보는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 중에 기도좀 한다는
교인 개인적인 싸움 정도는 거의 '군인의 칼싸움' 모습으로
많이들 본다.
개인적인 값의 상계세계와 가정적인 값의 상계세계와
지역적이고 단체적인 값의 상계세계와 나라적인 값의
상계세계와 세계적인 값의 상계세계가 있다.
'창조주의 법'이 이기면 내게 '축복'이 오고,
'죄의 법'이 이기면 내게 '징계'가 온다.
■(욥 1:7) "창조주신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창조주신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창조주께서 사탄에게 어디서 왔느냐? 물으시는 것은 내가
창조하지도 않은 사탄이라는 것이 어디서 뜬금없이 나타났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어디를 갔다 왔느냐? 무엇을 하고 왔느냐?
라는 것이다. 사탄으로서의 임무가 있다. 죄 지적.
브리핑을 하는 장면이다.
사탄이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한다.
사탄은 할 일이 없어서 여기 저기 쏘다니다 온 것이 아니다.
창조주의 허락도 없이 여기 저기 훼방하고 다니고, 유혹하고 다니고,
함정을 파놓고, 올무에 걸리고 하고, 사고도 나게 하고, 죽이기도 하고,
시험하고 다니고, 함부로 지옥도 보내고, 지옥에 온 영혼들은
창조주도 못 빼내게 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탄' 이라는 존재는 '참소' 라는 존재로 사람들의 죄를
주도면밀하게 찾아다니는 존재다. 그것은 사람의 죄를 찾으라는
창조주의 명령이시다(스가랴 1:8~11).
(민수기 32:23)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창조주신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욥을 사랑하시는 창조주께 대들기 위해서나 합당하지 않은 참소를
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창조주는 절대적으로
불의하시고 전지전능 하시지 않으시다. 참 신이 될 수 없다.
그러면 창조주를 믿을 필요도 없고 성경을 믿을 필요도 없다.
그러면 욥은 창조주를 경외하고 철두철미하게 창조주께 제사
드리면서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했고, 세상의 어떤 도덕적인
악에서도 떠나려고 무진 애를 쓴 사람인데 무슨 죄를
찾았기에 청문회가 열린 것일까?
■(욥 1:8) "창조주신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신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변호격이다. '창조주신의 법'이 변호격으로 말씀하신다.
'창조주신의 법'이 땅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왔다고 하는
사탄에게 욥에 대해서 물으신다.
욥 하나에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욥 같은 사람을 보았느냐?" "권혁미 같은 사람을 보았느냐?"
이것은 잘한다고 자랑하시는 것 같지만 "이 아이는 어떠냐?"
평가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말 잘했다고 하시는 것 같으면 욥이 그렇게 혼나지를 않는다.
'사랑의 창조주' 께서는 사람이 잘한 것을 '칭찬' 하시고 '축복'도
주시는 것이고, '심판의 창조주' 께서는 사람이 잘 못한 것을 찾아
내시고 징계도 하시는데, 이때 죄를 찾아내는 담당은 '참소'가
하는 것이고, 그 참소에 맞게 징계를 명하셨을 때는 '치는 천사'가
'징계 도구'로 치는데, 그런 사람 관련 모든 것들을 '사탄' 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육의세계도 재판 때 검사가 지적을 담당하고, 변호사가 변론을
담당하고, 판사가 판결을 담당하고, 유치장으로 호송하는 담당이
있고, 재판과정을 기록하는 담당이 있고, 유치장에 가두는 담당이
있고, 지키는 담당이 있고, 경찰이 있고, 총도 있고 몽둥이도 있고
영장이라는 서류도 있고 등 모든 담당들이 있다.
창조주신은 욥의 ‘의로움’을 사탄에게 자랑하셨는데, 사탄이 시샘을
하고 신을 꼬드겨서 징계를 내리쳤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창조주신께서 사탄에게 휘둘림을 당하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사탄 정도는 창조주신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도 안 된다.
그저 창조주신께 '사람들을 관리하는 존재' 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욥을 주의해서 보았느냐?" 라는 것은 칭찬 같지만 칭찬만 있었다면
그렇게 가축이 죽고 종이 죽고 자녀가 죽고 몸까지 종기가 나는 징계를
당하지를 않는다.
창조주는 기분이 나쁘셔서, 사탄의 충동질에 이리저리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가축도 죽이고 자녀까지 그렇게 떼 죽임을
당하게 하시지 않으신다.
■(욥 1:9) "사탄이 창조주신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창조주신을 경외하리이까"
사탄이 "욥이 까닭 없이 창조주신을 경외하리이까" 했다고 해서
욥은 의로운데 사탄이 막무가내로 참소하는 것이라든지,
사탄이 고발함으로 창조주께서 비로서 욥이 창조주를 경외했던
진정한 까닭을 안다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욥이 신을 경외하는 것은 까닭이 있었다는
것을 아신다는 것이다.
신께 혼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살았던 것은 욥이나 지금
현재의 기독교인인 우리들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예배 빠지면 혼날까봐, 말 안들으면 혼날까봐, 목사님께 대들면
혼날까봐, 교회봉사를 안하면 혼날까봐, 예배 빠지고 여행가면
혼날까봐, 유행가를 부르면 혼날까봐, 음담패설을 하면 혼날까봐,
바람 피면 혼날까봐, 음흉한 마음으로 이성을 보면 혼날까봐,
TV를 많이 보면 혼날까봐, 술 담배를 많이 하면 혼날까봐,
죽어서 지옥에 갈까봐 노심초사 하면서 살고들 있다.
■(욥 1: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욥은 그래도 자기가 받은 복이, 자기가 믿고 섬기는 신이
주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이다.
돈이 조금 있는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궁색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당당하게 "돈이란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라는 말을
서슴없이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가 있다.
그러면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아! 저는 돈이란 이렇게 생각 합니다" 라고 서로 자기의
좌우명이든 사고방식이든 자랑삼아 이야기 할 수가 있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돈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창조주신 없이는 못 살아요" 라고 말 할 수 있다.
"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죠" 라고 말 할 수 있다.
"돈이 있으면 쓰고 없으면 없으면 없는대로 살면 되죠" 라고
말 할수 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말죠".
"돈이 인생의 전부입니까?"
"돈이 행복의 전부입니까?"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래도 "나는 돈이 좀 있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돈이 한 푼도 없는 사람들은
그 돈은 "신" 이라고 한다.
그 돈은 "나의 목숨" "나의 전부" 라고 한다.
"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라는 말을 못한다.
"없으면 없는 대로 먹고, 있으면 있는 대로 먹죠" 라는
말을 못한다.
"돈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창조주신 없이는 못 살아요"
라는 말을 못한다.
"나는 곧 죽을 것 같아요"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이럴때 극단적인 선택도 할 수 있다.
나의 목숨이 끊어지게 생겼고 나의 가족의 목숨이 끊어지게 생겼다.
내가 먹고 살만하고, 부를 누리고 사니 신의 은총이라고 떠들 수도 있다.
■(욥 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그렇게 신께 아부적인 제사를 철두철미하게 지내는 욥이,
그렇게까지 잘 하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신께 혼난다면
그때는 욥도 신을 욕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괜히 때려!"
사탄이 불을 떨어뜨리고 이웃종족을 보내서 소유물을 치게 했다고
하지만 그 징계 값의 경계부분은 창조주 신께서 손을 펴서 때리신
크기의 모습이다. 사탄이 하나님의 불로 때린다.
항상 창조주께서 손을 펴시고 치시는데 무섭다.
그 무서움의 크기의 모습이 우리눈으로 볼 때는 마귀로 보인다.
이 마귀의 모습이 신께서 때리시는 크기의 모습이다.
두려움의 모습인 것이다.
욥은 그토록 얻어맞을 때 신께 직접적으로 욕하지는 않았다.
신께 혼날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철저하게 제사를 지내고 살았던
사람이 어떻게 신께 쌍욕을 할 수가 있나? 불신자였다면 모를까?
그동안 살면서 신의 존재를 경험해서 알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창조주 신을 향하여
나를 이 땅에 왜 출생하게 하셨냐고 출생도 저주하고,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푸념하고,
세 친구랑 변론하면서 자기 죄를 찾지 못하고,
계속 자기는 의로운데, 온전한데, 신께서 잘못하셔서
자기를 때리신다고 우긴다. "괜히 때려!"
그 자체가 영의세계에서는 신을 비방하는 것으로 계산된다.
창조주 신께 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창조주신은 불의하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욥 1:12) "신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창조주신 앞에서 물러가니라"
첫 번째 재판이 끝났다.
욥의 몸은 손을 대지 않는 조건과 욥의 소유물만 징계하신다는
판결이 떨어졌다. 사탄이 집행하러 나갔지만 성경에서는 항상
'네 죄악이 너를 때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사탄이라는 것은 욥의 죄 값 자체인 것이다.
그 죄만큼 혼나게 된다.
"그의 소유물을 네 손에 맡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사탄이 창조주의 명령만 듣고 그냥 나가서
"옳거니 꼴 보기 싫은 이놈들 잘됐다. 창조주의 허락은 받았고
내 맘대로 내 속이 다 후련하도록 징계를 다 퍼 부어야겠다"
하면서 함부로 불을 내려 던지고, 가축을 죽이고 종을 죽이고
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는 또 사탄이 그렇게 징계를 퍼 붓다가 잘못해가지고
욥의 몸까지 상하게 할까봐 걱정이신 것이 아니다.
이번 재판에 따른 징계의 값은 '욥의 소유물' 까지인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징계에 합당하게 창조주께서 재판을 하시고
그대로 실행되는 것 뿐이다. 때리시고 싸매시고의 법칙.
■(욥 1:13)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영의세계에서 이런 재판이 떨어진 것을 육의세계에서는 모른다.
욥의 자녀들은 생일잔치만 한 것이 아니라 나날이 잔치인 것이다.
그날도 욥의 자녀들이 맏아들의 집에 모여서 잔치를 벌였다.
이 시간에 이들은 즐겁게 먹으면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욥 1:14) "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같은 시간에 사환이 욥에게 달려와 고한다.
소는 밭을 갈고 있었고 그 곁에서 나귀는 풀을 먹고 있는데.
아주 일상적인 생활이다. 별로 죄 지을 것이 없을 것 같은
평화로운 풍경이다.
■(욥 1:15)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주께서 징계를 하실 때에 영의세계에서는 손을 펴신 것이지만
육의세계에서는 스바 종족이 갑자기 달려들어서 종들을 죽이고
가축들을 빼앗아 간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주께서 스바 종족에게 명하사 욥의 종들이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고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쳐라!" 라고 명하신다.
그러면 이 종들은 욥의 죄 값 징계용으로만 죽이셨을까?
그러면 다 죽어야지 누군 죽고 누군 살고 하나? 재수가 좋아서?
그냥? 우연히? 그러면 창조주가 필요가 없다.
그냥 우리끼리 대충 살면서 누군 죽고 누군 살고,
누군 죽이고 누군 죽임을 당하고 살면 되는 것이다.
아니다, 절대적으로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창조주께서 주관하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사가 다 그렇고 그렇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
머슴을 살아도 부잣집에서 머슴을 살아야 잘 얻어먹는다.
우리나라 왕사에서도 보면 무술이라고 해도 중전의 무술이냐
어느 1등급 후궁의 무술이냐 2등급 후궁의 무술이냐 3등급
무술이냐의 격이 다르다.
개도 주인을 닮는다. 사나운 주인 밑에서 큰 개는 사납고,
착한 주인 밑에서 큰 개는 착하다고 한다. 사나운 개는
그 주인을 안 봐도 사나운지 안단다.
그러니 그렇게 왕 같은 권세와 권위와 위엄과 품위를 갖춘
욥의 종들이었으니 그들의 품행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사람의 성품들이 다 다르듯이, 아주 나쁜 사람도 있고
덜 나쁜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다. 악인부터 죽이시고
남는 자들이 있다. 전쟁에서도 풍랑에서도 자연재해에서도
살아 남는 자들이 있다. 신께서 계산된 대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신하고 품행이 바른 종들을 욥 주인 때문에 그렇게 무참하게
죽여 버리셨다면 창조주신은 나쁘다. 불법의 창조주다.
불의의 창조주다.
그런 창조주신 이라면 우리가 믿고 따르고 섬기고
찬양을 할 필요도 없다.
■(욥 1:16)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사탄이 징계를 퍼부으러 나갔다.
그런데 그 불은 ‘하나님의 불’ 이라는 것이다.
사탄의 불로 징계하는 것이 아니다.
사탄이 징계하는 것 같지만 결론은 신께서 그렇게 징계하셨다는
것이다. 창조주께서 손을 펴신 만큼인 것이다.
■(욥 1:17)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신께서 손을 펴신 만큼 계속적으로 그 징계의 값이 끝날 때까지
육의세계에서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께서 갈대아 사람들의 무리들을 욥의 종들이
낙타를 타고 어디를 가든 낙타를 치고 있던 하는 그쪽으로
보내시고 그들을 점멸하려고 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인간사로 보면 그냥 부족과 부족과의 싸움으로만 보인다.
인간사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이다.
인간들의 죄값을 서로 상계시키기 위한 창조주신의 명령이시다.
■(욥 1:18)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그렇게 하늘에서 징계가 임하고 있는 그 시간에도
욥의 자녀들은 잔치가 끝나지 않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
잔치만 많이 해서 신께 매를 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잔치를 많이 하면 '흥청망청'과 '쓸데없이 떠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당연히 멸망이 온다.
■(욥 1:19)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
욥의 맏아들 집에서 잔치를 거들던 한 종이 달려와서,
거대한 '바람-태풍'이(출애굽기 15:10, 민수기 11:31,
욥기 28:25, 욥기 30:22) 집 모퉁이를 쳐서 집이 무너지고
자녀들이 다 죽었고 자기만 간신히 피하여 살아나왔다고
보고를 한다.
그 아비규환 현장을 보지 못하면 사고의 무서움을 모른다.
직접 들어가서 당했는데 간신히 살아나왔다면 모를까.
그런데 지금은 ‘영화’ 라는 것을 통해서 그와 비슷하게
알 수가 있다.
영화로 표현하는 것이 실제상황의 몇% 정도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가만히 앉아 뉴스를 듣는 '세월호' 사건이나, '타이타닉'
이라든지 '포세이돈' 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배에서 어떤 고통이
벌어졌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런 모습을 영화로 보면 "아~ 그랬구나..." 라고 할수 있지만
직접 본다면 본인도 죽을 만큼 마음이 아프다.
절규가 절로 나온다. 나의 가족이 아닐지라도.
트라우마가 생겨 평생을 즐겁게 살 수 없을 수도 있다.
다른 어느 부모가 아무리 죄를 지은 자녀라 할지라도,
싸가지가 없는 자녀라 할지라도, 그 집이 무너지는 아비규환
현장에서 다 한꺼번에 금새 죽어버린 것이라도 슬픈데,
한 명이라도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쳤을 것이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닐 것인데 그 모습을
생각하고도 거룩한 시를 쓸지 모르겠다.
"주신 이도 신이시요 죽이시는 이도 신이시요"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불쌍하다.
우리가 나쁜 사람은 그냥 막 죽어나가도 괜찮다는
영화를 많이 보았을 뿐이다.
■(욥 1: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하루 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욥이다. 욥도 놀라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리긴 했다.
놀라 죽겠는 마당에 칼이나 가위로 머리털을 밀고 있다?
머리털을 밀었다고 해서 지금의 1인 시위하듯이 바리깡으로
밀었다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을 것이다.
우리도 놀라면 그렇게 한다.
하지만 바로 이성을 차리고 두려우신 신께 머리를 조아린다.
너무 놀라 울지 못한 것인지 사랑이 없이 강한 사람이라
울지 않은 것인지 어쨌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는 말은 없다.
■(욥 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그리고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유명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말을 한다.
"내가 빈손으로 왔으니 내가 또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내게 재물과 자녀를 주신 분도 신이시니 거두어 가시는
분도 신이십니다. 마땅하십니다. 찬송 받으시옵소서"
라고 말했댄다. 이것을 예배라고 번역했다.
욥은 이때 옷을 찢고 티끌을 날리고 베옷을 입고
"신도 어쩜 그러실 수가 있느냐, 내가 이렇게
신을 잘 섬기고 있었는데 무슨 청천병력이냐"고
울고불고 난리를 친 것이 아니라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갑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하면서 이 모든 일에 입으로 범죄 하지
아니하고 신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다.
대단하다.
한마디로 가축이나 재산이나 종들이나 자녀들이 다 죽고
없어지는 판국에 거룩한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욥이 훌륭해 보이나?
요즘 말로 말하면 바다에서 아비규환의 '세월호' 라는 사건이
터졌는데 어느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의 가정에 10명의 자녀들이
전부 세월호를 타고 어디를 가는 중에 다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도 그들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고,
어떻게 고통하다가 죽게 되었는지 실상을 보고 살아나온 어떤
사람의 소식을 듣고도 그 부모가 기절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나의 자녀 10명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나의 자녀를 다 죽이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옳습니다. 마땅하신 징계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하면서 그 부모가 이 모든 일에 말로도 범죄
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무릎 꿇고 기도만 드렸다 라는 것과 같다.
팽목항까지 갔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갔어도 바다만 바로 보고
짐싸들고 왔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10명의 자녀를 바다에 두고.
그러니까 나라에 소송도 걸지 않고,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관공서를 찾고 범인을 찾고 하는, 이 일로 누군가랑 다툼도 없었으며
울고불고 난리 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나의 자녀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신데 그 신께서 죽이셨으니
당연히 죽은 것이다" 라는 말이다.
자녀 하나를 잃은 다른 부모들은 세월호 근처에서 헤어 나오지도
못하고 거적데기를 깔고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
오지도 못하고 있는데, 자녀 10명을 잃은 그 기독교인 부모는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교회를 잘 다니면서 신앙생활에 주력했다는
것이다.
너 참 강하고 훌륭하구나.
이런 부모의 믿음직한 모습이 기독교인으로 마땅한 모습인가?
하나님의 심판의 법으로 보자면 당연한 것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그 부모가 부모로서 마땅한지는 모르겠다.
어느 기독교인은 이런 모습이 멋있다고 따라하고 있다.
사랑이 없을수록 눈물도 없고 동정도 없다.
그 모습이 훌륭한 것이라고 하는 것인지…
여느 부모 같으면 기절하고 죽었을 것이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시지 그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러셨냐고 목 놓아 울부짖었을 것이다.
그런다고 창조주께서 그 부모까지 죽여 버리실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강하고 멋있게 훌륭하게 믿음으로 대응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음 차례로 욥의 몸이 두들겨 맞았다는 것이다.
부모 자식 간이 아니라고 해도 그 '죽음' 이라는 관계에서
'사랑' 과 '동정' 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울고 불고
한다. 욥이 울고 불고 했는데 성경기록에서 빠졌나?
욥의 친구들이라고 하는 그들도 욥이 죽은 것도 아닌데
이런 마음으로 그 난리를 치고 울고 불고 일주일을 말을
못 했었는데 말이다.
욥은 창조주신만 두려워 했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다.
■(욥 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창조주신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 하니라"
이런 큰일을 당했어도 모든 일에 입으로도 창조주께 직접적으로
욕을 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창조주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훌륭할 수가 없는데 도대체 창조주도 이상하시지
왜 2차 청문회를 여시고 2차 징계를 판결하셨을까?
"사람의 범죄 함이 없는데 사탄이 공격했다, 창조주신의 징계가
임했다"고 주장한다면, 창조주 신은 신도 아니다.
성경을 논할 필요도 없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함으로 인생이 펼쳐졌다는 것도 다 허상일 뿐이다.
그러면 모든 인생이나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허상이 된다.
성경도 허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