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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에베소서 1장 3~7절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그리고 골로새서 이 세 권은 바울서신 중에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바울의 이해가 가장 깊이 담긴 편지다. 바울의 사역 가운데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 에베소다. 다른 곳은 선교 여행을 하면서 짦게 머물고 지나갔는데 에베소에는 3년을 머물렀고, 바울이 순교하고 난 뒤에 요한이 와서 죽을 때까지 사역을 한 곳이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바울과 요한의 사역이 겹쳐진 교회이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한 교회였다.
에베소 교회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19-20장에 기록되어 있고 요한계시록 2장에서 일곱 교회를 언급할 때 제일 먼저 언급되었다. 바울도 지나가고 요한도 지나간 교회, 소아시아 지방의 중심인 에베소 교회를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외부의 도전도 많았고 제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자기 생명을 분배하면서 양육했던 교회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쓴 편지로 빌립보서와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까지 4권을 옥중서신이라 한다.
에베소서의 주제는 교회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신부다. 비유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밀이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이라고 했다.
에베소 교회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있어서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사도행전 19-20장에 보면 유대인들의 계교와 방해, 그리고 원래 에베소 지역에 있던 더 이상 우상 숭배를 할 수 없게 된 우상 숭배자들의 훼방이 극심했다.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사도행전 20장에 나온다. 에베소를 떠나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모아놓고 한 설교를 보면 얼마나 바울이 이 교회에 대해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애절한 마음으로 당부를 했는지 읽을 수 있다. 사도행전 가운데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모아놓고 한 설교가 가장 심금을 울리는 메시지로 읽혀지고 있다.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라는 표현을 할 만큼 깊이 자기 자신을 드려서 양육한 곳이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바울은 에베소 말씀을 시작하면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라고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 했다.
신약 성경에는 여호와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했다. 예수가 아버지라고 불렀던 분,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라고 하면 막연하기도 하고 사람마다 개념이 다르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같은 말을 하지만 내용을 들어보면 바알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외친 사람들이 너무나 나쁜 짓을 많이 했다.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고 정죄하기도 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편파적인 하나님을 만들어서 전하기도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고 하면 좋은 이미지도 있지만 나쁜 이미지도 세상에는 널려져 있다.
그렇지만 예수가 아버지라고 불렀던 분, 예수께서 하나님을 생각하시는 그대로 우리가 알면 이의가 없게 된다. 예수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이것이 신약의 전환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 이외의 새로운 장을 여는 말씀이 되기도 한다. 우리 하나님은 예수가 아버지라고 불렀던 분으로 정의하면 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께서 아버지라고 하신 분이다. 히브리서 1장 1-2절에는 옛적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로 계시된 하나님, 이 하나님보다 더 분명한 하나님이 없기에 우리는 하나님은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호칭할 때는 인자(人子)라고 하셨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나는 너희와 종이 다르다.”라고 하신 적이 없다. 자신은 사람의 아들인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던 것이다. 그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인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의 모든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고 그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이다. 나의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았다고 한 것처럼 예수님 자신은 “나는 그에게서 왔다.”라는 이 고백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 4장 34절에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 하셨고 5장 19절에도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하셨다. 5장 30절에는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라고 하셨고 7장 16절에는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 하셨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은 이런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 중에 우리가 못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의 양식은 우리를 이 땅에 있게 하신 분, 우리를 보내신 이의 일을 행하는 것이고 우리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우리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려는 것이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다.” 이런 말씀들은 다 우리가 따라 해야 될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신다.
예수님은 유대 스승들과 달리 율법 속에서 아버지 마음을 읽어내셨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 그분은 우리에게 절대군주가 되어서 우리를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 마음으로 주신 것이구나.’ 이렇게 율법을 이해하셨던 것이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이 그렇게 중요시했던 안식일까지도 사람을 위해서 주신 것이며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혁명적인 생각을 하셨던 것이다.
구약에도 없는 비유를 들어서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99마리 양을 놔두고라도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소유로 보면 99마리 양이 중요하지만 아들같이 생각이 되었다면 한 마리 양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하셨다. 이런 비유들을 통해서 아버지 마음을 이끌어내신 것이다.
구약성경 마지막 말씀인 말라기 4장 6절에는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이것이 구약 마지막 메시지다.
이 약속을 성취한 분은 예수 자신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해하고 우리를 율법이나 무서운 전제군주 앞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마음 안으로 인도해서 우리가 거기서 숨쉬고 살 수 있게 하셨다. 율법 아래서 우리는 다 눈치만 발달해서 ‘이것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나님이 보시면 어쩌나?’ 하며 살 사람들인데 아버지 앞에 있는 아들의 마음을 회복시키셨다. 그래서 아버지 마음을 자녀에게 가져오셨고 또 우리 마음을 아버지 앞에 있는 사람으로 가져가셨다. 그래서 우리는 당당하게 “나는 당신이 지은 피조물입니다.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당당하지 않은가.
‘나는 왜 이럴까?’ 이것이 내가 해야 될 고민이 아니다. 내가 공부를 못하는 것도 나의 성질도 알고 보면 다 부모에게서 유전자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면, 하나님의 우리의 아버지시라면 우리가 어떠하든 당당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필요하다면 더 주시지 않았겠는가.’라는 마음으로 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3절에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이 바울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 하였다.(고후1:20) 그리스도라는 통로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관계를 가지게 되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우리에게 오게 된다.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이라는 말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늘에 속한 것, 영적인 복, 이것은 전적으로 내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며 나로 말미암을 수 없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사도가 된 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았다고 하였다.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닌 것, 이것이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이다.
우리 인생에서 “내가 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진짜 영적인 복이고 하늘에 속한 복이다. 그런데 ‘그래도 내가 열심히 살아서 이렇지.’ ‘내가 머리를 잘 써서 이렇게 되었지.’라는 생각이 슬며시 들 때가 있다. 왜 그런 생각이 가능한가? 그것은 땅에서 난 것이기 때문이다. 노력이 가미되면 되는 것, 머리를 굴리면 되는 것, 부지런하면 되는 것, 이것은 땅에서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늘에 속한 것은 전혀 다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간 인천의 교회는 굉장히 뜨거운 교회였다. 나는 그 교회에서 배울 것이 있지 않겠느냐는 마음으로 갔는데 정말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무엇인지 헷갈렸다.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하고 기도해서 응답을 받고……, 그런 것을 보니 사람에게서 날 수 없는 것 같았다. 헷갈리다가 서울로 가게 되었는데 그때 일주일간 공백이 있어서 ‘영에 속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1권은 말들이 복잡한데 2권에 가니까 줄 치면서 읽어지는 부분이 나왔다. 사람이 혼의 능력, 혼적인 능력, 정신적인 능력으로, 사람의 의지나 혼에 속한 것으로도 예수를 사랑할 수 있고 예수를 위해서 큰일도 할 수 있고 죽기까지 헌신하고 충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이 다 영적인 것이고 하늘에서 온 것으로 알았는데 사람에게서도 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하면서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하였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이 육으로 마친다는 말이 아니라 시작이 육이기 때문에, 혼적인 것이기 때문에 육으로 마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그 책을 보고 영적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사람의 능력에서도 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헷갈리기 쉽다. 어느 종교에도 신비한 것이 없는 종교가 없다. 신비하니까 사람들이 매혹되고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칠 만큼 매료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영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에게서도 얼마든지 그런 일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을 알고 서울로 갔는데 거기는 세련되게 주님을 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자들도 많고 지적인 자원들도 많아서 어마어마한 자원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자마자 ‘아, 이것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하셨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경험이 돼야 우리가 하나님의 찬송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한 것인지 하나님이 하신 것인지 헷갈리면 끝에 가보면 결국 자기 자랑밖에 안된다. 그러면 누가 도대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겠는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시자 사람들은 “그러면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예수님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하셨다(눅18:27). 이것이 포인트다. 이것을 경험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자리로 가게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 나로 말미암지 않은 것을 누리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에 다 포함된다. 우리는 “나는 죽었다. 저 사람은 죽었다.”고 하고 “누가 부활했다.”고 하는데 성경에는 그렇게 써놓지 않았다. 바울, 베드로, 요한은 위대한 사도였지만 성경은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 죽었다고 하지 않았다. 물론 부활했다는 말도 없다. 이 사람들은 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 사람들이다.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할 때마다 자기 깃발을 꼽는다. 그렇게 여기는 내 깃발을 꼽고 저기는 저 사람 깃발을 꼽으면 이 세상에 예수의 이름을 빌어 수많은 깃발이 난무할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다 이 한 분 안에 포함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여기서 모두 통일되게, 하나로 만나지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우리는 다 다르다. 친한 친구도 만나다 보면 싸울 일이 생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면 그 안에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높은 산이 평지가 되고 골짜기가 메워지고……, 그리스도 안에는 차별이 없다. 누구라도 예수의 운명 안에서 사람이기만 하면 다 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자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열어놓으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바울의 핵심 사상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후1:20)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늘에 속한 모든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주시는 통로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담는 그릇으로 지어졌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지으신 본래의 자리에 있으면, 보화를 질그릇에 담은 것처럼 되고,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는 사람이 된다.(골2:9)
그러므로 우리는 내 죽음, 내 부활을 따로 갖는 것이 아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사는 것이고,(골2:12) 예수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빌3:9)
창세 전에 택하심
4절에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였다.
창세 전 일을 어떻게 알아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했는가? 집을 짓는 과정을 몰라도 지어진 집을 보면 누군가 짓기 전에 이미 설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 하나만 보아도 그러한대 인간이라는 존재를 보면서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계획하셨다. 예정하셨다.’라고 아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계획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고,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5절에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다.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한 것은 이 사람은 멸망할 사람이고 저 사람은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시나리오같이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도록 예정하셨다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있는 일이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될 때 “이것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너무 기막히게 앞뒤가 맞아 들어가고 중요하게 여겨질 때는 “우연히 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셨구나.”라고 말하게 된다. 자기를 부르신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느껴질 때 우리도 “창세 전에 이 일을 준비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내 상태가 있기 전에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었다. 나는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변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안식을 누리게 된다.
오늘 이 목사님도 새해 인사에서 우리 생각에 달린 문제라면 죽을 때까지 내 생각은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는데 십자가에 못박혀 내려올 수 없는 그 운명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변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을 붙잡게 된다고 하셨다.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이 변개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다는 것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은 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치 항구에 있는 닻과 같아서 우리를 거기 묶어 두니까 우리가 든든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처럼 풍랑에 일 때마다 시달릴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예정하셨다. 사람으로 정하셨다. 예수 안에서 우리를 정하셨다.’ 이 사실에 우리가 붙잡혀 있을 때는 든든하다. 내 상태가 변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라고 알 때 안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알고 보면 우리는 변할 수 없는 것, 변하는 것을 붙잡으려고 하면 사람은 집착을 하게 된다. 변한다고 생각하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원래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그 사람을 알 때 안식하게 된다.
내가 원래 말씀하는 형제인 것도 아니고 원래 내 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원래 내 가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원래 나는 하나님의 부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고 부름 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알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쉼을 얻게 되고 놓여지게 된다. 이렇든지 저렇든지 깊은 안식 안에 있는 사람으로 살게 된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안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거룩하고 흠이 없다.
에베소서 1장 4절에는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였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우리의 용도가 구별되면, 그 용도 안에서 보면 흠이 없다. 흠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일에 그러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용도가 구별되느냐에 따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흠집투성이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농구를 잘하는 사람을 야구장에서 평가할 수 있겠는가, 축구 잘하는 사람을 골프장에서 평가할 수 있겠는가. 손흥민 선수가 뛸 때 보면 사람인가 타조인가 싶을 정도로 빠르다. 하지만 골프 경기장에 가면 잘 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한번 치고 느긋하게 걸어서 다음 코스로 이동하는데 빠른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농구선수 마이크 조단은 에어 조단이라며 훨훨 날던 사람인데 메이저 리그에 진출해 보겠다고 했지만 타율 1할을 넘기지 못하고 창피만 당하고 나왔다고 한다.
사람이 어디서 평가되는가? 우리에게 만일 도덕의 잣대, 율법의 잣대, 기능의 잣대를 들이대면 우리는 다 허물투성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용도대로 쓰이면 우리는 거룩하고 흠없는 존재다. 누구라도 하나님을 표현하는 일에서는 온전하다. 하나님을 누리는데 있어서 우리는 흠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아버지 앞으로 가야만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된다.
우리의 소망이 여기 있다. 창세 이전에 나에게 계획을 가진 분,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다 하시는 분에게 가지 않으면 어디서 우리 가치만큼 대우받고 살겠는가. 인생의 용도가 이것이다. 다른 것에서 잘나려고 하지 않고 아들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일에 우리는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들이다. 이 자리만 알면 누구라도 복된 인생을 살 수 있다.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심
아들이 된다는 것은 생명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셔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벧후1:3, 4)라고 했다. 신의 본성에 참여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인생의 내용이 되어 그분의 생명과 본성이 우리 속에 담겨서 우리가 그를 나타내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담는 그릇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 사람이다. 왜 사람이라 하면서 우리를 존귀하게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그릇이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복된 것이다. 이것이 상속자, 아들의 축복이다. 하나님 아들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상속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보다 크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하였다. 예수님을 보면 독생자의 영광, 아들의 영광인데, 아들이라면 저럴 수밖에 없는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이다. 우리로 말하자면 우리 인생은 왜 육체로 사는가? 육체로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서 우리의 살이 되는 것이다. 말이 말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살이 될 때 모든 사람에게 양식이 될 수 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에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이 말씀이나 맏아들에게 하신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말씀은 같은 표현이다. 맏아들에게 한 표현과 많은 아들들에게 한 표현이 다르지만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내용이 되어 그분을 표현하고 그분을 나타내기 위해 사는 것 아닌가. 이것이 아들됨이다. 아들의 축복이고 아들의 사명이다.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기를 원하는가? 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서 그분의 인격으로 연합해야 하는가? 예수의 죽음 안에서 내가 발견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그릇이 되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상속되기 때문이다. 인생이 이 일을 위해서 지어지지 않았는가!
아들이 되고 아들의 축복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내용이 되어 그분의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은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우리에게 존귀하고 귀한 축복이다.
마귀는 소유의 영광, 즉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 주면서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했지만 우리에게는 더 큰 영광이 있다. 천하만국의 영광보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다. 이것을 상속자로 누리는 축복을 갖고 살기 때문에 다른 것이 부럽지 않은 것이다.
이 유업이 있을 때 우리는 시시한 것에 매여 살 필요가 없게 된다. 크고 든든한 유산을 가진 사람이 천 원짜리 한 장으로 싸우겠는가. 시장에 가서 깎아 달라고 실랑이를 할 필요가 없는 넉넉한 사람이 되듯이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신성의 모든 충만을 육체로 거하게 하셨다.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신성이라는 말은 신기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질을 우리 육체 속에 담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의 성품에,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다. 이것이 아들됨의 축복이다. 하나님 자신을 유업으로 잇는 데는 그릇이 필요하다.
구속 곧 죄 사함 받음
7절에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였다. 개역개정에는 속량, 곧 죄사함으로, 나머지 번역에는 구속, 곧 죄사함으로 번역되었는데 redemption은 죄수의 몸값을 주고 되찾아올 때 쓰는 말이다.
구속이라는 말은 몸값을 지불했다는 뜻과 되찾았다는 뜻이 같이 있다. 몸값을 지불하고 되찾았다는 뜻이다. 많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몸값을 지불했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우리는 이 말을 되찾았다는 데 중점을 둔다. 하나님이 우리를 되찾으셨다. 자기의 상속자가 되는 자리, 거룩하고 흠없게 하시고 아들이 되고 은혜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그 자리로 우리를 되돌리신 것, 이것이 구속이다.
성경에서 죄는 빗나갔다는 뜻이다. 히브리어 ‘하타아’나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빗나가다’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 즉 잘못된 행실로 인해 양심에 거리끼는 것은 다른 말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것은 빗나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서 빗나간 것, 이것이 죄다.
위치를 이탈한 것이 죄라면 위치를 회복한 것이 죄사함을 받은 것이다.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위치를 이탈한 인생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안으로 되돌아오게 하셨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거기서 내려올 수 없는 분, 우리와 같은 운명을 가진 분을 보니까 우리가 부끄러워했고 싫어 버렸고 무시했던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하신 자리고 축복의 자리라고 알게 된다. 우리는 창세 전에 예정한 사람에게 두신 존귀한 목적을 귀히 여기지 않고 살았다. 이것을 예수를 통해서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가 우리의 구속자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으로, 하늘에 속한 모든 영적인 복을 담을 그릇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할 자리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한 것, 이것이 예수의 사역이고 하나님의 갈망이다.
우리를 이 자리로 돌아오게 하셔서 구속, 곧 죄사함이 있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찬송이 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린다.
[ 기 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고귀한 목적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로 존귀하게 회복시켜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구속하심으로 빗나간 위치에서 우리를 되돌리셔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는 자로 되돌려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가 영원히 우리 자리인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일생 주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사람으로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