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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문즉답
2022. 6. 1
이런 자리를 갖게 되어 감사하고 여러분이 이 자리를 빛내고 도와주시기 바란다. 나에게 지금 꿈이 하나 있는데 출세를 한번 해 보는 것이다. 여러분이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다. 법륜 스님께서 즉문즉설을 하시는데 사람이 많이 모인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뒤로 방송을 통해서 들은 사람이 굉장히 많다. 우리 복음도 그렇게 전파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오늘이 첫날인데 잘 되면 세상으로 나가서 우리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복음은 이상한 생리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을 보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이 있다. 예수님 시대에도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괴로운 사람들이 먼저 온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이전에도 여러 가지 복음이 많이 전파되었다. 그때 그때 필요한 복음이 전파된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 주셨으니까 와서 먹으라는 것이 복음이다.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다. 율법이나 계율 통해서 사람이 다 했는데 그래도 안되는 것이 있다. 사람이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해 주신 것이다. 집에서도 아이들이 못한 것을 부모가 해줘야 되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까지 부모가 다 해주면 안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하면 된다. 밥을 해 먹는 것은 사람이 하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여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밥을 해 주신다.”는 복음은 없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살면서 우상이나 숭배하고 어찌할 수 없으니까 불러내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잘 사는 사람은 불러낼 수 없다. 불러내도 오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약속한 아들을 낳지 못했다.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겠다고 하셨다. 그때 아브라함은 모든 것이 끝난 때였다. 그래서 그 믿음 좋던 아브라함이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라는 장막 문에서 듣고 웃었다. 그 믿음좋은 사람들이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믿음으로도 안 되는 것, 이것을 해결한 것이 복음이다.
지금 교회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많다. 믿으라고 하고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라고 한다. 어느 종교에도 그런 말이 없는 데는 없다. 아무리 해도 안되는 것 때문에 복음이 생긴 것이다.
이 복음은 이 시대와 교회의 상황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나는 사십오 년 동안 오직 예수만을 따르고 추구해 왔다. 거기에 내 인생길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도 그것을 보고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다른 교회와 분명히 다른 노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유명한 미국인 선교사가 내 소문을 들었던지 나를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이 목사님께서는 뭐가 다른 사람하고 다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두말없이 “예수 아는 것이 다르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것이 비웃는 표정으로 “예수를 안다고요?”라고 물었다. 내가 다시 “예, 예수 아는 것이 좀 다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물어야 될 텐데 자기들은 예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내가 다른 예수를 안다고 생각하고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 후로도 우리가 말을 하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내가 늘 안타까워하는 것이 이것이다.
특별히 우리 교회에는 교사들이 많은데 한 교무실에서 4-8년씩 같이 근무하면서도 전도를 못했다. 어떻게 4년이나 8년 동안 복음을 전하지 않고 지낼 수 있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직능별 순을 만들면 좋겠다는 말을 몇번 했는데 안됐다. 직능별로 만나게 되면 얘기할 것도 많고 또 교회에 오기도 쉬우니까 제안한 것인데 안됐기에 ‘왜 그럴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를 살펴보니까 나도 개인 전도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잘 안되는 일이다.
옛날에 경대 캠퍼스에 다닐 때는 한 청년을 붙잡고 6개월 동안 창세기 공부를 한 적이 있다. 김철진이라고 경대 상대에 다니는 학생인데 결혼할 때는 말도 안하고 해 버렸다. 그 뒤로 못만나게 되었는데 금융계 회사에 다니다가 정년퇴직을 했고 지금도 교회생활지를 보내주고 있다. 알고는 있는데 전도가 안되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 잘하는데 전도를 하면 안됐다. 여러분도 아마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려고 해도 무엇을 말할지 몰라서 안한 경우가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로 모임을 통해서 사람들이 오게 되었는데 우리에게 복음이 분명하다면 누구에게도 말이 나올 것 아닌가. 꼭 굉장한 것이라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야 되는 것이다.
60년대 이후에 우리나라 기독교계에 큰 지각변동이 있었는데 그것이 구원파 운동이다. 삽시간에 전국에 퍼져서 당시 여름집회를 대학교 강당을 빌려서 했던 것이다. 당시에 2000명이면 굉장히 많은 숫자다. 2천명이 모여서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집회를 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질문한 것이 그것이다. “구원 받았습니까?” 당시 기독교인들 중에 “예, 나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할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때 가 봐야 알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호구로 알았던 것이다. 자기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었는데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물으면 모르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은 후에 천당에 가고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죄사함의 복음이 나와서 상당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우리 교회에도 거기 다니다 온 사람들이 많다. 거기 오래 다녀도 안되니까 우리 교회로 온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전국에 굉장히 많다. 그러므로 뭔가 한 가지라도 확실해야 한다.
요즘 세계는 무역전쟁 중이다. 한 가지라도 확실한 것이 나와야 되지 여러가지가 나와도 세계적인 것이 아니면 돈이 될 수 없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천재적인 사업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파산 직전이었던 ‘한국 반도체’를 인수하여 반도체 사업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계는 반도체 전쟁이다. 미국도 이 전쟁 때문에 삼성에 투자를 요구하며 한국을 끌어들이려고 한다. 그래서 삼성과 엘지가 미국에 엄청난 투자를 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가 여러가지로 탁월한 제품들을 만들고 있는데 그 중에 세계적으로 없으면 안될 것이 반도체다.
나도 개인 전도를 못하면서 남 보고는 ‘왜 그것을 못하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 곤욕을 치르지만 그래서 또 새로운 길을 발견하곤 했다. 충주에 있을 때는 고등학생과 전문학교 학생들뿐이었어도 나는 성경을 확실히 연구해서 가르쳤다. 그런데 학생들은 좋은지 싫은지 반응이 없었다. 충주 사람들의 독특한 기질이 그러하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굉장히 답답했다. 그래서 ‘왜 이럴까? 주의 말씀이 꿀송이보다 달고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라 했는데 어찌 이럴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그 질문은 내게로 돌아와서 ‘나는 어떤가? 나에게는 하나님 말씀이 꿀송이 보다 더 단가?’ 이 질문이 목회를 한지 10년 만에 내게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날밤 나는 아주 캄캄한 밤을 지내게 되었다. 다음 날 갈 곳이 없어서 조그만 서점을 찾아가게 되었고 거기서 발견한 것이 ‘주의 형상을 닮아’라는 작은 책이었다.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을 것 같아서 사왔던 것이다. 그 책에서 나는 ‘아,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있구나. 이런 사람을 찾고 있구나.’ 이것을 발견했다.
나는 8년 동안 한 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한 번도 이런 말을 해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다. 그러니 자연히 어떻게 되었겠는가.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데 설교를 듣는 사람이 알겠는가? 그때는 어디로 간다는 개념도 없었다. 그런데 길을 발견한 것이다. ‘아,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시는데 이런 사람을 찾고 있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나는 충주에서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다. 그것도
그전에는 능력이나 은사에 큰 관심이 있었지만 나는 안돼서 못했다. 삼각산에 다녔고 부흥회로 좇아다녔지만 안됐다. 할 수 없이 나는 안되는 사람인 줄 알고 접었어도 항상 속에서는 찝찝했다. 그런 것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열심이고 그 교회도 불덩어리 같았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을 때 서대문순복음교회와 우리 교회는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우리 교회는 냉랭했는데 그 교회는 뜨끈뜨끈한 만두집 같았다. 스스로도 한심했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다 이 교회로 데려오면 좋겠다. 우리 교회보다 여기 오면 얼마나 좋겠는가.’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때 만일 용기가 있었으면 다 이끌고 갔을 텐데 나는 그럴 용기가 없어서 못했다. 그래서 항상 마음이 찝찝했다. CCC에 가서도 그러했다.
그런데 그때 워치만 니를 통해서 하나님은 은사나 능력을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성경은 사람됨에 따라서 보여지는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의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성경을 이렇게 볼 수 있는가!’ 하고 감탄했고 그래서 두 번째 읽으면서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달라져서 이렇게 보이는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은사에 대해서는 말짱 정리가 되고 말았다. 나는 은사가 없어도 된다. 사람이 되면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를 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분이 신이면 나와 관계가 없다. 그런데 예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됨에 관심이 있다. 지금도 그러하다.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것이 다른 점일 것이다.
여러분, 오늘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 나같은 사람이 특별한 것을 한다는데 누가 이렇게 오겠는가. 특별한 것, 못보던 것을 보면 사람은 주저하는 것이 본성이다. 호기심을 갖고 온 사람도 있겠지만 주저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대구 사람들은 유독 그런 경향이 강하다. 안전 위주고 보수적이기에 새로운 것에 대한 반응이 미약하다. 서울에서 유행한 것이 다른 도시에서는 한달 뒤에 유행하는데 대구에서는 일 년은 지나야 유행한다. 군고구마 장사까지도 그렇다. 그만큼 신중하고 정중한 점은 좋다. 그러나 너무 느린 점은 답답하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복음에 대해서는 민감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복음은 가난한 자의 것이다. 그래서 생리가 가난한 자에게 먼저 갈 수밖에 없다. 복음은 우리 인생 문제를 우리가 원하는대로 해결해 주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함께 가야 되는데 지금 함께 못가게 되었다. 그 원인을 여러분은 다 아실 것이다. 그래서 요구가 다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사람이 원하는 것이 다르다. 사람의 의논을 통해서 복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토론해서 될 문제도 아니고 연구하거나 합의해서 될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우리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절대로 우리 생각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복음인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본 바요 들은 바요 주목하여 만든 바라고 했던 사도 요한과 달리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했던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므로 복음은 분명히 우리 상식에는 생소한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백 살에 아들을 주셨다는 것도 우리 상식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삭이 눈이 멀어서 축복을 잘못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 되었다는 것도 우리 상식에는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삭이 너무 편했고 문제가 아무것도 없어서 나이가 드니까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서 잘못 축복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가 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그렇지 않다. 이삭은 하나님이 내신 사람이다. 그가 만일 눈이 밝고 젊었으면 절대로 야곱을 축복하지 않을 사람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야곱을 축복해야 되는데 이삭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를 축복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해석한다면 이삭이 눈이 멀 때까지, 모를 때까지, 속을 때까지 기다리셨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은혜가 된다. 인간이 어떻게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실수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복으로 바꾸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내가 모르고 잘못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복이 된 것이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어떤 원리가 있다. 아무나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실수하면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는 어떤 여건 때문에 실수한 것이니까 그 여건이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여건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니까 잘못 듣고 ‘내가 실수해 버리면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시겠구나.’라고 알면 안된다.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온다. 누가 가난한가, 돈이 없어서 가난한가, 물이 없어서 가난한가, 먹을 것이 없어서 가난한가? 그런 것이 아니다. 남편 없는 과부와 같은 것이 가난이다. 모든 것을 갖추었어도 남편이 없으면 가난한 여자다. 아무리 귀걸이 목걸이 반지를 다이아로 꾸미고 다녀도 남편이 없으면 가난한 여자다. 다른 것으로는 여자를 바꿀 수 없다. 다이아가 많다고 남편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이것이 인생의 가난함이다.
어떤 사람들은 천사를 부러워해서 돈 없고 능력 없고 신비가 없으면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나는 한 때 신비가 없어서 가난했지만 그것은 나의 근본적인 가난이 아니다. 능력이 없어서 가난했지만 그것도 근본적인 가난이 아니다. 나처럼 신비나 능력이 없어도 잘사는 사람이 많다.
나는 장사를 하다가 망했다. 분명히 나는 능력이 없다. 그러면 능력이 없다고 다 못사는가? 그렇지 않다. 능력이 없어도 잘사는 사람이 있다. 돈도 마찬가지다. 돈이 없다고 다 불행한 것이 아니다. 교회에 안오고 돈이 없어서 행복한 사람이 있다.
인생의 가난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인격이 없는 것, 위치가 없는 것, 이것이 가난함이다. 신도 인생도 못된 것, 이것이 가난함이다. 천사도 못되고 사람도 못된 것이 가난함이다. 천사처럼 되고 싶은 사람은 항상 자기에게 불만이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늘 가난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꼭 필요한 것이 사람에게 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끝없이 찾아다니신다. 싫다는데도 끈질기게 찾아오신다. 이것이 우리에게 축복이다.
오늘 여러분도 복음에 목말라서 여기 오셨을 것이다. 나는 추기경도 아니고 노회장도 아니다. 한국 교회에서 이단으로 몰린 시시한 사람이다. 아무도 옹호하는 사람이 없다. 이런 나에게 뭐하러 왔겠는가. 여러분이 목마르고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가난한 사람, 목마른 사람이 너무 좋다. 내가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배부른 사람은 상대가 안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도 가난한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 줄 아시고 좋은 질문을 해 주시기 바란다.
송영소
머리도 밀었으니 거칠 것이 없다고 하셔서 거침없는 질문을 드리겠다.
요즘 교회에 목사님이 기존에 45년 동안 말씀하셨던 것과 새롭게 말씀하신 것 때문에 많은 혼란이 있는데 전에 하시던 말씀과 새로운 복음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많이 묻는다. 어떤 형제는 바벨탑이 무너진 것은 언어가 혼란이 와서라고 하는데 왜 언어가 통일이 안되는지? 새로운 복음이 명확하고 쉽게 인식이 될 때 한 생명이 되고 함께 살 수 있는데 지금 일부분 형제들은 화, 수, 목, 금, 토, 일 모임 중에 화, 수, 금, 토 모임은 거의 안듣는다고 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새로운 복음을 말해도 인식이 안되고 이해가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시기 바란다.
이현래 목사:
여러분이 생각을 잠깐 바꿔 보시기 바란다. 아브라함이 백 살에 이삭을 낳았다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이것은 아브라함이 노력해서 된 것도 아니고 어떤 신비에 의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것이다. “내가 네게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은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다.
이 방법과 이천 년을 건너 뛰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부활하신 것이 다른 것인가? 생각해 보자.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부활하겠는가?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내가 지난 45년 동안 말한 것도 똑같은 말이다. 시대가 다르고 판이 달라서 다른 제목으로 말했을뿐이지 똑같은 것이다.
여러분은 테이프가 있으면 다시 들어보고 책이 있으면 다시 읽어 보면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비유로 하자면 씨를 심을 때와 싹이 날 때와 나뭇가지가 날 때와 잎이 날 때와 꽃이 필 때와 열매를 맺을 때가 다르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른 것이겠는가. 다른 것이 아니다. 목표가 어디 있느냐를 봐야 한다.
성경은 일관되게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쓰여졌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했는데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기간이 얼마인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딱 이렇게 골라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했다.
더 쉬운 비유로 말씀드리겠다.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는 신발이 없어서 짚신이나 짚 게다를 신었다. 그러다가 나무로 만든 게다를 신었다. 나는 농촌에 살지 않아서 짚신은 안신었고 나무 게다를 많이 신었는데 게다가 양쪽 복숭아씨를 찧어서 피가 나곤 했다. 그러다가 고무신이 나왔고 운동화가 나왔다. 신발의 역사도 굉장히 길다. 오늘 여러분이 신는 나이키는 많은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신발은 신발이다. 과학도 그러하다. 많은 과정을 겪어서 나온 것이 과학이다.
갑자기 내가 이 말을 하겠는가. 나도 예수만 45년 추구했다. 그러니 갑자기 한 말이겠는가. 나는 신발 공장을 45년을 한 것이다. 짚신부터 시작해서 지금 나이키까지 왔다. 그래서 최종적인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이렇게 추구해 왔으니 이런 말을 하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최종적인 복음이라는 말을 하겠는가.
‘최종적’이라는 말에 걸린다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교황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닌 나 같은 사람이 그렇게 속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말을 하는가. 오늘까지는 최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은 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오늘 것을 받지 않으면 내일 또 그럴 것 아닌가. “이것이 끝이라고 할 수 없네. 더 기다려 봐야겠네.” 하다가 언제 만나겠는가.
바울도 자기 시대를 마지막 시대라 했다. 심지어는 처녀들은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그냥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까지 했다. 그렇다고 바울이 거짓말을 했겠는가. 바울의 마음은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이것은 내 생애에서 마지막 복음이다. 시간적으로도 마지막이지만 더 이상의 복음이 없다.”고 한 것이다. 나도 그렇게 말한 것이다. 오해하면 안된다. 내일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 여유 있는 소리 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주시면 그 날의 양식은 그 날에 주신다. 내일까지 두면 썩어버린다.
흑백TV에서 칼라TV로 바꿀 때 아이들에게 TV를 사 주려고 했다. 그런데 흑백시대가 지나가고 칼라 시대가 온다는데 흑백 TV를 사려니 그렇고 그렇다고 칼라 TV를 사려니 너무 비싸서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2년 동안을 TV를 못보았다. 그것이 오히려 아이들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어느 집에서는 여유도 없으면서 칼라 TV를 샀다. 소니 칼라 TV가 처음 나왔을 때는 굉장히 비쌌는데 여유도 없는 집에서 그걸 샀다. 그래서 아이들이 TV 앞에서 보았다. 처음 칼라 TV를 보았으니 신기했을 것이다. 그러다 그 집 아이들이 눈이 못쓰게 되었다. 그래도 볼려면 칼라 TV를 봐야 되지 남이 다 본 다음에 보면 재미가 있겠는가.
286 컴퓨터가 나왔을 때 ‘더 좋은 것이 나오겠지.’ 하면 컴퓨터를 못쓴다. 286이 나왔으면 사서 쓰다 보면 또 386이 나올 것 아닌가.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된다. 내일 더 좋은 것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나는 하나님을 찾다가 못찾았다. 그런데 무엇을 발견했던가! ‘나는 내일 일을 모르는 사람이구나.’ 이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손을 놓고 말았다. ‘내일도 모르는 사람이 하늘의 하나님을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하니 내 인생의 거품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땅에 주저앉았다. ‘나는 피조물이구나. 하나님 모르지만 나는 피조물이구나.’ 하나님도 알고 내가 피조물인 것도 알면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몰랐다. 그런데 나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나의 기초다.
지금도 똑같다. 일일이 다 지금 말을 할 수가 없지만 이런 예가 너무 많다. 끝나면 뭔가 평안해졌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다른 사람은 끝나면 절망일 줄 아는데 나는 끝나면 그때 평안해졌다. 이것이 내 체질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성경의 일관성, 하나님 계획의 일관성을 다시 검토해 보기 바란다.
김근태
교회생활 하면서 연합하는 것이 교회의 최종적인 목표로 알고 교회생활을 했고 그 생활 안에서 만족함을 누렸는데 목사님이 이번에 새로운 복음을 선포하시니 내 안에 드는 생각이 이상하게 연합을 추구하는 삶 속에서는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문득 이 질문을 드리고 싶었다. 연합하는 것과 내 정체성을 찾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에 대한 목사님의 답변을
이현래 목사:
우리 인간사회, 이 지구상에서 연합이라는 말은 굉장히 어렵고도 힘든 말이다. 정치적으로는 미국 외에는 연합국이 없다. 미국은 주마다 하나의 독립된 정부다. 주 정부는 자체 방위군을 가지고 있다. 각각 다른 나라가 연합되어 있으니까 언제라도 캘리포니아 주가 미연합국(USA)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통일국가를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미국은 유럽에서 다양한 역사적 경험을 한 다음에 미대륙을 발견하고 점령한 사람들끼리 연합국을 세운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파별로 땅을 점령했고 그 땅이 영구적으로 그 지파의 된 것과 같다.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가 미국이다. 중국이 더 커져서 미국을 침략한다 해도 미국에게서는 항복을 받을 수 없다. 50개 주를 다 항복받기는 불가능하다.
이차대전 때 미국은 일본이 미국처럼 강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왕 한 사람이 항복하니까 다 항복했다. 왜 한반도가 분열되었는가? 루스벨트는 중국에 있던 관동군이 엄청 강하다고 오해했다. 만약 전쟁에 이겨도 미군이 중국에 상륙해서 관동군을 처리하려면 엄청난 희생이 있어야 된다고 계산했기 때문에 스탈린을 끌여들었던 것이다. 그때 스탈린은 한반도를 분할 통치할 것과 북해 사도를 반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막상 일왕이 항복을 하고 나니까 저절로 다 항복했던 것이다. 미국은 그렇게 될 줄 몰랐다. 정보의 부재가 이런 역사적 비극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연합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은 연합체가 되게 하려고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요 생명이시다. 그러나 형태는 없다. 형태가 있는 세계를 다스리려면 형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만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미국의 연합과 다르다. 미국의 연합은 정치적인 형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연합은 없으면 멸망이고 있으면 영생이다.
영생은 의미로 보면 지극히 행복한 것, 더 이상이 없는 행복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아기를 낳듯이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연합되어야 무엇이 더 될 수 있다.
하나님과 연합이 안되면 사람은 다른 것과 연합해 버린다. 여자가 어떤 남자와 결혼을 못하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과 같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역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연합이 안되니까 사람은 뭔가 다른 것과 연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멸망이라고 한다. 혼잡이라고 하고 바벨이라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되면 완성이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결혼하기 위한 준비다. 결혼을 해야 아기를 낳는다. 인생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을 인간대사라 했다. 옛날에는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상투를 못틀고 머리를 땋고 다녔고 아무리 어려도 결혼을 했으면 초립동이라 해서 상투를 틀 수 있었다. 머리를 땋고 있으면 노인이라도 어린아이 취급을 하고 하대를 했다. 결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결혼은 혼합이 아니라 연합이다. 결혼한다 해서 남자가 여자 되거나 여자가 남자 되겠는가? 하나님과 사람도 그러하다. 연합한다 해서 하나님이 사람 되거나 사람이 하나님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고 사람은 여전히 사람이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굉장히 논란이 많다. 그렇지만 나는 확신한다. ‘사람은 반드시 사람이라야 한다. 신은 반드시 신이라야 한다. 이 둘이 섞이면 절대로 안된다.’ 사람에게 신성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사탄의 계략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이 말을 할 수 있다. 십자가에 못박혀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는 이것을 분명히 갈라놓았다. 사람은 사람, 신은 신으로 딱 갈라놓았다. 그래서 우주가 편안해 졌다.
여러분이 마음 속으로 해 보시면
‘나는 인생이다. 신기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인격이 필요하다.’ 이러면 사람이 안정된다. 내가 방황할 때 나는 신기를 갖고 싶었다. 그래야 흥왕하니까 그런 것을 원했는데 신기를 가지면 일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인생에는 아무 도움이 안된다.
조용기 목사는 병 고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단일 교회로는 70만이 넘는 성도를 가진 세계 제일의 교회다. 마지막에 그분은 파킨슨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그분의 마지막 설교를 들어보았더니 똑같았다. 병 고치는 것이 아니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어디서 만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결정된다. 그분은 병 고치는 예수를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기 병을 못고치고 죽었다. 내가 만일 병 고치는 예수를 만나서 교회가 커지고 유명해졌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겠는가.
김치현 목사가 있던 토론토의 그 교회의 목사도 늦게 목사가 되었는데 신유의 은사를 받아 많은 병자들을 고쳤다. 김 목사 아버지가 김 목사가 간염에 걸렸을 때 나와 김목사를 갈라놓기 위해서 토론토를 보냈다. 그 교회에 치료하라고 보낸 것이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가 간암에 걸렸는데 병원에도 못갔다. 자기가 한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끝까지 하나님이 고쳐주신다고 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 교회 사람들이 술렁거렸고 그 와중에 몇 사람이 김 목사를 따라나왔다. 그것이 토론토 교회의 시작이다.
어떤 것도 마지막에는 다 폭로되고 만다. 사람들이 아는 예수는 별로 못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무결점 인간, 완전 자라는 것밖에 모른다. 나도 그 예수를 알려고 했지만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분과 상대가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황했는데 딱 갈라지고 보니까 예수를 알기가 너무 쉽다.
하나님은 지금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는 확실히 안다. 하나라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사람을 확실히 알든지 신을 확실히 알든지 해야 한다. 어중간하게 섞인 것을 알면 안된다.
연합은 같은 자리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데 서로가 필요해서 둘이 하나되어야만 하는 자리에서 필요한 것이다. 연합은 둘이 아니다. 어디 가서 예수와 연합이 되겠는가. 연합될 자리가 없다. 예수를 알아볼수록 그러하다.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만으로도 연합될 자리가 없다.
아무나 십자가에 못박히겠는가. 아무나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도 해 보았지만 아무리 해도 안되었다. 따라갈 수도 없고 접촉할 수도 없다. 오죽하면 내가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을 굳이 하겠는가! 그 자리밖에는 내가 그분을 접촉할 자리가 없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것이다.
나도 잘나갔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똥 싸는 데까지 뭐하러 가겠는가. 왜 이것이 남아있겠는가. 다 싫으니까 안가져가고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하는데 찬송가에 얼마나 십자가가 많이 나오는가.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지나다 보면 십자가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다. 십자가를 빼면 기독교는 없다. 그렇지만 십자가에서 무엇이 되었는가?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내 죄를 대속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내 죄를 대신할 수 있는가? 빚은 대신 갚아줄 수 있지만 죄는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나에게 이런 의문이 생겼다. ‘이것이 아닌데…….’ 했지만 물어볼 데도 없었다. 다 믿고 있는데 나 혼자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 문제가 내 평생 따라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인격적인 예수를 만나고 나서 비로소 그 의문이 끝났다.
지금 기쁜소식선교회에서는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면서 “죄, 죄”하고 있다. 나는 한번도 여러분에게 “죄, 죄” 하지 않았다. 나도 안되는데 남보고 죄 짓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못한 것이다. 나도 못한 것을 어떻게 남에게 지우겠는가. 그래서 우리 교회에 오면 편한 것이다. 죄 소리를 안하니 얼마나 편한가. 다른 교회에 가면 입문이 죄다. 죄부터 해결해야 한다.
부흥회를 하면 첫날은 죄를 회개하는 날이다. 어떤 사람은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회개한다. 어느 기도원에 가니까 벽에 피를 철철 흘리는 예수를 그려놓았고 부흥사가 “보십시요. 우리를 위해서 피흘린 양입니다.”라고 하니까 옆에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을 했다. 나는 그때 얼마나 불안했던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생각해 보니 내가 백지장처럼 산 것은 아니지만 ‘과연 내 죄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 죽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겼다. 이것이 해결이 안되었다.
그런데 이 말이 왜 나왔는가? 연합 안에서 나온 말이다. 연합이 아니면 내 죄가 안된다. 그러므로 연합이 중요하다.
칼빈은 구원론에서 구원의 정상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써놓았다. 지금 교회들의 상태가 그런 상태다. 바르트는 예수는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하셨으니까 우리는 그 화해를 누리면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더 어렵다. 쉬운 것 같지만 더 어렵다.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 없다.
그런데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를 만나면 그때 이 문제가 해결된다. 왜냐하면 너와 내가 하나고, 예수와 내가 하나고 전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른 세계로 온다. ‘죄가 해결되는가 아닌가?’ 하는 세계가 아니라 죄가 없는 세계로 오는 것이다.
죄가 있는 세계에서 죄를 해결하려고 하니 가능하겠는가. 밥을 안먹으면 배 고픈 세계에서 참으려고 한다고 되겠는가. 내가 병원에 입원해 보니까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한번도 없었다. 병원에서 무슨 조치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은 다음 날부터 먹을 것을 준다고 하기에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은 없어도 기대를 했는데 아침에 쥬스 한 잔을 주는 것이었다. 무슨 풀을 갈았는지 50CC도 안되는 파란 쥬스를 주는데 그것을 먹고 나니까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에 미음을 주었다. 미음을 먹고 나니까 똥을 누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데도 기저귀를 깔아놓고 똥을 누라고 했다. 중환자실에는 화장실이 없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침대에 그냥 누라고 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똥을 누라니 어쩌겠는가. 딱하지만 똥을 누니까 죽처럼 줄줄 한 사발이 나왔다. 그것을 아줌마가 똘똘 뭉쳐서 갖고 가 버렸다. 깨끗하게 끝내버렸다. 그런 세계에서는 배고픈 것, 똥 눌 것을 걱정할 것 필요가 없다.
우리도 세계를 옮기면 된다. 그런 것이 없는 세계로 판을 옮겨야 한다. 있는 그 자리에서 참고 안참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해보았어도 안되었다. 나는 여러분도 판을 옮기기 바란다. 그러면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전우석
구속과 구원의 차이가 무엇인지
이현래 목사:
구속과 구원은 다르다. 구속은 인격이 제 위치로 돌아가는 것,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새 사람이 되었다 해서 사람이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구원은 위치가 바뀐 사람들의 사회다. 집을 짓는 재료는 나무고 그 나무로 집을 지어놓은 것은 가옥이다. 집을 보고 나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집을 보고 “집을 참 잘 지었다.”고 할 수는 있어도 “재목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구속이 재료라면 구원은 작품이라고 알면 쉬울 것이다.
백승환
소유와 존재를 구분지어 말씀하시는데 한 사람을 형성하는데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한다. 소유와 존재를 어떻게 구분지을 수 있는지?
이현래 목사:
좋은 질문이다. 지금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소유와 존재를 잘 구별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소유와 존재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니까 아담은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다고 대답했다. 나무는 그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나무만 본다. 우리의 소유는 물질적인 것도 있고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도 있다. 나 외에 다른 것은 다 소유다. 그러면 나는 어디 있는가? ‘그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어려우니까 우리가 모른다.
아주 간단한 것이 있다.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안에는 존재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너와 내가 하나인 것이다.
소유가 있으면 하나가 안된다. 그렇다고 소유를 없애야 되는가? 없앨 수 없다. 그것으로 살아야 한다. 소유는 필요다. 존재가 무슨 행동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소유다. 예수님과 우리가 왜 연합이 안됐던가, 왜 연합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가? 소유가 달라서다. 예수님의 소유와 우리의 소유가 다르다. 그러니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나와 이병철 씨가 소유로 연합되겠는가? 존재로는 하나다. 그 사람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 어디 있는 사람인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하나다.
그러니까 연합도 섞여 있는 세계, 나와 존재가 갈라지지 않고 섞여 있는 세계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연합이라는 말이 없는 것이다. 칼빈이 말했는데 칼빈주의자들도 연합을 부르짖는 사람이 없다. 왜 없는가?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연합은 예수 안에만 있다.
서찬양
십못내가 당연한데 이 난리를 치고 있는 상황이 이해가 안된다. 이렇게 느끼는 내가 비정상인가? 십못내는 팬티같은 것이다. 사람이 팬티입고 바지 입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어느날 사람들이 자기 팬티를 보여 주면서 “너도 팬티 입었어? 나도 입었다. 너랑 나랑 똑같구나.”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해괴하다고 느끼는 내가 비상식적인지, 아니면 “야, 나도 팬티 입었다.” 하면서 보여줘야 될지, 아니면 조용히 그냥 있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현래 목사:
성경에 있는 말을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는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하였다(요1:11). 그 다음 구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다. 자기 땅에 오셨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당연한 데 오신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왜 문제가 생겼는가? 소유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민족주의, 사회주의라는 주장과 소유가 있었다. 그런데 예수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래서 미움을 받았던 것이다.
세례요한은 당시에 가장 존경받던 선지자다. 그는 원래 제사장 가문 출생으로 세마포 옷을 입고 성전에서 최고급의 관리 노릇을 해야 했을 사람이다. 사람 문제를 하나님께 상신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사람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였다. 제사장은 어디를 가든지 일을 안하고 성전 봉사만 한다. 그런 사람이 다 벗어버리고 가죽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백성들에게 “깨어나라. 의를 행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
그런 사람인데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비난했다가 잡혀가서 목이 잘려 죽었다. 한참 민주와 운동을 할때 우리나라 교회에서 예수보다 세례요한이 훨씬 인기가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 사람이 사람을 보내 예수님에게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겠는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하셨다. 이 말을 듣고 세례요한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야, 저것은 아니구나.’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정희원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질문인데 올해 정년퇴직이후에 어떻게 살면 좋을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란다.
이현래 목사:
정희원은 만난지도 오래되고 내가 사랑하는 형제다. 뭔가 순수한 것을 찾느라고 방황하는 형제다. 가톨릭 수사가 되려고 들어갔다가 안됐다. 수도원 신부님이 면밀히 검사해 보고 도저히 안되겠다며 나가라고 해서 다시 우리 교회로 왔다. 적응이 잘 안되는 형제다. 안경사,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있고 대학을 세군 데나 다녔다. 그래도 적응이 안되었다.
어려운 문제다. 어디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복음 안에서는 정희원도 문제가 안될 것이다. 그러니 적응될만한 것을 찾아보기 바란다. 내 생각에는 세상 어디에도 안돼도 예수 안에는 된다고 대답할 수 있다.
나도 망하고 나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 동네에서 한 골목이 장사하는 골목이었다. 빤히 날마다 보다가 아침에 가게문을 못열고 문을 닫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솟아날 구멍이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니 나올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생지옥이었을 것이다.
예수 안에서 길을 찾기 바란다. 거기는 길이 넓다. 세상으로 가는 길은 넓고 좋은 것 같은데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장사를 아무나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정직하게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소질이 있어야 된다. 운동선수가 못될 사람은 평생 연습해도 운동선수가 안된다. 예체능계는 80가 타고난 것이고 20%가 훈련으로 되는 것 같다. 자녀들이 예체능계로 갈 수 있을 것 같으면 그쪽으로 보내야 되지 억지로 의과대학에 보내려고 하면 안된다.
사람마다 자기 소질이 있으니 그것을 살리면 된다. 정희원 형제에게도 꼭 맞는 소질이 있다. 그것을 어디서 찾겠는가. 십자가에 못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도 있지 않은가. 정희원이 낫지 않은가. 아마 정희원 형제는 십자가에 못박혀도 내려올 수 있다고 은근히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내려오지 못했다. 그런 사람을 우리가 따르고 있다.
정희원 형제가 살 자리를 찾아야 한다. 판을 바꿔야 한다. 그 판에서는 안된다. 영어가 안되는 사람이 영어를 하려고 하면 되겠는가. 판을 바꾸면 쉽다. 미국에 가보니 제일 답답한 것이 영어를 못하는 것이었다. 영어를 못하니까 미국 사람을 만나면 겁이났다. 요금이 비싼데 왜 국적기를 타겠는가. 외국 비행기를 타면 싸다. 그렇지만 물 한 모금 얻어먹기도 어렵다. 말을 못해서 답답한 세상에서 못살겠거든 칼기를 타면 된다. 칼기를 타면 티켓팅할 때부터 얼마나 자유로운데 굳이 미국에 살면서 ‘나는 왜 영어를 못하는가?’ 할 필요가 없다.
최순열 김영수
죽음 안에서 판이 옮겨지고 보니까 반드시 지금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던 옛 생명의 법이 사라졌는데 예수의 죽음과 내 죽을 운명은 같은 죽음인가, 아니면 다른 죽음인가?
그리고 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현래 목사:
나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수를 찾아야 되는데 못찾아서 방황하다가 이렇게 내게 딱맞는 예수를 만났다고. 내가 신학을 추구한 것도 아니고 누구를 대항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나는 단지 그 사람을 발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내 세계가 달라지고 판이 옮겨지고 모든 것이 다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예수를 추구하다가 만난 것이지 바울이 갑자기 예수를 만났듯이 만난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말만 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반응하든지 나는 그대로 인정한다. 나는 나대로 내 입장만을 발표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경험이 있으면 말하면 되고 자기가 확신하면 확신하는대로 발표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연기가 너무 많이 난다고 하는데 나는 연기를 어쩌겠는가. 나무가 타려면 연기가 나야한다. 아주 좋은 나무는 탈 때 연기가 좀 덜 나고 생나무는 많이 난다. 연기 나는 것을 너무 뭐라고 해도 안되고 그렇다고 일부러 연기 날 일을 해도 안된다.
우리 집은 이 동네에서 가장 오목한 데 있다. 이런 곳을 옛날에는 명당이라 했다. 제일 좋은 자리다. 그런데 한 가지 결점은 이곳은 산으로 둘러쌓인 지형이라서 모든 것이 우리 집에 와서 뭉친다는 것이다. 옆집에서는 연탄을 피우고 뒷집에서는 나무를 땐다. 할머니가 아궁이에 나무를 때는데 그냥 군불만 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궁이에 불을 넣어놓고 문을 닫아놓는다. 그래서 밤새도록 연기가 난다. 그분 계산으로는 밤새도록 나무가 타면 방이 식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정 사정하고 별 서비스를 다해서 겨우 오후 늦게 불을 피워서 한 시간 정도를 때기로 했다. 그리고 한 집에서는 연탄을 피우는데 연탄가스가 우리 집으로 밀려온다. 견딜 수 없어서 사정하다가 안돼서 방을 고치도록 우리가 경비를 부담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방을 고치는 중이다.
싫으면 싫은 사람이 피해야 한다. 남보고 연기 피운다고 할 수 없으니까 연기 때문에 못견디겠다고 가서 사정하면 된다. 안되면 돈이라도 주고 아부라도 해야 되지 연기 피우는데 어찌하겠는가.
그런데 연기가 다 나가고 나면 숯이 남을 것 아닌가. 옛날에 경주에서는 숯불로 밥을 해 먹었다고 한다. 우리 교회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날이 오지 않겠는가. 나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두번째 질문에는 혼의 죽음과 육의 죽음을 굳이 가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죽으면 다 죽지 이것 따로 저것 따로 죽겠는가.
혼의 죽음이라는 말은 ‘자아가 죽을 때’, ‘자아의 파쇄’라는 워치만 니의 작품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은 ‘내가 죽어야 되는데, 내 생각이 끝나야 되는데…….’ 이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책을 본 일이 없다. 내가 죽겠다고 해서 죽어지는가? 내가 나를 버린다 해서 버려지는가?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다. 내가 못버리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혼이냐 육이냐 할 것이 없다.
나는 ‘영에 속한 사람’ 그 책을 읽으면서 딱 한 가지를 얻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많은 일들, 특별히 종교 사업을 하는 동안에 혼으로 하면서 영의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CCC에 있을 때였다. 거기서는 일할 때마다 목표를 정해 놓고 기도하고, 그래서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CCC방식이다. 그런 것을 보면 잘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책을 보고 그것을 깨달았다.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업적을 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구나. 잘해도 혼의 일이 있고 잘못해도 영의 일이 있다.
나는 목표를 정해놓고 기도해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해봐야 안될 것을 왜 하겠는가. 그렇다고 다른 사람처럼 금식기도를 해서 기어코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안되도록 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한번도 못해보았다. 내가 CCC에서 밀려난 것도 금식기도를 하지 못해서다. 다 금식기도를 한다고 강원도로 갔는데 나는 못갔다. 내가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내 몸이 못하기 때문인데 그때 감원하면서 첫째 조건이 금식기도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이 첫째 감원 대상이었다. 나는 금식을 못해서 첫째 조건부터 감원대상이었다.
내가 언제 여러분에게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하라고 했는가, 문제가 있으면 기도해 보라고 했는가? 기도하는 것이 나빠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말을 안했던 것이다.
답답하게 왜 영이 죽냐 혼이 죽냐 하고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영이냐 혼이냐 하고 가를 때는 내가 하는 것이 영으로 하는 것인가, 혼으로 하는 것인가 하고 망설일 때였지만 그 외에는 그런 생각을 전혀 안했다. 나 대로, 그 인격대로 되는 것이지 개가 짖을 때는 몇 번을 짖어야 되고, 이런 사람이 올 때는 이렇게 짖고 저런 사람이 올 때는 저렇게 짖어야 한다고 공부해서 되겠는가.
나는 안될 것은 못한다. 그럴 능력이 있으면 내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얘기하겠는가. 아무것도 안되니까 이것을 찾은 것이다. 그러니 나는 자랑할 것이 없다. 잘나서 된 것이 아니다. 그 믿음 좋은 세계에서 못따라가니까 여기 온 것이다. 그러니 자기 능력대로 하면 된다. 힘이 있으면 하면 된다.
고민을 하는 사람을 보면 속으로 피똥 쌀 때까지 해 보라고 둔다. 피똥을 싸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무엇인가를 해 낸다. 그러나 나는 아예 불가능하다. 어려서부터 병이 들어서 그런 도전정신이 없다.
사람 될 생각을 해야 되지 혼만 따로 영만 따로 구분해봤자 안된다. 나는 그것 때문에 옛날에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나 안돼서 못했다.
청년부 강희정
늘 안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찾아오신다고 하셨다. 목사님은 자신의 안됨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를 발견하기까지,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안됨을 트라우마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현래 목사:
내가 안되는 것을 짊어지고 있으면 뭐하겠는가. 나는 안되는 것이 있으면 잊어버린다.
중심부 김종애
십못내를 외치는데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어야 되는가. 소외되고 어린 생명을 찾아보고 이해하는 것도 미덕인가?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이전에 말씀하신 사람이면 다 된다는 복음과 생명이 자라서 인격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복음은 다 필요없는 것인가?
그런 것이 옛 복음이 되어서 너무 괴롭고 힘들다. 왜 필요없는 복음이 되어 버렸는지, 나는 사람이면 다 된다는 것에 너무 행복했는데 지금은 십못내를 외치라 하고 그것을 외치지 않으면 외눈 가진 괴물이 되는 것 같다. 왜 그럴까? 뭐가 잘못되었는가? 십못내를 외치지 않으면 말씀을 못알아듣는 사람이 되었다. 십못내를 외치지 않는 지체를 사탄이라 하는데 누구보고 사탄이라 하는가?
이현래 목사:
서면으로 온 질문을 읽어 보았다. 원체 많아서 한 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데 종합해 보면 구속의 복음을 받으면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안해도 되느냐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 이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그러면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가 하고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염려하지 말 것은 아기가 필요하면 아기부터 낳으면 된다. 그 다음에는 아기가 기어다닐지 똥을 쌀지 아기가 알아서 한다. 아기를 낳지도 않고 ‘아기가 어떤 기저귀를 차겠는가.’ 하고 있으면 복잡해진다. 인생을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복잡하다. 일단 할 것은 하고 그 다음에 부딪쳐봐야 되지 않겠는가.
예수 안에서 발견되면 예수 안에서 발견된 사람으로서의 위치가 있고 할 일이 있다. 없어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셔야 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부터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루터가 사람은 나면서부터 율법적이라고 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서양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 그래서 인격은 말할 수 없고 행동만 말한다. 이것이 미국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들이 앉아서 “어떻게 우리가 손님을 대접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일단 죽게 되었으면 살고 봐야 한다. 내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알았으면 위치부터 바라야 한다. 바르기도 전에 “이러면 안된다.”고 하고 “저러면 안된다.”고 하기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운 것이다. 해 보지도 않은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하면 되겠는가. 해 보고 “나는 구속의 복음이 너무 좋은데 할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면 내가 할 일을 가르쳐주겠다.
나는 일할 것이 너무 많다. 어떤 사람이 재테크를 잘해서 돈이 수백억이 되었는데 그 재산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항상 고민이라고 한다. 딸이 몇 되는데 그것을 다 딸들에게 나눠주면 사회가 욕할 것이고 그렇다고 당장 어디 쓸 데도 없어서 밤낮으로 고민이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몇번 듣다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막말을 해 버렸다. “나는 지금 돈이 없어서 못쓰는 사람이요.” 그 말을 들었으니 “내 돈좀 쓰세요.” 하면 좋겠는데 그 사람은 그런 말을 안했다. 세상에는 별 사람이 다 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삼키고 있을 텐데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이 생각해 보니까 혼자 먹어도 안되겠고 자식들에게만 주려고 해도 안되겠으니까 어디 써야 될지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돈 한푼도 없지만 돈이 있기만 하면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돈이 있는 대로 다 쓸 수 있다. 노태우는 정치헌금을 받은 것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걸렸다. 그 돈을 어떻게 할 줄 몰라서 지하실에 두었다가 6천 억원인가가 발각되어 감옥에 갔고 전두환은 다 쓰고 돈이 28만원밖에 없다고 했다. 돈을 써버린 사람은 그래도 동지가 있다. 28만원밖에 없는 사람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겠는가. 그만큼 썼기 때문에 누가 줘도 준다.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서 돈을 쓸 수 있고 못쓸 수도 있다.
나는 필요한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하지 않은 소유 때문에 인생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소유에 덮이면 포장지만 좋은 인생이 된다. 요즘 어떤 물건은 포장지가 금박지로 되어 있다. 그렇게 비싼 포장지를 안써도 될 텐데 까보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닌데 포장지만 좋다. 인생도 포장지로 싸놓으면 안되고 있는대로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