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Title) : 산상설교 해설(Explanation of Sermon on the mountain)
부제(Sub-Title) : 산상설교 개론(Introduction to Sermon on the mountain)
성경 본문(Bible Text) : 마태복음(Matthew) 5,6,7장
인도의 국부(National Father)인 마하트마(Mahatma) 간디(Gandhi)가 변호사가 되기 위해 영국에 유학을 했을 당시에 신약의 복음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복음서 중에서 특별히 마태복음 5~7장에 있는 산상설교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서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힌두교의 가장 위대한 경전이랄 수 있는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에도 없다고 칭송한 적이 있습니다.
산상설교에 크게 감명을 받은 간디는 영국에 있는 교회에 출석했다가 인종 차별을 당하면서 교회에서 쫓겨났습니다. 즉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읽고 들으면서도 그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순종할 맘이 없었던 영국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간디는 실망을 했습니다. 영국 교회가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적용하여 사는 모습을 간디에게 보여주었다면 후에 인도에서 기독교의 위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부터 저는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설교에 대해 묵상해 보고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산상설교의 개론적인 부분을 살펴보고 내일부터 본문을 조금 더 세밀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산상설교에 대한 명칭
예전에 한국 교회는 마태복음 5~7장을 흔히 산상보훈(山上寶訓)이나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했습니다. 산상보훈이라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말씀하신 보배로운 교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 주신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보편적으로 산상보훈이나 산상수훈이라는 명칭보다는 산상설교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화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7장이 예수님께서 산상(山上)에서 하신 설교라고 여기기 때문이고 또 해외에서 신학을 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서 한국에 있는 신학교들에서 가르치는 신약학자들의 대부분이 영미권에서 Sermon on the Mountain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산상설교로 번역하여 사용하게 되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산상설교가 나타난 성경의 본문은 어디에 있습니까?
산상설교는 신약의 두 부분에서 나타납니다. 첫 부분은 마태복음 5~7장입니다. 그리고 다른 부분은 누가복음 6장 17절부터 49절까지 나타납니다.
3. 산상설교가 행하여진 장소는 어디입니까?
산상설교는 마태복음 5~7장에서 볼 수 있는데 산상설교의 전후를 살펴보면 어느 장소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본문에서도 산상설교가 행하여 진 곳이 어느 지역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최근 들어 일부 신학자들은 이 산상설교가 가버나움 근처의 갈릴리 호수 남쪽 끝에 있는 장소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본문이 정확히 말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냥 추측일 뿐입니다.
4. 산상설교는 산에서 이루어진 것입니까? 아니면 평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까?
산상설교가 시작되는 마태복음 5장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즉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시작한 지역이 마태복음에서는 산(山,mountain)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6장 17절에서는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라고 언급되어 있어서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곳은 평지(on a level place 또는 on a large, level area)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산상설교를 하신 곳이 각각 다른 장소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식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지역은 같은 곳이지만 묘사하는 방식이 달랐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서 군중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셨지만 그 산 위쪽은 평평하기 때문에 누가복음에서는 그 평평한 모습에 따라 평지라고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같은 장소이지만 마태복음의 표현과 누가복음의 표현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각각 다른 지역에서 거의 유사한 설교를 반복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오늘날 목사님들 가운데서도 다른 교회에 설교 초청을 받게 되면 자신의 본 교회에서 이미 했던 설교를 다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동일한 설교를 반복하여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반복하여 가르치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른 장소에서 산상설교를 반복하셨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5.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의 분량과 누가복음의 산상설교의 분량이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에서 산상설교의 분량은 5,6,7장에 걸쳐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산상설교는 6장 17절에서 49절까지인데 32절 분량에 불과합니다. 산상설교의 분량에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차이가 나는 이유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가 저술을 위해 받았던 정보의 분량이 달랐기 때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유대인으로 추정되므로, 따라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생존해 있었을 것이고 또한 마태복음의 저자가 진짜 예수님의 제자였던 마태였다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그 설교를 직접 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들었던 것과 다른 증인들의 이야기들을 구성하였기 때문에 누가복음보다는 풍부하고 많은 정보를 산상설교에 실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둘째,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전해오는 전승에 의지하여 누가복음을 저술했기 때문에 마태복음과 같이 풍성하고 다양하게 저술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6. 산상설교가 세상에 끼친 영향
앞서 언급한 대로 인도의 국부 간디는 산상설교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산상설교로부터 비폭력, 무저항, 불살생의 방식을 통하여 대영제국을 상대하므로 인도의 독립을 이끌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비폭력, 무저항, 불살생은 자이나교에서도 가르치고 특히 자이나교의 가르침인 아힘사(불살생)에서 그 사상들이 나왔다고 하지만 가장 영향이 컸던 것은 이 산상설교, 특히 팔복(Beatitudes)이 가장 큰 영향을 간디에게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후에 미국에서 흑인 인권 운동가인 마르틴 루터킹 목사는 간디의 이 사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간디의 사상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마르틴 루터킹 목사도 역시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아공의 대통령이었던 만델라도 백인들의 인종차별에 맞서 비폭력 무저항 비협조 정신을 이어받아 투쟁했고 오랜 세월의 투옥 생활 속에서도 끝내 견뎌내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출옥되어서도 자신을 핍박했던 백인들을 용서하고 나라의 화해와 화합을 도모하여 남아공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만델라 역시 간디의 정신을 이어받았지만 그 비폭력 무저항의 정신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가 예수님의 산상설교, 특히 팔복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들과 그의 삶을 통해 세상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산상설교를 실천하려고 애썼던 인물입니다.
7. 글을 맺으면서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강력하고 거룩한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지도 순종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간디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인도에 왔던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 실천했다면 모든 인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믿음이 하등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산상설교의 말씀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읽고 묵상할 뿐 아니라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