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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반증후군
밤 열두 시, 내겐 익숙한 시각, 집을 나서려는데 다비가 찾아왔다. 입술은 터져있고 교복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터진 입술을 부르르 떨며, 아빠! 그놈을 죽이고 싶다고 말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다비를 욕실로 들여보내고 입을 만한 티와 반바지를 찾아 욕실 앞에 놓아주었다. 얼마 후 다비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며 욕실에서 나왔다. 언뜻 다비의 골반이 눈에 띄었다. 절 골반! 왠지 익숙했다. 그러고 보니 아빠를 죽이고 싶다는 말 또한 처음 듣는 소리가 아니었다. 다리가 길어서인지 교복을 벗은 다비는 매우 성숙했다. 열여섯 살, 내가 다비의 나이를 알지 못했다면 학생이기 이전에 여자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다비가 교복을 빨아 베란다에 있는 건조대에 널며 말했다. 저 좀 데리고 있어 주세요, 라고.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방금 자기가 내뱉은 말에 쐐기를 박았다.
“우리 함께 살아요.”
허~, 나는 비웃음이 섞인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왜 나를 찾아왔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나를 변태 취급하고는 이 무덤에서마저도 쫓아내려는 것이었다. 너무 늦었으니, 하룻밤만 재워주겠다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을 때 다비가 뒤에서 말했다. 선생님! 나쁜 사람 아닌 거 알아요. 못 들은 척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두 달 전 학교에 찾아온 아내는 경서의 얼굴에 찢어진 노트를 흩뿌렸다. 내가 소설이라고 끄적거린 습작 노트였다. 소설의 내용은 청소년 성범죄와 관련하여 이 사회의 침묵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남자 교사가 여학생을 몰래 훔쳐보다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로부터 전개되는 내용이었다. 충분히 가능한 소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소설은 삼 분의 이 지점까지만 전개된 상태라서 그 부분을 읽은 아내는 충분히 흥분할만했다. 또 나는 가끔 반 아이들에 대해 아내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경서에 관해서도 서너 번 이야기 했었다. 그것이 화근이었고 도화선이었다. 소설 속 여학생 이름이 경서였던 거다.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습작 노트의 여러 페이지를 찍었고 불과 몇 시간 만에 나와 경서는 원조 교제 불륜 사이가 되어버렸다. 변명도 버티기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얻은 것이 있다면 이 사회의 속성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회는 거대한 테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속은 좁았고, 구원해줄 제도를 두고 있으면서도 내겐 무관심했다. 모두가 쉬쉬하며 침묵했다. 나는 학교에서 내몰렸고 경서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아내는 전 재산을 위자료로 요구했다. 그제야 아내의 진짜 속내를 알아차렸지만, 아내의 요구대로 해주었다. 내게 남겨진 것은 원룸 한 칸이었다. 원룸은 아내가 네게 선심을 쓰듯 1년간 살 수 있게 마련해준 것이었다. 당장 갈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당분간 지내기로 했다. 어떻게든 경서를 찾아 용서를 빈 후에 이곳을 영영 떠날 생각이었다. 사방팔방으로 경서를 찾았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경서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날카로우면서도 가늘게 떨렸다. 경서가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그만 찾아다니라고 애원했다. 용서를 빌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난 멈출 수밖에 없었고 그대로 방 안에 틀어박혔다. 무덤 속의 생활이 시작됐다. 그 무덤 속으로 다비가 찾아온 것이었다.
공원을 배회하는데 문득 경서 옆에 항상 다비가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에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했으니 어쩌면 다비만큼은 진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경서와 연락이 닿을지도 모른다. 맥주를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집에 잘 못 들어온 것만 같아 두리번거렸다. 집 안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다비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 보조개가 왠지 익숙했다. 눈을 아래로 두자 또다시 골반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칭찬을 바라는 다비 표정엔 아랑곳하지 않고 다짜고짜 경서와 연락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다비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자, 다비가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경서는 왜 찾느냐고 물었다. 용서를 빌어야 하니까.
다비에게 침실을 내어주자 무섭다며 문을 열어놓았다. 개의치 않고 맥주를 마셨다. 다비가 궁금한 게 있다고 했다. 내가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돌렸을 때 다비는 침대 위에 엎드려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다비는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경서를 어디까지 훔쳐봤냐고 물었다. 순간 저 아이가 경서 대신 복수하러 왔다는 생각이 스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떡 일어나 베란다에 있는 교복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집어 던졌다. 당장 집에서 나가! 그러자 다비가 느닷없이 방바닥으로 내려서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잘못했다고 했다. 또 경서 이야기는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며 울었다.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는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얼마 후 문이 열리더니 무섭다며 열어놓겠다고 했다. 다비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우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척했다.
이튿날 아침 드라이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살며시 눈을 떴을 때 다비가 방 안에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이 다비의 검정 머리에 부딪혀 하얗게 반짝거린다. 이 집에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게 특별한 이유 없이 고마웠다. 더는 무덤이 아니었다. 다비는 티와 반바지를 벗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순간 유독 기다란 까무잡잡한 다리와 골반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다비는 서둘러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간다며 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다비와 경서를 떠올렸다. 경서는 하얗고 다비는 다소 까무잡잡해 흑과 백이 함께 다닌다고 생각했었다. 아마도 그래서 하얀 경서가 더 돋보였는지도 모른다. 굳이 스타일을 논하자면 경서는 청순하고 다비는 관능적이었다. 다비가 관능적이라는 것은 조금 전 옷을 갈아입었을 때 잘 발달한 골반을 보고 느낀 감정이었다. 아, 이런, 골반이 관능적이라니! 아직 어린 학생을 두고 상상이 지나쳤다. 그러다가 오후 세 시쯤 아주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어느새 다비를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에 깜짝 놀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온종일 경서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오늘은 온통 다비만 생각하고 있었다. 단 하룻밤이었으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게 나도 모르게 기뻤던 모양이었다. 또 두 달 만에 누군가와 대화했다는 사실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차라리 다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막상 여섯 시가 넘어도 다비가 오지 않자 서운했다. 소나기가 어둠을 몰고 와서는 추적추적 내렸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리다가 깜박 잠들었다. 어머니의 골반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골반 속에서 나를 건져내듯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다비가 여행용 가방을 들이밀며 들어섰다. 다비의 팔을 잡아 세우고는 약속한 하룻밤은 이미 지났다고 말하자, 오늘도 하루잖아요! 라며 당당하게 웃었다. 말장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도 하루라는 말이 왠지 절실하게 느껴졌다. 절실할 수도 있는 하루! 다비의 팔을 놓으며 딱 오늘 하루뿐이라고 못 박았다. 다비는 거실 바닥에 가방을 펼쳤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자 자기가 거실에서 지내겠다고 했다. 가방을 방 안으로 들여놓고는, 지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만 자고 가는 것이라고 거듭 일렀다. 딱 오늘만이야! 라고.
아내와 이혼한 이후 경제 사정이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이 작은 집으로 이사 왔다. 직장도 없고 사회적 위치도 없는 나에겐 이것도 과분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이사 오던 날 집 앞에서 다비와 마주쳤었다. 그렇다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경서를 대신해 복수하러 온 게 분명했다. 그러나 다비를 내쫓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골반 때문일까?
옷을 갈아입고 나온 다비는 자기가 밥을 하겠다고 하더니 냉장고 문을 열었다. 곧바로 아무것도 없다며 투덜댔다. 그 투정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설렜다. 다비가 라면을 끓여 식탁 위에 올려놓았고 나는 다비와 마주 앉았다. 다비가 내일 수업 끝나고 시장을 봐 오겠다며 돈을 좀 달라고 했다. 나는 젓가락을 식탁 위에 딱 내려놓으며 정색했다. 내가 변태 같으니? 스무 살이나 어린 여학생과 그것도 미성년자와 함께 살 만큼 정신 나간 놈 같아? 내가 왜 너 같은 어린아이와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러자 다비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돌하게 물었다.
“제가 정말 어린 아이 같으세요?”
“열여섯 살이면 당연히 아이지.”
“그런데 왜 훔쳐봤죠?”
한순간 무서운 정적이 흘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비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다비의 저 날카로운 눈빛! 전에도 봤었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문제를 풀고 있었다. 나는 교실을 순회하다가 경서 뒤에 멈춰 섰다. 경서의 목덜미와 빗장뼈를 힐끗 내려다봤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질문이 있다고 했다. 내가 뒤돌아섰을 때 다비가 나를 째려봤다. 다비가 지금 그때의 눈빛을 했다.
“나는 누구도 절대 훔쳐본 적이 없어.”
“그 소설 다 읽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어때요?”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남자 교사처럼 내가 경서를 훔쳐봤고 자기가 그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소설을 쓰기 위해 나도 모르게 감정 이입을 했던 거라고 말했지만, 왠지 변명 같아 뜨끔했다. 다비가 뭐라고 말하려다가 침을 삼키더니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빵을 구워 먹던 다비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선생님을 다 이해할 수 있어요.
다비의 눈 속을 빤히 들여다봤다. 경서를 대신해 복수하러 온 게 분명했다. 다비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멈추고는 늦었다며 서둘러 학교에 갔다. 다비가 다 이해할 수 있다고 했으나 내가 정말 소설 때문에 훔쳐보기를 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분명히 소설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쯤 훔쳐보기를 했을 땐 순수하지 못한 욕망이 꿈틀댔었다. 욕망이었다고 인정하고 나니, 이젠 다비를 편안하게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면 아내의 의심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아내의 의심을 인정하려 하자 이젠 이 무덤 속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아 두려웠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다비가 나를 망치러 온 것이 분명했지만, 한편으로는 다비를 꼭 잡아두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무덤에서나마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으리라! 무덤 속에 혼자라는 느낌은 정말 끔찍하니까!
밖이 어두워졌는데도 다비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행용 가방이 있으니 언젠가 들어오기는 하겠지만, 걱정됐다. 다행히 열한 시쯤 다비가 양손에 무엇인가 검은 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시장을 봐왔다고 했다. 돈은 어디에서 났냐고 묻자, 음식점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했다. 당돌하게도 내가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만 자기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살림을 하겠다고 말했다. 순간 아찔하며 다리에 힘이 빠졌다. 식탁 의자에 앉았다. 다비도 맞은 편에 앉았다. 무덤 속에서도 먹고는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 아이가 일깨워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음에도 외면하고 있던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갑에서 오만 원을 꺼내어 시장을 봐 온 물건값이라며 다비에게 건넸다. 결국, 다비가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나를 위해서라도 꼭 그래야 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이 집에서 나가 달라고 부탁하자 다비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전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또 갈 곳도 없어요.
“안 돼! 이 집에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을 누군가 알기라도 하면, 난 산 채로 매장당할 거야.”
내가 언성을 높이자 다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교복 단추를 풀었다. 너무 갑작스러워 그러지 말라는 말을 못 하고 멍하니 있었다. 어깨와 빗장뼈가 수줍게 드러났다. 웃옷을 내리며 돌아섰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비 어깨에 오른손이 가다가 멈췄다. 다비의 어깨와 등판 여기저기에 검푸른 멍 자국이 선명했다. 오른손이 허공에서 떨었다. 어제 아침, 다비가 옷을 갈아입었을 땐 골반과 다리에 정신이 팔려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이런 죽일 놈!
다시 옷을 입은 다비는 눈물을 흘리며 아빠가 때렸다고 했다.
“엄마가 일을 처리할 때까지만 친구 집에 가 있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밖에 없어요.”
처리! 처리라는 말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내겐 이십 년 전에 달라붙은 하얀 그림자가 있다. 그놈은 이따금 이렇게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다비가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바라봤다. 뭐라고 할 말이 없어, 그냥 집에서 나왔다. 하얀 그림자와 다비의 골반이 자꾸 겹쳤다. 한참을 걷다가 맥주를 사 들고 집에 들어왔을 때 다비는 아르바이트가 힘들었던지 방문을 열어놓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방문 하나도 닫지 못하는 여린 마음이 안쓰러웠다.
식탁 위에 술과 안주를 펼쳐놓고 침대가 보이는 곳에 앉았다. 자는 줄 알고 있었던 다비가 고개를 들더니 맥주가 맛있냐고 물었다. 그림자 맛과 같은 맛이라고 대답하자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더니 방에서 나왔다. 다비는 핫팬츠를 입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걸어 나오는 다비의 긴 다리와 골반으로 눈이 갔다. 다비가 비시시 웃으며 마주 보고 앉았다. 나는 어색한 내 표정을 재빨리 수습했다.
“그림자처럼 특별한 색깔이 없는 맛이야. 하지만 늘 곁에 붙어있는 맛이지. 특별한 맛도 없는 이놈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별안간 다비가 내가 마시던 컵을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다비가 인상을 쓰더니 그림자 맛이 이런 맛이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비시시 웃었다. 웃는 얼굴이 열여섯 살 아이답게 순수하고 보기 좋았다. 그 순간 다비의 웃는 저 얼굴을 꼭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동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더니 식은땀이 흘렀다. 그 위험한 생각을 또다시 하다니! 내가 이 아이를!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한 게 처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아이를 사랑하나? 그런데 내가 사랑을 알던가? 다비가 엄마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가 불쌍하다고 했다.
“저는 엄마를 언니나 이모라고 불러요. 엄마는 이제 겨우 서른여섯 살인데 저와는 스무 살 차이죠. 아빠도 엄마와 동갑이에요. 고등학교 삼 학년 때 만나 저를 임신했죠. 철없는 아빠 때문에 엄마가 힘들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직장을 잃은 아빠가 엄마와 저에게 주먹까지 휘두른 거예요.”
돌연 처리하겠다는 말이 떠올랐다. 정색하고 물었다.
“엄마가 처리하겠다고 말한 것이 무슨 뜻이지?”
다비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더니 아빠와 헤어지려는 것이 아니겠냐고 내게 반문한다. 또 엄마를 생각하면 아빠를 죽여 버리고 싶다고 말하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난번에 다비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음의 상처가 깊은 모양이었다. 다비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다비에게 다가갔다. 다 괜찮아질 거라며 어깨를 토닥이자, 다비가 소리 내어 울었다. 내 앞에서 소리 내어 운 여자아이도 처음이 아니었다. 자꾸 이러면 곤란했다.
문득 눈을 떴을 때 밖이 어두웠다. 시각을 확인하니 새벽 네 시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들여다봤다. 다비는 옆으로 누워 한쪽 골반과 다리를 이불 밖으로 내어놓은 채 자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나는 왜 자꾸만 골반에 집착하는 걸까? 다비 머리맡에 핸드폰이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 다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비 핸드폰을 가지고 나왔다. 갤러리에서 엄마 아빠 사진을 찾았다. 다비가 아빠 피부를 닮았는지 아빠의 얼굴도 까맸다. 엄마 아빠 사진을 내 휴대폰으로 전송한 다음 전송한 흔적을 삭제했다. 노트북 앞에 앉아 학기 초에 정리해 두었던 파일에서 다비의 집 주소를 알아냈다. 그러고는 다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달그락 소리에 눈을 뜨자 기다란 다리 한 쌍이 바로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다비가 핫팬츠를 입고 거실에 딸린 주방에서 밥하고 있었다. 비좁은 곳에서 다비의 두 다리가 애쓰고 있었던 거다. 자리를 내줘야 했으나 모른 척하고 잠시 더 누워있었다. 다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렇게 그냥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비가 나이를 서너 살만 더 먹었다면! 그렇게 생각하자 열여섯 살이라는 나이가 내 양심의 척도를 알아보려는 시험문제 같았다. 양심이라고 생각하니, 아직은 내가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다비가 내 욕망을 눈치라도 챈 듯 그만 일어나라며 깨웠다. 이제 막 깨어난 것처럼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밥은 할 줄이나 아느냐고 묻자, 새초롬하게 웃더니 아줌마 솜씨보다 나을 거라고 했다. 웃는 다비가 너무 예뻤다.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아예 못 들은 척하며 욕실로 들어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혔다.
세수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왔을 때 다비는 벌써 밥상을 차려놓고 나를 기다렸다. 하얀 쌀밥과 된장찌개가 있었다. 밥상을 보자 괜히 울컥했다. 이혼하고 나서 처음 받아보는 밥상이었다. 맛이 나름 훌륭했음에도 칭찬하지 않자, 다비가 왠지 서운한 모양새였다. 밥그릇을 비운 후 한 공기만 더 먹을 수 있겠냐며 밥그릇을 내밀자 그제야 활짝 웃었다. 밥을 퍼주고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식사 후에 함께 놀러 가자고 했다. 이 대낮에 어찌 가겠느냐고 되묻자, 다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밤에 다니면 사람들이 더 이상하게 볼 거 같은데요.”
우리! 저 어린아이와 내가 우리라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함께 밥 먹고 스스럼없이 우리라고 말하고 함께 놀러 가자고 말하는 다비를 보며, 나 또한 그런 다비에게 은근슬쩍 장단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더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주말 대낮에 밖에서 서성이는 것은 힘들었다.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이 알아볼까 봐 두려웠다. 멀리 이사 갈 형편도 안 되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거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자, 다비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 다비가 자기를 봐달라며 나를 불렀다. 내가 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다비가 문 안쪽에서 오른쪽 다리를 밖으로 내어놓았다. 종아리가 보이더니 오금이 보이고 이내 뽀얀 속살의 허벅지가 보였다. 이내 허벅지 위로 흰색 치맛자락이 보였다. 잠시 후 다비가 스스로 ‘짠’하고 효과음을 내더니 뒷모습 전체를 드러냈다. 그러고는 다시 ‘짠’ 하더니 돌아서서 앞모습을 보였다. 웬 아가씨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다비는 어느새 파마머리를 하고 화장까지 했다. 그 모습이 웃겨 보이거나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지 절대 열여섯 살 여중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떤 말을 못 하고 멍하니 바라만 봤다. 다비가 살며시 미소 짓더니 옷은 엄마 옷이고 머리는 가발이라고 했다.
다비가 갑자기 자기를 믿어보라며 내 팔을 잡아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비가 시키는 대로 침대 위에 앉았다. 자기 꿈이 연예인 스타일리스트라고 말하더니 내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내 얼굴에 화장까지 했다. 그 손길이 싫지 않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 다비의 손길과 움직임을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가느다란 숨소리와 머릿결에서 풍기는 미세한 향기가 소녀의 수줍은 몸짓 사이사이로 하나둘 펼쳐졌다. 다비를 관찰하고 있는 나 자신이 민망하게 느껴져 눈을 감자 이번엔 다비의 손길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묘한 흥분과 편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왠지 잠이 쏟아지더니 깜박 눈을 감은 모양이었다.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자 다비가 내게 모자를 씌우고는 거울을 내밀었다. 전혀 다른 모습의 내가 거울 속에 있었다. 화장이 아니고, 변장이었다. 다비는 내 옷장을 뒤지기 시작하더니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냈다. 교사가 되기 전에 입었던 절개 청바지와 흰색 티였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오자, 다비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거울 앞에 나란히 섰다. 이십 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한, 그러니까 아주 잘 만들어진 이십 대 남녀 한 쌍이 거울 속에 있었다.
우리는 한껏 들뜬 상태로 집에서 나와 놀이공원으로 갔다. 다행히 우리 둘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내 옆에서 즐거워하는 다비를 보며 이래도 되는 거냐며 순간순간 움찔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양심을 거부하고 있는 나의 욕망을 모른 척했다. 그러면서도 다비에게는 경서처럼 상처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비는 피곤한지 곤히 잠들었다. 그 모습이 참 맑고 예뻤다. 이 아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마음이 움직이자, 머릿속에선 벌써 구체적인 방법이 구상되기 시작했다. 지극히 위험한 계획이었다. 또다시 이 위험한 계획을 구상하다니! 내 안에 있는 괴물이 다시 살아났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변장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아는 얼굴인데도 저쪽에선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비네 집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모든 사물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이 모든 것을 장악하자 내 안에서 용기가 솟았다. 다비 아빠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다비 말에 의하면 매일 저녁 PC 게임방에 있거나 편의점 앞에서 술을 마신다고 했다. 나는 핸드폰에 있는 다비 아빠 사진을 확인하면서 아파트 단지 주변에 있는 편의점과 PC 게임방을 뒤지다가 다비 아빠를 발견했다. 아파트 뒤편에 있는 편의점 앞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슬리퍼를 신은 덩치 큰 사람이 파란 플라스틱 의자와 한 몸인 양 앉아 있었다. 과자 부스러기를 놓고 소주를 마시는 꼴이 누가 봐도 백수였다. 나는 맥주 한 캔을 사 들고 실례한다며 예의를 표하고는 살며시 옆자리에 앉았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오늘 회사에서 쫓겨났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다비 아빠가 미끼를 물듯 자기는 벌써 이 년째 놀고 있다며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예 소주와 오징어 다리를 사다 놓고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마셨다.
이튿날 저녁 다비에게 다시 한번 변신을 부탁했다. 다비의 손길 하나하나가 나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다비가 경서를 대신해 복수를 감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외면하는 데 성공했다. 오히려 내가 계획한 목표를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자, 머릿속이 맑아졌다. 다비를 꼭 지켜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편의점에서 다비 아빠를 다시 만났다. 잘 아는 곳이 있으니 다음 주에 함께 바다낚시 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같은 백수끼리 잘해보자고 말하자, 연대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좋은 생각이라며 활짝 웃었다. 집으로 돌아와 다음 주 일기예보를 점검했다. 다음 주 수요일에 남해안으로 태풍이 상륙할 거라고 했다.
달리 할 일도 없었지만, 날마다 다비를 기다리는 것이 나의 중요한 일과였다. 또 거의 매일 골반 꿈을 꾸었다. 마치 몽정하는 열여섯 살 소년 같았다. 다비 아빠와 약속한 날이었다. 아침 일찍 다비를 깨워 또다시 변신을 부탁했다. 내 얼굴을 화장하던 다비가 너무 긴장한 것 같다며 긴장을 풀라고 했다. 또 무슨 일이냐며 이상하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다비가 내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아 무서웠다. 변신을 끝내고 다비에게 일렀다.
“잘 들어. 이젠 집에 들어가야 해. 이 집에 있는 다비의 흔적은 모두 지워야 하고. 경찰이 올지도 모르니 꼭 그렇게 해야 해. 자세한 건 다음에 말해줄게. 당분간은 절대 찾아오지도 말고 행여 연락도 하지 마. 때가 되면 내가 먼저 연락할 거야.”
다비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대꾸하지 않고 집을 나서려고 했다. 그때 다비가 별안간 뒤에서 나를 껴안으며 무섭다고 했다. 다소 놀랍기는 했지만, 그냥 있었다. 왠지 이 아이를 꼭 지켜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차 안에서 다시 한번 태풍 소식을 확인했다. 태풍은 자정 전후에 남해안에 상륙할 거라고 했다. 낚시 장비를 확인한 후 정오쯤 다비네 아파트 앞에서 다비 아빠를 기다렸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뉴스와는 상관없이 간간이 바람이 불뿐 하늘은 너무 조용하고 맑았다. 저쪽에서 다비 아빠가 다가왔다. 그런데 다비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함께 다가왔다. 레깅스를 입은 다비 엄마는 다비처럼 다리가 길었을 뿐만 아니라 묘하게도 걸음걸이까지 닮았다. 어쩌면 골반 모양까지도 유전되는 모양이었다. 차에서 내려 인사를 건네자, 다비 아빠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내와 함께 가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다비의 말과는 다르게 둘 사이에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비 엄마가 다비 아빠 옆에서 환하게 웃었다. 다비가 거짓말을 한 것만 같아 다비를 지켜주겠다는 결심이 한순간 무너져 내렸다. 내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비 아빠가 다비 엄마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랄하고 왜 갑자기 따라나서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어.”
순간 다비 엄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난 그 순간 다비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돌연 내 목표는 이전보다 더 선명해졌다. 목표가 선명해지자 다비 엄마의 골반이 낯설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다비 엄마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지만, 다비 엄마의 얼굴엔 보조개가 없었다. 그러함에도 다비 엄마의 골반이 다비의 골반보다 더 익숙했다. 이십 년이 지나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골반, 분명 열여섯 살 연희의 골반과 닮았다. 분명 연희의 골반인데 아무리 봐도 다비 엄마의 얼굴에선 연희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해안을 향해 갈수록 바람이 점점 더 거세게 불었다. 화순 부근에서 결국엔 거센 비바람을 만났다. 난감하게도 다비 아빠가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때 다비 엄마가 다비 아빠를 다독였다. 집보다 목적지가 훨씬 더 가까우니 일단 그냥 가자고 했다. 돌아가는 길이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으니 가능한 한 빨리 가겠다고 했다. 운전대를 내가 잡고 있어서 그런지 다비 아빠가 고개를 주억이더니 조심하라고 했다. 한 시간쯤 후에 목적지인 고흥만 방조제에 도착했다. 뉴스에선 태풍의 중심이 제주도 서쪽 해안을 지났다고 했다. 우리 세 사람은 예약해 놓은 민박집을 찾아 들어갔다. 낚시는 태풍이 지나간 이후, 새벽에 하기로 했다. 식당 운영을 겸하고 있는 민박집 주인아주머니가 해물 매운탕을 끓여 가져왔다. 우리 세 사람은 방 한가운데에 술상을 차려놓고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일단 다비 아빠를 취하게 만들어야 했다.
다비 엄마가 뭔가 이상했다. 차 안에서 다비 아빠를 다독인 것도 그렇고, 이번엔 자꾸만 다비 아빠에게 술을 먹였다. 다비 아빠가 계속 투덜대는데도 불구하고 살랑살랑 웃으며 다비 아빠를 구슬렸다. 그동안 구박해서 미안하다고도 했다. 마치 사전에 내가 다비 엄마와 공모라도 한 것처럼 그랬다. 다비 아빠도 술을 서너 잔 마시자, 다비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한결 부드러웠다. 그러다가 한순간 다비 엄마의 얼굴을 쓰다듬더니 놀라운 말을 꺼냈다.
“학생 땐 정말 예뻤었는데, 사고만 아니었으면 얼굴에 칼 대지 않았을 텐데.”
다비 엄마는 얼굴 성형을 여러 번 했다고 했다. 다비 엄마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눈빛이 연희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이십 년 전, 나는 왜 연희의 눈빛보다 골반에 더 심취했을까? 이름을 물어보려는데 다비 아빠가 내게 술을 권했다.
자정이 다가왔을 때 밖에선 비바람이 더 세차게 불었다. 태풍의 중심이 고흥만 방조제를 넘어서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날아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에 부딪히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 세 사람은 꽤 취했다. 사실 취한 것은 다비 아빠 하나였다. 다비 아빠가 졸린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다비 엄마가 다비 아빠에게 정신 차리라고 했다. 술이 깰 수 있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다비 엄마가 함께 나가자며 팔짱을 끼자, 다비 아빠가 그 이름을 불렀다. 연희! 우리 연희가 오늘따라 왜 이러냐며 기분 좋게 웃었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두 사람은 방문을 나섰다. 두 사람을 말리는 척했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밖은 비바람이 거셌다. 두 사람은 서로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방조제로 갔다. 내가 바짝 뒤쫓았지만 두 사람은 내가 뒤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방파제에 올라서서 얼마쯤 걸어갔다. 한순간 연희가 배를 묶어 놓은 밧줄을 오른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때 바닷물이 두 사람을 덮쳤고 연희는 다비 아빠를 잡고 있던 왼손마저 빼냈다. 연희는 두 손으로 밧줄을 부여잡은 채 그 자리에 엎드렸다. 다비 아빠는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빠졌다. 파도가 내려섰을 때 다비 아빠의 윗옷이 방조제 모서리 부분 어딘가에 걸린 듯했다. 다비 아빠는 가슴 언저리까지 바닷물에 잠긴 채 파도를 뒤집어썼다. 옷자락에 매달려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연희가 그 옷자락을 풀어버리려고 했다. 처리! 그제야 연희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다시 거대한 파도가 달려왔다. 나는 재빨리 달려들어 연희를 끌어안은 채 엎드렸다.
“내가 할게. 빨리 들어가.”
“누구?”
“내가 처리할 일이야.”
연이어 파도가 덮쳤다. 빨리 들어가라고 소리치자 그제야 연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다비의 변장 솜씨 때문에 미처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다시 소리치자, 연희가 민박집으로 뛰어갔다. 머뭇거림 없는 저 뒷모습은 이십 년 전과 똑같았다.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뒷모습! 허우적거리고 있는 다비 아빠를 지켜보다가 한순간 다비 아빠의 눈과 마주쳤다. 다비 아빠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십 년 전, 그날은 집 앞 강가에 물난리가 났었다. 어머니는 홀로 민물매운탕 전문 음식점을 운영했다. 연희 아빠는 어머니가 아버지 없이 혼자 살자, 자주 찾아와 치근덕댔다. 그날도 연희 아빠는 많이 취해 있었다. 다리 건너에 사는 연희가 아빠를 찾으러 왔다. 연희가 자꾸만 집에 가자고 조르자, 연희 아빠가 술병을 집어던졌다. 연희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어이없게도 연희 아빠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내가 연희 이마에 약을 발라주자, 연희가 아빠를 처리하고 싶다고 했다. 벌써 세 번째 하는 말이었다. 당시 연희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지옥에서 살고 있었다. 연희를 지켜주고 싶었다. 연희를 사랑하니까 꼭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연희와 함께 연희 아빠를 부축하며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거셌다. 다리 중간 지점에서 멈춰 서자 연희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연희 아빠에게서 연희를 떼어내고는 빨리 가라고 소리쳤다. 연희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내가 처리할 일이라며 다시 소리치자, 연희가 다리 건너 저쪽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비틀거리는 연희 아빠를 다리 가장자리에 세워놓고 뒤로 물러났다. 한순간 연희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기다렸지만 연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연희 아빠의 시신이 강 하류에서 발견되었고 사건의 경위는 술에 취한 연희 아빠가 실족한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얼마 후 연희 모녀는 마을에서 떠났다.
다비 아빠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비 아빠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혹시 연희가 다비를 내게 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내가 다비와 연희를 의심하다니! 내가 더는 열여섯 소년이 아닌 모양이었다. 학기 초에 다비 엄마 연희가 학교에 다녀갔었다. 나는 연희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연희는 나를 알아봤을 거다. 그렇다면 다비가 내게 온 것은, 경서를 대신한 복수가 아니었나? 내가 또다시 여기까지 오다니! 내 안에 잠자던 괴물을 또다시 불러내다니! 어쩌면 내게 어떤 고질병이 있는지도 몰랐다. 열여섯 살, 첫사랑 증후군!
이십 년 전, 나는 기다렸으나 다리를 건너간 연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녘 빗속을 걸어 어머니에게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골반 사이에 안겨 한없이 울었다. 어머니의 골반 사이로 기어들어 가 아무것도 모르는 태아의 꿈을 꾸었다. 하지만 지금은 돌아갈 어머니가 없다. 나를 태아로 품어줄 골반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무덤이 되었다. 그렇다면 다비의 골반이 나를 태아로 품어줄 수 있을까? 그 골반 사이로 파고 들어가 아무것도 모르는 태아가 되고 싶을 뿐. 그러려면 이 사람부터, 앞으로 손을 내밀자…….
첫댓글 드라마 한편을 본듯합니다
주인공의 심리에 몰입했네요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