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가 만들어 준 새로운 세상]
허리가 아팠습니다. 특별한 이유없이 고관절 쪽에서 통증이 올라왔습니다. 으레 그랬듯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했지만 웬일인지 갈수록 심해졌어요. 아마도 최근에 이부자리를 바꿨는데, 그게 문제인 듯싶었습니다. 딱딱한 바닥에서만 살다 결혼 후 푹신한 침대로 갈아타 허리가 놀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걷는 게 불편했습니다. 힘이 안 들어가고, 마치 두 다리 길이가 서로 다른 사람처럼 절룩였어요. 젊은 사람이 다리를 저니, 여기저기서 안쓰러워했습니다. 10분이면 족히 걸어갈 직장을 30분이 넘게 걷는 신세가 되었어요.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었거든요. 횡단보도라도 만나면, 못마땅한 표정으로 기다려주는 운전자에게 미안했습니다. 고개가 숙여졌어요.
재채기를 한 번 할라치면, 손끝, 발끝에서부터 긴장감이 올라왔습니다. 에- 에-, 흐윽. 필사적으로 참아냈습니다. 시원하게 내뱉으면 난리가 나거든요. 즉시 극심한 격통이 온몸을 휘감기 때문이었죠. 폐 깊숙한 곳에서부터 신음소리가 발작적으로 새어 나왔습니다. 지켜보는 아내에게 미안했어요.
밤이 찾아오면, 망망대해가 비좁다는 듯 잠자는 곱사등이 새우가 되었습니다. 똑바로 누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꿈이라도 꾸어 몸을 뒤척이게 되면 올라오는 통증에 잠이 완전히 달아났습니다. 아내가 깰 새라 쥐 죽은 듯 신음을 씹어 삼켰습니다. 새벽 1시에 한 번, 1시 40분에 한 번, 2시 30분에 한 번. 그렇게 대여섯 번 하면, 감았는지 안 감았는지도 모를 눈꺼풀 아래로 퍼렇게 동이 터왔습니다. 짜증으로 가득 찬 새벽 공기는 시리게 폐부를 찔렀습니다. 그렇게 다시 출근을 하고, 내내 피곤했어요.
출산 후 자신의 몸과 아이 돌보는데 전념해야 할 아내가 집안일까지 도맡았습니다. 아무런 불평 없이요. 제가 담당했던 설거지, 청소,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버리기를 다 하고 있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엊그제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졸지에 사지 불구가 되니 벽지와 천장 색이 내내 부옇기만 하더군요. 정작 눈은 멀쩡했지만 설거지를 하는 아내의 뒷모습에도 초점이 맞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병가를 냈습니다. 직장생활도, 가정생활도 다 쉽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가장 불쾌한 건, 스스로가 하찮아졌다는 점이었습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갈수록 줄어들었거든요.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씁쓸했어요.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야 했습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고통의 의미는 살아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견디기가 어려우니 그렇게라도 의미 부여를 하는 게 낫다고 하더군요.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안 아파보니 저러는게 아닐까, 날을 세웠습니다. 그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불행이 찾아 왔나’, ‘내가 뭔 죄를 지었나.’ 하며 차라리 뭐라도 푸념하며 원망하고 싶었습니다.
하루하루 불행의 늪 속에 스스를 가두다, 잘 걷지 못하는 몸뚱이를 이끌고 느릿느릿 동네를 걸어보았습니다. 그렇게 굼벵이마냥 발걸음을 옮기다가 노인분이 걷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게 ‘걷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다리를 옮기고 있었어요. 그 때 저는 멍하니, 한참 동안이나 그분을 바보고 있었습니다. 걷는 것, 그게 부러웠거든요. 저렇게 멀쩡히 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통증이 더 심해지던 어느날 저녁, 돌쟁이 아이를 조심스레 안고 베란다 창밖을 바라본 적이 있었습니다.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속 깊은 말을 했습니다. 몸 아픈 아비를 만나게 해 미안하다며 사과도 했죠. 어부바도 해주고, 목마도 태워주고, 비행기도 태워주고 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이날 아이와 함께 본 노을은 흑백이었습니다.
허리전문병원에서 MRI를 찍고, CT를 찍고, 주사제를 받고, 견인 치료와 도수 치료도 수없이 받아도 차도가 없었어요. 팔자에 없던 응급실 신세도 져봤고요. 그런데도 허리가 멀쩡하다고 합니다. 이상하대요. 결국 큰 병원에 가보자는 소견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처음 가 본 충남대병원에서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강직성 척추염 환자. 이게 제 새 이름입니다. 마침내 유전적인 원인을 찾은 것이었죠. 천만다행으로 맞는 약이 있었습니다. 술도 커피도 홍삼도 다 끊었습니다. 세법상 장애인도 되었습니다. 병원비도 10%만 내면 된다고 합니다. 연말정산에서도 혜택을 많이 보게 되었고요. 진단서가 있어 병가도 넉넉히 쓸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나 좋은 점이 많았지만, 거울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불행했거든요.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세상은 마냥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일상과 단절된 평일 낮의 진료 대기실의 풍경, 의사 선생님 처방전 하나 받으려 길게 줄 선 사람들, 휠체어 탄 젊은이들, 한 보따리씩 약 타가는 어르신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나처럼 어딘가 아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다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면서도 열심히 미소지으며, 누군가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더 나아질 앞날을 기대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엔 아픈 사람들도 참 많고, 많지만, 그들 모두 다 불행의 늪에 갇혀만 있는 게 아니라, 나름 열심히, 행복을 찾아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요.
새롭게 처방받은 약 덕분에 염증과 통증이 서서히 줄어들었습니다. 삶에 여유가 찾아오면서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팠던 덕분에 당연한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죠. 양보하는 게 많아졌습니다. 운전대 잡고 경적을 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해보며 그 시간에 하늘을 한 번 더 올려다보게 되었어요.
감사한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아이와 시소를 탈 수도 있습니다. 줄넘기를 할 수도 있고요. 무거운 쓰레기도 버리러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간혹 늦으면 달릴 수도 있죠. 재채기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아침에 통증없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내가 웃네요. 나도, 아이도 따라 웃습니다. 삶 한가운데에 행복이 다시 돌아오고 있나봅니다. 아프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행복입니다.
50년 전에만 태어났어도 서서히 고통 속에 죽어갔을 몸뚱이였을 겁니다. 좋은 시대에 태어나 일상생활이 가능해졌습니다. 거저 사는 느낌이에요.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약에 의지하지 않고 건강히 살아갔을 때보다 삶의 행복감이 높아졌어요. 이제 하루하루 소중함을 깨닫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덕분에’가 만들어 준 새로운 세상.
이 모두 다 아팠던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