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금강경이 칼을 대신 받다
당나라 거부중에 충주절도사 최상서가 법령을 어긴 병사를 불러다 칼로 쳐서 죽였다. 그런데 밤 늦게 깨어 그 사람이 집으로 돌아왔다.부인이 놀라면서 말했다. "어떻게 살아 왔읍니까?" "처음 칼에 맞을 때 술에 취한것 같고 꿈을 꾸는것 같아서 아무 고통도 모르 다가 잠이 깨어보니 몸이 거리에 딩굴고 있는지라 정신을 차려 집에 돌아 왔 습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최상서를 찾아가서 어제 법령을 지키지 못한 것을 사과하였다. 최상서는 놀라 눈이 휘둥글해 가지고 말했다. "너는 귀신이 아니냐?" "아닙니다." "무슨 술법이 있어 살아왔는가?" "아무런 술법도 없습니다. 다만 어려서부터 매일 금강경 3번씩 밖에 읽은 일이 없습니다." "그럼 칼로 베일 때 아프지 않던가?" "처음 문 밖으로 압송할 때 정신이 술취한 것 같았습니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경은 어느 곳에 있는가? 급히 가져와 보라." 그 사람은 곧 집에 돌아가 경이 든 함을 가지고 왔다. 최상서와 함께 열어보니 경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최상서는 깜짝 놀라며 참회하고 은으로 경 백권을 써서 모든 관리에게 나누어 주고 모두 읽게 하였다. 그리고 충주 연수사(연수사) 문밖에 칼에 찢어진 경을 붙여놓고 누구든지 이 경을 보고 군장과 같이 영험을 입도록 하라고 말했다.
<2>염불 공덕으로 고향에 돌아오다
신라시대 경주 서라벌에는[만장사]라는 절이 있었다. 절 부근 우금리라는 마을에 근근히 끼니를 지탱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불심이 장한 '보게'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일찌기 과부가 되어 아들 장춘 하나만을 유일한 희망 으로 삼고, 한숨과 눈물로써 지내며 고이 키우고 있었다. 봄이면 산나물을 캐서 끼니를 때우고 또한 남의 삯바느질과 김매는 품삯으로 두 목구멍에 풀칠하는 가난한 살림을 지속하였다. 그럭저럭 세월은 흘러 외아들 장춘이도 어느듯 장가보낼 나이가 되었다. 인생은 고해(苦海)라서 근심걱정이 떠날 길 없던 나머지,그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지독한 가난은 면 해야 하겠기에 외아들을 멀리 중국 장사(상인)의 일꾼으로 보내고는, 민장사 에 가서 일을 돌보며 항상 관세음보살을 지성으로 불렀다. '비록 가난하기느 하였으나 우리 모자는 한번도 남의 재물을 훔친 일이 없고 무턱대고 적은 산 목숨이랃 죽인 일이 없으니, 부디 부처님께서 도와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서소.'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부처님앞에 빌었다. 불행이도 배가 떠나던 그날 저녁부터 모진 강풍이 불며 폭우가 쏟아져 온 천지가 수라장이 되었다. 바다에 나갔던 배는 한척도 돌아오지 못 하였음은 물론이다. 모두가 죽은것으로 여기고 제사를 지내었으나 보게 아주머니만은, '죄 업는 내 아들만은 틀림 없이 살아 올 것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남들 처럼 죽었다고 제사지내는 대신 평상시와 같이 일하면서 기도만 하였다. 얼마를 더 지냈어도 바다에 나갔던 모든 배들은 한 척도 돌아온 것은 없었고 배를 탔던 사람 역시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장춘이가 탔던 배는 파선되었으나 그는 다행이도 판자에 몸을 기대어 며칠간 표류를 계속하다가 어떤 섬에 다달아 구조 되었다. 그 곳은 당 나라 땅이었는데,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힘이 세었으므로 어느 부 잣집에 고용이 되여 밭갈이등 잡역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 점심 후 곤히 잠을 자다가 문득 민장사 절의 부처님이 나타난 꿈을 꾸고는 일어나 기이하게 생각 하고 다시금 염불을 드높은 소리로 하면서 일을 계속하였다. 때마침 중국에 왔다가 고국으로 떠나가는 신라의 큰 스님이 그 곳 가까이 지나다가, 밭을 가는 농부가 고국말로 염불하기에 놀랜 나머지 그에게 물어보게 되었다.장춘이는 지난 모든 과거를 이야기 하였더니 모두가 "관세음보살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긴 공덕이라."고 극구 칭찬하면서 함께 집주인을 찾아가 인사를 하게 되었다. 주인도 가상히 여기고 적지 않은 재물과 함께 선물을 주어, 큰 스님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국에 돌아와서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다.
<3>원효가 촉루루를 마시고 도를 얻다
원효의 성은 설(薛)이고 이름은 서당(誓幢)이다. 내마(奈麻) 담달의 아들로 이십구세 출가하여 영축산 낭지(郎智),흥륜사 연기(緣起),반용산 보덕(普德) 등을 찾아 수행하다가 삼십사세에 입당구법을 결의하고 의상대사와 함께 남 양 갯가 어느 무덤 사이에서 배오기를 기다렸다. 밤이 늦어 목이 마르므로 사방으로 물을 찾다가 손 끝에 바가지 하나가 잡혀 그 속에 든 물을 달게 먹 었는데 아침에 깨어서 보니 그것은 단샘의 물이 아니라 해골바가지으 송장 썩 은 물이었다. 급작히 비위가 뒤집혀 배를 움켜쥐고 토하려하다가 홀연히 한 소식을 얻었다. 心生즉種種法生 마음이 나면 모든 법이 나고 心滅즉種種法滅 마음이 멸하면 해골도 둘이 아니다. 이어 원효는 부처니 말씀에 "三계가 오직 마음이라."하였는데 어찌 부처님이 나를 속이겠는가. 당나라 구법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불행을 하니 가히 행동의 성자였다. 하루는 거리에서 노래를 불렸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바칠 기둥을 찍으련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스님께서 아마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자식을 낳으려 하신 모양이다.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그 보다 더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이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 석궁으로 맞아 들이게 했다. 원효는 일부러 문천교 다리 밑에 빠져 옷을 적 셨다. 궁리가 그를 모셔 요석궁에서 옷을 말리게 하였다. 과연 공주는 얼마 있다가 아이를 배니 그 아이가 저 유명한 설총(薛聰)이다. 또 원효는 이미 계를 범하고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인의 옷을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일켤었다. 또 광대들이 가지고 다니는 둥근 박 에 여러가지 도구를 장엄하여 무애(無碍)라 이름짓고 가지고 다니면서 노래하 고 춤추며 염불하였으므로 가난 하고 무지몽매한 사람이라도 모두 부처를 알게 되었고 갓난아이들까지도"나무아미타물"을 모르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그를 모르는 자는 이것을 보고 원효를 광인(狂人),파계승 (破戒僧)취급을 하고 근래 불자 가운데도 그를 대처승이라 멸시하는 자 없지 않았으나 진실로 그는 무애 성자로 불교를 사실적으로 실천한 대보살이라 하겠다.
<4>머슴이 죽어 원님이 되다
경남 산청군에 심원사라는 절이 있다. 그 절 주지에 묘심(묘심)이라는 스님 이 있었는데 절이 너무 낡아 묘심은 절을 증수코자 부처님께 기도하였다. 그런데 기도를 끝마치던 날 부처님께서 꿈에 나타나 하시는 말씀이,"네가 내 일 아침 일찌기 일어나 동구 밖에 나가다가 제일 먼저 보는 사람에게 시주를 청하라" 하시었다. 묘심은 꿈으 꾸고 마음이 기뻐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부처님께 예불하고 권선문을 들고 동구밖에 나갔다. 그런데 맨 처음으로 만 난 사람은 아랫마을 조부자집 사는 머슴이라는 꼴에 돈이 있을것 같지 않아 망서리다가 부처님 말씀을 생각하고 다가서서 사정하였더니 머슴은 반가워 하며"절을 중수하려면 돈이 얼마나 듭니까?" 하고 물었다. "약 백냥만 가지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권선문을 내 놓으라 하였다. 묘심은 하도 허망하여"당신에게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있습니까?" "예, 저는 조부자집에서 사십년간 머슴을 살았는데 장가를 들기 위해서 한푼 도 쓰지 않고 모았으나 이제 나이 오십삼세가 되었으니 이제사 장가를 간들 무슨 재미를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고맙습니다."하고 권선문에 백냥을 적고 조부자 집에 가서 곧 돈 백냥을 주어 절 중수를 곧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머슴보고 미쳤다고 비방하고 또 묘심이 그를 꼬여 뜯어 냈다고 헛 소문을 퍼뜨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머슴은 시주한 뒤 몇일 안 있다가 병(重風)이 나 일도 못하고 돈도 없으니 하루는 조부자 집에서 사람을 시켜 업혀서 절로 보냈다. 그래서 묘심은 하는 수 없이 방 하나를 정해 주고 정성껏 간호를 하면서 시주 한 공덕이 헛되지 않다면 결정코 나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백일 기 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한지 몇일이 되지 않아 머슴은 병이 더하여 그만 죽고 말 았다. 하도 허망한 일이라 기가 막혀 말도 못하고 정성껏 화장하여 장례를 잘 치루어 주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니 부처님이 너무나도 야속한 것 같 았다. "그 머슴이 평생동안 번 돈을 다 절에다 바쳤는데 병을 낳게하여 주지는 않고 병이 더하여 죽고 말았으니 부처님은 영험이 없다." 하고 도끼를 가지고 법당 에 들어가 부처님을 원망하면서 부처님 이마를 도끼로 내려쳤다. 그랬더니 도끼가 이마에 밖혀 빠지지 않는 지라 묘심은 그를 빼기 위해 온갖 힘을 다하 다가 민망하여 그대로 놓아두고 걸망을 싸서 짊어지고 절을 떠났다. 이산 저산 이절 저절 유랑하기 이십오년, 공부를 많이 하였으나 항상 심원사 부처님 생각 이 나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지금쯤은 절이 완전히 폐허되었으리라.-아니 혹 누가 들어가 도끼를 빼고 시 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이렇게 여러 갈래로 생각하다가 한번 찾아가 참배 나 드리고 와야겠다 하고 절을 찾아 왔다. 그런데 그 날사 말고 산청군에 새로 박정재라는 원님이 부임하여 심원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럴리가 있느냐? 내가 한번 가서 빼 보리라."하고 종자를 몇과 같이 절을 찾아 왔다. 과연 부처님 이마에 꽂힌 도끼를 보고 "이상도 하다" 하며 손으로 가 잡으니 그만 도끼가 쑥 빠지는데 "화주시주상봉"이라 한 푸른 글자가 도끼날에 쓰여 있었다. 그 때야 묘심이 원님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그 도끼의 내력을 이야기 하니, "참으로 신기하다." 하며 원님은 더욱 신심을 내어 절했다. 얼마 뒤 다시 부 처님을 쳐다보니 도끼가 빠진 곳에 상처가 금방 없어지고 더욱 이마에서 백호 광명이 빛났다. 원님은 묘심으 붙들고"나는 전생에 시주한 공덕으로 일자무식 이었지만 좋은 곳에 태어나 이런 벼슬을 하게 되었으니 스님께서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저와 함께 공부하게 해주세요"하고 사정하였다.세상 사람들은 참 으로 보기 드문 일이라 놀래며 부처님을 받들기 옛보다 배는 더했다.
<5>낭백스님이 죽어 순찰사 되다.
조선말엽(서기 1719)동래 범어사에서는 범어사에서는 낭백(浪白)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계행이 청정하였으며 행인은 물론 금정산 주위의 가난한 사람 들을 위하여 물심으로 많은 보시를 하였다. 당시 조선 말엽의 배불정책으로 동래부사는 남달리 괴팍스러웠으므로, 관권을 이용하여 270여종이나 되는 엄청난 잡역(雜役)을 부과하여 자기 분이 내키는 대로 스님들을 마구 혹사 시켰다. 절에도 할 일이 많은데 매일 같은 출역으로 들붂이니 도무지 붙어 있을 수가 없어 절유지조차 곤란하게 되었다. 낭백스님은 새벽예불도 제대로 못할 형편에 있으면서 어찌 해서라도 스님들의 고역을 면하도록 노력하였다. 남몰래 부처님 앞에 나아가"하루라도 속히 이 생을 마치고 내생에는 큰 벼슬에 올라 도 닦는 스님들로 하여금 관권구속과 혹사없이 도를 닦을 수 있도록 제가 보살피게 해주시옵소서..."하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러고는 홀연히 절을 떠나 동구 밖의 산비탈을 개간하여 오이와 감자를 심어 배고픈자를 위하여 보시하였다. 또 한편 밤이면 짚신을 삼아서 발을 벗고 가는 행인들에게 보시하였으며 날저문 후의 나그네를 위하여 오두막을 지어 함께 머무르게 하고 손수 밥을 지어 배고픔을 면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새벽 이면 일어나 서쪽에 있는 범어사를 향하여 부처님께 정성스리 기도를 하였다. 이웃 마을에서도 낭백스님이 지나가면 모두 합장하였으며, 또한 일을 하게 되면 도와주곤 하였다. 그럭저럭 몇 해가 지난 초겨울 어느날 낭백스님은 모 든 것을 정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범어사로 올라갔다. 바로 그날밤을 법당에서 새우더니 아침에 어느 행자를 만나서는"이제 몸은 주린 범에게 보시를 하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내가 간후 25년이 지나서 절 의 잡역을 없애고 불사를 위해서 애쓰는 관리가 있으면 그 사람이 나인 줄 알 아라"고 하고는, 그 길로 산으로 올라가서 몸을 범에게 던져 보시하였다. 범이 먹다 남은 시체는 며칠후 나뭇군들에 의해서 발견되어 절에서 화장하 였는데 사리(舍利)와 영골(靈骨)이 나와 지금도 범어사의 탑에 모셔져 있다. 그후 과연 24살 난 나이 어린 경상도 순찰사 조엄이 새로 부임하여 각군을 시찰하게 되었다. 동래군에 들렸다가 때 마침 봄날이라 산천경치가 좋기에 범어사를 찾기로 하였 다. 동래구에 이르러 개간된 오이밭과 감자밭을 지나면서 어쩐지 향수를 느끼며 절에 이러서는 마치 고 찾아온 듯한 감격으로 우선 금강계단에 올라가 무수히 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어떤 스님을 통하여 절의 사정을 묻더니, 여러 잡역으로 스님들이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단번에 면제하여 주고 많은 불사를 하기로 약속 하였다. 그 스님은 하도 기이하여 조순찰사에게 나이를 물으니 24살이라 하였다. 그 스님은 낭백스님이 돌아가신지 24년이 되는 오늘이 때마침 제삿날이라고 하니, 조엄 순찰사는 그제서야 자기의 전생이 낭백스님이었음을 깨닫고, 그 후부터는 평생을 통하여 많은 불사를 하였다.
<6>신라 석종(石鍾)의 유래
손순(孫順)은 신라 서울 경주 모량리 사람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런데 손순의 어린 아이가 항상 늙은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손순 은 이를 민망이 여겨 그 아내에게 말하였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마는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려운데 아이가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어머니가 굶주림이 너무 심하니 이 아이를 매장해 버리고 어머 니를 배부르게 해야 하겠오." 이에 아이를 엎고 취산(醉山)북쪽 들로 가서 땅을 팠더니 문득 돌종(石鍾)이 나왔는데 심히 기이하였다. 그들 부부는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감간 숲의 나무 위에 걸어 놓고 두드려 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하여 들을만 하였다. 처가 말 하였다."이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마 이 아이의 복인듯 하니 묻어서는 아 니되겠습니다." 남편도 또한 그렇게 여겨 이내 아이와 돌종을 지고 집으로 돌 아와서 들보에 달아 놓고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 소리를 듣고 측근의 신하에게 말하였다.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 멀리 들리니 보통 종이 아니오. 빨리 이를 알아 보시오" 왕의 사자가 그 집에 가서 알아보고 사실을 자세히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말하였다. "옛날에 곽거(郭巨)가 아들을 묻자 하늘이 금 솥을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이를 묻자 땅에서 돌종이 솟아났으니 전세의 효와 후세의 효를 천지가 함께 살피신 것이다." 이에 집 한채를 내리고 해마다 매벼 50석을 주었으며 지극한 효도를 표창했다. 손순은 자기 옛 집을 내놓아 절 이름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돌종을 달아 두었다. 진성왕 때에 후백제의 횡포한 도적이 그 마을에 쳐들어 와서 그 종을 가져갔다.
<7>사복이 죽은 어머니를 업고 땅속으로 들어가다
경주 만선북리(萬善북里)에 한 과부가 있었다. 남편도 없이 아이를 베어 낳 았는데 그아이는 나이12세가 되어도 말도 하지 않고 또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름을 사복(蛇伏)이라 불렀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원효는 고선사(高仙寺)에 있다가 그를 보고 영접했으나 사복은 답례도 하지않고 말했다. "그대와 내가 옛날에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지금 죽었으니 같이 장사지냄이 어떤가?" "좋다" 마침내 원효는 그와 함께 사복의 집으로 갔다. 사복이 원효에게 포살 (布薩)을 시켜 계(戒)를 주게하니 원효는 그의 시체앞에 가서 빌었다. "나지말라. 죽는 것이 고통이다. 죽지 말라. 나는 것이 고통이다." 사복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너무 말이 길다."하니 원효는 말을 고쳐, "생사가 다 고통이다."하였다. 두 사람이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里山) 동쪽 기슭에 갔다. 원효가"지혜있는 호랑이를 지혜의 숲속에 장사지내는 것이 어찌 마땅하 지 않는가?" 하니 사복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읊었다. "그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라수 사이에서 열바하셨는데 지금도 그와 같은 이가 있어 연화장(蓮華藏) 세계에 들어가려한다." 말을 마치고 옆에 있는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명랑하고 청허(淸虛)한 세계가 그 안에 칠보로 장엄되어 있었다. 사복은 말 없이 시체를 등에 업고 그 속으 로 들어가니 땅이 갑자기 합쳐져 원효는 하는 수 없이 홀로 돌아왔다.
<8> 정백인(程伯鱗)과 왕마자(王麻子)
태청 휘상,정백인은 양주에 오랫동안 살면서 관음보살을 정성껏 섬겼다. 을유년 여름 병정들이 양주성을 지나게 되어 백인은 관세음보살님 앞에 나아가 가족이 모두 안전하게 피난하게 되기를 빌었다. 그런데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말했다. "너의 가족17명중에 16명은 무사히 피난할 수 있으나 한사람은 안 된다." "그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너다" "어찌하여 그러합니까?" "너는 전생에 왕마자란 사람을 칼로 잘라 죽인 일이 있는데 이제 그 과보로 그의 칼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너희 가족은 모두 동상(東床)에 있게하고 너는 혼자 중당에 기다려 가족에 누가 없게 하라." 너무나도 역역하여 가족을 모두 피난시킨 뒤 그는 체념한듯 그저 부지런히 경만 읽고 있었다. 그랬더니 5일 후 과연 병정 한 사람이 문 앞으로 왔다. 백인은 흔연한 마음으로 영접하며,"어서 오십시요 왕마자선생"하니 왕마자는 어리 둥절하며,"어떻게 나의 이름을 알았습니까?"하고 물었다. 백인이 전 날 꿈 이야기를 하며,"내가 전생에 당신을 죽였으니 오늘은 내가 마땅히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그러나 다시는 나와 원수가 되지 맙시다."하니 그도 너무 희한한 일이라,"그렇다면 오늘 그 원한을 풀고 다정한 벗이 됩시다."하고 카로 백자인을 죽이는 흉내만 내고 그만 가버렸다.
- 불교설화 8편을 싣습니다. 자료는 박광용의 [행복한 하루]에서 가져 왔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