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군 봉성면 봉성리 26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종연간 건축한후 1579년(선조 12)중수하고,1869년 현감 조병익(趙秉益)이 회랑과 동서무를 중수하고,1925년에 군수 서병린(徐丙麟)이 중수한 기록이 있으며, 특이한 것은 향교(鄕校)9동(棟)의 건물이 동일한 홑처마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1950년 ~ 1975년까지 25년간 봉성고등공민학교(鳳城高等公民學校 :-중학과정)로 사용 되었는데 이때 누각(樓閣)과 명륜당(明倫堂)에 유리창을 끼워 원형이 손상된적이 있으며, 1975년에 폐교된후 그해 군수 권명흠과 전교(典校) 이성호(李成鎬)의 노력으로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고, 1979년 군수 조갑희와 지방유림들이 보수를 한후 최근에도 여러차례 중수를 하였다.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3호로 지정되었으며소유는 경북향교재단이나 봉화향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소장전적은 거의 산실(散失)되었으며, 봉화향교임록 (奉化鄕校任錄) 입재록(入齋錄),사마록 (司馬錄)향교원임록(鄕校原任錄)등은 향토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현재 전교 1명과 30여명의 장의(掌議)가 매월 초하루는 전교와 총무장의가 분향하고, 매월보름은 장의 2명이 돌아가면서 분향을 하고 있다. 대성전봉안성현(大成殿奉安聖賢)으로는 공부자(孔夫子)를 비롯한 오성 (五聖),송조사현(宋朝四賢),동국18현(東國十八賢)등 27위(位)의 위판 (位版)을 봉안하고 열향(列享)하고 있으며, 석전(釋奠)은 년1회 음력 8월 27일 공자탄일(孔子誕日) 상오 10시에 거행되고 있다 가. 대성지성문선왕(大聖至聖文宣王)공자(孔子)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의 성은 공씨(孔氏)요, 휘(諱)는 구(丘)며 자(字)는 중니(仲尼)니 단기 1783년 경술 11일 경자(서기전 552년) 노(魯)의 창평향(昌平鄕) 야읍(야邑 : 현 산동성 곡비현)에서 부(父) 숙량흘(叔梁紇)과 모(母)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탄생하셨다. 공자께서는 하늘이 낳으신 생지(生知)의 대성(大聖)으로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학문에 정진하셨으며 더 잘 아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을 청했다. 젊어서 이미 박학다식하셨으며 회계 출납적인 위사(委吏) 목장 경영직인 사직(司直) 등으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셨다. 주(周)의 낙읍(洛邑)을 방문하시어 문물을 견학하시고 귀국하시어 명망이 높아지면서 많은 제자가 모였다. 36세 되시어 소공(昭公) 25년에 노(魯)에는 3환(三桓 : 孟孫·叔孫·季孫)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공자께서는 제(齊)로 피난하시어 거기서 음악을 논하시고 경공(景公)에게 정명주의적(正名主義的) 정치이상을 말하셨다. 경공은 공자를 고문으로 임용하여 이를 실시하려 했으나 예절의 번잡과 비현실적임을 지적하여 반대하는 대부(大夫) 안영(晏嬰)의 진언으로 좌절, 실망하시어 2년만에 귀국하셨다. 노(魯)에 돌아오신 후에 시서예악(詩書禮樂)을 연구하시면서 제자들을 교육하셨다. 배신(陪臣) 양호(楊虎)가 세력을 잃고 물러난 뒤 중도재(中道宰)를 거쳐 대사구(大司寇)에 임명되시어 빼앗긴 노의 땅을 반환받고, 난신(亂臣)인 대부(大夫) 소정묘(少正卯)를 죽였다. (서기전 496년) 삼환씨(三桓氏)의 세력을 꺾으려 하셨으나 실패하시고 또 정공(定公)이 주위 제국(諸國)의 계략에 속아 음악(淫樂)에 빠진 것을 만류하시다가 대립하여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시고 사임하신 뒤에 14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간난신고(艱亂辛苦)를 무릅쓰시고 위(衛), 송(宋), 조(趙), 정(鄭), 제(齊), 진(晋), 채(蔡) 등 열국(列國)을 주유(周遊)하시며 인의(仁義)와 정도(正道)에 의한 정도정치(正道政治)를 실현하여 난세를 구제하시려고 노력하셨으나, 제복(諸僕)들이 공대(攻代)에만 급급하여 이해하지 못하므로 애공(哀公) 11년(484)에 다시 노(魯)로 귀국하셨다. 귀국하신 뒤에는 오직 제자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시어 시(詩), 서(書), 예(禮) 등을 제정하시고 춘추를 저술하셨으며 주역을 연(演)하시어 효전(爻傳을 지으셨다. 공자의 역사적 객관적 생애가 이러함에 비해 내면적인 인격의 완성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셨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30대에 이미 일가견(一家見)을 갖고, 40대에 흔들림이 없으셨으며, 70대에 오셔서는 마음에 꿈은 바가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었다고 하신데서 대성인으로서 진면목을 알 수가 있다. 제자는 3천명으로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잘 하는 사람이 72명이었으며, 그중에서 뛰어난 4과10철(四科十哲)이 있었다. 덕행(德行)은 안회(顔回), 민손(閔損), 재백우(再伯牛), 중궁(仲弓)이며, 언행은 재예(宰豫), 자공(子貢)이며, 정사(政事)에는 재구(再求 : 子有), 중전(仲田 : 子路)이고,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자하(子夏)이다. 그 외에도 증자(曾子)·자장(子張)·유자(有子) 등이 있다. 공자의 사상은 제자들과의 언행록격인 논어에 있는데 그 근본은 인(仁)으로서 스스로 이를 단적으로 밝히신 바 없으나 대체로 지덕(至德), 지선(至善)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심오한 인도주의(人道主義)로서, 정치적으로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必也正名乎), 질서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君君臣臣)의 본분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며,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盡己), 남을 부축하며(推己),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악(强惡)하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을 비롯한 제덕(諸德)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인(仁)을 지향하고 예(禮)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소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이고 비상대적인데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고 비보편적이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라 설파하셨다. 인간은 인간적으로 이분(二分)하여 생각하셨다. 그러나 인(仁)은 성인만이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자신마저도 인(仁)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외경(畏敬)할 만큼 어려운 것임을 암시하셨다. 그 자신은 예(禮)에 엄격하여 절도가 계셨으며, 엄숙·온화·원만한 성격을 지니시고 계셨다. 사상이 현실적, 현세적이어서 상식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심오하며 제자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각인(各人)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서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성품을 계발(啓發)시켰다. 공자의 사상은 생시에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曾子)·자사(子思)를 거쳐 맹자(孟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한(漢)의 무제(武帝)이후 중국의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를 이루었으며, 또 동아시아(한국,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애공(哀公) 16년(기원전 479) 74세로 졸하시니 魯城化 洙上(산동성 곡비현 북쪽)에 장하였다. 역대의 군주가 봉시(封諡)를 누가(累加)하여 송(宋)의 진종(眞宗)시(997~1022)에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라 하였고, 원(元)의 무종(武宗 : 1307~1311) 때에 대성(大成) 2자를 가호(加號) 하였으며, 명(明)의 세종(世宗 : 1521~1566)에 지성선사(至聖先師)라 개칭하였다.
나. 연국복성공(兗國復聖公) 안자(顔子) 부성공(復聖公) 안자(顔子)의 명(名)은 회(回)요, 자(字)는 자연(子淵)이니 노국인(魯國人)이다. 공자의 제자이며 30세가 젊었다. 안자(顔子)는 천자(天資)가 침잠순수(沈潛純粹)하여 상지(上智)의 자질을 가지고 선문호학(善問好學)하여 덕행이 모든 제자의 수위에 있었으며, 삼월불위인(三月不違仁)하여 거의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일간미달(一間未達)할 뿐이다. 그 호학(好學)함은 불천노불이과(不遷怒不二過)하였으며, 그 지조는 공자께서도 많이 칭찬하셨으니「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敢其憂 回也爲之 賢哉」어렵고 가난해도 불개기락(不改其樂)하였다. 주(周)의 경왕(敬王) 38년(서기전 490)에 졸하니 나이 32세였다. 공자께서 곡통(哭慟)하시며 " 슬프다 하늘이 너를 죽였구나 "라 하셨다. 원(元)의 문종(文宗)시에 연국부성공(兗國復聖公)을 봉하고 명(明)의 세종(世宗)시에 부성안자(復聖顔子)라 개칭하였다. 다. 성국종성공(郕國宗聖公) 증자(曾子) 종성공(宗聖公) 증자(曾子)의 명(名)은 참(叅)이요, 자(字)는 자여(子輿)니 부(父)는 점(點)이며 노국(魯國) 남무성현(南武城縣)이다. 공자의 제자로 46세가 젊었다. 증자(曾子)는 지성독실(至誠篤實)하고 근엄장중(謹嚴莊重)하여 오도일관(吾道一貫)의 종지(宗旨)와 대학교인(大學敎人)의 법과 선왕효치(先王孝治)의 도(道)는 공문(孔門) 전수심법(傳授心法)의 본령(本領)으로 증자가 친히 그 전통을 받아 편저를 하여 종지(宗旨)를 후세에 전하였다. 공자께서 돌아가셨을 때에 나이 겨우 26세였으나 조예가 정심(精深)하였으며 만년에는 소견이 더욱 높아져 지킴이 더 한층 돈독하여 고명광대(高明廣大)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공자의 손(孫) 자사(子思)에게 도통(道統)을 전하였다. 원(元)의 문종(文宗)시에 성국종성공(郕國宗聖公)을 봉하고 명(明)의 세종(世宗)시에 종성증자(宗聖曾子)라 개칭하였다.
라.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자사(子思) 술성공(述聖公) 자사(子思)의 성(姓)은 공(孔)이요 명(名)은 급(伋)이며 자(字)는 자사(子思)니 공자(孔子)의 손(孫)이요 리(鯉)의 자(子)이다. 소시에 성조(聖祖) 공자의 교훈을 얻어 잇고 그 책임이 중함을 자임(自任)하였던 바 증자(曾子)가 성조의 적전(嫡傳)이 됨에 이르러 그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여 성명(性命)의 본원(本源)을 궁구하고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묘(妙)를 탐구하며 성(誠)으로 본령을 삼고서 경신존도(敬身尊道)를 위주하여 깊이 성조의 전통을 계승하고 도학(道學)의 실전(失傳)을 염려하여 중용(中庸)을 저술하셨다. 원(元)의 문종(文宗)시에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을 봉하고 명(明)의 세종(世宗)시에 술성자사(述聖子思)라 개칭하였다.
마.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맹자(孟子) 아성공(亞聖公) 맹자(孟子)의 명(名)은 가(軻)요 자(字)는 자차(子車) 또는 자여(子輿)라 하며 노(魯)의 공족(公族) 맹손씨(孟孫氏)의 후손(後孫)이요 추국인(鄒國人)이며 부(父)의 명(名)은 격(激)이요 모(母)는 패씨(佩氏)의 슬하에서 자랐다. 추현(鄒縣)은 공자의 탄생지인 곡부현(曲阜縣)과 가까웠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배하고 사숙(私淑)했다. 어머니는 삼천지교(三遷之敎), 단기지훈(斷機之訓)으로 유명한 현모로서 그의 감화도 크게 받고 자사(子思)의 제자에게 배웠다. 학업을 마친 뒤에 양(梁)·제(齊)·송(宋)·노(魯) 등의 여러 나라를 돌면서 제복(諸僕)에게 왕도(王道)를 개진했다. 제(齊)의 선왕(宣王), 양(梁)의 혜왕(惠王), 등(藤)의 문공(文公)의 정신적인 공명(共鳴)을 얻었을 뿐 실제 정치에 용납되지 못하여 귀국 후에는 만장(萬章)·공손축(公孫丑) 등과 시(詩)·서(書) 및 공자의 뜻을 조술(祖述)하였으니 그것이 현행 맹자칠편(孟子七篇)이다. 때는 주말전국시대(周末戰國時代)라 각국이 서로 침공을 일삼고 공취(攻取)를 조석으로 하며, 합종연(合從連)의 책(策)과 부국강병론과 피음사도지설(詖邪道之說)이 중국 전역을 풍미(風靡)하던 시기에 제복(諸僕)들의 공감을 얻기란 불가능하였다.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전국(戰國)의 절박한 정세하에서 맹자가 주장하는 요순의 도덕과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왕도정치를 당시의 군주들이 이해못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였다고 보여진다. 정통유교를 후세에 전달하여 크게 영향을 끼친 그의 윤리설 및 정치론의 중심사상은 성선설(性善說)로 인간의 성질은 모두 동성(同性)이며 선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잔인한 것을 보았을 때에 측은한 마음, 추악한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는 수치의 마음, 어른을 공경하는 사양하는 마음, 선악을 식별하는 시비의 마음, 곧 이는 인의예지 사덕(四德)의 단(端)으로서 이 사단이 존재하는 이상 성(性)이 선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사람이 악행을 하는 것은 외부이 영향을 받아 물욕에 빠졌기 때문이라 했다. 학문의 방법에 있어서는 선천적 선성(善性)을 잘 길러 물욕에 감염됨이 없이 호연지기를 길러야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정치론에 있어서는 공자와 거의 같으나 시대적인 변화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즉 공자가 존주론(尊周論)을 주장한데 대하여 맹자는 민권주의로 발전하여 아무리 군주라도 덕을 잃었을 때는 대체할 수 있다는 혁명론을 말했다. 또 성선설에 입각하여 왕도론(王道論)·교화론(敎化論)을 주장하는 한편 주(周)의 문왕(文王)을 이상으로 하여 정전법(井田法)의 실시를 주장했다. 맹자의 학설은 여러 제후의 공명은 얻지 못했으나 공자의 인의설(仁義說)을 확장하고 유학의 이론적인 기반을 수립했다. 송(宋)의 신종 원풍 6년(1083)에 맹자를 추국공으로 추봉하고 동 7년에 공자묘(廟)에 배향하였으며 원(元)의 문종시에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을 봉하고 명(明)의 세종(世宗)시에 아성맹자(亞聖孟子)라 개칭했다.
바. 도국공 주돈이(道國公 周惇頤) 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惇頤)의 자(字)는 무송(茂松)이요 호(號)는 염계(濂溪)니 북송 하남성인이다. 비록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정밀하고 강직하여 힘써 도리를 다하고자 하니 벼슬이 오르지 않았음으로 오로지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학문에만 힘을 기울였다. 저서에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주자가 " 전성(前聖)께서 미발(未發)한 바를 발(發)하였다 " 하였으니 통서(通書) 수십편이 성학본원(聖學本源)을 밝혔다. 하여 남송(南宋)의 주자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학문은 정호(程顥)·정이(程頤)의 형제가 이어 받았으며 송학(宋學)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년(年)이 57세에 졸(卒)하니 후에 종사문묘(從祀文廟)하고 도국공(道國公)에 봉하였다.
사. 예국공 정 호(豫國公 程 顥) 예국공(豫國公) 정호(程顥)의 호(號)는 명도(明道)니 북송(北宋) 하남인으로 송 인종(仁宗) 명도 원년(1032)에 나셔다. 젊어서 관계에 들어가 관직을 임명받고 일했으나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과 맞지 않아 사직하고 동생인 이천(伊川) 이(頤)와 함께 염계(濂溪) 주돈이(周惇頤)에게서 오랫동안 수업하였다. 힘써 학문을 닦아 역경(易經)에 도를 구하여 드디어 유학을 체계화시켰다. 건원일기(乾元一氣)의 철학을 수립하고서 인간의 성(性)에 선악을 구별하지 않고 그것은 후천적인 것이라고 보아 선으로 향하는 수양법을 세워 우주의 이치를 자각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저서에 식인편(識仁篇)·정성서(定性書)·어록이 있다. 54세에 졸하니 명도선생(明道先生)이라 칭하였다. 송 영종(寧宗)시에 시(諡)를 순공(純公)이라 하고 후에 문묘에 종사(從祀)하고 예국공(豫國公)을 봉했다.
아. 낙국공 정 이(洛國公 程頤) 낙국공(洛國公) 정이(程頤)의 자(字)는 정숙(正叔)이요 호(號)는 이천(伊川)이니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제(弟)이다. 형과 함께 주렴계(周濂溪)에게서 수업하였으며 철종(哲宗)의 시강(侍講)이 되었으나 동파(東波) 소식(蘇軾)과 뜻이 맞지 않아 그 문하생들이 당쟁을 야기시켜 유배되었다. 송의 철종시에 사마광(司馬光)·여공저(呂公著) 등의 중신들이 조정에 천(薦)하면서 " 하남처사(河南處士) 정이(程頤)는 도덕이 순비(純備)하고 학문이 연박(淵博)하여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才)가 있다." 하였다. 그는 명도(明道)와 함께 유교의 철학적 기초를 세운 사람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직각적인 학풍의 명도(明道)와 달리 분석적으로 탐구하여 다른 학자들처럼 질료(質料)로서의 기(氣)를 인정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형상(形相)으로서의 이(理)를 내세워 이기(理氣)의 철학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공적을 쌓았다. 그는 이(理)를 우주의 근원이라 하고 여기에 절대선(絶對善)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성을 이(理)로 보는 새로운 학설을 싹트게 했다. 그 형제의 학설을 이정(二程)의 학이라 하는데 이는 주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주자학을 이루게 하고 송학인 정주학(程朱學) 즉 신유학(新儒學)을 형성하였다. 나이 75세에 졸하니 후에 문묘에 종사하고 낙국공(洛國公)에 봉하였다.
자. 휘국공 주희(徽國公 朱熹) 휘국공(徽國公) 주희(朱熹)의 자(字)는 원회(元晦)요 호(號)는 회암(晦菴)이니 송(宋)의 휘주(徽州) 출신이다. 성(性)이 총혜근엄(聰慧謹嚴)하고 그 학문은 연평(延平) 이동(李侗)을 사사(師事)하였으며 명도(明道) 이천(伊川)을 독신(篤信)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등제(登第)한 뒤로 요순(堯舜)의 덕치(德治)를 바라면서 봉사(封事)와 상서(上書)로 누천만언(屢千萬言)을 개진하였으나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소대배(小大輩)들의 미움을 받아 만년에는 많은 고생을 했다. 그의 학문을 주자학(朱子學)이라 하며 유교의 주류인 이기심성(理氣心性), 거경궁리(居敬窮理)의 학설을 제창하여 그 성리학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소저(所著)에는 주역본의계몽(周易本義啓蒙)·시집전(詩集傳)·대학중용장구혹문(大學中庸章句或問)·논어맹자집주(論語孟子集註)가 있고, 소편(所編)에는 논맹집의(論孟集義)·중용집략(中庸集略)·효경간오(孝經刊誤)·소학서(小學書)·통감강목(通鑑綱目)·근사록(近思錄)·주자집(朱子集) 등 방대하다. 71세에 졸하니 송 영종(寧宗)시에 시(諡)를 문공(文公)이라 하고 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 휘국공(徽國公)을 봉했다.
차. 홍유후 설총(弘儒侯 薛聰)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의 자(字)는 총지(聰智)니 신라 태종(太宗) 무열왕 2년(655)에 출생하였다. 원효대사의 아들로 어머니는 요석공주이다. 신라 3문장(설총·강수·최치원)의 한 사람이며 벼슬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에 통달했으며 이두(吏讀)를 집대성하였다. 경덕왕(景德王) 5년(746)에는 박사(博士)로서 강수(强首)와 함께 구경(九經)을 구결(九訣)로서 강론하여 후학을 지도하였다. 신라 10현의 1인으로 유학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고려 현종(顯宗) 13년(1022) 정월에 홍유후(弘儒侯)를 봉하고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하였으며 저서로는 화왕계(花王誡)가 있다.
카. 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하며 신라 사량부인(沙梁部人)으로 헌안왕(憲安王) 원년(857)에 경주에서 나셨다. 12세 때인 경문왕(景文王) 8년에 당에 유학하여 17세에 과거에 급제,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를 거쳐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供奉)이 되어 자금어대(紫金魚帶)의 하사를 받았다. 고병(高餠)의 종사관으로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 격문을 지어 이름이 당나라 천지에 진동하였다. 헌강왕(憲康王) 11년(884)에 귀국하여 진성왕(眞聖王) 7년(893)에 견당사(遣唐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이 횡행(橫行)하여 가지 못하고 다음해에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려서 하손(阿飡)이 되었다. 그훌 후삼국의 난세를 당하여 전국의 산수 좋은 곳을 찾아 유랑하면서 풍월을 읊다가 마지막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그의 학풍을 듣고서 글로써 문답하였다고 하며 그의 제자로서 고려에 벼슬한 자가 많았다고 한다.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誌)에는 그의 저서로 46집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있다 하였고 그외에 봉암사지증대사적조비문과 숭복사비문도 그가 찬한 글이며 석순응전도 유명하다. 고려 현종 11년(1020) 8월에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하고 동왕 14년 2월에 문창후(文昌侯)에 봉했다.
타.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裕)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초휘(初諱)는 향(珦)이요 자(字)는 사온(士薀)이며 호(號)는 회헌(晦軒)이고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시(諡)는 문성(文成)이다. 고려 고종(高宗) 30년(1243)에 순흥부 죽계 상평리촌에서 나셨다. 아버지 부(孚)는 원래 홍주의 관리였으나 의술로 출세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에까지 이르렀다. 조선조 문종(文宗)의 이름이 향(珦)이었기 때문에 유(裕)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충열왕(忠烈王) 12년(1286)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과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었으며 이해 왕을 따라 원나라에 건너갔다. 연경에서 처음으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기뻐하여 유학의 정통(正統)이 바로 이것이라 하며 손수 그 서책을 베껴 쓰고 또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서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또 학교가 날로 쇠퇴하여 감을 우려하고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장학기금으로써 6품 이상은 각각 은 1근씩,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를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써 학교를 운영케 하는 한편 박사 김문정(金文鼎) 등을 중국에 보내어 공자와 그 제자들의 초상을 그리고 제기(祭器)악기(樂器)와 경서(經書) 등을 구해 오게 하는 등 고려 말기의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주자를 숭배하여 그의 초상을 항상 벽에 걸어두고 주자의 호인 회암(晦菴)의 회(晦)자를 따서 스스로 호를 회헌(晦軒)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이것은 주자의 저서를 보고 그기에 심취하였음으르 의미하는 것으로 보통 우리는 회헌을 우리나라에 맨 처음 주자학을 받아들인 최초의 주자학자로 보고 있다. 졸한지 12년이 되는 충숙왕(忠肅王) 5년에는 왕이 회헌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에서 일하던 원나라 화가에게 명하여 회헌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이 초상화는 현재 소수서원에 보관되어 있는데 고려 때에 된 것으로는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그림의 하나로 매우 귀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조선 중종(中宗) 때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순흥 백운동에 선생의 사묘(祀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드니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가 된다. 충숙왕 6년(1319) 6월에 문묘에 종사(從祀)하였으니 회헌실기(晦軒實記)가 있다.
파. 문충공 정몽주(文忠公 鄭夢周)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선생의 자(字)는 달까(達可)요 호(號)는 포은(圃隱)이며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시(諡)는 문충(文忠)이니 고려 충숙왕(忠肅王) 6년(1337) 6월에 영천군 동우항리에서 나셨다. 부는 성균관 학생 운관(云瓘)이다. 공민왕(恭愍王) 6년(1357) 감시(監試)에 급제하고 동왕 9년에 문과에 장원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修撰) 등을 거쳐 동왕 10년에는 낭장(郎將) 겸 합문기후(閤門祇候)·위위사승(衛尉寺丞)을 지내고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여진 토벌에 참가하고 전농사승(典農寺丞)·예조정랑(禮曹正郞) 겸 성균박사(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고 공민왕 20년(1371)에 태상소경(太常少卿)·보문각응교(寶文閣應敎) 겸 성균직강(成均直講)·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성절사(聖節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13일 동안 사선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귀국했다. 우왕(禑王) 2년(1376)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였다. 언양(彦陽)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일본 구주의 지방장관 금천료준(今川了俊)에게 가서 왜구(倭寇)의 단속을 청하여 응락(應諾)을 받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우산기상시보문각제학지제교(右散騎常侍寶文閣提學知製敎)를 거쳐 우왕 5년에 예의판서(禮儀判書)·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하고 다음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전하고 이어서 밀직제학상의회의도감사보문각제학상호군(密直提學商議都監事寶文閣提學上護軍)이 되었다. 우왕 7년에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봉해지고 이듬해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다가 입국거부로 요동에서 돌아왔으며, 우왕 9년에는 동북면조전원수(東北面助戰元帥)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다음 해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우왕 12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지고 우왕 14년에 문하찬성사지서연사(門下贊成事知書筵事)가 되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했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커가서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리던 중 공양왕 3년(1392)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 ; 太宗)이 이성계를 그날 밤으로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고 이어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 도중 선죽교에서 방원의 문객(門客) 조영규(趙英珪)에게 격살(擊殺)되었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는데 힘쓰시고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유학보급에 진력하시어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되었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송도에 5부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신률(新律)로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에도 관여하여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 잡고자 노력했으나 이성계의 신흥세력에 꺾였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丹心歌)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 밖에도 많은 한시가 전하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태종 원년(1401)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補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증직(贈職)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중종 12년(1517)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 되었다. 포은집(圃隱集)이 전한다.
하. 문경공 김굉필(文敬公 金宏弼)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선생의 자(字)는 대유(大猷)요 호(號)는 한훤당(寒喧堂)이며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단종(端宗) 2년(1454) 5월에 한성(漢城) 정릉동(貞陵洞) 사제(私第)에서 생(生)하니 부(父)는 사용(司勇) 뉴(紐)이다. 성종(成宗) 5년(1474)부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門)에 취학하여 성리학에 통달하였다. 성종 11년(1480)에 생원이 되고 뒤에 남부참봉(南部參奉)이 되었다가 연산(燕山) 3년(1497)에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셨다. 평생에 언행을 소학(小學)에 따르고 합천(陜川) 야로현에서 제자를 교회(敎誨)하였다.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는 점필재문인이라 하여 희천에 유배되고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시켰으며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회 때에 사사(賜死)를 당했다. 중종(中宗) 때에 도승지(都承旨) 좌의정(左議政)에 증직되고 선조(宣祖) 8년(1575)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補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증(贈)하고 광해(光海) 2년(1610)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거. 문헌공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선생의 자(字)는 백욱(伯勗)이요 호(號)는 일두(壹蠹)이며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세종(世宗) 32년(1450) 5월에 함양 덕곡리 개평촌에서 생(生)하니 부(父)는 우후(虞侯) 육월(六月)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문인(金宗直門人)으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선생과 도의(道義)로 교유(交遊)하셨다. 한동안 지리산에 들어가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성종(成宗) 21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세자(世子) 시강원(侍講院) 설서(說書)를 지내시고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었으나 연산군 4년 무오사화로 종성에 유배되셨다가 사사(賜死)되시고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셨다. 당시 성리학의 대가로서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역행실천(力行實踐)을 인(引)한 독서를 주로 하셨다. 용학주소(庸學註소), 주객문답(主客問答), 진수잡저(進修雜著)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에 부인(夫人)이 소각하고, 지금은 한강(寒崗)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그 유집(遺集)이 전할 뿐이다. 중종(中宗) 12년(1517)에 우의정에 증직되고 광해 2년 9월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너. 문정공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선생의 자(字)는 효직(孝直)이요 호(號)는 정암(靜菴)이며 시(諡)는 문정(文正)이요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성종(成宗) 13년(1482) 8월에 한성부(漢城府)에서 부(父) 현감(縣監) 원강(元綱)의 아들로 나셨다. 어릴 때부터 학문의 뜻이 컸으며 18세때 아버지가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자 따라가서 마침 희천에 유배되었던 성리학자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을 만나 깊은 감명을 받고 그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학문은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을 받들어 이를 토대로 하여 경전(經傳) 연구에 응용했으며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옛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중종(中宗) 5년(1510)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고 중종(中宗) 10년에 추천으로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으나 과거를 보아 떳떳이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다짐하던차 마침 알성시(謁聖試)가 있어 이에 급제하셨다. 전적(典籍)을 거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교리(校理)·응교(應敎)·승지(承旨)를 지내고, 부제학(副提學)이 되어서는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단행하고 유학정치를 구현하려 함으로써 유학과 문치에 뜻을 둔 중종에게 격별한 대우를 받았다. 특히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임하셨는데 당시의 어진 선비들이 모두 뽑혀 요직에 앉은 때라 서로가 협력하여 숙폐(宿弊)를 개혁하니 과거 성종 때의 법이 차츰 실행되기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정암선생의 계청(啓請)으로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추천에 의해 재행(才行)이 겸비한 선비 120명 중에서 중종 14년(1519) 4월에 중종이 친히 장령(掌令) 김식(金湜) 등 28명을 뽑으니 정암선생 등은 그들을 사간원(司諫院)홍문관(弘文館)시강원(侍講院) 등 요직에 등용하였으며 조정에는 간신들이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들은 성리학에 입각한 철인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를 내세우고 기성(旣成)·훈신(勳臣)·귀족(貴族)들을 소인배(小人輩)라 지목했으며 양풍미속(良風美俗)을 기르기 위해 미신의 타파와 향약을 실시케 하고 민간의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에 유익한 여러 가지 서적을 번역, 인쇄하여 널리 보급하는 등 이상주의적 정치를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신진의 청년들이라 생각이 너무 급진적이고 특히 경연때 마다 발언이 그치지 않아 중종도 차츰 그 응대에 지치기 시작했는데 당시 정암(靜菴) 등에 의하여 벽지로 좌천되어 있던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눈치채기까지 되었다. 그리하여 정암선생은 왕도정치가 일조일석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임을 알고 항상 자리를 내 놓으려 했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과격과 선비들로부터 우유부단 하다는 비난을 받게까지 이르렀다. 그해 10월 정암선생은 대사간(大司諫) 이성동(李成童) 등과 함께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문란하게 책록(策錄)되었으니 부당한 자들은 훈록(勳錄)에서 삭제하라고 소를 올렸으며 대신(大臣)·육경(六卿)들도 이를 지지하는 계청(啓請)을 올렸다. 중종은 하는 수 없이 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을 공신훈적(功臣勳籍)에서 삭제해 버렸으며 이로 인해 정암선생은 훈록에서 삭제된 자들로부터 깊은 원망을 받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홍경주가 찬성(贊成)이 되었다가 정암선생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드디어 남곤·심정 등과 기맥을 통하고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에 이르러 홍경주는 자기의 딸 희빈(熙嬪)으로 하여금 " 백성의 마음이 온통 조정암에게 기울어졌다 "고 말하게 하고, 심정은 또 경빈박씨(敬嬪朴氏)의 궁비(宮婢)를 통해 "조정암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며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게 했다. 또 궁안의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씨(趙氏)가 왕이 된다는 글을 써 벌레가 파 먹음으로써 글자를 새기게 하여 이 일이 궁의 손을 거쳐 왕에게 전해지게 하는 등 왕의 뜻을 움직이려고 갖은 수단방법을 쓰자 왕도 또한 뜻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심정은 홍경주를 시켜 밀서를 가지고 실의(失意)한 여러 재상들을 찾아가 정암선생을 죽일 것을 모으케 하자 홍경주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전(金銓) 등과 함께 "몰래 왕에게 글을 보내어 고변(告變)하려고 해도 왕을 모신 근시(近侍)가 모두 정암선생의 심복이므로 도리가 없으니 신무문(神武門)을 열고 밤에 들어가 상변(上變) 하겠다"고 청했다. 드디어 10월 15일 밤 홍경주는 김전·남곤·이장곤·고형산·심정·홍숙·손부방·유영·윤희인·김근사·성운 등과 신무문으로 궐내에 들어가 왕에게 입대(入對)하고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하여 구신(舊身)을 몰아내고 나라를 뒤집어 놓았으니 그 죄를 밝혀달라"고 진청(秦請)했다. 그리하여 조광조를 비롯하여 참찬(參贊) 이자(李耔)· 형조판서(刑曹判書) 김정(金淨)· 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 부제학(副提學) 김구(金絿)· 도승지(都承旨) 류인숙(柳仁淑)· 승지(承旨) 박세희(朴世熹)· 응교(應敎) 기준(奇遵)· 수찬(修撰) 심연원(沈連源)· 공서린(孔瑞麟)· 윤자임(尹自任)· 안정(安珽)· 이구(李構)· 홍언필(洪彦弼)· 정광필(鄭光弼)· 우의정(右議政) 안당(安塘)· 신임대사헌(新任大司憲) 류운(柳雲)· 신임대사헌(新任大司憲) 윤희인(尹希仁)· 전적(典籍) 정응(鄭膺)· 봉교(奉敎) 채세영(蔡世英) 등의 역간(力諫)으로 일단 취조를 받게 되었다. 결국 정암선생을 비롯하여 김정(金淨)·김구(金絿)·김식(金湜)·윤자임(尹自任)·박세희(朴世熹)·기준(奇遵)·박훈(朴薰) 등 8명이 귀양가게 되어 정암선생은 능주(綾州)에 귀양가 12월 20일 드디어 사사(賜死)되었다. 기묘사화후 선조 원년(1568) 4월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광해 2년 9월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은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일두(壹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선생을 가리켜 동방사현(東方四賢)으로 숭배했다. 저서로는 정암집(靜菴集)이 있다.
더. 문원공 이언적(文元公 李彦迪)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선생의 초휘(初諱)는 적(迪)이요 자(字)는 복고(復古)이며 호(號)는 회재(晦齋)며 본관은 여흥(驪興)이요 시(諡)는 문원(文元)이다. 성종(成宗) 22년(1491) 11월에 경주 양좌촌에서 생(生)하니 부(父)는 생원(生員) 번(蕃)이다. 중종(中宗) 9년(1514) 문과에 급제하여 천관랑(天官郞)을 비롯하여 인동현감(仁同縣監)· 장령(掌令)· 밀양부사(密陽府使) 등을 거쳐 중종 25년에는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당시 김안로(金安老)의 거용문제(擧用問題)에 대하여 극력 반대하다가 심언광(沈彦光) 등의 모략으로 물러났다. 중종 32년(1537) 김안로 일파가 쫓겨난 뒤에 종부사첨정(宗簿寺僉正)·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고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어 선치(善治) 했으므로 경내(境內)가 평안하였다. 수천언(數千言)의 소를 올려 국가대본(國家大本)과 정치강령을 논하여 왕의 찬탄을 받고 가선(嘉善)에 올라 예조판서(禮曹判書)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하고 인종(仁宗) 1년(1545)에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이 되셨다가 다음해인 인종 2년에 양재역의 벽서(壁書)사건에 관련되어 강계(江界)로 귀양가셨다가 명종(明宗) 8년(1553) 적지(謫地)에서 졸(卒)하셨다. 선조(宣祖) 원년에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에 명증(命贈)되고 광해(光海) 2년(1610)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셨다. 회재선생은 조선전기의 뛰어난 성리학자로 특히 주리(主理)의 학설은 퇴계선생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선생이 28세 때에 조한보(曺漢輔)와 여러 차례에 걸쳐 논쟁한 무극(無極)· 태극설(太極說)은 조선 초유(初有)의 대논쟁이라 한다. 후에 퇴계선생은 회재선생을 한훤당 김굉필.일두 정여창.정암 조광조와 함께 동방4현으로 추모하였다. 소저(所著)에 회재집(晦齋集).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속혹문(續或問).구인록(求仁錄).구경연의(九經衍義) 등이 전하며 옥산서원(玉山書院)에 보관되어 있다.
러. 문순공 이황(文純公 李滉)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선생의 자(字)는 경호(景浩)요 호(號)는 퇴계(退溪)이며 시(諡)는 문순(文純)이고 본관은 진성(眞城)이니 연산군 7년(1501) 11월에 예안현 온계리에서 나시니 부(父)는 진사(進士) 식(埴)이다. 숙부인 송재(松齋) 우(堣)에게 학문을 배우고 중종(中宗) 28년에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선생을 찾아뵈었다. 중종 23년(1528)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중종 28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자(正字).박사(博士).전적(典籍).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중종 34년에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 되셨다. 그후 승진을 거듭하여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학문을 연마하셨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를 지내고 인종(仁宗) 원년(1545)에 전한(典翰)이 되셨다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화를 입어 한때 파직되셨다가 복직하셨으나 이미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을 때이므로 사퇴하고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셨다. 일찍 선생이 서울에 계실 때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읽고 깊이 연구하여 성리학을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비록 조정에서 부름이 있더라도 오래 머물지 않으시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직(外職)을 자청하였다. 명종(明宗)초에 단양·풍기 등의 군수를 역임한 것도 이 때문이며 명종 7년(1552) 다시 부름을 받고 홍문관 교리·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시고 명종 10년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한서암(寒棲菴)을 짓고 후진교회(後進敎誨)에 힘쓰셨다. 율곡 이이선생이 선생을 찾은 것도 이 때의 일이며, 명종이 선생께서 관직에 나오지 않는 것을 애석히 여겨 화공(畵工)에 명하여 도산의 경치를 그려 오게 하여 완상(玩賞)한 것도 이때의 미담이다. 선생의 사상은 50에서 60세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변론(辨論)·저술(著述)·편저(編著) 등 중요한 것은 모두 이 기간에 된 것으로 계몽전의(啓蒙傳疑)·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송계원명이학통론(宋季元明理學通論)·인심경역의(人心經繹疑) 및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문답한 사단칠정분리기서(四端七情分理氣書)와 같은 것은 선생의 대표적인 명저(名著)이다. 명종(明宗) 말에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고 선조(宣祖) 원년(1568)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다음해에 이조판서(吏曹判書)·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 등이 되시어 유명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소)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으시니 이는 국은에 보답하고 학문을 계발하기 위한 만년의 대표작이다. 선조(宣祖) 3년(1570)에 선생이 졸(卒)하시니 선조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하고 시(諡)를 문순(文純)이라 하고 광해(光海) 2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했다. 선생은 율곡과 함께 우리나라 유학사상(儒學史上) 가장 대표적인 대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적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선생은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함을 배제하였다. 선생은 우주만물을 이(理)와 기(氣)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의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기(理氣)와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는 이(理)는 순선무악(純善無惡)한 것이고 기(氣)는 가선가악(可善可惡)한 것인즉 이(理)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氣)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심성(心性)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奇大升)과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으로 이 뒤의 우리나라 유학자로서 이 문제에 언급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중대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선생의 학설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명치시대의 교육이념의 기본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학문적 근본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속에 있다는 것이 신념으로 지(知)와 행(行)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誠) 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敬)이 있을 뿐이라 하셨다. 실로 선생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敬)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敬)을 칠십평생을 통하여 실천하셨다. 선생은 문학(文學)·고증학(考證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저서로는 수정천명도설(修正天命圖說)·성학십도(聖學十圖)·자성록(自省錄)·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이학통론(理學通論)·계몽전의(啓蒙傳疑)·경서석의(經書釋義)·상례문답(喪禮問答)·퇴계집(退溪集)·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 전하며 도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머. 문정공 김인후(文正公 金麟厚)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선생의 자(字)는 후지(厚之)요 호(號)는 하서(河西)이며 시(諡)는 문정(文正)이고 본관은 울산(蔚山)이니 중종(中宗) 5년(1510) 7월에 장성현 대맥동에서 나시니 부(父)는 참봉(參奉) 령(齡)이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선생 문(門)에서 수학(受學)하고 중종(中宗) 28년에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퇴계선생과 함께 학문을 닦고, 중종(中宗) 35년에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가 되고 후에 박사(博士)·설서(說書)·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부모의 부양을 위해 옥과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명종(明宗)이 즉위하고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후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더욱 정진하였다.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일재(一齋) 이환(李桓)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반대하여 이기혼합설(理氣混合說)을 주장했다.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산수(算數)율력(律歷)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정조(正祖) 12년(1788)에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저서에 하서집(河西集)·주역관상편(周易觀像篇)·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백연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버. 문성공 이이(文成公 李珥)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선생의 자(字)는 숙헌(叔獻)이요 호(號)는 율곡(栗谷)이며 시(諡)는 문성(文成)이고, 본관은 덕수(德水)니 중종(中宗) 31년(1536) 12월에 강릉부 북평향에서 나시니 부(父)는 감찰(監察) 원수(元秀)요 모(母)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모부인(母夫人) 사임당(師任堂)에게서 어릴 때부터 학문을 배우고 13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급제하고 전후 9차의 과시(科試)에 장원하였다. 16세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3년 집상후(執喪後)에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여 명종(明宗) 13년에는 당시 이름을 떨치던 퇴계선생을 도산으로 찾아가 학문을 논의하니 퇴계선생은 율곡선생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셨다고 한다. 그해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이후부터 과거 때마다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란 칭송을 받았다. 명종(明宗) 19년(1564)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된 것을 시초로 관계에 나서서 선조(宣祖) 원년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셨으며 선조(宣祖) 3년에 해주야두촌(海州野頭村)에 돌아가 학문의 터를 닦았다. 이듬해 조정의 부름을 받고 청주목사(淸州牧使)가 되었으나 학문연구를 위하여 다시 사직하고 은퇴하셨다. 선조(宣祖) 7년에는 또 조정의 요구로 해주감사(海州監司)로 나가시어 약 반년간 재직하셨다. 그후에도 자주 조정과 고향을 왕래하면서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호조판서(戶曹判書)대제학(大提學)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우찬성(右贊成) 등을 역임하셨으며 선조(宣祖) 16년(1583)에는 당쟁의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단핵을 받아 일시 퇴직을 당했닥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보기 드문 천재로서 성격과 태도가 퇴계선생과 달라 기상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어 학문에 있어서도 분석적인 해석보다는 근본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한는 것이 특징이었다. 선생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23세 때에 지은 천도책(天道策)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즉 율곡선생은 퇴계선생이 " 이(理)와 기(氣)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데 이설(異說)을 제기하고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理)와 기(氣)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분리되거나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理)와 기(氣)는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무궁하게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이는 조리(條理) 즉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體)요 기(氣)는 그 조리(條理)를 구체화 하는 활동이니 우주의 용(用)이라 주장하였다. 그리고 도덕적 가치에 있어서도 인간심리의 근본이 이(理)와 기(氣)의 두가지 근원이 있지 않고 일원적(一元的)이라 하여 퇴계선생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학설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퇴계의 설을 절충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이 주장이 주자의 뜻과 어긋난다면 주자가 잘못된 것이라고까지 하는 자신을 얻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선생은 학문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경세가(經世家)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선생의 저작인 동호문답(東湖問答)·성학집요(聖學輯要)·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시무육조소(時務六條소) 등은 모두 임금의 도리와 시무(時務)를 논한 명저(名著)로 선생의 정치에 대한 태도는 유학자의 이상인 요순시대(堯舜時代)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밖에 정치의 부폐의 타개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에 관하여는 한층 구체적인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선생은 부패의 시정책 7조항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그 중에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예언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밖에도 대동법(大同法)의 실시와 사창(社倉)의 설치 등을 제의한 일은 조선조 사회정책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일반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서원향약(西原鄕約)·해주향약(海州鄕約)·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동거계사(同居戒辭)·학교모범(學校模範)·해주은병적사학규(海州隱屛積舍學規)·약속(約束)·문헌서원학규(文憲書院學規) 등의 규례(規例)를 많이 만들었다. 선생은 제자들에 의하여 동방지성(東方之聖)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 후세의 유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셨다. 저서로는 율곡전서(栗谷全書)·성학집요(聖學輯要)·격몽요결(擊蒙要訣)·사서언해(四書諺解)·소학집주(小學集註)·진복창전(陳復昌傳)·경연일기(經筵日記) 등이 전한다.
서. 문간공 성혼(文簡公 成渾)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선생의 자(字)는 호원(浩原)이요 호(號)는 우계(牛溪)이며 시(諡)는 문간(文簡)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이니 중종(中宗) 30년(1535) 6월에 한성 순화방에서 나셨으며 부(父)는 현감(縣監) 청송(聽松) 수침(守琛)이다. 중종(中宗) 39년에 청송(聽松)이 파주 우계에 복거하니 세상에서 우계선생이라 한다. 17세때 감시초시(監試初試)에 들었으나 병으로 복시(復試)를 못치르게 되자 과거를 포기하고 아버지 청송(聽松)에게서 학문을 열심히 배웠다. 휴암(休菴) 백인걸문(白仁傑門)에 나아가 수업하고 덕망과 학문이 뛰어났었다. 선조(宣祖) 초에 경기감사(京畿監司) 윤현학(尹炫學)의 천(薦)으로 참봉(參奉)·현감(縣監)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율곡선생과 도의지교(道義之交)로 사귀어 사단칠정이기설(四端七情理氣說)을 토론하고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였다. 공조좌랑(工曹佐郞)지평(持平)주부(主簿) 등에 계속 임명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율곡이 왕에게 권유하여 종묘서령(宗廟署令)의 벼슬을 내리고 부르니 조정에 들어왔으나 병으로 등청하지 못하자 선조(宣祖)는 약을 보내주고 편전에서 인견(引見)하였다. 그때 왕이 쌀을 주니 부득이 받았으나 친척 동네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제수했으나 또 사퇴하더니 선조 16년에는 병조참지(兵曹參知), 이어서 이조참의(李曹參議)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경연(經筵)을 맡았다. 한때 사임했다가 이조참의(李曹參議)를 거쳐 이조참판(李曹參判)이 되었다. 율곡선생이 졸(卒)하시자 "나라의 인재를 잃었다"고 통곡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世子) 광해(光海)를 모시고 이리저리 돌아 임금의 행재소(幸在所)에 당도하였다. 상소하여 용병(用兵)군량(軍糧) 등의 3책(三策)을 상주(上奏)하였다. 그 무렵 명나라의 주사 원황(袁黃)이 들어와 함께 성리학을 논하여 원황의 격찬을 받았고, 참찬(參贊)의 벼슬을 사퇴하고 환도(還都)후 좌찬성(左贊成) 겸 비국당상(備國堂上)으로 있을 때 명나라 총독(總督) 고양겸(顧養謙)이 일본과의 화의(和議)를 권유하자 영상(領相) 류성룡(柳成龍)과 같이 그에 따를 것을 주장했으나 선조는 반대파의 의견을 들어 화의를 배척하였다. 때마침 화의를 주장한 전라감사(全羅監司) 이정암(李廷馣)에 대하여 관대한 조치를 주장하자 선조가 분노하여 파주로 내려갔다. 율곡선생과 같이 성리학의 대가로 후세에도 이름이 높으며, 퇴계선생의 학설을지지하여 사칠속편(四七續篇)을 완성하였고, 졸(卒)한 뒤에 반대파들에 의해 관작(官爵)을 삭탈 당했으나 인조(仁祖)초에 신원(伸寃)되어 인조 7년에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을 명증(命贈)하고 숙종(肅宗) 8년 5월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저서로는 우계집(牛溪集)·주문지결(朱門旨訣)·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가 있다.
어. 문원공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선생의 자(字)는 희원(希元)이요 호(號)는 사계(沙溪)이며 시(諡)는 문원(文元)이고 본관은 광산(光山)이니 명종(明宗) 3년(1548) 7월에 한성(漢城) 황화방(皇華坊) 정동제(貞洞第)에서 나시니 부(父)는 대사헌(大司憲) 계휘(繼輝)이다. 명종 15년에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선생에게서 예학(禮學)을 배우고 명종 22년부터 율곡선생에게서 성리학을 전수하여 성학(聖學)의 오묘한 뜻을 배웠다. 그리하여 예학파(禮學派) 유학의 종장이 되셨다. 선조 11년에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천수(薦授)되었다가 뒤에 정산현감(定山縣監)·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안성(安城) 및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역임하셨다. 인조가 여러번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후학교육에 전념하셨다. 율곡·구봉 양선생의 학문의 정통을 이어 문인(門人)을 교회(敎誨)하여 많은 석학을 배출하였다. 나라의 전례(典禮)나 모든 행사에 의문이 있으면 모두 선생에게 상의하였으며 인조가 생부(生父)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존(追尊)할 때에도 역시 선생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선생은 이에 반대하여 의견이 상반되자 굽힘이 없이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선생의 학문은 다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에게 전수되어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유학의 양대주맥을 이루었다. 여러번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으며 마지막에는 형조참판(刑曹參判)이 제수(除授)되었으나 받지 아니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순박하여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글을 읽다가 깨닫는 바 있으면 그 자리에서 적어 책을 지으니 모든 사람이 덕행군자라 일컬어 추앙했다. 인조 9년에 졸하시니 효종 8년에 의정부 영의정을 명증(命贈)하고 숙종 43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했다. 저서로는 사계집(沙溪集)경서변의(經書辨疑)근사록석의(近思錄釋意)의례문해(儀禮問解)서소잡록(書소雜錄)가례집람(家禮輯覽)상례비요(喪禮備要)가 있다.
저. 문열공 조 헌(文烈公 趙 憲)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선생의 자(字)는 여식(汝式)이요 호(號)는 중봉(重峰)이며 시(諡)는 문열(文烈)이고 본관은 백천(白川)이니 중종 39년(1544) 6월에 김포縣(金浦縣) 서감정리제(西坎井里第)에서 나시니 부(父)는 응지(應祉)이다. 율곡선생에게서 성학(聖學)을 배우고,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효순(孝順)했으며 학문에 힘써 명종 22년(1467)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에 계시다가 정주교수(定州敎授)로 3년간을 재임하면서 그곳 선비의 풍속을 일신시켰다. 파주교수(坡州敎授)로 옮겨 우계(牛溪)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니 우계선생은 사양하면서 감히 사제간(師弟間)의 예(禮)로 대하지 않았다. 선조 5년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로 왕의 불공(佛供)이 옳지 않음을 극간(極諫)하다 파직되었는데 이때부터 곧은 말을 잘한다는 평이 자자했다. 선조 7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의 문물·제도에서 따를 만한 것을 조목별로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박사(博士)호조(戶曹)와 예조(禮曹)의 좌랑(佐郞)전적(典籍)감찰(監察) 등을 거쳐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나가시어 백성을 잘 다스리다가 법을 어긴 뢰노(牢奴)를 취조 중 장살(杖殺)하고 부평에 귀양갔다. 선조 14년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전라도사(全羅都事)로 나가 소를 올려 연산군 때 공안(貢案)으로 민폐(民弊)가 되는 점을 개혁할 것을 청하고 율곡선생을 숭모하며 어진 선비들과 사귀었다. 선조 15년 보은현감(報恩縣監) 때에 소를 올려 노산군(魯山君;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旌門)을 세워 포충(褒忠)할 것을 청했으나 시기하는 자의 무고(誣告)로 드디어 파직되었다. 선조 19년 조정에서 학제를 수정하고 각도 제독(提督)을 창설할 때 공주 제독이 되어 선비들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원근에서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이때 또 소를 올려 율곡을 변호하는 한편 정여립(鄭汝立)의 행패를 통박했으나 관찰사가 화를 두려워 하여 여러번 각하하므로 드디어 벼슬을 내놓고 옥천으로 돌아갔다. 선조 17년 대궐에 엎드려 소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론(極論)하니 광론(狂論)이라 하여 삼사(三司)의 배척을 받고 드디어 길주로 귀양갔으나 그해 겨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선견지명이 있다하여 석방되었다. 같은 해 일본의 풍신수길이 현소(玄蘇) 등을 보내와서 명나라를 칠 것을 말하자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또 소를 올려 현소 등을 죽일 것을 청했다. 선조 24년(1591) 또 일본사신이 왔을 때 선생은 상경하여 왜적을 대비할 계책을 상소했으나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시골에 내려와 탄식하고 있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 4월에 하늘 가에서 큰 소리가 남을 듣고 크게 놀라시어 이는 ":천고(天鼓)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온다" 하고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청주로 피하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보은의 통로를 차단하는 등 공이 많았으나 관찰사 윤선각(尹先覺)의 시기를 받고 홍성(洪城)지방에 옮겨가서 또 의병 천여명을 모집했다. 이때 왜적은 청주에서 진을 치고 있어 관군이 여러번 공격했으나 패하고 승장(僧將) 영규(靈圭)와 합세하여 적을 대패시키고 청주를 탈환했다. 당시 금산의 적이 충청도 일대를 석권할 기세라는 소식을 듣고 영규와 함께 전주에 내려가 7백명의 의사(義士)를 얻고 그 길로 금산을 향하여 나가다가 금산 10리밖에 이르렀다. 당초 호남순찰사 권율 및 초토사 고경명과 합세하여 적을 공격할 약속이었는데, 권율로부터 기일을 미루자는 편지가 왔으나 이미 적은 이쪽의 약점을 알고 역습해 왔다. 선생의 군사는 역전분투하여 적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중과부적으로 드디어 선생과 7백의사가 한 사람 남김없이 전사했다.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4충신이다. 선조 37년에 선무원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