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침구사제도의 역사와 현황 조병희(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1. 연구의 배경
침구사 제도는 세계 각국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초까지 침구사 제도가 유지되다가 1962년에 의료법이 개정도면서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침구시술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침구는 한의사들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시술되고 있다. 한의사이외에도 과저 일제시대에 침구사 면허를 획득했고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는 소수의 정규 침구사들도 침구시술을 한다.
일부 의사들도 침구를 시술한다. 의료법에 따르면 의사들에게는 침구시술 권한이 없기 때문에 불법적인 시술이 된다. 의사 이외에도 무면허로 침구를 시술하는 사람들이 상당이 많다. 이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추산하기 어렵지만 침구지식을 습득한 사람들은 최소한 수만명은 될 것으로 보인다 1) 이들은 전통침법을 배우기도 하고 수지침처럼 최근에 개발된 새로운 치법을 배우기도 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침구강좌를 개설하고 있는 학원도 여러 곳이 있다. 일러한 상황은 침구제도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제도의 정비가 필요함을 말해 준다.
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증대는 일차적으로 서구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체의학의 등장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체의학의 등장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고 있지만 의학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체’(alternative) 의학이 문자적 의미는 정통의학을 대체하는 치료법이란 것인데 그러면 사람들이 정통의학에 불만이 커서 이것을 포기하고 대안적인 치료법을 선택하는 것일까? 이에 관한 많은 연구들에 의하면 대답은 ‘No!'이다.
현대사회에 들어와 질병구조가 급성전염성 질환으로부터 만성퇴행성 질환 또는 생활습관병으로 변화되면서 의학의 역할도 완치보다는 증상의 악화를 방지하는 수준의 치료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를 들어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은 기존의 병원 치료에서 뚜렷한 효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대안적인 치료법을 찾게 된다. 이들은 대안적 치료법에 의존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현대의학의 치료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하나의 요인은 사회적인 것으로 70년대 이후 자신의 신체와 건강에 대한 통제력 또는 권리에 대한 인식이 만들어진 점이다. 이에 따라 자조(self-care & self-help), 소비자 주권, 소비자 동의(informed consent) 등의 새로운 개념들이 만들어졌고, 환자가 치료법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전파되었다. 대체의학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보통학력이나 소득수준이 높은 중산층들로써 이들은 고도로 복잡하고, 경쟁지향적이며, 상업화된 문화를 벗어나 대안적인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이들을 중심으로 well-being과 같은 새로운 가치가 보편화되면서 대체의학도 대안적인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대안적 치료법들은 대체로 정토의학만큼 과도하게 침습적이지 않으며(non-invasvie) 신체의 자연치유력을 강화시키고 신체와 정신의 조화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의사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본인인 직접 시술하거나 실천하는 부분이 많다는 점도 환자의 주체성이란 측면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1)대한침구사협회와 고려수지침 요법학회는 2003년 5월에 침구사 및 수지침사 제도 도입을 위한 입법청원을 공동으로 추진한 바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재야 침구사 40만, 수지침사 400만에 다하며 침구사사 제도의 도입으로 고비용 의료구조에 대한 대안이 되면, 고령사회 침구수요 증가에 대처, WTO 체제에서 침구시장 개방에 따른 국부유출 방지 등을 필요성으로 제시하고 있다(대한침구사협회 간행 월간침술의학 2003년 5월 21일자).
이러한 특징들이 탈근대사회(post-modern society)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이나 가치관과 부합되면서 대체의학이 사회적으로 관심사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체의학은 기존에 지위를 확립하고 있는 정통의학과 일정하게 이해관계가 대립되기도 한다. 정통의학과는 치료법의 철학적 근원이나 이론적 원리를 달리하기 때문에 의사들로부터 ‘사이비 의료’(quackery)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대체의학의 효과를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이다. 철학이나 이론적 원리가 매우 상이하기 때문에 기존의 과학적 검증의 틀로는 효과입증이 잘 안되는 경우들이 많다. 대체요법의 효과가 어느 정도 입증되는 경우에도 그 시술자들에게 공식적인 권한을 인정하는데 인색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정통의학의 한 범주로 편입시켜 버리기도 ks다.
한국에서의 침술의 문제는 이와 같은 일반적인 문제 이외에도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작용하여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에서는 전통의학(traditional medicine)을 전문적으로 시술하는 한의사 제도가 만들어져 있고 그들의 교육수준이나 사회적 지위는 의사의 그것과 버금간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한의학은 대체의학이 아니라 정통의학적이고 ‘공식의학’(formal medicine)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침구는 대체의학이 아니라 공식의학의 한 부분으로 정립되어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침술 습득자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한의사들은 민간의 침술 습득자들을 ‘사이비 의료’의 일종으로 ks주하는 경향이 있고 불법적 시술을 금지시켜 해결해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일반인들에게는 전문화된 한의학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닌 대체의학의 한 부분으로 침술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의사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한의사에 의한 침둘 독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미 서양에서 의사들의 침 시술이 보편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도 침술을 배워 시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60년대에는 의사들이 침 시술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침구사 제도의 폐지를 주도하였지만 이제는 의사들의 생각이 크게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의사들의 생각은 나아가서 의학과 한의학이 제도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전통의학에 대한 연구나 시술을 할 수 없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최근에는 두 의학을 제도적으로 통합하자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따라서 침술의 문제는 의학과 한의학이라는 공식부분 내부에서의 갈등은 물론 한의사와 민간 침구사들간의 갈등까지 내포하고 있는 복잡한 문제가 되고 있다.
이글은 왜 한국에서 침술제도가 이와 같이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전개되었는가 하는 점을 역사적으로 살펴본 다음, 현재 침술을 둘러싼 집단화의 갈등 현황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침술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2. 침구사제도의 형성
한국역사에서 조선시대(1392-1910)에는 의료 시술자(medical practitioners)들에게 공식적인 자격을 인증하거나 면허를 부여하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전통의학을 시술하는 한의사들이 존재했지만 이들에 대한 자격기준 같은 것은 없었고 다양한 수준의 시술자들이 병존하였다. 조선 왕국의 말기에(1900년) 서양식 근대국가가 만들어지면서 의사, 약제사 같은 직종에 대한 자격기준이 만들어졌고 면허증이 발급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침술은 별도의 직종으로 독립되지는 않았고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사나 동양의학을 시술하는 한의사 모두 ‘의사’(醫士)라는 직종으로 통합되어 면허가 발급되었다.
그런데 조선이 1910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의료제도도 일본식 제도가 도입되는 변화를 겪게 된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한방의 제도를 완전 폐지하고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의료제도가 만들어졌다. 원래 한의학은 첩약과 침술의 두가지 치료법을 갖고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17세기 이후 맹인들이 침술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한방의들은 침술을 하지 않게 되었고(Lock, 1980: 53-61), 한방은 곧 첩약치료만을 의미게 되었다(黑田浩一郞, 1985). 메이지유신 당시 한방의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침은 맹인들의 복리 를 위하여 존치시켰다.(龜山孝一, 1932: 441). 조선이 식민지화 되면서 침구사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일본과는 달리 전통 한방의를 의생(醫生)이라는 이름으로 존속시켰다. 이것은 일제초기에 자격을 갖춘 의사가 수백 명밖에 되지 않는 현실에서 의료공급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전통 한방의를 존치할 수밖에 없었다.
2) 또한 수천명에 달하는 조선인(전통 한방의)들을 실직상태서 구제하는 ‘은혜를 베품’과 동시에 향후 수십 년에 걸쳐 자연도태 되도록 의도하였다(白右保成, 1918: 52). 즉 의생제도는 잠정적으로 허용된 제도이다. 서양식 의과대학들 설립하고 의사를 양성하려는 정책적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반면에 한의학 전문 교육기관의 설립은 허용하지 않았고 의생에 대한 신규면허의 발급도 매우 제한하였기 때문에 의생의 수는 계속적으로 감소하였고 한의학의 학문적인 연구나 교육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반면 침구사들의 수는 계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1933, 1939년판)에 따르면 의생제도가 실시된 1914년에 5,800여명이 의생 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의생의 수는 계속 감소하여 1939년에 3,600명 수준이 되었다. 반면 침구사는 1938년 다시 침사 882명, 구사 668명이었는데 양쪽 면허를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침구사의 수는 약 1,000명 내외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생과 달리 침구사의 경우에는 일본인들이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 침구사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3)의생과 침구사가 병존하게 되면서 이들 간에 업무영역의 중첩이 불가피하게 발생하였다. 의생은 전통 한방의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초근목피’올 첩약을 조제하는 일 이외에도 침과 뜸을 사용하는데 제한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침구사 제도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침 시술권자의 이원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일제시대에 의생과 침구사간에 업무영역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발생하지 않았다.
의생이나 침구사 모두 공식 의료체계의 핵심인력이 아니었으며 의료체계의 주변부에 머무른 직종이었다. 이들에게는 근대적 직업집단에 필수적인 학력이 요구되지도 않았다. 다만 관련 의업에 종사했거나 기성 자격자에게서 의술을 배운 경력만 인정되면 자격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공식부문에서 요구되는 학력과 독점적 면허제도와 무면허자에 대한 엄격한 정부의 규제가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 간에 직업적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 또한 의생들은 새로 배출되는 의사들에게 밀려나 지방이나 농촌에서 직업 활동을 하게 된 반면 침구사들은 의사와 마찬가지로 도심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던 점도 이들 간에 갈등이 빚어지지 않게 만든 요인이었다.
2) 1908년말 통감부의 의료인력 통계를 보면 한국인 의사가 2,659명, 일본인 의사 283명, 기타 외국인 의사 19명으로 집계되어 있으나(통감부 入部 生局, 1919). 한국인 의사의 대부분은 한방의였다. 1899년에 관립의학교가 설립되어 1902년에 첫 졸업생 19명이 배출되었고 이후 매년 비슷한 규모로 의사양성이 이루어졌던 사정을 고려하면 (전종휘, 1987: 374-379) 단기간에 의사를 확충하기 어려웠다. 이점은 일본에서 메이지유신 당시 상당수 의사가 이미 양성되어 있었던 점과 대비된다.
3) 1938년 통계에 의하면 참사의 경우 일본인 347명, 조선인 535명이었고 구사의 경우 일본인 386명 조선인 282명이었다. 양쪽 면허를 모두 가진 사람들을 고려할 때 한국이 침구사는 500-600명 수준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鮮滿의の 生, 1938년3월호)> 더욱이 침구사 제도가 공인되는 새로운 상황에서 의생들은 침구보다는 첩약의 조제판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의생 이외에도 약종상이라는 직종이 있었다. 원래 의생은 진단하고 처방하는 시술자였고 약종산은 기성 처방집에 수록된 대중적인 한방약을 판매하는 직종이었다. 의생과 약종상은 의료체계의 주변부에 있는 직업군이었고 이들의 직업활동에 대한 정부의 규제도 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생과 약종상은 실제 업무수행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들은 첩약조제판매에 주로 종사하였고 필요할 때 침구시술도 하였지만 이들의 주 수입원은 첩약판매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의생과 약종상은 법적 자격은 의사와는 달리 독점적 면허의 개념이 아니라 한방업무에 종사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자격증이 아니라 한방업무에 종사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자격증을 매우 제한적으로 발급하였기 때문에 자격취득 기회의 편의에 따라 의생 또는 약종상의 자격을 취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두 집단 간에는 상당한 동질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들과 침구사는 그 생성배경이 다르고 활동지역이 달랐기 때문에 이질성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한의사 가계를 유지하여 왔던 집안출신의 한 한의사의 회고에 의하면
4)“왜정시대에 침구사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 도시에나 있었지 지방에는 모두 약종상만 있었다. 약종상들이 약은 물론 침과 뜸을 다했다. 침뜸은 재료가 안드는 것이기 때문에 별도로 돈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면 환자들이 나중에 담배 같은 것을 갖다 주었다.”
의생과 약종상은 때로 침구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첩약조제판매에 치중하게 되고 침구사는 침만을 전문으로 하는 식으로 업무의 영역이 분화되었다. 그런데 침구과 달리 첩약조제는 원료비가 많이 소용되었기 때문에 치료비가 상대적으로 비쌀 수밖에 없었고 이를 전문으로 하는 의생과 약종상들은 보다 많은 자원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생과 약종상은 침구사보다 상대적으로 집단 규모도 컸고 자원통제력도 우월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대한민국 건국이후 한의사제도가 성립되고 침구사제도가 폐지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3. 침구사제도의 폐지
일제시대의 의료제도는 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식 의료제도의 기본틀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주변부에 의생이나 침구사와 같은 동양의학의 전통적 요소를 남겨두고 있었다. 1945년에 일제 시민지배가 종식된 미 군정을 거쳐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의료제도도 새로운 틀을 갖추게 되었다. 새 의료제도가 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식 의료제도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동양의학 부문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다. 주변부에 밀려나 있던 의생이 ‘한의사’라는 지위로 격상되었고, 반면 침구사 제도는 폐지되었다.
한의사는 정규대학 과정을 이수한 학력자에게 면허를 주었기 때문에 의사에 버금가는 법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이웃 일본의 경우와는 큭 대비된다. 일본에서는 2차 대전 이후에도 의료제도에 큰 변화가 없었다. 기존 공식부문은 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의료제도가 유지되었고 침구사나 안마사 제도 역시 유지되었지만 계속 주변부에 남아 있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의료제도에서 동양의학 부문의 변화가 컸던 원인은 ‘정치세력의 교체’에 따른 효과일 것으로 추측된다.
4)강원도 동해안에서 거주하는 63세된 한의사로 그 부찬대의 상황을 구술한 것임.
(1) 한의사제도의 성립 1951년에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면서 한의사제도가 만들어졌다. 한의사제도가 성립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미 큰 세력으로 성장한 의사들은 한의사제도를 법적으로 인정하는데 강력히 반대하였다. 의사들의 주장은 한의학이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제도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5) 한의사제도를 인정하는 법은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고까지 발언하였다. 정부도 의사들의 의견에 동조하여 처음에는 한의사제도를 완전히 배제한 의사 중심의 의료법안을 제출하였으나 다수 국회의원들의 반대로 입법되지 못하였다. 한의사제도를 인정하는 새로운 법안이 만들어져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당시 국회의원의 다수 일제에 의하여 탄압받던 민족의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하였다.
보건위생 담론의 측면에서 생각할 때 1951년은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보건위생의 상태가 일제시기와 질적인 차이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6·25를 겪으면서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지고 일본인 의사들의 귀환으로 의사는 부족하여 의료체계의 정상적인 가동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전 시기의 위생담론은 여전히 유효하였으며 항생제 등의 발명으로 서양의학의 성과는 계속 높아가던 시기였다. 한의학의 담론이 어떤 질적 변화를 하거나 한의학의 사회적 역할이 확대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의사제도가 성립한 것은 일제통치가 종식된 직후 식민지를 경험한 신생 독립국가로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요인은 국가적 차원에서 보건의료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할 보건행정권력이 일시적으로 공백상태에 있거나 매우 취약했던 점이 작용하였다. 일제하에서는 식민통치의 기간조직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경찰에서 보건행정업무를 담당했었다. 그러나 미군정을 처리면서 보건행정은 미국식으로 바뀌면서 별도의 독립부서(보건부)로 이관되었다. 미국식으로 보면 보건행정을 전문화시키는 것이었지만 당시 한국의 실정에서는 보건행정의 전문가가 거의 없었고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하부조직도 없었으며, 사회보장이나 복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이념을 갖춘 정부도 아니었기 때문에 보건부의 정책역량은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상 의사들이 보건부서 장관직을 맡았으나 이들은 민족주의에 압도외어 있던 당시의 국회의원들을 설득할만한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다 의료인력의 절대적인 부족은 한의사제도의 존속 내지 승격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하였다. 또한 당시에 한의사들이 상당한 인적·물적 자원을 기반으로 국회의원들에 대한 로비를 성공적으로 진행시켰다. 당시 상황을 한의사협회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국회 사회보건위원회에 한의사제도의 입법을 위한 증언을 신청하였으나 이 같은 시도는 한의학에 대해 왜곡된 시각을 지니고 있던 양의출신 국회의원들의 반대에 의해 빈번히 무산되고 말았다.... 한의계 중진인사들이 적극적으로 국회의원들과 교섭을 벌였다..서울에 거주할 때부터 닦았던 정치적 기반과 재정적 뒷받침으로 마침내 국회 증언의 기회가 얻어졌다.” (대한한의사협회, 1989: 72)
국회증언 이후 한의사제도는 법안에 포함되어 제출되었고 결국 통과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5) 반대주장의 선봉에 있었던 의사이며 국회의원이었던 이용설은 한의사들은 심장이 어디 있고 무엇을 하는지, 심장혈액과 심박회수나 혈액의 성분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의사들은 韓醫師라는 명칭 대신에 韓醫士를 고집했고, 한의원이라는 기관명 대신에 진찰소를 고집하면서 한의사를 격하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국회본회의 속기록, 1951.7.13)
한의사들은 의생이라는 격하된 지위에서 벗어나 법적으로 의사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곧바로 한의과대학도 만들어지면서 대학 학력을 가진 한의사가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2) 한의학의 제도화 국민의료법이 제정된 이후 한의학의 제도화가 시작된다. 한편으로서는 한의과대학을 설립하고 후진을 양성하며 한의학을 체계화하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법제에 따라 기존의 의생들에게 한의사 시험을 치르고 면허를 부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국민의료법 통과에 따라 국가는 1952년에 4년제 정규대학인 서울한의과대학 설립을 인가하였고 이 학교는 1955년에 동양의약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당시는 한의과 대학이라는 명칭이 갖는 사회적 위상이 지금과 달라 일제시대의 낙후된 한방의 이미지를 연상시켰기 때문에 동양의학이란 명칭을 생각하였고, 약학과 설치를 염두에 두게 되면서 동양의약 대학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대한한의사협회, 1989:100). 이 학교는 한의학 이외에 해부학이나 생리학 같은 기초의학 강의를 실시함으로써 보다 현대화된 한방의학이 이미지를 만들려는 노력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교과과정은 이후 한의학 교육의 전형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한의학 제도화의 다른 측면은 한의사의 자격을 인증하고 성원을 구성하는 일이었다. 국민의료법은 한의사의 자격으로 한의대 졸업자나 검정시험을 합격하여 동등한 학력을 인정받는 자에게 한의사 자격시험을 거쳐 면허를 부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당시 의생의 경우 영구면허를 가진 자는 곧바로 한의사 면허를 인정받았지만 한지의생 면허를 가진 자는 검정시험을 치른 후 다시 자격시험을 보아야 면허를 얻을 수 있었다. 일제의 정책에 의하여 의생규칙이 반포된 최초 1회를 제외하고는 이후로 계속 한지의생 면허만을 주었기 때문에 노령의 일부 의생도 한지의생으로 한의사 면허를 갖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대한한의사협회, 1989: 89).
따라서 이들은 한지의생을 의생과 동일하게 인정해달라는 청원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국회에서는 의사자격을 인정하기 어려운 한지의사들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이러한 청원은 거부되었다. 6) 따라서 한지한의사의 이루는 검정시험을 거쳐 한의사 자격을 획득하였으나 다수는 한지한의사로 남게 되었다.
초기 한의사를 형성했던 또 다른 집단은 한약종상이다. 통계를 보면 1950년대 초에는 한의사 수의 2~3배에 달하는 한약종상이 존재했다. 그런데 한의사 검정시험 규정에 의하면 의생은 물론 10년 이상 한약판매 업무에 종사한 한약종상들에게도 시험자격을 부여하였다. 한약종상은 의료인력의 부족 때문에 정규 의료인이 없는 지역에서 약품판매업을 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한 직종으로 진맥이나 침구시술 등 진료행위는 할 수 없고 처방집에 따른 한약의 판매만을 하는 직종으로 ‘한약방’을 운영하던 직종이다. 이들은 한약재 유통에도 관계하였기 때문에 일부 ‘성공한’ 한약종상은 상당한 경제적 자산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의계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한의사 국가고시를 볼 수 있는 자격부여 검정고시에 매년 수십 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던 점을 생각할 때
7) 적어도 검정고시가 시행되었던 63년까지 수백 명의 한약종상이 한의사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표1에 의하면 1953년에서 1962년까지 매년 약 150명의 신규 한의사가 등록되었다. 1954년 당시 유일한 한의학 교육기관이었던 4년제 서울한의대 재학생이 280명이었던 점을 8) 감안하면 신규 한의사의 절반이상이 한지의생이나 약종상 출신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같은 동양의학 계열의 시술자였던 침구사에게는 한의사 자격 6) 제45회 국회 속기록 보산 제9호 7) 공보처, 관보 제632호. 단기4286년(1953년) 6월30일 검정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나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던 점이다. 이것은 초기 한의사 형성과정에서 의생과 한약종상은 집단의 정체성을 같이 하였으나 침구사와는 사회적 거리를 멀리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들 세 집단은 모두 정규적인 학력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지식수준’의 차이가 이들의 집단정체성을 가르는 기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지식수준의 차이가 있더라도 시험을 통하여 ‘유자격자’를 가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1950년대 동양의학대학의 교과과정을 보면 침구학 전임교수와 침구강좌가 있었다(정우열, 1999). 따라서 당시의 한의사들이 침구를 한의학의 한 부분으로 생각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의사를 형성과정에서 침구사들을 제외했던 것은 두 집단의 세력화 정도의 차이가 크고 집단정체성이 달랐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한의사 형성과정에서 침구사를 배제한 결과 이후 침구사들과의 갈등이 조성되었다.
표 1 년도별 한의사 관련인력의 수 년도한의사(의생)한지한의사한약종상19393,5977491939(남한)(2,115)(362)19495921,0655,78519537411,0124,72519549951,0034,25919551,0691,0094,08219561,2171,0004,04919571,3839903,83419581,5729843,66319591,8249752,33519601,9579653,77019622,2529533,63419631,9854984,62419642,1884854,37119682,4464483,925 자료 :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 統計年報, 각년도 보건사회부, 보건사회통계연보, 각년도 *일제하에서는 의생과 한지의생을 구분한 인력통계가 없다.
(3)침구사제도의 폐지 국민의료법은 침구사제도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 없이 그대로 존속시켰다. 또한 침구사 제도 운영에 관한 사항을 관련 행정부령으로 정하도록 함으로써 일제시절의 법체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관련 부령을 제정하지 않았고, 특히 신규 자격증 발급을 위한 시험을 실시하지 않았다. 당시 의료계에서 의학이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료 유사업을 존속시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했던 사실을 생각할 때 9) 의료계의 절대적 영향
8) 보건사회부. 1957. 보건사회통계연보, IV-318. 아래 있었던 정부의 보건행정 부서가 행정부에 위임된 침구사 부령 제정을 회피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침구사제도는 법적으로 존속되었지만 침구영역이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하는 점은 상당히 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에 침구는 한의사의 독점영역이 아니었다. 국민의료법 입법과정에서 한의사들은 침구사제도 존속에 대하여 별다른 의견제시가 없었다. 또한 1962년까지 실시되었던 한의사 자격 검정시험 과목은 첨약조제 관련과목으로 구성되었을 뿐 침구관련 과목이 포함되지 않았다.
10) 의료법이 개정되기 이전인 1961년 대법원은 “침구사 자격증을 소지하지 않은 한의사가 침술이나 구술을 실시할 수 있다는 법적인 근거는 없다.‘고 판시하기도 하였다. 11)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침구가 한의학의 한 부분이기는 하여도 한의사들의 독점 영역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정부가 침구사 신규배출 기회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침구영역에 대한 실질적 관할권은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에 이승만 정부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의하여 몰락하고 새로 장면 정부가 수립되면서 상황이 변화하였다. ‘민의의 표출’이 자유로워지면서 다양한 조직과 단체들의 민원이 제기되었는데 침구를 배웠던 맹인학교 학생과 침구학원 졸업생들이 침구사 부령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이우관, 1973: 34). 맹인들이 생업으로 안마와 침구를 배웠으나 법적 자격을 얻지 못하게 되자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그 결과 1960년 12월에 침구 등 의료유사업자에 대한 부령이 제정되었지만 곧이어 1961년 5·16 쿠데타로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침구사 자격시험은 실시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1962년에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침구사제도는 기존 정규 침구사의 기득권만 인정하고 폐지되었다. 더욱이 개정 의료법은 침구사제도를 폐지하면서 침구를 한의사가 관장한다는 등의 제도폐지에 따른 경과규정을 마련하지도 않음으로써 이후 집단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조국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통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확립하려 하였다. 의료부문에서도 역시 ‘근대화’를 지향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조치가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의료인에 대한 국가고시제를 도입하여 의료인력의 질적 향상을 기하고 물리치료사 등 의료보조원 제도를 도입하고 간호사에 대한 교육을 대학수준으로 높이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의료 근대화의 다른 측면은 ‘전통의 잔재’를 없애는 것이었다. ‘전통’은 곧 ‘낙후와 빈곤’의 원인처럼 간주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전총의 탈피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의사와 침구사, 안마사 같은 동양의학의 전통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1962년에 국민의료법을 의료법으로 개정하면서 이를 일거에 없애려고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한의사들의 강력한 반발이 제기되면서 결국에는 한의과대학을 4년제에서 6년제로 교육연한을 연장하여 그 실력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반면 침구사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 과정도 세심한 검토를 거쳐 결정되기보다는 비과학적 의료행위를 근절하는 식으로 무조건 폐지해 버렸다. 이후 의료유사업자들이 담당하던 접골은 정형외과 의사들이, 침구는 한의사들이, 마사지는 물리치료사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다만 맹인들의 생업을 위한다는 목적하에 맹인들에게 안마사의 길을 터 주었다.
9) 제11회 국회임시회의 속기록 중 국민의료법 제정과 관련된 의사출신 이용설의원 발언. “앞으로 계속해서 침놓는 사람, 뜸뜨는 사람...들을 두자는 소리올시다. 여러분, 이건 상식에 벗어나 일이 아닙니까?...이 법령대로 되면 우리나라 의학계는 적어도 200년은 뒤떨어집니다.” 1951.7.13
10) 1952년 한의사국가시험 응시자격 검정고시 시험과목으로는 1차 시험에 생리학, 약물학, 병리학, 해부학, 위생학이 있었고, 2차시험에 진단학, 내과학, 소아과학이 부과되었다. 한의사국가고시에서는 내과학, 소아과학, 의사법규가 부과되었다. 공보부, 관보 640호, 단기4285년(1952) 4월22일.
11) 대법원 1961.10.19 선고 4292행상122판결 다만 맹인들의 생업을 위한다는 목적에서 안마만이 제도적으로 살아남았다. 조직력이 약했던 침구계는 군사정부의 조치에 제대로 반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종식되고 민정으로 복귀하면서 몇몇 침구계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침구사제도 부활운동이 조직되었다. 이 운동의 주체는 침구사 자격시험을 준비해 오던 침구학원 졸업생들과 맹인학교 학생들이었다. 1950년대에는 법적으로 침구사제도가 존속하였고, 침구사 신규 자격시험 실시를 예상하면서 여러 침구학원들이 설립되어 수천 명의 이수자를 배출하였다.
대한침구학원 동창회가 1964년에 결성되었고 이후 몇몇 침구학원 동창회가 이어서 결성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국회의원들에 대한 로비를 통하여 입법청원이 이루어졌다. 정규 침구사들의 단체인 대한침구사회는 조직역량이 미비하여 조직차원의 지원은 없었고 몇몇 침구사들이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입법청원은 큰 효과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맹인학교 학생들이 침구사 제도 부활을 요구하면서 조직적인 거리 시위를 전개하자 여론이 반전되었고 국회도 이 문제에 과심을 보이면서 보건사회위원회와 법사위원회를 통과하여 1966년 1월에 본회의에 회부되었다.
침구사제도가 국회통과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전개되자 의사회와 한의사회는 합심하여 저지에 나섰다. 소위 ‘2대 악법’에 대한 저지투쟁이다. 정부는 의사들의 기피로 보건소장을 의사로서 보임하기 어렵게 되자 의사가 아닌 약사 등 타 직종도 보건소장에 임명할 수 있도록 보건소법을 개정하려 하였고, 국회는 침구사제도를 추진하여 66년 1월에 두 법안이 국회 보건사회위원회를 통과하였다.
의사회는 법안이 발의된 이후 줄곧 법안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시하다가 법안이 보건사회위원회를 통과자하 위기를 느끼고 국회통과 다음날 ‘보건관계법안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각 지부별로도 집회를 가졌다. 일부의사들은 두 법안을 반대하면서 국회의사당까지 시위를 하기도 하였고 의사 4천명의 서명이 담긴 연판장을 첨부하여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제출하였다 일부 의사들은 하루 동안 휴진을 하기도 하였다(대한의학협회, 1979: 143-145). 이러한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유례가 없던 일로 정부나 국회에 상당한 압력을 가하게 되었고 국회는 결국 두 법안을 폐기한 것으로 종결지었다.
침구사 문제를 두고 찬반 양진영의 세력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반대진영의 선두에는 의사회가 있었고, 한의사회가 그 다음으로 참여했으며, 치과의사회와 약사회도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병원협회와 보건소장, 의과대학장협의회와 의학회 등 의료계와 한의계의 각종 단체가 모두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집권당인 공화당 역시 반대 입장에 서 있었다. 반면 찬성진영은 침구학원동창회연합회가 주도하였고, 여기에 맹학교 학생들과 안마사회에서 참여하였다. 이들은 모두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이들 간의 사회적 지위나 조직의 규모 및 대외적 교섭력 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임이 분명하다. 정규 침구사들이 이들의 노력을 외면하거나 방해하는 일까지 있었다. 12) 침구사제도 부활에 대하여 양측은 뚜렷하게 대비되는 논리를 갖고 있었다. 논쟁의 핵심은 의료의 전문화를 통하여 우수한 전문 인력을 양성할 것인지 아니면 의료시술자의 질적 수준을 낮춰서라도 시급한 의료인력의 부족을 해결할 것인가의 여부가 대립되었다. 이와 함께
12) 서울침구사협회 간부진들이 접골사나 안마사와 구분되는 침구사 단독법을 제정하고, 4년제 침구사 대학과정과 한의사국가고시 응시자격 부여 등을 주장하면서 의료유사업자법을 반대하였다(이우관, 1973:184).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상황에서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주장이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청원이 한의사협회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들이 한의사협회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법안을 추진하던 침구학원동창들과 안마사 등 여타 업자들과의 결속을 와해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침구(및 안마와 접골)이 전근대적인 비과학적 요법인가 아니면 과학적 근거를 가진 치료법인가를 두고 논란을 빚었다. 당시 정부의 견해는 1962녀 의료법 개정으로 침구사제도가 폐지되었고 침구는 하의사의 영역으로 포함되었기 때문에 별도로 침구사 제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침구가 비과학적이라는 점에 대해서 찬성론자들은 선진국에서 침구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하여 효능을 밝혀내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13) 당시는 이미 국제침구학회가 조직되어 매년 학술대회를 열고 있을 정도로 국제적으로는 의료계를 중심으로 침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지만 국내 의료계는 침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이것을 비과학적인 전통의 잔재로 보는 견해가 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사들은 이미 정규대학과정에서 한의사들이 배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체계적 교육을 결여한 침구사를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의료계와 한의계는 공통적으로 당시 침구사들이 가졌던 공식교육의 부재와 기술능력의 취약성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침구사들이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최초의 관인침구학원인 대한침구학원이 1957년에 인가되었는데 이 학원은 6개월 이론과정과 6개월 전문과정으로 일년의 교과과정을 마련하고 있었으나 수강생들은 경제난으로 전과정을 이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14) 또한 수강생들의 학력수준도 초등학교나 중학교 졸업 등 낮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정규교육 이외에 독학, 개인교습, 비정기적인 관련단체 학술강좌 등을 통하여 침술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두고 찬성측에서는 의료인력이 전반적으로 부족하고 특히 농촌에서는 의료인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의사나 한의사 등 고급인력의 배출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침구사처럼 단기간에 보다 많은 력을 배출해서 의료공급을 원활히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결국 침구사 문제는 의료제도 구성에서 과학화 전문화를 지향하면서 소수 엘리트에 의한 의학의 발전을 도모할 것인지 아니며 계층간 형평성 해소를 지향하면서 가용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것인지의 문제로 집약된다. 여기서 정부는 전자를 지향하였다. 정부는 한걸음 나아가 1969년에 ‘보건범죄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불량식품과 부정의약품은 물론 부정 의료업자에 대하여 2년 이상 무기형까지 내릴 수 있도록 강력한 처벌위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70년대 이후 침구사 등 불법적인 진료는 사라지게 되었다. 반면 국민들의 경제사정이 향상되는 80년대까지 다수의 국민들은 의료를 이용하기 어려운 의료소외를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
4. 대중적 침술의 부활 침구사법 제정청원은 70년대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있어왔지만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적극적인 입법논의는 되지 않으며 침구는 한의사들의 영역으로 굳어지게 된다. 표2를 보면 90년대 들어 6번에 걸쳐 침구사제도 부활과 관련된 법안이 국회의원들에 의하여 발의되었지만 매번 상임위원회에서 한두번 논의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국회 논의에서 핵심 사안은 기존 한의사가 있는데 별도로 침구사 제도를 둘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였는데 침구의 대체의학으로서의 활용가치나 비용의 경제성 등이 그 이유로 제시되었지만 이러한 문제는 한
13) 당시 외국언론보도 등을 통하여 외국의 침구연구 현황이 간략히 소개되기도 했고, 서울의대의 이문호교수가 독일유학 중에 독일의 침구의학 현황을 의료계 주간지(의사시보 103호)에 소개하기도 했다(이우관, 1973: 155).
14) 한국침술연합회 이석원 회장의 증언 의사제도의 보완을 통해 해결해야지 별도의 침구사제도를 도입하면 의료시장에 혼란을 유발한다는 반대의견이 더 많았다.
15) 이것은 의료의 공식부문에서 한의사의 지위가 확고하게 인정받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한의사의 업무영역에 도전하는 시도는 더 이상 국회차원에서 지지를 얻기 어려워졌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표2에서 주목할 점은 7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던 침구사법 제정운동이 이후 20여년간 거의 사라졌다가 90년대 들어와 6차례나 시도될 정도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중영역에서 침구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대되고 있고 침구부활운동 역시 과거보다 조직화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표2 침구서 관련법안 제출 현황 1차 6대 국회, 1964맹인단체 및 침구사협회의 청원, 64년10월 폐기.2차 7대 국회, 1968윤인식의원외 18명 ‘침사·구사·안마사에 관한 법률안 제안. 의사회와 한의사회의 반대 청원. 위원회 계류 후 임기만료로 폐기3차 8대 국회, 1972침사법 제정청원. 국회해산으로 자동폐기4차 9대 국회, 1973강기천의원외 52명, ‘침사법’ 제안. 문태준의원 반대청원. 임기만료로 폐기됨5차 11대 국회, 1983침사제도 확립에 관한 청원. 보사위에서 자동폐기6차 13대 국회, 1990김판술의원외 90인, 침구사법 제정에 관한 청원. 청원철회7차 14대 국회, 1994김남섭 외 3,150인 침구사제도 부활청원. 자동폐기8차 15대 국회, 1997조중연의원외 20명, 의료법 개정. 자동폐기9차 15대 국회, 1999이성재의원외 20인 안마사의 침사용을 명문화 요구. 자동폐기10차 15대 국회, 1999박성범의원외 65인 침구사제도 신설위한 의료법개정. 자동폐기11차 15대 국회, 2002이연숙의원외 침구사제도 신설 위한 의료법 개정
자료: 보건복지부 내부자료 ; 필자 보완
그런데 90년대에는 대중영역에서 침구의 담론이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자연의술로서의 침구의 효용성이 인식되면서 대중영역에서 침구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들을 대상으로 전국적으로 수십 개소의 침구강좌가 개설되었다. 한의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침구강좌를 개설하는 정규학교로는 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과 경기대학교 대체의학대학원이 있다.
전문대학인 송원대학에 2년제 자연요법과가 설치되어 뜸요법을 강의하고 있다. 정규학교보다 일반교습소에서 더욱 활발하게 침구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데 대학부설 사회교육원의 경우가 많고 다음으로 침구관련단체에서 제공하는 강좌들이 있다(표3 참조). 강좌기간은 주2회 강의에 1-2년 정도가 보통이다. 강사진은 대부분 재야 침구사들이다. 침구를 배우려는 사람들의 지식수준도 높아져 일반인들은 물론 이제는 의사들도 침구를 배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15) 236회 임시국회 보건복지위원회 회의록 제2호 16) 생존 침구사인 김남수 선생이 운영하는 ‘뜸사랑’에서는 의사들만을 위한 9개월 침구교습과정이 있다. 침구를 비과학적이라 여기며 경원시하던 의사들이 침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획기적인 상황변화라고 할 수 있다.
17)일반인들 중에도 대학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도 상당수 있으며 침구를 배우려는 목적도 자기 건강관리와 생명과 환경운동의 일환18)으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해외선교 목적으로 침구를 배워 파송되는 경우들도 생겨났다. 대중영역에서의 침구의 유행은 기공이나 단전호흡과 같은 전통적인 신체수련법이나 아로마 요법과 같이 서구에서 개발된 대체요법들이 사회적 관심을 끌고 있는 것과 유사한 사회적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고비용의 의료체계에 대한 대안으로 자연의술의 가치에 주목하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19)
표 3 침구교육과정을 제공하는 주요 사회교육기관(2004년 11월 현재) 개설기과강좌명교육기관송원대학자연요법과2년과정(정규전문대학)고려대학교 사회교육원침구요법주당 6시간 1년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침구교정학과2년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수지침(초급 중급)각 15주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침구학교실1년과정(주2회 6시간)서울여자대학 사회교육원수지침(초급 중급)각 15주한양대학교 사회교육원건강관리사(침술)3개월(주1회 6시간)대전신학대 선교침술교육원기초, 전문, 학위과정기초1년, 전문2년, 학위5년녹색대학 대학원자연의학과 침구전공2년세계침구학회연합회 대한침구사협회경락연구기초과정3개월 과정(주2회 6시간)뜸사랑기초, 중급, 고급과정기초·중급3개월, 고급 6개월 자료: 각 기관의 인터넷 홈페이지
90년대 이후의 침구는 더 이상 과학성 논란이나 의료불평등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대안적인 삶과 자연의술의 상징으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문화된 한의사들이 침 시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구에 대한 새로운 대중적인 욕구가 만들어지고 있고 그것의 상당부분이 재야 침구사들을 중심으로 해결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17) 김광기·조병희(2003)가 재야 침구사들(전통침법 및 수지침 교육 이수자) 50며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75-84%가 건강유지와 증진을 위해 침을 배우고 있었다. 응답자의 25% 정도는 침시술을 전업으로 하고 있었고 다른 응답자들은 대부분 무보수로 타인에게 시술하는 경험을 갖고 있었다.
18) 장회익교수가 주도하여 창설한 대안대학인 경남 함안 소재 녹색대학 대학원에서는 녹색교육학과, 생태건축과와 함께 자연의학과 설치되어 있어 자연치유와 침구에 대한 대학원 교육과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19) 2000년 의약분업 논쟁 이후 복지부 장관이던 김원길이 의료비 절감차원에서 침구사제도의 합법화를 구상한 적이 있다고 한다(침구사 김남수의 증언). 또한 맥락은 차이가 있지만 의약분쟁과 같은 업권분쟁의 근본적인 근본적 해결책으로 자연의술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계간 사회비평 2001년 가을호와 월간말 2000년 12월호에 관련 특집 기사 참조.
대중영역에서 새로운 침법이 개발되고 있는 점도 유의할만한 사실이다. 수지침 같은 새로운 침법이 비제도권에서 개발되었고 특히 수지침은 이미 전국적인 조직을 갖는 단체로 성장하였다. 이들 침구운동가들은 대체의학의 한 부분으로 침구를 받아들임으로써 한의사 이외에 의사나 간호사는 물론 일반인들도 침구를 배워서 건강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만성병이나 노인의료에 있어서 침구가 삶의 질을 높이는데 비용효과가 높기 때문에 침구사를 많이 양성하여 이에 대비토록 하자는 주장까지 전개하고 있다(침뜸살리기 국민연대 준비모임, 2002).
이러한 주장이 아직은 정치적으로 큰 지지세력을 형성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미 세계적으로 대체의학과 자기 치료(self-care)에 대한 관심이 높은 상황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문제는 계속적으로 논쟁거리가 될 소지가 크다.
물론 법적으로 침구는 한의사들의 독점 영역으로 규정되어 잇다. 과거에 한의사들에게 침구시술 권한이 없다고 판결했던 법원도 이제는 침구를 한의사들의 영역으로 판정하고 있다.20) 한의사 제도가 공인되는 현재 상황에서는 침구사를 별도로 인정하는 법제도가 만들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는 침구가 대중적인 관심사로 대두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침구사가 법제화되어 있는 일본의 경우는 한국처럼 침구에 대한대중적인 운동은 없고 침구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변화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침구사라는 전문가가 이미 오래전부터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에 침구에 대한 새로운 수요는 이들 침구전문가를 중심으로 해결되는 방식이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침구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관심이 제기되었을 때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중영역 내의 무자격 전문가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침구전달체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21) 한의사들이 침구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주장하면서 한의사 이외의 다른 집단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켰기 때문에 정작 침구에 관심이 있는 의사들도 제도권내의 침구 전문가인 한의사들로부터 침구를 배우기보다는 대중영역의 비제도권 전문가들로부터 침구를 배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대안의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한의사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재야 침구사들은 침구술 부활이라는 목적 때문에 대중 누구에게나 침구를 전수하는데 열성을 보이기 때문에 침구를 배워 스스로 건강관리를 하려는 사람들과 쉽게 목적이 일치되지만 전문화를 지향하는 한의사들의 경우는 이러한 식의 지식 나눔이 원천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결국 지난 60년대에 한의사들은 의사들과 연대하여 침구사의 제도화를 방지하고 침구사들을 비제도권으로 몰아냄으로써 동양의학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비제도권 내의 침구의 존재 자체를 없애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사회적 상황의 변화와 함께 이것은 부메랑이 되어 오히려 자신들을 옥죄는 요인이 되었다. 만일 한의사들이 침구사 제도를 허용하였거나 아니면 침구사들을 한의사의 일원으로 받아들어 완전히 단일적인 동양의학 전문가 집단으로 발전하였다면 현재의
20) 대법원 1993.1.15 선고 92도 2538판결, 1994.12.27선고94도78판결. 이런 판결에 대하여 창원지법 판사 황종국(2000)은 민간의술의 유용성에 주목하면서 민간의술을 전면 합법화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21) 재야 침구사들은 한의사들이 침구를 소홀히 해 왔기 때문에 침구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상지대 이응세 교수팀의 연구(1999)에 따르면 한의원 내원환자의 60%가 침구환자였다. 따라서 현재 한의사들이 침구를 도외시한다는 주장은 맞지 않는다. 그런데 한의사들이 첩약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1990년까지 출간된 한의학 관련 석박사 논문목록을 보면 침구관련 논문은 불과 5% 미만이다(오승환 외, 1993). 또한 70-80년대까지도 한의대에서 침구관련 교육이 부실하게 이루어졌다는 증언들이 있다.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수 있다.
근대사회에서 의료의 전문화가 진행되고 ‘과학적 의학’이라는 근대적 담론에 배치되는 의학이론과 시술법들이 소멸되거나 공식의료체계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현상은 세계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일제하에서 한방과 침구 역시 이러한 추세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은 근대의료체계의 기반이 충분하게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부족한 의료공급을 보완하는 차원에서만 그 역할이 인정되었을 뿐이다.
건국이후 의사들에 의하여 한방과 침구제도의 폐지가 꾸준하게 주장되었던 것은 이러한 근대성 담론이 작용했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방은 살아나고 침구사 제도는 폐지되었던 데에는 서로 다른 요인이 작용하였다. 한방의 거우에는 근대성 담론에 대응하는 민족주의 담론이 중요하게 작용하였지만 침구사 제도는 민족주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근대성 담론에 밀려서 폐지되고 말았다.
여기서 흥미로운 현상은 한의사들의 전략이다. 한의사들은 한의사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민족주의에 기대었지만 일단 한의사제도가 만들어진 이후에 이들은 의사가 밟아 온 전문화 과정을 답습하였고 이후 침구사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의사가 한의사제도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들은 침구를 포함하여 동양의학 분야에서 전문화된 의료인력이고 침구사들은 자질이 부족한 부정의료업자로 격하시키면서 침구사제도의 존속에 반대하였다.
22) 이후 한의사들은 의사들과 대립되는 상황에서는 ‘민족의학’이라는 점을 계속 부각시켰지만 내부적인 발전전략은 전문화를 지향하는 양면전략을 구사한다. 이에 따라 한편으로는 한의학(漢醫學)을 한의학(韓醫學)이라고 명칭변경 하면서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 서양의학체계와 유사하게 전문의제도를 도입하거나 종합병원시스템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러한 발전전략은 1930년대에 의사와 한의사 간에 한방논쟁이 있었을 때 조헌영(1942: 181-204)이 제시했던 한방의 발전전략과는 크게 대비된다. 조헌영은 한의학은 서양의학과 달리 생활주변에서 손쉽게 약재를 구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배워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민중보건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한방의 시술자에 대해서도 ‘해방주의’와 ‘엄선주의’를 병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방을 전업으로 하려는 경우에는 자격시험을 치러서 유자격자를 길러낼 필요가 있지만 동시에 일정한 학식이 있는 자가 스스로 한의학을 배워서 이용하는 것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한의학 자체가 수천년 동안 해방주의 전통을 갖고 있었고, 해방주의를 취하면 민중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무자격자가 걸러질 것으로 보았다. 조헌영은 일제가 잠정적으로 인정했던 의생제도를 곧 폐지할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서도 한의학의 발전과정은 이와는 달리 엄선주의만을 지향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해방주의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최근의 대중적 침술의 부활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료분야에서의 민족주의 담론의 성격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방
22)한의사들은 한방과 침구가 분리될 수 없는 한의학의 원리라고 주장하지만 재야 침구사들은 역사적으로 침구학파는 황제내경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었고 첨약은 상한론에 근거를 두어 발전했던 것은 사실이다(山田慶兒, 1999; Unschuld, 1979). 전근대사회에서 의료시술자들이 지식수준이나 사용하는 기술의 종류 및 고객의 지위에 따라 다양한 분파를 형성했던 것은 동서양 사회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존재하던 현상이다. 그러나 근대사회 성립 이후에는 대개 단일적인 의료전문가로 통합되는 추세가 강하다. 이런 통합과정에서 특정한 기술 집단을 포함할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 하는 점은 정치적 성격이 강한 문제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최근에 침구사 제도가 전통 중국식 침법을 중심으로 법제화하면서 수지침 전문가가 이에 포함되지 못한 점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Flaws, 1993).
과 침구의 존폐가 논의되던 50-60년대에 보건의료분야에서의 민족주의는 단순히 근대성에 대립되는 정치적 지향만은 아니었다. 근대의료체계가 지향한 전문직 중심주의의 필연적 결과인 의료서비스의 불평등 분포에 대응하여 ‘중간수준의 의료시술자’들을 양성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세계보건기구를 중심으로 중간수준 시술자에 의한 일차보건의료 체제로 후진국 의료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시도가 1970년대에 만들어졌던 점을 생각할 때 한국의 경우는 그보다 일찍 내부적으로 이 문제를 두고 사회적 논쟁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침구사제도의 폐지와 함께 의료체계는 더 이상 불평등에 대한 민중지향적인 속성을 상실하고 전문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한의사들의 경우 대외적으로는 아직도 민족주의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었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미족주의는 더 이상 민중지향적인 것으로 보기 어렵다. 한의사들 자신이 이미 전문화되어 있고 한방의료 생산체계가 상당히 고가의 자본과 비용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한방의료는 더 이상 근대의료에 대한 비용효과적 대안은 아닌 것이다. 이들의 민족주의는 의사에게 대항하기 위한 정치적 성격이 강하다.
이와 대비하여 대중적 침구술은 서양식 근대의료와 한방의료 모두에 대립하는 대안적 성격을 갖고 있다. 즉 대중적 침구술은 전문화 전략을 거부하고 일반대중을 침구시술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일부 시술자들은 암암리에 침구시술을 생업으로 하기도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자기건강관리를 목적으로 침을 배우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사회에서도 서구와 마찬가지로 대중의 의식이 건강문제와 관련하여 전문화된 의료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던 상태를 벗어나 적극적인 자기건강관리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음을 말해준다.
일상적 건강관리 목적의 침구사용에는 단기간의 학습만으로도 가능하고 별다른 비용부담도 없다는 특성 때문에 침구는 쉽게 대중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전문화는 지식의 독점을 의미하기 때문에 전문화된 의사나 한의사는 이러한 새로운 대중적 욕구(즉 지식 나눔)을 충족시키기 어렵다. 이와 같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침이 이원적으로 존재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의료체계를 정당화해주는 담론체계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담론의 등장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구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중적 침구술의 등장으로 한의사와 침구사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의사와의 관계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침구를 둘러싼 정치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과거에 침구를 전근대적인 유물로 간주하던 의사들이 이제는 침구의 효용성을 인정하고 침구를 배우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과거에 clan사제도 폐지에 의사와 한의사가 협력하였던 점이 주요한 성공요인이었다면 이제 의사가 침구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임에 따라 새로운 역학관계가 만들어졌다. 아직은 의사들이 의사회나 관련 학회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침구사사제도의 부활 같은 것을 주장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의사들이 침구에 관한 지식을 한의사가 아닌 재야 침구사나 외국의 침구사들로부터 배우고 있다는 사실은 침구사의 사회적 존재를 인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전문직간의 협력관계가 준 전문직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이라는 Halpern(1992)의 연구와도 일치되는 현상이다.
전문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침구의 이원적 존재는 결국 그동안 진행되어 온 한의학의 전문화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의사들은 한의학을 대학교육화하는 등 제도화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침구사와의 관계에서 이들을 흡수하거나 위계적 통제구조 하에 두지 않고 배제한 결과 상황의 변화와 함께 부메랑이 되어 침구영역에 대한 갈등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후적인가정일 뿐 거대한 의사집단을 상대하면서 생존을 모색하던 한의사들에게는 전문화를 통한 성장발전과 침구사 폐지라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침구를 둘러싼 갈등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전문화된 한의학과 대중적 침구술은 그 구성논리나 지향점이 크게 대비되는 상황이다. 영역갈등론의 관점에서 시사하듯이 누가 더 사회적으로 설득력 있고 세련된 담론체계를 구성하는가에 따라서 앞으로의 방향은 달라질 것이다. 현재로서는 침구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충분히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만들어지는 초기 단계에 있기 때문에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재야침구사들의 침구 담론 역시 대중성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세련된 형태는 아니고 의사나 한의사들 역시 아직은 변화하는 상황에 충분히 주목하고 있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영역갈등이 본격화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만일 현재와 같은 침구의 이원적 존재가 그대로 제도화 된다면 이것은 의료의 탈전문화에 신기원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