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찐빵
유년 시절 아버지는 오랫동안 공직에 있다 정년퇴임을 하고 찐빵 장사와 우동 장사를 했다. 그런 아버지 때문인지 철들고 10여 년 동안을 찐빵과 우동을 사 먹지 않았다.
아버지는 멋쟁이였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할 때마다 우리들을 한 번씩 안아 주곤 하였다. 그런 아버지가 양복과 넥타이 대신에 밀가루가 잔뜩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열심히 빵 반죽을 했다.
나는 친구들이 볼세라 학교가 파하면 달음박질로 집에 오거나 맨 나중에 교실을 빠져나오기일쑤였다.
아버지가 찐빵 장사를 하는 것이 못내 심술이 났다. 마음에 꼭 들던 커다란 풍선 하나가 하늘로 슝~하고 날아가버린 듯했기 때문이었다. 간혹 반 친구가 찐빵을 먹고 있을 때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너 찐빵 장사 딸이지?’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찐빵이 필요할 때면 아버지께 은근슬쩍 떼를 써 커다란 찐빵 한 개를 손에 쥐고 친구 덕이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 찐빵을 고구마나 생선으로 바꿔 먹었다. 덕이네 집은 우리 집과 담을 같이하고 있었다.
매번 내가 들고 가는 찐빵은 고구마가 아닌 막내동생을 위해 생선과 바꾼 적이 더 많았다. 막내동생은 입이 짧아 언제나 밥 한 그릇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제일 먼저 놓았다. 엄마는 안타까운 마음에 덕이집을 잘 드나드는 나를 불러세웠다.
찐빵을 손에 쥐어주며 생선과 바꿔 오라고 눈짓을 하는 것도 모자라 빨리 갔다 오라며 손을 홰홰 저었다. 바꾸어 온 갈치를 화덕에 구워 흰쌀밥에 갈치 토막이 얹힌 수저를 바라보는 나는 부러움과 시새움에 눈을 한껏 추켜올려 막내동생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언제쯤 숟가락을 놓을 것인가 하면서…….
유년 시절 내가 살던 곳은 여수시 국동 신작로 건너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다. 눈만 뜨면 그 바다에 나가서 동네 친구들과 개구리 헤엄을 쳤다.
바다를 바로 앞에 둔 우리집이었지만 배를 타지 않았던 우리 집은 바다에서 나는 모든 것을 돈으로 주고 사 먹어야 했다. 그렇지만 덕이네 아버지는 마도로스였는데 외동딸인 덕이를 위해 새옷과 새신발을 늘 손에 쥐고 나타났다. 나와 반 친구들이 모두 덕이를 부러워하였다.
여수 수산대학을 옆에 둔 우리들은 놀이터가 학교 운동장이었다. 하루는 운동장에서 덕이와 동네 친구들이 불놀이를 하고 놀았는데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수위아저씨가 소리를 지르며 쫓아왔다.
우리는 머리카락 휘날리며 달렸지만 내 키보다 높은 담벼락을 넘어가지 못하고 터억 하니 빨래 걸치듯 다리 한쪽만 걸쳐진 채 낑낑대고 있었다.
더 이상 내 몸뚱이는 넘어가지 못했고 걸쳐진 다리 때문에 수위아저씨한테 목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그때 수위아저씨는 총알처럼 날아와 ‘요놈, 너 박선생 딸이지.’ 하면서 뒷목을 잡아챘다.
겁이 덜컥 났다. 몸이 거의 다 넘어간 덕이 옷자락을 질끈 잡고 늘어졌는데 그 때문에 덕이 몸뚱이가 뒤로 발랑 넘어져 같이 붙잡히게 되었다.
한 시간이 넘게 그 풀밭에 무릎을 꿇고 벌을 섰다. 다리가 저리고 아팠지만 덕이에게 미안함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만 수그리고 들릴 듯 말 듯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덕이 집에 가지도 못하고 찐빵과 생선을 바꾸어 먹지도 못하게 되었다. 고구마뿐이 아니었다. 막내동생의 갈치와 함께…….
두어 달을 우울하게 보냈다. 그런데 겨울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덕이 집에 방 한 칸을 세내어 전도사가 왔다. 개척교회였던 것이다.
교회에 나오라고 전도사가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했다. 기회가 온 것이었다. 덕이와 화해를 하기 위해 몇 번을 어물쩡거리다가 두 번의 일요일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세 번째 일요일이 다가오던 날 용기를 냈다. 깨끗이 빨아입은 옷으로 한껏 단장을 하고 교회를 나갔다. 덕이는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제 집 안방인 양…….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다가가 덕이 옆에 앉았다. 실실거리는 나를 보더니 덕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무척 반겨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덕이와의 만남은 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이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찐빵과 생선을 바꾸어 먹지는 않았다. 그때가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이었는데 졸업식을 앞두고 우리 가족은 모두 광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10여 년이 지나간 지금 따끈한 김이 오르는 찐빵을 보면 불현듯 아버지가 그립다.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 공직에서 퇴임한 후에도 일손을 놓지 않고 밀가루를 반죽하고 찐빵을 빚었던 아버지.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버지가 항상 곁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어리석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