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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아동문학의 맥〛① 동화작가 최영희 선생님
이상향을 위한 결말은
항상 내 동화 주제의 모티프
대담 : 동화작가 김 문 홍
2014년 1월 초에 시인 강구중 선생이 떠나자 뒤이어 주성호 시인이 지구별을 떠났다. 후배 동화작가인 양경화, 한아 선생을 대동하고 2009년부터 지금까지 6년째 암 투병을 하고 있는 동화작가 최영희 선생 댁을 느닷없이 찾았다. 대담을 하기 위해서였다. 오지랖이 넓기로 소문난 분이라 떡이며 식혜를 내놓으며 유난스레 후배들을 챙긴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열두 번을 올 수 있는 거리인데도 고작 두 번째이다. 생기가 도는 얼굴을 보니 미안했던 마음이 금세 안도감으로 바뀐다.
동화작가 최영희. 일찍이 시와 동시, 시조로 등단했지만 이 모든 것을 떨쳐내고 지금은 오직 시름시름 ‘동화앓이’에만 빠져 있다. 자신이 동화를 택한 것은 어렵고 불쌍하고 힘든 사람들도 언젠가는 행복하게 될 수 있다는 결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상향을 위한 결말은 항상 그의 동화 주제의 모티프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래저래 가까이 있던 문우들이 느닷없이 곁을 떠나기 시작한다. 보내고 사무치게 그리워하기보단 곁에 있을 때 자주 손이라도 잡아 드려야겠다. 그러고 보니 앞으로의 나의 인터뷰 여행은 참 좋고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 같다.
<동화작가 최영희 선생님은 부산 아동문학계에서 오지랖이 넓기로 꽤 알려져 있을 만큼 정이 많다>
최영희 선생의 근황이 궁금하다
아무런 예고 없이 느닷없이 최영희 선생 댁을 방문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사전에 연락을 드리면 또 선생님 성격에 이곳저곳 집안을 쓸고 닦으랴, 이것저것 음식을 장만하는 번거로움을 끼칠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연락을 드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후배 동화작가들이 아무래도 여자라는 특성상 머리 손질도 하고 옷매무새도 다듬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 시간을 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귀띔을 주는 바람에 달리는 차 안에서 10여 분 뒤에 도착한다고 전화를 넣었다. 항암치료 후유증 때문인지 모자를 쓴 채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커피 대신 식혜로 목을 축인 다음 최영희 선생의 근황이 궁금하여 먼저 말문을 열었다.
김문홍 최영희 선생님, 반갑습니다. 2009년에 암 수술을 끝내고 열 몇 번의 항암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듣기론 항암치료는 주사약이 독해 치료 끝나고 진찰실을 나올 때는 거의 기어 나올 정도로 고통스럽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항암 치료가 끝나면 어느 정도는 바깥출입이 가능할 것도 같은데...어떻습니까,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까? 설마 재발한 건 아니시겠죠?
최영희 제가 아득바득 한다고 해서 병이 더 나아질 것도 없지 않겠어요. 투병을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개인의 삶과 죽음은 사람의 소관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음을 비우고 삿된 생각을 하지 않고, 자연의 순리에 맞게 제 몸을 거기에 맞춰 가고 있습니다. 그저 호젓한 산길을 걸으며 자연의 정직함을 배우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은 덕담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하루 주어진 삶은 보너스라고 기쁘게 여기고 감사드립니다.
김문홍 제가 알고 있기론 영문과를 졸업한 따님이 한 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캐나다로 어학연수 갔다고 얼핏 들은 것도 같은데, 참 그 후에 혼자서 조그만 사업을 벌였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지금은 엄마와 같이 있지 않고 따로 나가서 사는 건가요? 그리고 연세가 많으신 어머님도 생존해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참, 그리고 최 선생님께선 환갑 벌써 넘으셨지요?
< 인터뷰 중에도 후배 작가들에게 많이 맛나게 먹으라고 챙긴다>
최영희 하나밖에 없는 제 딸은 한때는 조그마한 개인 사업을 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접고 좋은 직장에 잘 다니면서 저와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의 좋은 말벗이 되어 주어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요. 제 어머님은 막내 남동생과 함께 살고 계십니다.
김문홍 저도 한 3년 전에 신장암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다른 부위로 전이가 되지 않아 지금까지 6개월에 한 번씩 초음파 검사로 전이 여부를 체크하고는 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나선 한동안 즐기던 담배도 끊고 음식 섭취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한 번 큰 수술을 받고 나니까 인생관이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일과를 보낸다는 점과,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걷어낸 채 유유자적으로 살아가야겠다는 것이 크게 달라진 점 같습니다. 최 선생님께서도 발병 후에 세상살이와 인간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을 걸로 아는데 어떻습니까?
최영희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란 게 유한적인 건데, 조금 일찍 가고 조금 늦게 남는다는 그 차이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저 마음을 비우고 나도 이 자연의 일부로 태어나서 살고 있고 언젠가 자연의 일부로 소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될 수 있으면 살아있는 동안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은 얘기만을 하고, 하루, 하루 최선을 다 해 살다보면 언젠간 좋고 기쁜 일도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김문홍 최영희 선생께선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으로 동화를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10여 권의 동화집을 상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발병 이전엔 그래도 꾸준하게 동화를 발표해온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투병 생활을 하면서부턴 건강 유지가 최우선이라 동화 창작은 뜸하고 더딜 것으로 생각되는데...동화 창작은 계속 하시는 건가요? 그리고 발병 이후부턴 문학적인 행사나 모임에는 발길을 끊을 수밖에 없는데 하루 일과를 어떻게 소일하고 계시는지요?
최영희 동화 창작이라? 그렇지 않아도 지난 1월초, 모 출판사에 110매 정도의 동화원고를 넘겼습니다. 개인 창작동화집이 아닌 출판사 기획물이고, 4인의 동화작가의 글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투병을 빌미로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었던 처지라 처음 청탁을 받았을 땐 많이 망설였답니다. 그런데 중간에 다리를 놓은 지인께서 재차 권유하셔서 엉겁결에 승낙을 하고 원고료까지 먼저 받았지요. 원고료를 받을 땐 이런 욕심이 앞섰지요. 이 원고료면 반년 치 고양이 사료 값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고요. 사실 제가 길고양이 밥을 10년 째 주고 있는데, 내 밥을 먹는 길고양이들이 많은지라 사료 값이 만만치 않거든요. 그런데 원고 마감일에 맞춰 글을 써야지 하고 마음을 먹는 찰나 갑자기 몸이 아팠어요. 허리가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렇게 영영 자리보존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부터 앞섰지요. 병원에 가서 각종 검사도 하고 척추 주사도 맞았지요. 원장 선생님 말씀으론 오랜 항암치료로 뼈와 근육이 약해진 탓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전혀 나을 낌새가 보이지 않고 원고 마감 날이 며칠 남지 않아, 온통 머릿속엔 청탁 받은 원고를 어떻게 해야지 하는 걱정만 앞섰답니다. 이제라도 원고료를 돌려주고 사실대로 말하면 편집장이 무엇이라고 말할까? 또 다리를 놓아 준 지인의 입장은 정말 난처하겠지? 하는 고민 끝에 편집장에게 전화를 해서 일주일 정도 말미를 얻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말미로 얻은 일주일이 반쯤 갔을 무렵 의자에도 앉을 수 있어 3일 만에 겨우 원고를 마무리해서 넘길 수 있었지요. 원래 내가 글쓰기에 있어 벼락치기 체질이긴 하지만 이번처럼 마음 졸인 적은 없었답니다. 앞으로도 기력만 있으면 동화 창작을 계속 하고 싶지만 글쎄요? 마음만큼은 열심히 동화를 생각하고 있지만 몸도 따라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4년 넘게 문학 행사나 모임에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된 항암치료에 체력도 떨어지고 면역력도 약해져서,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피하고 있습니다. 또 멀미가 심해서 차를 타고 10분 견디기도 힘드니까요.
하루 일과를 어떻게 소일하고 있느냐고요? 그야말로 단조롭고 한가로운 하루일과를 보내고 있습니다. 불면증 때문에 새벽까지 잠을 뒤척이다 아침 늦게 일어나요. 아침에 2시간쯤 신문도 읽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듣지요.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간식과 물을 가방에 넣고 내가 사는 아파트 뒷산으로 갑니다. 우리 아파트 뒷산은 금정산 둘레길 입구이거든요. 날씨가 쾌청하고 몸 컨디션이 좋은 날은 범어사 상마마을까지 가기도 하지만 요즘은 부산외대 입구에서 점찍고 과학 고등학교를 거쳐 다시 내려옵니다. 내려오는 길 입구 소나무 아래에 놓인 평상에서 아는 분들과 간식도 나눠 먹고 담소도 합니다. 가끔씩 산에서 내려온 고라니도 만나고 나무 위를 오르내리는 청설모의 재롱도 보고요. 그 시간이 정말 행복해요. 저녁 해가 지면 마지막 일과인 길고양이 밥을 주러 갑니다. 모두 세 곳에 사료를 주는데 그 애들은 내 발자국 소리도 알아요. 그 중에서 성질 급한 녀석은 빨리 안 오면 찻길을 건너 우리 집 앞에 까지 온답니다. 참으로 단조롭지만 하루시간이 정말 빨리 가네요.
김문홍 참, 동화나 시를 쓰는 후배들이나 동료 작가들이 자주 찾아오시는지요?
저도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으면서도 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이번이 발병 이후 6 년 만에 이번이 겨우 두 번 정도인 것 같아 낯 뜨겁습니다. 더욱 부끄럽게 생각하는 건 부산아동문학인협회 행사가 있을 적마다 최선생께서 비누를 비롯한 선물을 잊지 않고 보내주시는데 난 그 동안 뭐하고 있었나 하고 자책하기도 했지만 그건 또 그때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섭섭하거나 그리울 것 같은데요?
최영희 가끔씩 동료작가나 후배들이 잊지 않고 전화도 주고, 또 이따금씩 찾아주어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또 나를 위해 항상 기도해 주신다는 선배님들도 있어 정말 나는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비누는 부담감을 드리려고 하는 게 아니고, 내가 부산아동문학인협회을 생각하며 만든 정표로 받아주시면 됩니다. 만나지 않아도 항상 나는 마음속으로 부산아동문학인협회 행사에 같이 참여하고, 또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나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이니까요.
<지금까지 펴 낸 그녀의 동화집은 그녀의 꿈과 삶의 무게 만큼니아 큰 무게중심을 지니고 있다>
하필이면 왜 동화창작이었을까?
최영희 선생은 초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1975년에《새교실》지에〈낙엽〉으로, 그리고《교육자료》지에서 동시 추천으로 문단에 얼굴을 처음 내밀었다. 그리고 1977년에는〈연〉이라는 시조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그 이듬해인 1978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서〈봄을 파는 가게〉로 당선하여 3관왕의 영예를 안은 바가 있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동아대학교 국문학과 재학시에《동아문학상》시 부문 당선, 시 전문지《시문학》대학생 시 부문 당선의 경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녀는 동시와 시조, 시 창작을 끊고 지금까지 오로지 동화 창작에만 전념해 오고 있다.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동화앓이’에만 빠져 있게 한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김문홍 최영희 선생께선 문단에 등단할 무렵엔 동시, 동화, 시조, 시 등을 두루 창작하고 발표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모든 것을 접고 오로지 동화 창작에만 전념해 오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보니 시, 시조, 동시 청탁이 뜸한 탓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아무래도 여러 분야를 창작하다 보니까 문학적 열정과 상상력이 분산되다 보니까 모든 장르에서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탓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단 풍토에선 한 사람이 여러 장르를 섭렵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탓도 있을 것입니다. 최선생께선 이 모든 것을 접은 채 지금은 오로지 동화 창작에만 전념하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최영희 물론 내 문학의 시작은 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시는 쓰지는 않지만 시, 동시, 시조 읽는 작업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동화는 시, 동시, 시조 다음에 제일 마지막에 만났지만, 지금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되었지요. 내가 오로지 동화 하나만 고집하는 것은 시, 동시, 시조를 내 능력으로 다 감당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것들을 다 놓치기 싫어서였습니다. 나는 내 동화 속에 시, 동시, 시조를 다 품고 싶었지요. 마치 내 동화가 엄마라면 시, 동시, 시조는 갖가지 형태의 자식 같다고 할까요? 그래서 나는 동화 속의 문장 하나하나를 시어처럼 다듬고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김문홍 시 창작은 동아대학교 국문학과 재학 시절에《동아문학상》시 부문 당선과 시 전문지《시문학》지에 대학생 시 당선의 영향이 있어서 시를 썼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동시와 동화, 그리고 시조 창작은 문단 등단이 좀 다른 특별한 계기가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당시에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시, 동화 창작으로 연결되었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민족시가인 시조 부문에서 당선된 이면에는 뭔가 다른 계기가 있었을 걸로 생각됩니다. 어떤 계기에서 동시, 시조, 동화를 창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녀의 거실은 자신의 삶 만큼이나 정갈하고 옹골차고 단출하고 아름다와서 가까이 가기가 두렵다>
최영희 동시, 시조, 동화 창작 계기에 대해선 몇몇 잡지에서 언급된 것이 있어 그대로 인용할까 합니다.
나의 시는 부산동아대학 국문과에 재학 중인 1975년에 ‘시문학사 주최 전국대학생 시 모집’에서 1등 당선’, ‘제 12회 동아대 동아문학상 수상’, ‘해기사협회 해양문학상 시 부문 당선’, ‘영남여성백일장 시 장원’이라는 행운을 줄줄이 안겨주었습니다.
우쭐해진 나는 겁도 없이 졸시 몇 편을 들고 상경하여, 그 당시 시문학사 주간이며 시인이었던 문덕수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시문학사 주최 시 부문에 당선하면 시문학 1회 추천으로 간주한다는데 용기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희미한 기억이지만 그때 문덕수 선생님께선 나보고 더 열심히 쓰라고 격려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 무렵 나는 생각지도 않게 우연한 기회에 동시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부산교육대학을 졸업한 나는 나의 모교이자 초임지인 당감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1974년 3월, 공재동 시인이 내가 근무하는 당감 초등학교로 전근을 왔고, 공교롭게도 바로 옆 반 담임이 되었습니다. 1973년 <새교실>에 동시를 천료하고, 이미 부산아동문학회 회원이었던 공재동 시인은 나에게 자신이 쓴 동시를 여러 편을 소개해 주었고, 1973년 9월에 발간된 부산아동문학 1집도 한 권 주었습니다. 당시 동시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나는 공재동 시인 덕분에 동시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시를 쓰던 내가 동시쯤이야 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1974년 <새교실>, <교육자료> 두 군데 다 동시를 응모하게 되었는데, 운이 좋게도 보내는 것마다 그대로 뽑혀 동시 3회 추천완료가 되었습니다. 내 부끄러운 동시를 보고 정진채 선생님과 김상남 선생님께서 엽서를 보내주셨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아동문학으로 걸음마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좋은 선배님들이셨습니다.
<새교실>, <교육자료>에 동시가 천료 되는 계기로 1975년 부산아동문학회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부산아동문학회 고문이었던 이주홍, 조유로 선생님을 비롯하여 정진채, 박돈목, 심군식, 선용, 안수희, 김상남, 박원돈, 김용석, 주성호, 최향숙, 이금옥, 공재동 박지현 선생님 등 아동문학회의 여러 선배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 이듬해 부산교육대학 출신 아동문학가(공재동, 김문홍, 김재원, 김종순, 류석환, 박연희, 손월향, 주성호, 최영희)들이 모여 1976년 2월 20일 ‘맥파’ 동인을 결성하고, 1976년 5월 3일에서 5월 9일까지 일주일간 광복동 명문다방에서 창립기념 시화전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또 1977년 2월에는 9인의 동인들이 4집까지 낸 프린트 판을 한데 묶어 <늘보리>라는 맥파 동인 시집이 첫 선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늘보리>의 말미에는 조유로 선생님께서 지도서평을 써주셨는데 선생님 특유의 예리함과 신랄함으로 인해 우리 동인들은 한동안 가슴앓이를 한 것 같습니다. 꼭 조유로 선생님의 지적이라고만 할 수 없지만, 나도 나의 동시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회의와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이 되어 시조에도 한몫 거들고 있었습니다. 내가 시조에 눈을 뜬 것은 순전히 시조시인인 전일희 선생님 덕분이었습니다. 전일희 선생님은 당시 공재동 시인의 절친한 친구였는데, 이미 1975년에 월간문학에 시조가 당선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전일희 선생님의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의 아름다움과, 파닥이는 신선함이 묻어난 시조 한 편 한 편에 놀라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시와 동시에서 맛볼 수 없는 또 다른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강나연’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한 나의 첫 시조 작품인 ‘연(鳶)은 운이 좋게도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습니다.
시와 시조를 쓰시는 박재삼 선생님께서 내 작품을 뽑아 주셨는데, 신인다운 활달함과 차분한 조화와 말이 제자리를 잘 찾아야 한다는 비밀을 잘 터득하고 있는 점을 높이 사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람과 하늘의 사용 빈도가 잦은 점을 사소한 흠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시조로 등단한 나는 시조문학과 중앙문예에 몇 편의 시조를 발표하고, 같은 중앙일보 출신선배님인 시조시인인 류제하(시조시인 진복희 선생님의 부군이시며 이미 작고하셨음) 선생님의 격려를 받으며 다소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동시는 시와 시조의 한가운데서, 나의 시조는 시와 동시의 한가운데서 점점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1977년이 저물어 가는 11월말쯤 어두운 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나는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았습니다. 또 한 해가 다 갔구나 하는 쓸쓸함과 함께, 나는 시도 시조도 동시도 아닌 나의 동시에 대해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은 도저히 잠들 수 없었는데, 바로 그날 밤을 새워 탄생한 것이 바로 동화〈봄을 파는 가게〉였습니다.
‘봄을 파는 가게’는 ‘최리향’이라는 필명으로 쓴 나의 첫 동화작품이자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품이었습니다. 아동문학가인 박화목 선생님과 어효선 선생님 두 분께서 뽑아주셨습니다. ‘봄을 파는 가게’는 동화 습작기를 거치지 못한 탓으로 내 개인적으론 단조롭고 서툴기 짝이 없는 동화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박화목, 어효선 두 분 선생님께선 동화다운 상상력과 아기자기함에 후한 점수를 주어 ‘봄을 파는 가게’를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것 같습니다.
김문홍 그런데 이젠 동시와 시조 창작을 접은 채 동화 창작에만 전념해 오고 있습니다. 다른 장르의 창작 활동을 접고 동화 창작에만 전념하고 있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요? 시조와 동시보단 동화 창작에 문학적 상상력이 더 빛을 발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동화 장르가 다른 장르보다 뭔가 다른 특성이나 매력이 있었을 걸로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린 시절에 유별나게 동화읽기에 대한 특별한 문학적 경험이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최 선생께서 오로지 동화 창작에만 전념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싶습니다.
<그녀는 동화 작품의 원고료로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길 고양이들에게 먹일 양식을 마련하고 있다>
최영희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물론 입담 좋은 외할머니의 옛날이야기도 정서적 자극이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독서영향이 가장 컸지요. 시, 동화, 소설, 희곡 등 책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고 그것들은 내 마음의 자양분이 되었지요. 시는 다른 문학 장르에서 볼 수 없는 함축미와 내면의 상상력을 보여주었고, 소설은 절묘한 복선과 방대한 서사성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지요. 근원적으로 시를 사랑했지만 소설도 좋아했지요. 내가 동시와 시조보다도 동화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어린 시절에 접한 안데르센이나, 그림형제 동화, 또 청소년기에 접한 모파상, 톨스토이, 투르게니에프, 안톤 체홉의 단편소설의 영향 탓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김문홍 제가 알고 있기론 최영희 선생께선 1978년애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으로 동화세계에 첫 발을 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36년 동안 10여 권의 창작집을 상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기론 거의 모두가 단편동화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장편동화는 거의 창작하지 않은 채 단편동화에만 매달리고 있는 게 궁금합니다. 물론 장편동화를 창작하는데 힘이 부쳐서 그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엔 최 선생의 문학적 상상력을 담는 그릇으로는 장편보다 단편이 더 적절해서 그럴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제 추측이 맞다면 그렇게 단편동화 창작을 고집하는 이유가 뭔지 정말 궁금합니다.
최영희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동화의 참다운 매력은 단편동화라고 생각합니다. 짧은 분량 속에 압축된 서사, 그리고 리듬감이 넘치는 문체, 시종일관 긴장감을 잃지 않는 탄탄한 구조...이런 것들의 매력이 저를 단편동화의 매력 속에 빠져 있게 한 것 같습니다. 장편동화를 즐겨 쓰다 보면 이야기의 재미와 크나큰 서사구조의 매력에 빠질 순 있지만, 단편동화가 주는 압축과 절제미를 잃게 되는 것이죠.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딸은 이제 그녀의 삶 깊숙히 들어와 큰 위안이 되고 있다. 유치원 때 모습>
김문홍 최 선생님께서는 단편동화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생각하기론 단일한 효과와 긴장과 압축에서 오는 절제미, 그리고 문장의 절제에서 비롯되는 여운 등에 있어서 장편보다는 단편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최 선생께서 단편동화를 고집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싶습니다.
최영희 앞서 말씀 드렸지만 나는 정서적으로 시와 맞았고, 또 청소년기에 좋아한 소설들이 모파상이나 톨스토이, 투르게니에프, 안톤 체홉 같은 작가들이 쓴 단편 소설들이 좋았습니다. 물론 장편소설도 방대한 서사성과 끊임없는 사건전개가 흥미를 끌었지만, 단편 소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습니다. 마치 장편 소설이 황금덩어리라면 단편 소설은 잘 세공된 금강석 같다고 할까요? 특히 모파상의 목걸이는 결말의 반전도 반전이지만 한편의 동화처럼 느껴졌지요. 또 가짜 목걸이라는 걸 알게 된 여주인공은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을까? 그 친구는 그 목걸이를 여주인공에게 무사히 돌려주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상상력을 고취시켰지요. 그런 점에서 장편 동화보다 단편동화에 더 안착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문홍 지난해에 지식을 만드는 지식(지만지) 출판사에서 시도한 한국동화문학선집 100권 중에 최 선생님의 동화선집도 들어 있습니다. 그 동화선집에는 모두 15편의 중단편 동화가 수록되어 있더군요. 1978년부터 2007년까지 연대별로 여러 작품들이 포진되어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순수동화(환상동화)로 채워져 있어 무엇보다도 반가웠습니다. 저도 동화문학의 본령은 생활동화나 아동소설보다는 순수동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또 그 작품들을 하나하나 읽어 보니 최 선생의 동화는 생활동화보다는 순수동화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최 선생께서는 순수동화 창작에 집착하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최영희 순수 동화에 집착한다 라기 보단 순수 동화를 지향한다 라는 게 맞겠지요. 내 생각으론 동화의 본질은 순수성을 벗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많은 작가들이 현실 문제를 보여주고 있고, 또 그것이 동화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도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상 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동화 속에서까지 적나라한 현실의 비정함을 맛보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 것들은 텔레비전 뉴스나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일상으로 대할 수 있으니까요.
김문홍 최 선생께서는 순수동화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최영희 최근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이 1000만명 관객을 돌파했다는 뉴스를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바쁘고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왜 동화 같고 환상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에 저리도 열광할까? 하고요. 그것이 답변이라면 답변이 된다고 될까요?
<2013년 지만지 출판사에서 펴낸 한국동화문학선집 100권 중의 하나인 최영희 동화선집>
최영희 동화의 속내가 궁금하다
최영희 선생의 동화는 참 아름답고 곱다. 모든 사람과 사물을 보는 눈이 밝고 긍정적이다. 동화의 결말이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으로 보아서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만지 동화선집의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는 이상향을 위한 결말은 항상 나의 동화 주제의 모티프가 되었고 그것을 계속 고수해야 하는 괴로움도 숙명처럼 안고 왔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최영희 동화의 장점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 주는 이상향의 추구일 것이고, 단점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의식이 부재한다는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김문홍 최영희 동화선집에 수록되어 있는 15편의 중단편 동화를 하나하나 읽어 보았습니다. 제가 추구하고 있는 동화의 이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동화는 동화라는 형식을 빌려 현실을 우화적으로 은유하는 형식인데, 최 선생의 동화는 하나같이 아름답고 곱고 순수했습니다. 우리 주위의 사물과 인간을 보는 시각이 참 따뜻하고 낙관적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작품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처럼 그런 동화세계를 통해 최영희 선생의 순수한 휴머니즘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최영희 선생이 동화선집의 ‘작가의 말’에서 밝힌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는 이상향을 위한 결말”은 어떤 뜻인지 알고 싶습니다.
최영희 이상향을 위한 결말은 바로 해피엔딩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가령 예를 들어 어른들이 즐겨보는 텔레비전 드라마 중에 막장드라마 라고 지탄을 받는 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지탄을 받으면서 시청률은 계속 고공 행진하다가 성공적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마 모든 드라마들이 권선징악을 담은 옛 이야기와 같은 전철을 밟을 게 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엔 그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불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동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김문홍 저는 최영희 선생의 동화에서 인간과 사물을 보는 따뜻한 시선과 세상과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적이고 긍정적인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적인 문장과 해피엔딩의 결말을 통해 최 선생께서 동화의 본질적 세계로 접근하고 있다는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치열한 현실이 부재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즉, 너무 아름답고 순수하고 꿈으로만 가득 차 있어, 혹시 뜬구름을 잡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최 선생의 동화에는 ‘지금 이곳’의 치열한 현실이 부재하다는 저의 지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 의견에 반론을 들어 설명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동아대학교 국문과 재학시절에 꽤 많은 시를 써서 기성 시단을 술렁거리게 했다.>
최영희 물론 치열한 현실부재가 내 동화의 단점이 된다고 지적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화는 교육성, 예술성, 재미성, 이상성이란 내면적 구조와 단순성, 소박성, 명쾌성이란 외형적인 구조가 한데 잘 어울려 상승효과를 일으킬 때 비로소 큰 감동과 위안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화가 다른 장르의 문학과 다른 점은 독자의 대부분이 아이들이고, 아이들은 누구보다도 때 묻지 않고 순수해야 합니다. 적어도 어른들 중 한사람인 동화작가는 그들의 순수성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문홍 최 선생님께서는 역시 ‘작가의 말’에서 “내가 아직도 안데르센이나 그림동화를 좋아하는 것은...(중략)...어렵고 불쌍하고 힘든 사람들도 언젠가는 행복하게 될 수 있다는 결말 때문이었다.”라고 피력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론 그건 최 선생이 순수 동화를 좋아하고 즐겨 창작하는 이유가 아닌 가 생각하는데요?
최영희 내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몇 가지 느낀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람이 착하다고 다 부자가 되고 행복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또 나쁜 사람이 다 벌을 받고 불행하게 되는 것도 아니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참 불공평하구나 하면서 한탄한 적도 있었지요. 그런데 새로운 점도 발견하게 되었지요. 그것은 물질적으로 가지지 못해도 마음이 평안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고, 가진 것이 많아도 항상 부족하고 불만이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도 행복하게 될 수 있다는 결말은 바로 마음의 평안과 여유를 갖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김문홍 최 선생님께서는 젊은 시절엔 자신의 동화가 모든 인간을 구원해 줄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데,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까? 그리고 동화가 오늘날 힘들고 고달픈 사람들에게 조그만 위안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 생각 역시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까?
최영희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황장엽 씨가 북한을 탈출해서 제3국에 잠시 머물었는데, 그 때 기자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잠들기 전에 동화책을 읽었다고 말입니다. 한때 공산주의 이론가였던 그가 어렵고 힘든 때 동화책을 읽으며 위안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습니다. 이 에피소드가 답변이 될 수 있을까요?
김문홍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최 선생님에게 동화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최영희 동화란 언제나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고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거나 주어야 하니까요. 이기적인 삶보다는 이타적인 삶이 더 동화에 가깝지 않을까요.
<인터뷰에 함께 자리한 후배 동화작가인 양경화, 한아 선생과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다.>
요즘의 동화문학에 대한 그녀의 솔직한 마음
동화작가 최영희는 요즈음 발표되고 있는 동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이 참 궁금하다. 그리고 생기발랄한 후배 작가들의 동화작품과 활동에 대해선 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 속내 또한 궁금하기 짝이 없다. 요즈음은 단편동화 대신에 장편동화, 그리고 순수동화보다는 생활동화와 아동소설, 앞으로 동화문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리라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싶다. 물론 이런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변이 가장 이상적인 동화문학의 진로는 아닐 것이다.
김문홍 최 선생께서는 요즈음 발표되는 동화 작품들을 얼마나 많이 읽고 계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요즈음 동료 작가들이나 후배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솔직한 생각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생기발랄한 후배 작가들의 작품 활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아울러 알고 싶습니다.
최영희 글쎄요. 작가마다 개성이 다르고 지향점도 다르니까요. 나하고 다르다고 뭐라고 탓할 수 없지요. 제일 중요한 건 동화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고 얼마나 지키고 있느냐가 문제이지요. 일본 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처럼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공감하고 위안을 주는 동화를 쓴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요.
김문홍 요즈음은 단편동화보다는 장편동화가 대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학적인 상상력의 결집체로서의 과거 동화의 목직한 경향보다는, 동화문학의 일차적 독자인 어린이들의 독서 패턴을 고려한 재미 위주의 동화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또한 아동의 호흡을 고려하여 장편동화의 분량이 자꾸 줄어들고 있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녀의 집 거실에 있는 단출한 서가에는 오직 동화 작품집만이 넉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최영희 동화가 너무 재미 위주로 치우치는 것은 분명히 문제점이 있다고 봅니다. 요즘 출판사들이 기획하는 출판물 중에도 그런 경향이 많더군요. 마치 어린이들의 편식을 부추기는 것 같아 걱정도 됩니다. 육체적 영양결핍 못지않게 정신적 영양결핍도 문제니까요. 장편 동화의 분량이 자꾸 줄어들고 있다는 건 어린이들의 독서능력 한계라고 생각됩니다. 스마트폰 같은 기기들도 한 몫 하는 탓일 겁니다.
김문홍 최 선생께서는 지금까지 발표된 자신의 동화 작품 가운데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최영희 ‘봄을 파는 가게’와 ‘난장이 마을’ 입니다. 이 두 작품 속에 내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모든 것들이 함축되어 있으니까요.
김문홍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내 이름을 대면 금방 떠오를 수 있는 필생의 역작을 꼭 한 번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죽고 나서도 ‘김문홍하면, 아 그 작품!’ 하고 떠올릴 수 있는 장편동화 하나, 그리고 단편동화집 한 권을 필생의 작업으로 쓰고 싶다고 늘 꿈 꾸고 있습니다. 최 선생께서도 앞으로 꼭 이런 작품을 한 번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있는지요? 그리고 그 작품은 언제쯤 볼 수 있는지요?
최영희 좋은 작품을 남기고 싶은 건 작가라면 누구라도 꿈꾸는 일이 아닐까요? 그러나 중요한 건 지금이 아니고 나중이겠지요. 언제나 평가는 후세의 몫이 아닐까요.
김문홍 최 선생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생의 버팀목이 되어 준 좌우명이 있다면 후배 작가들에게 한 번 들려주십시오.
최영희 작품은 바로 그 사람이다!
김문홍 몸이 편찮으신 데에도 오랜 시간 동안 대담해 응해 주시어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얼굴은 자주 못 보지만 앞으로 작품이라도 자주 많이 접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빨리 쾌차하시어 예전처럼 저희들과 아웅다웅 부딪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끝으로 대담을 접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최영희 부산 아동문학인협회는 항상 내 마음의 집입니다. 그리고 부산아동문학인협회 회원들은 늘 내 마음의 식구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행복합니다.
【작품 및 수상 연보】
1975년《새교실》, 〈낙엽〉으로《교육자료》동시 천료 1977년 시조〈연〉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1978년 동화〈봄을 파는 가게〉로《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1986년 동화집《난장이 마을》(두루마리방) 출간 1988년 동화집《움직이는 보석》(정원출판사) 출간 1989년 동화집《움직이는 보석》으로 부산아동문학상 수상 1997년 동화집《꿈꾸는 책》(꿈동산) 출간 1998년 동화집《꿈꾸는 책》으로 한국아동문학상 수상 2001년 동화집《행복한 그네》(21문학과 문화) 출간 2002년 동화집《행복한 그네》로 이주홍아동문학상 수상 2004년 동화집《교실을 지키는 허수아비》(아동문예사) 출간 2004년〜2005년 이주홍문학재단 사무처장 역임 2005년 동화집《봄을 파는 가게》(한국 헤밍웨이) 출간 2006년 국제신문신춘문예 동화부문 심사위원 역임. 동화집《교실을 지키는 허수아 비》로 제12 부산문학상 수상 2007년 동화집《넌 누굴 닮았니?》(해성출판사) 출간 2007년 〜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 동아대학교 문예창작과 외래교수 2009년 동화집《빨간 우체통의 비밀》(해성출판사), 동화집《너무나도 다정한 점순 씨》(아리샘주 니어) 출간 |
<동화작가 최영희 선생을 위로하러 찾아갔다가 오히려 대담자가 더 큰 위안으로 힐링을 받았다.>
<이번 동화작가 최영희 선생님의 인터뷰 때에는 후배 동화작가 양경화, 한아 선생님의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의 뜻을 전합니다. 다음 3월 인터뷰 대상자자는 동화작가 솔마 김상남 선생님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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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최영희 선생님, 반갑습니다.
연초, 손수자 회장님과 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는 짧은 만남이 아쉬웠는데 이렇게 근황을 듣게되니 무척 반갑고 고맙습니다.
김문홍 선생님, 양경화 한아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담을 통해, 최영희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게 되어 참 좋습니다. 최영희 선생님 근황을 접하니 많이 반갑습니다,. 어서 건강을 되찾으셔야 합니다. 꼭 그렇게 되길 빕니다!! 김문홍 선생님의 수고로 부산아동문학응 좀더 넓고 깊게 살펴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대담을 도우신 양경화, 한 아 샘도 수고 했어요!
선생님 늘 건강하셨으면 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김문홍 선생님 양경화 선생님 한아 선생님 수고 많이 하셨고 고맙습니다.
김박사님, 부산아동문학인 맥을 잇는 훌륭한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다음은 소로마 선생님의 작품 세계에 대해 조명하신다고 하니 기대하겠습니다. 최영희 선생님, 늘 찡합니다. 가슴 한 켠이.
최영희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김 박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