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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크 케이블(William Clark Gable)
생년월일 : 1901. 2. 01 ~ 1960. 11. 16
신 장 : 185cm
국 적 : 미국 오하이오화
데 뷔 : 1934년 어느날 밤에 생긴일
출생지 : 미국 오하이오
수상경력: 제 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 주연상
21살에 무작정 집을 뛰쳐나와 극단을 전전하다 신문사, 전화 회사 등에서 잡역부로 일하기도 했다.그러면서도 무대를 향한
꿈을 접지 않았던 클라크 게이블은 조세핀 딜런을 만나 철저한 연기 수업을 쌓았고 라이오넬 배리모어와 같은 무대에 서며
무대를 향한 꿈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서른의 나이에 그의 배우 생명은 끝날 위기를 맞았었다. 영화사의 간부진들이 그를 스타의 자질이 없는 인물로 간주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브로드웨이 연극무대로 진출했고, 1928년에
그러자 헐리우드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34년 아카데미-남우주연상 수상작인 <어느날 밤에 생긴 일> 이전에 이미 그는 조안 크로포드나 그레타 가르보와 공연하면서
로맨틱한 스타로서의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지만, 이 작품으로 그의 위치는 확고한 것이 되었다. 다음 해에는 명작
<바운티호의 반란(Mutiny On The Bounty)>에서 부함장 플레쳐 역으로 또한번의 명연을 펼쳐서 다시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은 못했다.
제작자 데이빗 O 셀즈닉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역을 결정할 때에는, 그를 남주인공 레트 버틀러 역으로 하라는 팬들의
열화같은 요청에 못이겨 그를 전속시키고 있었던 MGM 영화사에 수익금의 절반을 주는 조건으로 그를 빌려와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역할을 완벽하게 해냄으로써 다시 후보에 올라 관록을 과시했으나, 수상은 하지 못했다. 남성적인 야성미와
로맨틱한 분위기를 함께 갖춘 그는, 여성팬 못지않게 남성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던 드문 배우였다. 그에게는 작품의 운도 따라서
많은 명감독들이 그를 캐스팅했고 헐리우드의 유명 여배우는 공연해보지 않은 상대가 거의 없었다.
그의 사생활은 비극적이었다. 첫 두번의 결혼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에의 그리움으로 연상의 여인들과 했으며,
세번째 당대 최고인기의 코메디 여배우 캐롤 롬바드(Carole Lombard)와의 결혼은 가정이라는 것의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에
그녀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함으로써 끝이 났다. 4,5번째의 결혼이 전부 캐롤과 비슷한 여자를 찾았던 것이고보면,
그에게 그 상처는 너무나 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그 슬픔을 잊기위해 공군에 자원입대했고, 편한 근무를 마다하고
독일 상공에 직접 출격하기도 했다.
전쟁 후의 작품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서 헐리우드의 상업주의로 인해서 그 수준이 떨어지지만, 에바 가드너, 그레이스 켈리와
공연한 죤 포드 감독의 <모감보(Mogambo)>와 제인 러셀과 공연한 라올 월슈 감독의 서부영화 <거인(The Tall Men)>은
그중 명작으로 꼽힌다. 마지막 작품은 마릴린 몬로,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공연한 1961년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로
촬영 완료 몇주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는 공연한 3명의 명배우 모두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가 죽은후 5번째 아내 케이 스프렉클스 는 그의 유일한 후손인 아들을 낳았다. 명성과 인기에 어울리지 않게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헐리우드의 진정한 제왕 이었다.
빅터 프레밍 감독의 유명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자다>를 본 여성 팬이면 클라크 게이블의 이름과 얼굴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클라크 게이블을 이해하는 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빅스타 게이블의 특유한 개성만큼은 십분 파악할 수 있는 기회였다. 게리쿠퍼와 같은 미남 배우와
정통적인 수법의 영화 방식이 대중을 이루던 헐리우등의 전성 시대에 유독 게이블만은 미남도 아니고 오소독스한 분위기도
아닌 독특한 개성으로 슈퍼스타의 확고한 위치르 누렸다.
다른 미남 배우들의 단순한 관념적 연기에 비해 게이블은 보다 복합적이고 피부적인 리얼리티를 체취처럼 풍겼는데
아마 그 클라크 게이블의 전통르 계승한 배우가 챨스브론슨이라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느 유형을 설정하는 데 대과가 없을 것
같다. 친구로서라면 다소 능글맞고 연인으로서라면 불길 같은 야성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만약 남편이었다면 전지전능한
기둥이라도 되었음직한 남성적 상징들을 강하게 갖춘 값진 배우로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1901년 2월 1일 오하이오주 카데쓰에서 석유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윌리암 아락 게이블이었다.
그의 모친은 몸이 약해서 게이블을 낳은 지 7개월만에 세상를 떠났기 때문에 결국 새엄마 제니이 양육을 받으며 자랐다.
게이블이 배우로서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방랑생활을 하던 어느 날 시골에 있는 극장에서 뮤지칼의 연극을
구경하고 난 다음부터였다. 그는 곧 그 극장에 심부름하는 아이로 취직했다. 그리고 열심히 무대를 들락거리며
미래의 스타가 될 꿈을, 실로 막연하기만한 꿈을 키웠다. 그러나 배가 고프기는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백화점의 점원,
신문사 보급부원, 전화설치공 등 어려가지 일들을 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시골을 순회하는 작은 극단에
입단을 하였다. 이 극단에서 만난 14세 연상의 죠세핀 대론이라는연기 지도 선생과 사랑에 빠져 연기와 사랑 두 가지를
다 배웠다. 죠세핀 데론에 싫증이 난 게이블은 뉴욕으로 자리를 옮겨, <메카니칼>이라는 연글에 대역으로 출연하였는데.
여기서 뉴욕 사교계의 귀부인 리어 랜험 여사 눈에 들어 그녀의 후원을 크게 받아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진출하여
연극의 주연으로 맡았으며 영화 단역도 자주 맡게 되었다. MGM 영화사가 미래의 톱스타 클라크 게이블을 발굴한 것이
바로 여기서였다. 세계 굴지의 대회사인 MGM은 이 능글맞은 바람둥이 사내한테 큰 도박을 했다.
계약 첫해에 바로 여섯 개의 작품에 게이블을 주연으로 썼던 것이다. 이 무렵 그가 맡은 배역은 주로 갱이나 악역이었지만
어느 영화에서건 게이블이 독특한 개성은 뚜렷이 살아 헐리우드에 그 이름을 뿌리박기 시작했다. 그리고 잘 팔렸다.
소년 시저부터 고생를 해 온 그의 강인한 정신력은 어느 배역에든지 철저하게 달라붙어 충실한 연기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게이블을 프랑크 카프라 감독이 <어느날 밤에 생긴 일>이라는 영화에 기용, 신문기자역을 주었다.
영화에서 그는 사회 밑바닥의 모든 그늘과 그림자들을 몬과 표정으로 잘 재현시킨 공로로 영화인의 최고 영예인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았다.
불우한 어린 시절과 갱스타에의 진출
클라크 게이블이 헐리우드의 갱이라 불리면서도, 죽을 때까지 30여년간 헐리우드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불우했던 어린시절에서 영향받은 바가 많다. 생후 7개월간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그 뒤 고등학교를 야간으로
다닌 그는 황량한 가정에서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와 친구와 둘이서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철도 연변에 기다리고 있다가 달리는 화물열차에 뛰어올라 열차가 가는 대로 여행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마을 근처에 이르면 열차에서 뛰어내려 그 마을에서 일할 장소를 찾곤했다.
이런 생활 속에서 몇년째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1923년 클라크는 로키산맥의 중간을 달리는 열차속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는데. 그 때가 가장 쓸쓸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그의 일행 중에는 오래곤으로 가는 남자 둘이 함께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 풍성한 찰면조
구이대신에 콩 통조림과 한 개피씩의 담배로 크리스마스 디너를 떼웠다. "그 때의 크리스마스 디너가 지금 헐리우드의
호화한 레스토랑의 그것보다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클라크는 이렇게 말하면서 콩을 나누어 먹고 일행이 건네주는
담배를 피우면 흔들리는 화차에 앉아 로키산맥위에 비치는 겨울의 달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정처없이 배회하면 타이어 공장의 일도 하고, 목재 인부 등을 하다가 우연히 뮤직 홀에서 무대를 보게
되면서부터 스타에의 꿈이 싹트기 시작했다. 클라크가 처음 MGM에서 출연한 영화 중의 배역은 거의가 갱이나
악역이어서 그로서는 불만이 많았으나, 어떻게 보면 그의 변화무쌍한 어린 시절의 방랑 생활이야말로
그가 맡은 역을 더욱 어울리게 플러스시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헐리우드의 갱' 이라 부르는 것은 단순힌
저널리스트들이 붙여 준 그의 애칭일 뿐이다.
다섯번이나 결혼한 케이블
헐리우드의 남우들 중에서 클라크만큼 결혼을 많이 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는 주로 연상의 여인과 사랑했는데,
이는 일종의 변칙적인 사랑으로서, 그가 어려서 방랑과 변천속에서 살아온 고독한 생활이 자연히 이러한 포용되는
사랑을 갈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첫사랑> 그가 속해 있던 극단의 인기 있는 미인 여유로,
이름은 프랑스 드루프라. 게이블은 금방 사랑하게 되어, 극단은 깨어지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게이블이 돈이 없다는 이유로 헤어졌다. <제2의 여성> 포틀랜드에 새로 결성된 극단에서 연출을 맡고
있던 옛 브로드웨이의 주연 여우로 이름은 조세핀 딜론. 게이블보다 14살이나 연상의 여인으로 그의 연기 지도를
철저히 했으면 그런 가운데 두사람은 열렬히 사랑했다. <제3의 여성> 게이블이 브로드웨이에 있을 당시,
텍사스의 휴스턴에 순례공연을 갔다가 만난 리어 랭험부인. 사교계에서 인기있는 부잣집 유한마담으로
게이블을 물심양면으로 도와, 연극 <더 라스트 마일>에 스펜서 트레시가 주연을 맡게 되어 있는 것을,
그녀가 수단을 써서 게이블로 교체시킬 정도였다. 게이블보다 17세나 연상이었으나, 1930년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새로운 연인들> 1935년 게이블이 주연한 <전함 바우티호의 반란>이 성공하자, 그이 새로운 연인들의 이름이
헐리우드에 파다하게 나돌게 되었다. 이를테면, 캐롤 롬바드, 존 크로포드, 로제타 영 등 그 이름이 한 다스나 되었다.
그 무렵부터 리어 부인과의 사랑이 식어가기 시작하여 1939년에 이혼했다. <제4의 여성> 1949년 왕년의 대스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의 전 부인이었던 실러 아실레와 결혼했다. 사교적이고 그림과 스포츠에 능했으나,
아내로선 실격이었다. 결국 1952년에 이혼했다. <미망인이 되 여성> 1955년 7월 7일 게이블은
다섯번째로 케이 윌리암즈 스프레클즈와 결혼했다. 클라크의 생애 중 가장 노말하고 평화와 행복이 깃든
가정생활을 영위했고 아들 존 클라크을 낳기도 했다.
주요 출연 작품
1924년 금단의 낙원(Forbidden Paradise)
1925년 선도자(Teh Palemakers), 메리 위도우(The Merry Widow), 플라스틱 에이지
1926년 북극성(North Star)
1931년 참극의 사막(The Painted Desert), 가장쉬운 방법(The Easiest Way), 암흑가의 춤(Dance, Fools, Dance),
비밀 6(The Secret Six), 무관의제왕(The Finger Points), 웃는 죄인(Laughing Sinners), 자유의 혼(A Free Soul),
밤의 간호원(Night Nurse), 남성의 피(Sporting Blood), 수잔 레녹스(Susan Lenox), 신기루의 여자(Possessed),
태평양 폭격대(Hell Divers), 지옥의 서커스(Polly of the Circus), 빨간 먼지(Red Dust), 이상한 간주곡(Strange Interlude), 마음의 푸른하늘(No Man of Her Own), 화이트 시스터(The white Sister)
1933년 봄의 불놀이(Hold Your Man), 야간비행(Night FlightP, 댄싱 레디(Dancing Lady)
1934년 어느 날 밤에 생긴 일(It Happend One Night), 백의의 기사(Men in White), 사나이의 세계(Manhattan Melodrama), 나의 나이너(Chained), 결혼 십분 전(Forsaking all Others)
1935년 어느날 반의 특종(After Office Hours), 야성의 부름(The Call of the Wild), 지나해(China Seas),
전함 바운티호의 반란(Mutiny on the Bounty)
1936년 아내와 여비서(Wife us, Secretary),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스타와 선수(Cain and Mabel)
1937년 사랑의 만가(Parnell), 사라토가(Saratoga)
1938년 테스트 파일롯(Test Pilot), 지구를 달리는 사나이(Too Hot To Handle)
1939년 바보의 낙원(Idiot's Delight),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1940년 기묘한 화물(Strage Cargo), 붐타운(Boom Town), 둥지 X(Comrade X)
1941년 봄베이에서 만남(They met in Bomday), 무법가(Honky Tonk)
1942년 어디선가 당신을 만나리(Somewhere I'll Find You)
1945년 모험(Adventure)
1947년 선전업자(The Hucksters)
1948년 귀향(Homecoming), 결단명령(Commond Decision)
1949년 아무하고나 놀다(Any Number Can Play)
1950년 시(市)에로의 열쇠(Key to the City), 스피이드 왕(To Please a Lady)
1951년 미주리 횡단(Across the Wide Missouri), 캘러웨이 그길을 가다(Kallawy
that Way)
1951년 영광의 별이 지다(Lone Star)
1953년 나를 가게 말아주(Never Let Me Go), 모감보(Mogambo)
1954년 반역자(Betrayd)
1955년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나이(Soldier of Fortune), 용감한 사나이들(The Tall Men)
1956년 왕과 네 여왕(The Kong and Foru Queens)
1957년 남부이 반역자(Band of Angels)
1958년 깊이 조용히 잠항하다(Run Silent Run Deep), 선생의 귀염둥이(Teacher's Pet)
1959년 나는 면직자다(But Not For Me)
1960년 나폴리 만(It Started in Naples)
1961년 야생마의 여인(The Misfite)
클라크 게이블의 수입
1954년 3월 3일 게이블과 MGM과의 계약을 일차 결산하는 기회에, 그는 재계약에 응하지 않고 메트로를 떠나버렸다.
그와 같이 미련없이 메트로를 떠나 버리는 배우도 많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 무렵 그의 샐러리는
주급 7천 5백달러였고 그는 프리엿다. 우리나라의 일류배우하고는 비교도 안되는 액수이다..
인기 절정인 그를 매트로 측에서도 떠나지 말라고 만류했다고, 그로선 만일 일이 없어지면 수입이 전무해서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일은 계속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중에서 좋은 걸 고르고 싶어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메트로를 떠난 이유는 회사측이 그에서 '부친역'을 출연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창 혈기 왕성한 그가 늙은이 역을 해서 세계의 팬들에 대한 이미지를 흐려 놓는 것을 꺼렸던 것이다. 당시 한 영화잡지는,
'메트로가 그(게이블)의 작품에서 벌어들인 돈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포함하여 1억달러에 달할 것이다.
그러니까 메트로는 그에게 종신 은급을 지불해도 좋은 입장이다. 그런데 거기서 나오기까지는 그 역시 심사숙고를 했을
것이다.' 라고 게재한 바있다. 클라크 게이블은 20에이커의 넓은 대지에 캘리포니아풍의 방갈로식으로 지은
2층 저택에서 살았으며 2대의 고급승용차(콤포테이블 캐딜락과 콤포테이블 자가)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 재산은 대부분 국채와 주식에 투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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