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ame01.bmp
아울러 박창화에 대해 한마디 덧붙인다면, 그를 유가적 한학자 운운하여 간단히 치부하는 것은 속단이다. 그는 한성사범을 졸업하였고, 국어학자인 권덕규와 일찍부터 교분이 있었으며, 소설가 김팔봉에 따르면 그는 1910년대에 이미 국문 장편소설과 시를 짓는 등 빼어난 문학적 자질을 지녔다고
노태돈, 「필사본 화랑세기는 진본인가」, 한국사연구(1997) 에서.
어떤 글에 권덕규가 이병도의 절친한 술친구라는 분도 있군요.
박창화는 권덕규를 일찍부터 알고 지내고, 권덕규는 이병도의 절친한 술친구라...
박창화의 손자되시는 분은 박창화 선생이 생전에 이병도를 우리 역사 교육을 망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고 증언하면서 이병도의 제자들에 대해 실망감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박창화 선생이 이병도를 잘 알고 지냈음은 분명히 드러나는 부분이고, 이병도가 박창화와 안면이 없었을까? 여러 정황상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만 증언할 수 있는 분이 없고, 증언자가 남당 박창화의 유족으로 한정되어 객관적이지 못하다.
이병도 선생이 남당 선생의 필사본을 한 번만 보았더라도 우리가 만화책을 읽는 속도로 대강을 알아챌 것이다.
우리 같은 인간이야 몇 달을 지낸 후에야 대강을 알지만 --;
이병도 선생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인정하였다고 하였으나, 박창화 선생의 유족의 말이니 객관성이 없다.
나도 이번에 서강대학교 학술대회에 가서 이종욱 총장을 처음 봤다.
그런데 내가 이종욱 총장을 인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이렇다 할 책이나 논문도 없고 대학 전공도 무관하고
당시의 나의 사회적 위치가 의성군과도 약속이 없었고
감히 용기가 없어 나서지 못하고
이종욱 총장 주변을 서성거리며
누군가가 나를 소개시켜 주기를 바랬지만
용기없는 나에겐 끝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
학술대회 말미에 본인이 5분정도 상당히 긴 시간동안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였으니,
학술대회 시작부터 저녁식사시간까지 남아있던 총장님이 관심을 가졌을 것은 분명한 것이다.
사회자가 은근히 나를 염두한 발언이 있었지만, 이종욱 총장님은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지, 주변인을 통해 나를 물어보는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이 말은 꺼내는 이유는 이종욱 총장님과 내가 직접적으로 말을 건네지는 않았지만 이병도 선생은 주변관계를 통하여 서로에 대해 의식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긁적여 보았다.
권덕규 (한국 국어학자) [權悳奎]
1890(고종 27) 경기 김포~1950.
호는 애류(崖溜). 1913년 휘문의숙(徽文義熟)을 졸업하고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한글을 연구했다. 1919년 3·1운동 때 장지연·이인 등과 함께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그뒤 휘문·중동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 주시경의 뒤를 잇는 학자들의 한 사람으로 1921년 12월 조선어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했다.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참여했고, 1932년 12월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원안을 작성했다. 〈한글〉지에 〈정음(正音) 이전의 조선글〉을 발표한 것을 비롯, 많은 신문과 잡지에 여러 논문을 발표했다. 1944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함흥감옥에서 복역했고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나왔다. 그의 저서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는 국어의 음운·문자·고어·이언(俚言)·어원·향가·횡서(橫書)의 편리 등에 대해 논하고, 여러 이론의 소개와 자신의 의견을 담은 국어교습서이다. 그밖의 저서로 조선유기(朝鮮留記), 을지문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