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끝 아득히 먼 곳 - 해남도
오송 송경호
남중국 바다에 떠있는 외딴섬 하이난다오(海南島). 섬 남쪽 끝에 자리한 항구도시 산야(三亞)는 3월인데도 벌써 햇볕이 따가웠다. 호텔정문이 해변과 마주하고 있어 앞마당 나가듯 가벼운 차림으로 바닷가로 나갔다. 모래사장을 따라 멀리까지 야자수가 줄지어 서있고, 찰랑이는 파도가 하얀 모래톱을 도닥거리고 있었다. 철이 일러 아직 해수욕객이 없는 한적한 해변에 소녀가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모래를 만지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소녀는 눈이 크고 맑았으며 목덜미의 선이 길고 아름다워 사슴같이 예뻤다. 그녀는 하이난다오 원주민 여(黎)족으로 그들의 먼 조상은 사슴이라고 한다.
아주 먼 옛날, 한 젊은 청년이 사슴 한 마리를 쫓고 있었다. 산 넘고 물 건너 며칠을 쫓기어 달아나던 사슴은 바닷가 절벽 끝에 이르렀다. 앞에는 망망대해, 더 도망갈 수 없는 사슴은 머리를 돌려 뒤따라오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사슴의 눈빛은 처연했다. 처연하고 절망어린 사슴의 눈빛과 청년의 눈빛이 마주쳤다. 영혼이 통하였을까, 청년은 화살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사슴은 예쁜 소녀로 변하여 그에게 다가가 둘은 결혼하여 아들딸 낳고 잘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사슴이 머리를 돌려 바라보았다는 바닷가 절벽은 산야에서 한 마장 거리에 있는데 그곳에 10미터 높이의 커다란 사슴 조각상, ‘녹회두(鹿回頭)’가 서있었다. 바닷가 절벽 끝에 서서 고개를 뒤로 돌려 먼데를 바라보고 있는 녹회두는 하이난다오의 애환을 상징하는 표상일지 모른다.
산야에서 부겐베리아 꽃길을 따라 한참 내려간 곳에 산줄기 하나가 슬며시 바다로 빠져들면서 바닷가에 여러 개의 바위덩어리를 남겨놓았다. 그 중에 맵시가 반듯하고 큼직한 바위 하나에 ‘천애(天涯)’란 두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천애, 하늘 끝 아득히 먼 곳이란 뜻이 아닌가. 먼 곳은 두렵고 버림받은 곳이며, 또한 평화롭고 새로운 희망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북방 한중(漢中)에서 내려다본 하이난다오는 천하에서 가장 멀고 험한 곳이었다. 그래서 황제의 미움을 받은 사람들은 가족과 헤어져 그곳으로 가야만했고, 또 전란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새 삶을 찾아 하이난다오로 갔다.
바닷가에 절규하듯 우뚝 솟은 바위에 새겨진 천애란 두 글자를 보면서 당나라 천재 시인 왕발(王勃, 650~676)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별을 노래한 천고의 절창인 그의 시는 시 속의 ‘천애’란 두 글자로 해서 시인의 운명적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海內存知己(해내존지기)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 있다면
天涯若比隣(천애약비인) 하늘 저 끝도 이웃과 같으리니
無爲在岐路(무위재기로) 이 갈림길에 서서 헤어질 제에
兒女共霑巾(아녀공점건) 아녀자처럼 눈물로 수건을 적시지 말게나.
<送杜少府之任蜀州(송두소부지임촉주), 촉으로 부임하는 두소부를 보내며> 중에서
시인은 자기가 저지른 죄에 연루되어 하이난다오로 유배를 간 아버지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 스물여덟 아까운 나이에 바다에 빠져죽고 말았다. 세상에 아버지보다 자기를 더 알아주는 이가 또 어디 있을까? 아버지를 만나 용서를 빌고, 그를 위로하려 했건만 하이난다오는 너무 멀어 죽어서 차가운 바다물결을 타고 아버지 곁으로 갔다. 시인은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 있다면, 하늘 저 끝도 이웃과 같으리라” 했는데,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기가 하늘 끝 가기보다 더 어렵단 말인가?
아무리 멀어도 중요한 때에는 찾아가는 것일까? 1887년 봄, 해남도 동북쪽 구루위엔(古路園) 마을에 한 젊은이가 찾아갔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정담을 나누며 며칠을 지내다가 떠났다. 그가 중국 현대사의 전설인 송씨 세 자매(송애령, 송경령, 송미령)의 아버지인 송요여(宋耀如)였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홉 살에 미국인에 입양되어 보스톤에 살다가 상하이에서 인쇄업으로 부자가 되었는데 결혼을 앞두고 고향을 다녀간 것이다. 그의 조상은 남송시대에 전란을 피하여 샨시성(陝西省)에서 해남도로 이주한 객가(客家)였다. 대륙을 떠나 천 년이 지난 후 그들의 후손은 다시 대륙으로 돌아가 실질적인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던 것이다.
구루위엔 마을에는 송경령의 기념관과 소상(塑像)이 세워져있고, 번듯한 사합원(四合院)집에 ‘송경령 조거(宋慶齡祖居)’, 곧 송경령의 조상이 살던 집이란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송씨 6남매의 조상이 살던 집’이라 하는 것이 옳을 텐데 송경령의 이름만 쓰여 있었다. 이념이 다르면 가족에도 끼지 못하는 것인지. 그리고 송경령이 그곳에 간 적이 없고 또한 조상들이 사합원에서 살 만큼 여유가 있은 것도 아닐 텐데 그렇게 큰 규모의 기념관과 집을 세운 것은 그녀가 중화인민공화국의 명예주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구루위엔에서 돌아오는 길은 흙먼지가 푸석이는 해변도로였다. 작은 어촌을 지나면서 마침 점심때라 끼니를 때울 곳을 찾는데 바다 건너 작은 섬을 가리킨다. 작은 목선을 타고 갔더니 섬 주변 바다 위에 어시장이 서있고 선상식당이 성황이었다. 바다 가운데의 그물망이 곧 수족관이었고 거기에는 거북이랑 바다의 온갖 고기가 식도락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끼 같은 큰칼로 듬성듬성 모양새 없이 잘라진 생선이 식탁 위에 수북이 놓였다. 요리는 단순했다. 냄비에 물을 끓이고 끓는 물에 야채와 생선을 넣어 익혀 그냥 양념장에 찍어 먹는 것이었다. 가장 원초적인 요리가 최고의 진미였다. 맛의 요체는 양념장에 있었다. 양념장을 조금 얻어 와서 훗날 집에서 선상식당의 흉내를 내어 요리를 하였는데 맛이 그때의 그 맛이 아니었다. 맛의 정기는 그 정기가 자라난 곳을 떠나면 없어지는 것인가 보다.
하늘 끝 아득히 먼, 더 나아갈 수 없는 곳은 돌아오는 반환점이다. 하이난다오 끄트머리 바닷가 절벽에 서있는 ‘녹회두’는 고개를 뒤로 돌리고 먼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절망의 끝은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라고 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