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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
중요민속문화재 제16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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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가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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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 |
1984년 1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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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1길 51(해저리 48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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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준공연도 169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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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 |
202.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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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자 |
김시원(金始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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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김시원(金始源) |
건물 |
건립시기 |
규모 및 평면 |
면적(㎡) |
가구 |
지붕 | |
01 |
안 채 |
1695 |
5×4칸, ‘⊓’자형 |
87.97 |
3량가, 장여수장 |
서산각, 와구토 |
02 |
사랑채 |
1850 |
4×4칸, ‘⊣ ’자형 |
67.45 |
5량가, 직절익공 |
팔작-맞배, 와구토 |
03 |
문간채 |
1994년 중건 |
4×1칸, ‘−’자형 |
39.64 |
3량가, 장여수장 |
맞배, 막새 |
04 |
화장실 |
2000년대 초 |
1×1칸, ‘−’자형 |
7.20 |
3량가, 장여수장 |
맞배, 와구토 |
제2장 봉화 해저 만회고택
1. 연혁
1) 봉화 해저 만회고택의 연혁
그러나 의성김씨 만회고택을 가장 처음에 적극적으로 이용한 사람은 팔오헌 종계에서 갈라져 나온 김경한(金景漢, 1687~1759)부터라고 하겠다. 김경한은 자가 사장(士章)인데, 통덕랑 벼슬이 주어졌으며, 배위(配位)는 완산최씨이고, 후 배위는 완산이씨이다. 김경한은 팔오헌 김성구의 손자이고, 김여건의 2남이다.
이 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 김건수가 살았으며 현재는 김시원(金始源)이 소유ㆍ관리하고 있다. 김건수(1790~1854)는 김경한의 4대손으로, 오늘날 해저마을의 이 오래된 집이 의성김씨 만회고택이라는 이름을 갖게 한 사람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공립(公立), 호는 만회헌(晩悔軒)이다. 아버지는 호군(護軍) 재인(在仁)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종해(宗海)의 딸이다. 가학을 이어받았다. 1830년(순조 30)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2년 뒤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고, 1834년 명릉별검(明陵別檢)에 제수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2월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에 임명되었고, 이 때 왕명을 받들어 칙사(勅使)를 영접하였다.
그 뒤 사간원정언ㆍ사헌부지평ㆍ홍문관수찬ㆍ장악원판사ㆍ현풍현감 등을 지냈다. 현풍현감에 재직하면서 아울러 창녕ㆍ청도ㆍ양산ㆍ영산의 4군을 다스릴 때, 밀양포(密陽浦)에 수송해 온 세미(稅米)를 둘러싸고 밀양의 관리들이 농간을 부리자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여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847년(헌종 13)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고, 홍문관응교ㆍ김해부사ㆍ승정원우부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한때 경연에서 임금에게 정치의 요체와 중농정책ㆍ교육의 진흥 등에 관해 상주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만회헌문집』이 있다.
사랑채인 명월루(明月樓)는 만회가 건립하였는데 1850년 (철종 1)에 대규모 수리가 있었다고 한다. 만회고택의 명월루는 특히나 소백산 태백산하의 청풍으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시영을 읊고 학문을 닦은 곳이었다 명월루에서만 약 1,000편 이상의 시가 쓰여졌다고 한다. 안채 앞의 중문간채는 한 때 기울어져서 1981년 임시로 철거하였다가 다시 복원하였다.
의성김씨 만회고택은 사랑채에 걸린 택호이긴 하나 사랑채에 속한 이름이 아니라 이 집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명월루’ 현판은 사랑채의 마루방에 게시되어 있다. 명월루는 해저마을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곽종석 계열 유림 독립운동의 구심점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이었다. 김창숙은 해저마을 사람들을 독립운동 대열에 동참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또는 해저마을 사람들의 유형ㆍ무형의 지원을 받기 위해 해저마을에 들어와 활동하기도 하였다. 김창숙은 해저마을에 왔을 때 명월루에서 거처하였다. 그러므로 의성김씨 만회고택의 명월루는 해저 독립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명월루는 3.1운동 직후 유림들이 김창숙을 중심으로 이곳에 모여 파리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제출한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작성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또한 1925년 유림단(儒林團) 독립운동 자금모금 당시 영남북부 지방에서 이 집에 모여 의논하였다.
2. 입지 및 배치
1) 마을 연혁 및 입지
해저리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에 속해 있다. 봉화읍의 서쪽, 봉화에서 영주 나가는 2차선 도로의 봉화 쪽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해저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분지는 동북 남서 방향으로 길게 찢어져 있다. 분지의 한 끝에는 봉화읍이 자리 잡고 있으며, 다른 한 끝에는 해저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해저마을에서 봉화읍은 동북 방향으로 물러나 있다.
해저마을 앞으로는 2차선 도로와 영주 태백 사이의 철길이 종으로 가로지르고 있고, 그 너머로 멀찍이 물러나서 고만고만한 산들이 횡으로 늘어서 있다. 해저마을의 북쪽은 해발 587m의 응방산(鷹坊山)이 버티고 서 있다. 그리 높은 산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해저 마을의 북방을 옹위하고 있는 주산인 셈이다. 그러나 해저마을에서는 응방산의 600여m 남짓한 높이도 실감할 수 없다. 응방산은 해저마을에서 북쪽으로 멀리 물러나 있고, 응방산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들이 나지막이 한참을 흘러내려 해저마을을 품고 있는 산자락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응방산 정상은 해저마을에서는 볼 수조차 없는 것이다. 해저마을 사람들은 응방산을 매봉산이라고 한다. 매는 응의 한자 의미로부터 온 것이고, 봉은 방의 음이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해저마을은 그 응방산, 또는 매봉(방)산의 발치에서 흘러내린 나직한 산줄기의 그 끝에서 남면하고 있는 제법 큰 마을이다. 해저마을에 서서 보면 앞의 도로와 철로 넘어 펼쳐져 있는 벌은 호평들이다. 호평들의 서쪽으로는 학정봉이 막아선다. 영주 나가는 길은 그 발치를 휘돌아 숨은 듯이 뻗어나간다. 앞쪽 멀리 일선을 이루고 있는 산줄기 속에서 가장 높은 것은 조금 서쪽으로 치우진 지점을 장악하고 있는데, 호골산이라고 불린다. 서쪽은 넓게 열려 있어 봉화읍이 그 끝을 차지하고 있다.
봉화와 해저 사이의 북쪽 산줄기는 해저마을의 서쪽 부분에서 나뉘어 있다. 그 사이의 골짜기 안은 개터밭골 또는 개따밭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해저(海底)는 바라미ㆍ바래미의 한자 이름으로 신라시대에는 파라미(波羅尾)라고 불렸다. 의성김씨 개암공파 해저문중이 펴낸『해저(海底)』라는 소책자에는 “일설에는 ‘파라밋’이라 하여 논보다 내가 깊어서 물을 파라로 퍼 올렸기에 그 파라가 있는 밑에 위치한다고 해서 파라밋이란 음이 평음화 되어 바라미가 되었다는 속설도 있다.”라고 적혀 있다.
해저마을의 중앙에는 팔오헌 선생이 강학하던 학록서당이 자리한다. 그 왼쪽에 도로와 마주보는 쪽을 아랫마을, 오른쪽을 윗마을이라 부른다. 아랫마을에는 남호구택(南湖舊宅)과 영규헌(映奎軒), 개암고택(開巖古宅) 팔오헌고택 참판댁 해와고택 김건영 가옥 단사정과 학록서당 소강고택등이 있다. 남호구택은 일제 때 남호 김뢰식(南湖 金賚植)이 살던 곳이다. 윗마을에는 조선 순조 때의 문신인 만회 김건수 선생이 살았던 만회고택이 있다. 바래미마을은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주택이 5곳이며 영조이후 약 200년간 17대과와 63진사를 배출하여 동시대 기록상으로 영남최고를 기록한다.
만회고택이 속한 해저 바래미 마을은 봉화의 태백산 인물밸트에서 춘(춘양)전(법전)유(유곡 닭실)해(해저 바래미)내에서 영남에서 대과벼슬로 10위권에서 4군데나 포진하고 있으며 태백산 인물 밸트의 발원지라 불리울 만하다
태백산의 청량산과 문수산등의 좋은 기운이 이를 태동시킨 듯하다
또한 바래미 마을은 나라가 평온할 때는 옳바른 다스림(치도)과 대쪽 같은 선비정신으로 죽음을 불사한 상소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서는 전가문이 4세대에 걸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는는 마을이며
만회고택가 또한 바래미의 일원으로 심산의 혈연생가로 진림과 호림 심산 김창숙 만창 김홍기 경능 창백 교림 만기 정진등이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됩니다
2) 배치 및 공간 구성
가)만회고택 문화재적 의미
만회고택은 해저의 지역명칭처럼 물이 성하며 지반이 낮은 곳에 위치하여 멀리서보면 배한척이 떠있는 형상으로 지어진
집이며 명월루는 배가 정박하는 선착장 형태를 만들어 놓았다고한다
또한 만회고택은 조선중기 고택의 형태인 ㅁ 자형태에서 후기들어서 사랑채가 발달하면서 사랑채를 새로이 지음으로서
조선중기와 후기로 가면서 건축의 변화를 살필 수 있을 뿐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건축양식이 일고와 이고라면 만회고택은 유림의
유교의 서열에 따른 6고(6계단)로 만들어진 균형미 넘치는 고택임
나)태백산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여름에도 선선함이 느껴지는 자연친화적이며, 종이 학을 접었다 폈다한 듯한 용마루 곡선미와 춘양목(적송)으로 만들어지며 200-300년 세월이 만들어낸 농익은 아름다움 뒷산의 수백년된 나무들이 집안에 들어선 듯한 별도 정원이 필요없는 구성등을 볼 수 있겠다
의성김씨 만회고택은 마을의 동측 깊숙한 곳에 숲이 우거진 뒷동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건물을 앉혔다. 동북측 모서리가 튀어나온 장방형의 대지에 외곽으로 담장을 두르고 건물을 배치하였다. 건물은 크게 안채, 좌우의 연결채, 중문간채를 중심으로 한 본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었다. 본채는 이 지역의 일반적인 ‘ㅁ’자집 구조로 안채를 중심으로 좌우로 연결채가 부속되고 전면에 문간채가 갖추어진 평면인 반면 사랑채는 규모가 상당히 큰 편으로 사랑채가 이 집의 중심 건물이 된다. 사랑채에는 3개의 현판이 있는데 의성김씨 만회고택ㆍ청풍헌ㆍ명월루가 그것이다. 청풍헌은 사랑채의 마루, 명월루는 사랑채의 누각을 부르는 이름이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문간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동쪽 끝이 중문이다. 통상의 경우보다 훨씬 큰 2쪽 판장문이 가설되어 있다. 중문으로 들어가면 안채 건물군이 나타난다. 안채는 정면 5칸으로 ‘⊓’ 형태의 평면을 하고 남향하여 배치되고 그 앞에 ‘一’자형의 중문간채가 놓여 튼‘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측되며 안방과 사랑방 뒤쪽에 각각 수납공간을 두고 있는 경북지방 ‘ㅁ’자집의 고식 평면배치법이 통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대청 뒷벽의 양개 널문이 미닫이로 되어 있는 점도 흔치않은 예이다.
외곽으로는 기와를 올린 판축담을 둘렀는데 별도의 대문은 마련되지 않았다. 사랑마당에는 조경수가 식재되어 있는데 근래에 심어진 것들이다. 안채의 서편에는 근래 지어진 화장실이 있으며 뒤편 북쪽과 동편에 텃밭이 있다.
1) 평면 구성
만회고택의 안채는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측되며 안방과 사랑방 뒤쪽에 각각 수납공간을 두고 있는 경북지방 ‘ㅁ’자 집의 고식 평면배치법이 통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2) 주간 및 용척
안채의 정면 주간은 서측 웃방부터 2,740㎜, 1,971㎜, 2,648㎜, 1,989㎜, 2,757㎜로 전장 12,105㎜이다. 대청은 측면 1칸으로 주간은 평균 3,639㎜이다. 우익사는 바깥마당에서 보아 좌측 건넌방부터 2,439㎜, 2,749㎜, 2,764㎜, 3,625㎜로 전장 11,577㎜이다. 좌익사는 바깥마당에서 보아 좌측 도장방부터 3,653㎜, 2,766㎜, 2,757㎜, 2,416㎜로 전장 11,592㎜이다.
좌ㆍ우익사의 주간이 서로 마주보면서 대칭을 이루고 있으나 실의 구획은 벽체를 달리하면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간실측치를 기준으로 만회고택 안채의 영조척을 살펴보면 전후좌우 4면의 주간의 전장을 더한 값 47,400㎜를 완척(完尺) 156尺으로 나눈 값인 303.85㎜/尺이 영조척으로 추정된다. 익사의 주간은 9尺, 8尺으로 설정되었으며 대청의 단면은 12尺으로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청 3칸의 주간은 전장이 6,608㎜로 22尺 정도로 추정되지만 각 주간은 완척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조척을 기준으로 정칸 8.72尺, 협칸 6.64尺 정도로 추정되는데 익사의 주간이 정확히 완척으로 구성된 것과 비교하면 의외의 결과를 보여주는데 향후 좀 더 깊이 있는 조사ㆍ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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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성
안채의 대청은 3량가로 자연석 초석 위에 각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를 보아지, 장여, 도리, 대들보로 결구한 장여수장집을 이루고 있다. 대들보 위에 종도리대공을 세우고 종도리장여와 도리를 걸어 장연을 걸고 홑처마를 구성하였다.
좌ㆍ우의 익사는 안채 대청 양 측면 기둥에 덧대어 1칸씩 덧달아 낸 평면을 하고 있는데 대청과는 90°로 꺾여 배치되었다. 자연석 초석 위에 각기둥을 세운 후 기둥머리에 도리만 설치한 민도리집으로 대들보 위에 종도리 대공을 세운 3량가의 홑처마로 구성되었다.
(2) 축부
만회고택 안채의 기둥은 총 24본으로 각기둥이 사용되었다. 기둥의 크기는 기둥 하부를 기준으로 대청이 205㎜, 220㎜, 224㎜로 나타나며 길이는 3,432~3,522㎜이고 좌ㆍ우익사는 크기 188~229㎜, 길이 2,382~2,917㎜이다. 대청은 고주를 사용하였으며, 좌ㆍ우 익사는 기둥의 길이가 535㎜의 편차를 보이는데 이는 경사진 대지에 건물을 앉힌 결과이다. 대청 기둥은 모서리를 외사로 쇠시리를 넣어 장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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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성
안채의 대청은 3량가로 자연석 초석 위에 각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를 보아지, 장여, 도리, 대들보로 결구한 장여수장집을 이루고 있다. 대들보 위에 종도리대공을 세우고 종도리장여와 도리를 걸어 장연을 걸고 홑처마를 구성하였다.
좌ㆍ우의 익사는 안채 대청 양 측면 기둥에 덧대어 1칸씩 덧달아 낸 평면을 하고 있는데 대청과는 90°로 꺾여 배치되었다. 자연석 초석 위에 각기둥을 세운 후 기둥머리에 도리만 설치한 민도리집으로 대들보 위에 종도리 대공을 세운 3량가의 홑처마로 구성되었다.
(2) 축부
만회고택 안채의 기둥은 총 24본으로 각기둥이 사용되었다. 기둥의 크기는 기둥 하부를 기준으로 대청이 205㎜, 220㎜, 224㎜로 나타나며 길이는 3,432~3,522㎜이고 좌ㆍ우익사는 크기 188~229㎜, 길이 2,382~2,917㎜이다. 대청은 고주를 사용하였으며, 좌ㆍ우 익사는 기둥의 길이가 535㎜의 편차를 보이는데 이는 경사진 대지에 건물을 앉힌 결과이다. 대청 기둥은 모서리를 외사로 쇠시리를 넣어 장식하였다.
7) 수장
(1) 벽체
안채 대청 전면과 우익사의 부엌을 제외한 벽면에는 창호를 설치한 나머지 면에 벽체를 설치하였는데 회가 섞인 재사벽으로 마감되었다.
(2) 바닥, 마루
안채 대청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전후 기둥에 장귀틀을 걸고 도리방향으로 동귀틀을 걸었다. 대청의 전면에는 여모귀틀만 설치하였다. 귀틀의 크기는 장귀틀 180×135㎜ 정도, 동귀클 180×120㎜ 정도이며 청판의 두께는 60㎜ 정도이며 청판의 길이가 큰 편에 속한다.
안방 위쪽 웃방 역시 우물마루를 깐 마루방인데 하인방에 의지해 방 가운데 동귀틀 하나만 걸고 청판을 설치하였다. 온돌방에는 장판지 마감하였으며 부엌바닥은 강회다짐된 상태이다. 대청의 천장은 재사벽으로 마감한 연등천장이며 방에는 지반자로 마감하였다.
7) 수장
(1) 벽체
안채 대청 전면과 우익사의 부엌을 제외한 벽면에는 창호를 설치한 나머지 면에 벽체를 설치하였는데 회가 섞인 재사벽으로 마감되었다.
(2) 바닥, 마루
안채 대청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전후 기둥에 장귀틀을 걸고 도리방향으로 동귀틀을 걸었다. 대청의 전면에는 여모귀틀만 설치하였다. 귀틀의 크기는 장귀틀 180×135㎜ 정도, 동귀클 180×120㎜ 정도이며 청판의 두께는 60㎜ 정도이며 청판의 길이가 큰 편에 속한다.
안방 위쪽 웃방 역시 우물마루를 깐 마루방인데 하인방에 의지해 방 가운데 동귀틀 하나만 걸고 청판을 설치하였다. 온돌방에는 장판지 마감하였으며 부엌바닥은 강회다짐된 상태이다. 대청의 천장은 재사벽으로 마감한 연등천장이며 방에는 지반자로 마감하였다.
4. 사랑채
1) 평면 구성
사랑방 정면에는 만회고택(晩悔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나 낙관은 보이지 않는다. 중후한 필체로 힘차고 날카롭고 경쾌한 느낌이 풍기는 글씨이다. 대청에는 청풍헌(淸風軒)이라는 현판이 걸렸는데 힘차고 단정한 느낌을 풍긴다. 대청 뒷벽에는 백하(白下)라는 액자가 걸렸다. 누마루 사당방 앞에는 명월루(明月樓)라는 현판이 걸렸다. 임자초춘(壬子初春)이라는 작은 글씨 아래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의 인장이 뚜렷하다. 둔중한 힘이 느껴지는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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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간 및 용척
사랑채의 정면 주간은 좌로부터 2,445㎜, 2,732㎜, 2,405㎜, 2,739㎜로 전장 10,330㎜이다. 측면 주간은 동측 입면을 기준으로 좌로부터 2,733㎜, 1,496㎜, 3,035㎜, 2,794㎜로 전장 10,058㎜이다.
주간 실측치를 기준으로 만회고택 사랑채의 영조척을 살펴보면 정면과 우측면 주간의 전장을 더한 값 20,388㎜를 안채에 적용된 영조척인 303.85㎜/尺에 의해, 주간을 완척으로 설정하고 5尺, 8尺, 9尺, 10尺으로 대입한 후 전장 67尺으로 나누면 사랑채의 영조척은 304.30㎜/尺으로 안채보다 약 0.45㎜ 크게 나타나는데 이는 사랑채의 건물 변위에 따른 오차로 안채와 거의 동일한 값으로 볼 수 있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주열을 같이 하므로 주간에 적용된 영조척은 동일하게 적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3) 기단부
(1) 기단
만회고택의 터는 전면으로 약하게 경사진데다 사랑채가 가장 전면에 배치되어 높은 기단을 갖게 되었다. 몸채는 자연석 3~4단을 허튼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건립되었으며 누마루는 하부에 기단이 마련되지 않았다. 기단의 전면으로는 화단이 만들어졌으며 누마루와 대청마루 사이로 계단이 있어 사랑마당에서 사랑채로 출입하도록 하였다. 사랑채 동측 후면의 사당방과 감실방은 외벌대기단으로 되어 있다. 기단바닥은 강회다짐으로 마감되었다. 1990년 보수공사 도면에 의하면 현재와 같은 자연석 기단이 아닌 견치석기단으로 작도된 것을 볼 수 있다.
기단내밀기는 정면 980㎜, 좌측면 981㎜, 우측면 935㎜, 배면 1,050㎜이다. 경사진 대지에 조성되어 정면 기단의 높이는 1,140㎜ 정도이며 배면은 55㎜ 정도로 차이가 있다.
(2) 초석
사랑채의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기둥면을 그레질하여 초석 상부에 얹은 자연석 덤벙주초를 사용하였다. 전면 기둥을 원기둥으로 해서 집의 권위를 좀 올린 이유로 초석도 안채보다는 좀 더 정성들여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온돌방 앞의 초석은 등이 볼록한 것을 사용하였으며 누하주 초석은 상면이 반듯한 것을 사용하였다. 초석의 크기는 435~716㎜이며 기단상부에 노출된 초석의 높이는 53㎜~199㎜ 정도이다.
4) 가구(架構)
(1) 구성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기본 규모에 동측에서 남북으로 실을 확장하였는데 구조적으로는 5량가의 서측 3칸과 3량가의 동측 1칸이 직교하여 가구를 만들어낸 집이다.
서측 3칸의 5량가는 툇마루 하단은 누하주를 두고 하층 주열을 만들고 기둥머리에 멍에창방과 귀틀을 걸고 상층기둥을 세웠다. 전면 퇴칸과 누마루의 기둥은 원주이고 나머지 기둥은 각주로 처리되었다. 전면 평주는 기둥머리를 직절익공계의 공포로 장식하고 퇴보를 걸어 후면 내진평주와 결구하였다. 대들보는 내진평주와 후면 외진 기둥에 퇴보와 맞보로 결구된다.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받고 있으며 종보 상단에는 대공을 걸어 종도리를 받고 있다.
서측 3칸의 5량가와 직교하는 동측 3량가는 전후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대공을 세운 후 종도리를 설치한 일반적인 구조인데 누마루 부분은 직절익공계의 공포를 사용하였으며 측면 도리에서 대들보로 덕량(德樑)을 걸어 외기도리를 지지하고 있다.
3) 기단부
(1) 기단
만회고택의 터는 전면으로 약하게 경사진데다 사랑채가 가장 전면에 배치되어 높은 기단을 갖게 되었다. 몸채는 자연석 3~4단을 허튼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건립되었으며 누마루는 하부에 기단이 마련되지 않았다. 기단의 전면으로는 화단이 만들어졌으며 누마루와 대청마루 사이로 계단이 있어 사랑마당에서 사랑채로 출입하도록 하였다. 사랑채 동측 후면의 사당방과 감실방은 외벌대기단으로 되어 있다. 기단바닥은 강회다짐으로 마감되었다. 1990년 보수공사 도면에 의하면 현재와 같은 자연석 기단이 아닌 견치석기단으로 작도된 것을 볼 수 있다.
기단내밀기는 정면 980㎜, 좌측면 981㎜, 우측면 935㎜, 배면 1,050㎜이다. 경사진 대지에 조성되어 정면 기단의 높이는 1,140㎜ 정도이며 배면은 55㎜ 정도로 차이가 있다.
(2) 초석
사랑채의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기둥면을 그레질하여 초석 상부에 얹은 자연석 덤벙주초를 사용하였다. 전면 기둥을 원기둥으로 해서 집의 권위를 좀 올린 이유로 초석도 안채보다는 좀 더 정성들여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온돌방 앞의 초석은 등이 볼록한 것을 사용하였으며 누하주 초석은 상면이 반듯한 것을 사용하였다. 초석의 크기는 435~716㎜이며 기단상부에 노출된 초석의 높이는 53㎜~199㎜ 정도이다.
4) 가구(架構)
(1) 구성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기본 규모에 동측에서 남북으로 실을 확장하였는데 구조적으로는 5량가의 서측 3칸과 3량가의 동측 1칸이 직교하여 가구를 만들어낸 집이다.
서측 3칸의 5량가는 툇마루 하단은 누하주를 두고 하층 주열을 만들고 기둥머리에 멍에창방과 귀틀을 걸고 상층기둥을 세웠다. 전면 퇴칸과 누마루의 기둥은 원주이고 나머지 기둥은 각주로 처리되었다. 전면 평주는 기둥머리를 직절익공계의 공포로 장식하고 퇴보를 걸어 후면 내진평주와 결구하였다. 대들보는 내진평주와 후면 외진 기둥에 퇴보와 맞보로 결구된다.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받고 있으며 종보 상단에는 대공을 걸어 종도리를 받고 있다.
서측 3칸의 5량가와 직교하는 동측 3량가는 전후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대공을 세운 후 종도리를 설치한 일반적인 구조인데 누마루 부분은 직절익공계의 공포를 사용하였으며 측면 도리에서 대들보로 덕량(德樑)을 걸어 외기도리를 지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