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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정월 그믐,
나는 군인트럭 조수석에 앉어 이십리길 되는 용문산 조계골이라는 동네에 닿아 아버지를 따라서 차에서 내렸다.
바위가 드문드문 앉혀진 사이 틈으로 밭고랑이 이루어진 언 땅에서 정월 한낮에 햇살을 받아 생기를 돋우며 올라오는 밀밭에 첫 산골 풍경으로 내 눈에 들어온 조계골 생활은 시작됐다.
아버지와 나는 이곳 용문산 조계골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가지고 할아버지의 묶은 전답 2,000평과 개간지 산 7,5000평에 달하는 농지를 개간하러 왔다. 아버지의 중년 말기의 계획된 삶에 밥을 해드리기 위하여 맏딸인 내가 한가족에서 분가되어 새로운 낯선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차에서 내린 이삿짐 (초가삼간을 덮을수 있는 이엉 30통 농사를 짓기 위한 거름으로 계분 7가마를 도로 큰길옆 공지에 하차하고 가제도구,양은솔,이불,쌀)등등을 가지고 조계골 정선생님 건너방 웃방으로 이사가 되었다.
정선생님께서 아버지에게 나누신 인사말씀은 "박주사님 큰 뜻을 가지시고 이곳에 오셨는데 이 산골 생활에 고생을 어떻게 다 하실지,건투를 빕니다." 아버지께서 "예,수구초심으로 왔습니다."였다.
정선생님 부인되시는 주인 아주머니께서 이삿짐을 정돈시켜 주시고 생활하는 법을 한두가지 설명해주셨다.
물은 주인집 물통을 빌려서 뒷 개울에서 길어 올려다 먹어야되고 굵은돌 3개를 건너방 아궁이 앞에 주워다 놓고 밥솥을 얹어 놓은게 생활준비의 전부였다.
이렇게 시작된 첫째날 밤이었다.
웃방이라 그런지 무척 추웠고 뒷 계곡에 물소리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에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피난 생활같은 낯선 분위기에 모든 불편한 조건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게 하였다.
16세 어린 나에게는 그때의 심경을 무어라 적어야될지 소설의 한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었다.
두번째 날이었다. 아침밥을 한다고 했는데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윤달이 든해,임춘절기. 쌀쌀한 추운날씨에 돌위에 솥을 덩그러니 올려놓고 하는 두식구의 밥은 밑에는 타고 위에는 생쌀로 선밥이 되었는데,주인 아주머니가 퍼주시는 우거지국으로 대강 아침을 먹고 아버지는 나를 집에 두고 지게에다 어제 내려놓은 연장짐 낫과 톱을 챙기시고 개간지 81번지 우리산으로 올라가셨다.
세번째 날, 나는 낯선 빈방에서 혼자 있기가 뭐해서 밖으로 나와 개울계곡을 구경하는데 이름모를 풀들이 양지쪽 바위 돌틈사이에 예쁘게 머리를 들며 올라오는 풀을 한 웅큼 흙속에서 후벼 뜯어가지고 집으로 와 주인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며늘취 묵나물이라고 했다. 나는 보자기를 가지고 그곳에 혼자 갔다.
생전 처음 뜯어보는 나물, 최고 이른 봄 양지쪽 돌 틈사이로 제일 먼저 올라오는 탐스런 새싹을 뜯고 또 뜯고 시간가는줄 모르고 한 보따리 해가지고 집으로 왔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어휴,세상에"했다. 하얀 얼굴을 해가지고 처음 산골에 들어온 열댓살 아가씨치고는 "으아"하고 극성맞아 보였을것이다.
해가 지니까 품안을 파고드는 봄바람이 추워서 주인 아주머니 저녁하시는 부엌으로 들어가 아궁이 앞에 불을 쬐었다.
정선생님은 학교를 설립하시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형편은 매우 빈곤했으나 그분네들에게는 여유로움을 풍기는 덕이 있었고 아랫말 교회를 다니는 분이라 하였다.아궁이 앞에서 시골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아버지와 나를 격려하는 말씀을 하시고 화로불을 담아서 우리방에 놔주셨다. 나는 그 불에 밥두그릇을 냄비에 해놓고,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해가 져서 컴컴해져도 아버지는 산에서 내려오시지 않았다.
나는 기다리다 못해 밖에 큰 길로 나가 우리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내려오시는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아버지가 올라가신 어둑어둑한 정주목산을 향하여 "아버지"하고 불렀다. 정주목 + 땀봉 바위산옆 골짜기에 부딪쳐오는 메아리가 "아버지"하고 울렸다.
나는 걱정되는 마음으로 다시 크게 "아버지"하고 부르는데 두번째 메아리 다음에 "그래.. 간다."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안도감을 돌리며 이렇게 조계골 생활 세번째 날이 지나갔다.
나흘째 되는날, 오늘은 나도 아버지를 쫒아 산으로 함께 올라갔다. 아버지는 말뚝을 박고 새끼줄을 치시며 초가삼간 집을 앉힐 좌향과 계획된 일을 어린 나에게 설명하셨다. 옆에는 이틀동안 비어내린 통나무 기둥감과 섯가래감 나무들이 누워 있었다.
"아버지,나 뭐할까요?" 글쎄..순간 나는 남자들이나 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도울것을 결심했다.
용문집 생활에서도 아버지의 힘듬을 늘 안쓰러워했던 나에게 허허들판 이 산중에서 이 엄청난 계획에 일을 시작하는 아버지를 보고만 있을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기다리신듯이 소나무를 의지하여 섯가래둘을 묶어세워 나무껍질을 벗길수 있는 작업틀을 만드시고 일감에 시범을 보이셨다.
목수인 아버지는 깍고 짜르고 재목을 다듬는 일을 하셨고 나는 생통나무 기둥 섯가래 껍질 벗기는 일부터 시작하여 보조역이 아닌 중역으로 아버지의 일손을 함께 해 드렸다. 이러한 일을 계속하다가 4,5,6,10여일이 지난 날 나는 어린 동생들과 엄마가 있는 용문집에 내려가야만했다. 내용은 아버지의 심부름...
용문집에 3년생되는 송아지를 용문산으로 올려오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으론 금년엔 직접 소를 거둘수가 없겠고 다른 사람에게 소를 빌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계골 김00 씨댁에 소를 빌려주기로 하여 김씨 아줌마와 함께 용문집에 가는것이었다.
20리길을 걸어서 용문집에 도착했다.
군용차로 이사시켜준 사랑방 유대위(중대장)사모님과 엄마 동생들에게 보인 내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10여일전 용문집에서의 희고 고운 내 모습은 찾아 볼수가 없었고 거센 산골 바람속에 더운물도 없이 생활한 나의 얼굴과 손은 보기 안쓰러울만큼 터지고 옷은 소나무 송진에 완전 두메산골 촌색시로 변신한 모습이었다.
엄마는 동행한 김씨아줌마에게 간단한 소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딸인 나는 내일 보내겠다는 인사말을 하고 외양간에서 고삐를 풀러 그 아줌마에게 소를 인도하였다.
어린 동생들앞에 앉은 엄마가 해다준 저녁 밥상이었다.
전에 용문집생활에서 미쳐 느껴보지 못했던 이 좋은 여건의 집과 생활의 편안함...
용문산 조계골 10여일에 산골생활은 너무나 옛생활의 부유함을 깨닫게 하며 소중하게 하였다. 엄마도 아버지의 빈자리 어린 다섯 동생들과의 10여일에 생활은 "아차"싶으셨던 모양이었다.
작은 오빠(박석웅)는 정월달에 군에 입대했고 큰 오빠(박수찬)는 그동안 엄마와의 갈등속에 말 안듣는 아들로 집안에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다.
1965년 정월에 이루어진 가족분산의 현실은 엄마에게 그 큰집에서 허전함을 감당하기 힘들정도로 어린 동생들만 데리고 큰일났구나 싶으셨을 것이다. 엄마의 후회와 부부간의 기로에 선 갈등, 딸인 나를 하룻밤을 재워 보내겠다는 엄마의 생각은 이미 진행된 아버지의 용문산 개간사업을 포기하시게 하여 전과 같은 용문집 생활로 되돌아오게하는 방법을 나에게 쇠뇌적으로 주입시켜 이 일을 행하게하는 엄마의 명령과 부탁이었다. 그러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닌듯 싶었다. 오늘의 후회할 일이 이지경에 이르기까지는 엄마의 모순된 외가집 영력의 내조로 비롯된 영향의 현실이었다.
이미 진행된 개간사업은 아버지의 굳은 의지와 계획으로 선택된 진로였는데 엄마의 때늦은 판단, 아버지의 내딛은 현실속에 이 불길한 부모님 인생의 항해의 소용돌이는 나의 심기를 감당하기 어렵도록 짓눌렀다. 불가능에서 가능토록 만일에 안될경우, 앞으로의 닥칠 어린 동생들의 고생까지 모든 책음을 나에게 전가시키려는 가혹한 엄마의 설득방법까지 동원됐다.
식구대로 이 어려운 심리적 기로에 서게된 원인 제공은 엄마가 아닌가 싶었는데 어쨋든 나는 엄마 지시에 따르기로했다.
아버지만 포기하시도록만 만들면 전과 같은 용문집에서의 생활이 현실적으로 가족모두에게 백번 고생안하고 유리했으니까 아버지심기를 되돌려 전과 같은 용문집 생활로 현실에 이르도록 하는 막중한 책임을 결심하고 이른날 혼자 걸어서 용문산을 향했다.
20리길 2시간 반동안 혼자 걸으면서 활동사진처럼 아버지가 용문산에 계획을 세워 여기까지 오게된 동기가 내 머리속에서 지나갔다.
그동안 건축사업을 하시는 아버지가 돈을 벌어다 우리들이 앉은 안방에서 엄마앞에 내 놓을때,돈을 팽개치며 바가지 긁어대는 장면을 수없이 보았다. 그리고 외가집 처들며 그들의 농사지음과 산골생활을 우상화 해가며 아버지를 힘들도록 들볶고 내조했던 어머니의 모순된 발단이었는데, 그리고 아버지의 계획은 그냥 시골 농사나 마구잡이로 간단히 경작하려함도 아니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임야개간 신고 특별법까지 거쳐서 농지개발에 정부 보조금 지원절차까지 허가에 착수한 구체적으로 준비되고 진행된 일었다.
이러한 남편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다시 엄마의 꼭두각시가 되어주기를 원하는 엄마의 그 이기심리의 작업을 나를 통하여 이뤄내고자 하심인데 가슴이 답답한 쉬워보이지 않는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심했다.
엄마의 내조의 잘잘못을 떠나서 앗차 싶은 현실을 헤쳐나갈수 없는 무지한 고생보다는 할 수만 있으면 아버지맘을 되돌려 전과 같은 생활이 동생들과 우리 식구 모두에게 좋을것 같았다.
아버지가 용문에 안계신지 (시기적으로)정 이월이면 건축설계가 10여일. 그동안에 집을 짓기 위하여 건축설계를 내러 온 지역사람들이 수차례 다녀갔다한다. 이 부분역시 경제적인 생활의 막강한 현실 배경인데 또한 아버지가 아니면 안되는 지역에서의 인정받는 건축기술업자 공인의 입장이었다. 용문에 안계시는 아버지를 집을 짓기 위하여 찾아 왔다가 헛걸음 하고 돌아서는 건축주들...
이 현실의 모두가 엄마편을 들어 드리는 나의 판단이 되어버렸다. 굳게 결심하고 아버지 계신곳에 도착된것은 점심때였다. 아버지는 여전하셨다.
나 없는 하루 한나절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이 진행되었는지 현상황을 풀을래야 풀수 없는 이 무거움... 재목을 다듬는 아버지 옆 껍질 벗긴 통나무옆위에 털썩 앉았다. 돌변한 어두운 내 얼굴을 보시며 "잘 다녀왔니?" 한마디외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쌀쌀한 바람속에 어둑어둑한 시간이 돼서야 일손을 놓고 내려오신 아버지와 저녁이라고 먹고 안집에서 건네준 화로불 위에 손을 얹으며 본격적으로 아버지앞에 입을 열었다. 굳은 의지가 움직일것 같지 않은 면전에서 엄마가 시킨 몇몇가지의 방법을 동원했다.
그리고 엄마 혼자 기르실 다섯동생을 애절하게 걱정하면서, "아버지. 내러가요.." 담배를 피워 물으셨다. 그리고 말이 없으셨다.
나는 다시 또 반복된 설명으로 답을 받아 내려고 작정을 하고 졸랐다.
졸라도 졸라도 헛기침 두어번으로 침묵 일관하시는 아버지앞에 진퇴양난에 선 이 어려움은 나를 울음으로 폭발해버리게 했다.
만 삼일에 걸친 이 어린딸의 힘듦에 울음은 아버지를 대성통곡하게 하였고 주인집 식구들의 민망함도 생각할 여지없이 아버지가 나를 붙들고 우셨다. 울어도 얼마를 울어도 현실에 맞는 답은 찾지못했다.
이른날 아침, 정선생님과 아버지가 마주치는 인사말... 무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박선생님,수고하십시요" "예" 하고 단답으로 받는 인사속에 어젯밤 부녀간의 울음소리로 송구스러움을 끼쳤던 민구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이 내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없이 현장산으로 올라가셨다.
나는 몇시간 후 아버지 일하시는데 올라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용문집으로 돌아가라고 또 울고 졸랐다. 늘어진 어깨로 힘겹도록 재목을 다듬으시던 아버지가 보다못해 일손을 놓으시고,내 옆에 앉으셨다.
"선녀아, 너 혼자 내려가거라. 이러지말고.. 나는 못 내려간다. 하루 아침에 사고 팔은 물건도 아니고 심사숙고하여 수날동안 마음 다지고 후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계획 세워 여기까지 왔으니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남아일언 중천금이다" 하시며 결심에 흔들리지않는 극단적인 표현의 말씀을 하셨다.
이것으로 부부간에 나를 새중간에 두고 줄다리기한 엄마의 뜻은 끝났다.
내 나이 너무 어려서 부모님 내외의 갈등의 원인을 어디서부터인지 알 수 없었으며 두분의 뜻을 협상시킬 능력이 여기가 끝이다 싶었다. 아버지를 이 산중에 혼자두고 내려갈수가 없었기에 나는 아버지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13일째 되던 날, 삼일을 그토록 힘들었던것과는 달리 마음을 정하고 나니까 일손이 잡혔다. 아버지의 손발이 되어 이른 아침부터 어둡도록 일했다.
15일째 되는 날, 집안되시는 아저씨 두분을 모시고 가래로 비탈진 산을 깍아 터를 다듬고 지경을 다지고 주춧돌을 놓았다.
그 다음날은 기둥을 세워 붙들어 드리고 보를 올려 상량이 되고 섯가래를 올리기 까지는 아버지와 나하고의 작업이 가능했지만 새우를 받는 일(지붕에 흙을 얹는 일)은 세 분의 인력을 붙여 지붕을 완성시켰다.(이엉을 입혀)외를 엮고 흙을 발라 초벽,맞벽,새벽까지 그 다음 구들을 놓고 문을 달아 초가삼간 집이 완성되기까지 40일이 걸리는데 정말 정말 힘들었다.
이른 봄,꽃샘추위까지 겹처 지붕올린 흙도 땡땡 얼었고, 벽도 마르고 굳기전에 밤기온 영하로 내려가 얼어서 문제는 되었으나... 여하튼 집은 완성되었다. 도배 못하고 방 바닥은 용문에서 준비해오신 돗자리식 가마니를 깔았다.
아버지가 용문산에 오신지 40일만에 나하고 같이 걸어서 용문 엄마집에 갔다.
이발을 못한 아버지의 머리와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나 또한 같았고 엄마의 대함을 걱정스럽게 생각했는데 이미 운명으로 생각했던지 화는 내지 않으시고 서둘러 저녁밥을 지으시고 아버지는 오랜만에 이발을 하셨다.
용문집 엄마의 밥상은 너무 좋았다. 사랑방 군인가족 중대장 사모님이 들여준 생선과 격식 갖춘 밥상은 오래간만에 한 가족의 행복한 자리였다.
사랑방 내외분이 인사를 아버지께 해주셨고 그동안 못뵈인 가까운 주변분들과 외가 친척들이 아버지를 뵈러 인사차 오셨다..
어른들간의 주고 받는 얘기, 넷째 이모가 오셨는데 엄마를 타이르며 아버지편을 들어주셨고 이틀을 묵어 오는데 아버지의 노고를 치사하시며 잘되시기를 바란다는 나름대로 주변분들의 인사였다.
그 이른날 농사 지을 씨앗과 필요한 연장 모두를 더 챙기고 다시 용문산(합승차)편으로 올라오는데 배웅하는 동생들과 엄마를 두고 오는 마음이 너무너무 무거웠다.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용문산에서 올라온 다음 정선생님 집에서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가 됐다.
불을 때고, 밥을 하고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딸과 아버지가 사는 조계골 산 81번지 초가삼간 1가구의 생활이 새롭게 탄생됐다.
1968년도 겨울 "나는 과수원 꽃이 만발할 그 때를 기다리며" 라는 제목으로 1965년도 일년동안 있었던 개간사업 일기를 정리하며 어느 한 사람에게 보여준 일이 있었다.
1965년부터 1995년까지 그리고 2004년 30년에서40년을 놓고 역사하신 우리가족에 계보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와 나의 영혼을 영화롭게 하신 축복은 기독교 홍보용 종교 소설에 주인공으로 세우셨음을 깨달았다.
그 어느 인간과는 대화나 의논이 될수없는 나의 인생사의 깊은 경지속에서 현실을 초월한 에덴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에게는 영광이요 우리들에게는 영화로운 축복에 아름다운 글을 써 낼수 있는 글밭에 무대를 찾아낸 순간이었다.
용문산안에 조계골 최고의 아름다운 계곡과 경관을 소유한 천산의 요람속에 5년동안 나를 가두시고 여인이 아기를 잉태하듯, 아기가 형성될때 필요한 태교를 하듯 조상의 얼을 담아 나의 청년기의 혼신을 그 땅에 심어서 아버지의 영혼을 공존시킨 나의 인생사는 결국 믿음에 승리자로 오늘에 이 영화로운 축복에 주인공이라 하겠다.
나무를 베고 돌을 캐며 과일나무과 뽕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글에 바탕을 깔고 눈앞에 닥친 석양을 준비하기 위해 내 인생에 하얀 아름다운 영적인 집을 짓는 기초석을 놓으면서 그 옛날 조계골 땅을 처음 밟는 해토일 첫 발자욱부터 하나하나 기억을 짚으며 40년전으로 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낙엽속에 깊이 뭍힌 아름다운 추억과 돌 틈 속에 끼워둔 선친으로 부터 전수한 삶의 교훈들...
그 옛날 초가삼간을 둘러싼 자연의 무대는, 오늘도 경칩에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를 듣게하였고 입하, 소만을 거처서 울어대는 소쩍새 소리 청명 곡우...꽃을 보며 절기를 가늠한 모자리, 대낮처럼 밝았던 조계골 산야에서 일손이 모자라 파종에 시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밤에까지 고구마 싹을 심으러 산밭으로 아버지와 올라갔던 일...
팟배씨로 묘목을 만들고 좋은 나무의 씨눈을 따다 처서절기 (나무에 물기가 거두기전 시기)가 지나기전 접목시키던 과수생업의 원리, 이 모두가 나에겐 인생훈 일기로 적어지는데 왜 이토록 가슴이 뜨거운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와같이 이토록 지난일에 글감의 기억과 무대를 가지고 있는지...
내 인생 아름다운 정서의 무대 문학의 산실 조계골이다.
이 무대를 통하여 내 인생에 작가가 되시고 박씨계보의 절대적인 감독이 되셔서 16세 소녀의 개간 사업 과수농원에 일기장을 추억의 지상천국으로 안내 하신 하나님앞에 감사하면서...
2003년 3월
조계골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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