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시고기와 부활 ]
2001, 4, 구득영 목사
지난 주 기독교보에 가시고기에 대한 기사가 나서 나름대로 감히 몇 자 적어봅니다. 이 가시고기가 소설인 줄 알기 전에 모 방송국에서 제작한 드라마로 보았는데, 아마도 2부작으로 기억이 되는데,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특히, 자기의 아들을 생각하면서 행복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는 아버지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TV의 내용과 흐름이 소설과도 거의 같다고 여겨집니다. 암에 걸린 자식을 위해서 아버지가 헌신하는 모습은, 그리고 나중에 자기도 암에 걸렸음을 알지만 그 몸이라도 팔아서라도 자식을 고치고자 하는 아버지의 뜨거운 마음을 잘 말해주고 있는데, 자식을 가진 아버지라면 누구나 다 공감을 하는 내용인줄 압니다.
사실 이런 내용들은 누구나 다 한번쯤은 생각해보는 것이고, 가시고기의 그런 습생을 모티브로 삼아서 소설가로서 글을 쓴 것은 요즘같이 메마른 시대에 단비와도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너무 통속적이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진부한 내용처럼 보여도, 그러나 소설이라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여전히 주제로 삼고 있고, 그것은 결코 가벼운 것도 진부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 숨쉬고 있는 이 땅에서 두고두고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런 소설들은 나와야 되고, 또 나올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는 그것이 과연 십자가의 사랑과 어떤 연결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작가는 지난 기독교보의 기사를 보면, 작가 정신을 발휘해서 비록 십자가라는 단어는 숨기더라도 십자가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물론 십자가라는 말이 들어간다고 해서 무조건 십자가의 사랑이 되는 것도 아니고, 빠진다고 해서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만, 과연 이 소설에서 주제로 삼은 그런 아버지와 자식간의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을 말해줄 수 있는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생각 자체는 선하고 좋지만 과연 그것이 성경이 허락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어느 누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다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랑이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의 많은 설교에서도 그런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승화해서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런 사랑의 한계를 분명히 지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아들을 버리신 그 사랑에 전혀 이르지 못하는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려도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식이니까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라는 말은 거기에 자기의 모든 것이 다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자식이 아니고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선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말하는 부활이고 종교입니다. 물론 이방종교 말입니다. 자기 자식을 통해서 자기가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과 영혼불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주장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종교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종교란 것이 어디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있으면 종교는 항상 그 곁에 있는 것입니다. 종교적이지 않는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유교는 그렇게도 조상의 제사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까? 제사는 윤리적인 효의 실천이 아니고, 자식을 통한 부활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간들이 취할 수 있는 모습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능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은 그야말로 신이 되어보겠다는 환상에 젖어서 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확대시키면서 살아갑니다. 자식도 그런 연장선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못다 한 꿈을 자식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마치 온 천하만물이 자기 것처럼 여기면서 살아가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말이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유일한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이니까 말입니다.
지금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김우중 회장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업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입니까? 아무리 세계가 넓어도 다 나름대로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쳐들어가서 빼앗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을 전쟁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땅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이 세상의 정신을 고발하라고 말입니다. 세상과 하나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주위에서 이러한 자기와 어떤 관계가 없음에도, 자기 자식이 아니라 남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희생하고 희생되는 경우들을 가끔 봅니다. 얼마 전 일본 지하철역에서 죽은 대학생이 그렇고, 소방관들의 희생도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역시 십자가의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희생은 오직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만이 참된 희생이고,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희생은 아무리 믿어도 가슴만 아프고 눈물만 나지, 참된 영생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글을 마치면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이 글은 가시고기라는 소설을 비판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소설을 평가하려면 어느 정도 소설가의 위치에 있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다만, 젊은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 다른 길을 가고있지 않는지, 뭔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적어보았습니다. 물론 새롭다는 것은 자신의 각오를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새 것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말입니다.
"진희씨, 이런 말 알아? 사람은 말이야, … 그 아이를 세상에 남겨놓은 이상은, 죽어도 아주 죽는 게 아니래" - 가시고기 마지막 부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