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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생가 안내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 171
경상북도 기념물 제86호(1993년 2월 25일)
생가 입구 주차장에는
'새마을운동중흥'비가 새워져 있었다.
'새마을운둥' 상징 동상
생가 입구
생가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일대기 화보
학창시절 모습
구미보통학교 시절 사진
사진들이 낡아 새롭게 손질을 하였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가 입구
이 집은 대한민국
제 5대에서 9대까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1917~1979)가 태어나서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생가 내에는 안채 및 사랑채와 1979년에 설치한 추모관이 있다.
건립 당시 안채는 초가였으나 1964년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하였다.
박정희대통령은 고령박씨 29세손으로
그의 선조는 고령에서 성부로 이거하였다가
1916년 현 위치인 상모동으로 이사하였다.
생가 입구
생가 앞뜰
왼쪽 : 추모관 오른쪽 : 복원한 생가
추모관
추모관 내에 설치되어 있는 내외분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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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은 본관(本貫)이 고령(高靈)이며 직강공(直講公)의 15세손인 박성빈(朴成彬)공과 수원(水原) 백씨인 백남의(白南義) 여사의 다섯째 아들로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태어났다. 1945년 건군과 함께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국군의 주요 지휘관을 역임하고 1961년 5.16군사혁명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 1963년 제5대부터 1979년 제9대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을 역임하는 동안 조국의 근대화의 기수로서 오천년 이래의 가난을 물리치고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닦아 세계 속의 풍요한 한국으로 부각시켰으며 겨레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민족중흥을 이룩한 영도자로서 민족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1979년 10월 26일 서울에서 향년 61세로 서거하여 삼천칠백만 온 국민의 애도 속에 11월 3일 국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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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관 내에 설치되어 있는 사진들
대통령 영부인 陸英修 여사는
管城 陸氏 陸鐘寬 공과 慶州 李氏 李慶齡 여사의
둘째 딸로 1925년 11월 29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1950년 12월 대구에서 혼례를 올렸으며
1974년 8월 15일 서울에서 향년 49세로 순국,
8월 29일 국민장으로 대통령 묘 왼편에 쌍분으로 안장되었다.
농촌을 방문하여 농민들과 막걸리를나무는 모습.
군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1962년 여름쯤인 것 같다.
1974년 8월 29일
1974년 8월 15일 서거하신 육여사를 보내며
생가 모습
초가는 방 2칸, 부엌1, 디딜방아간, 마구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박대통령께서 태어났다.
과거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박대통령이 사용했던 방
원래 생가의 모습에 대한 기억은 다음과 같다.
메주 뜨는 냄새와 서까래가 보이는 천장에 파리똥이
새까맣게 앉은 황토 벽으로 된 방에는 신문지 한 장도 바르지 않았다.
장대 두 개로 시렁을 지르고 그 위에 세간을 차려 놓고 사는
전형적인 한국 농촌의 토방(土房) 속에서 태어났다.
(정재경 1992 {위인 박정희} 집문당 35쪽)
박대통량이 사용했던 책상, 책꽂이, 호롱불
결려있는 사진은
사범학교 재학시절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움푹하게 패인 대지에 동쪽만 제외하고 사방이 대나무와
탱자나무 숲으로 빙 둘러쳐진 곳이어서 담을 쌓을 필요가 거의 없다.
… 여기서 박성빈은 온 가족과 함께 황토 흙을 이겨서
흙벽돌을 만들고 안채와 사랑채인 두 초가를 지었다.
안채는 북향. 정면에 있는 언덕과 대나무
숲이 바람막이 역할을 하도록 방향을 잡은 것이다.
박정희가 쓴 [나의 소년 시절]에는
'이 집은 6·25동란 당시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였으나
6·25 때 파괴된 것을 사랑채만 옛 모습으로 복구하고 안채는 초가로
가건물을 백형이 지었다가 5·16 후 지금 있는 안채를 다시 건립하였다.
지금 있는 사랑채 큰 방은 내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고고의 소리를 내면서 태어난 산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원래의 안채는 一자 모양으로 부엌과 방 두개 사이로 마루방이 하나 있었다.
박정희가 태어난 사랑채에도 방이 둘이었다.
그의 산실인 큰방은 2×3m 크기로서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 사랑채 작은 방에는 정희가 상희 형에게서 물려받은
앉은뱅이 책상 하나가 지금도 놓여 있다.
가로 88cm, 세로 53cm 정도인데 서랍이 두개 달려 있다.
박정희가 태어난 사랑채에는 외양간과 함께 소여물을
끓이는 큰 가마솥이 걸렸던 부엌이 있다.
이 부엌의 한쪽 벽을 따라서 디딜방아가 놓여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우물이 있고 그 옆에 통시가 있다.
아버님이 사용했던 사랑방
지금 남아 있는 가구들을 가지고 추정하면
이 집안의 재산 목록은 장롱 하나, 놋쇠 화로 하나, 탈곡기 한대,
가마솥 몇 개, 밥상과 소반 몇 개, 숯불 다리미, 호롱불 등잔 서너개,
앉은뱅이 책상 하나, 식기와 옷가지들,
그리고 언문소설을 읽는데 썼던 백남의의 돋보기 하나,
가축으로는 닭이 대여섯 마리, 황소 한 마리,
박성빈 일가가 약목에서 이사 올 때 가져온 가구는
황소 한 마리의 등에 다 실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갑제 1998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권 조선일보사 336-338쪽)
1920년대 모친이 사용했던 옷장
안 마당에 설치되어 있는 추모 사진들
박정희(朴正熙)가 태어난 생가 옆으로
풀짐을 나르는 큰형 박동희(朴東熙)의 모습.
허리를 굽히고 있어 상대적으로 짐이 크게 보인다.
처마 밑에 주렁주렁 달린 가마니는 닭들이 알을 낳던 [닭집]이었다.
사진 우측에 살짝 보이는 방문이 박정희가 쓰던 공부방.
사립문 뒤로 보이는 초가지붕은 박정희의 둘째형 박무희(朴武熙)와
그의 장남 박재석(朴在錫)이 살던 집이다.
(조갑제 1998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권 347쪽)
생가 입구에 있는 식당 '보릿고개체험장'
보리개떡. 두부. 보리감주. 보리콩죽. 고구마 등을 1,000원에 팔고 있다.
한사람이 3,000원 정도되게 주문하면 옛 맛을 즐길 수 있다.
담벼락에는 수세미가 자라고 있고
표주박도 자라고
체송화도 곱게 피어 있어 편안함을 느끼고 나올 수 있었다.
▼아래 기사는 제가 직접 현장에서 취재를 하였으며 저는 현재 서울중앙뉴스 기자이며 경북취재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으며 모든 기사는 구글을 통하여 전세계 동시번역보도 되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서울중앙뉴스 경북취재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모든 기사는 구글을 통하여 전세계 동시번역보도됨을
알려드리며 아래기사는 제가 직접 현장취재 한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94회 탄신제 박근혜 (전)대표 구미 상모동 생가 방문 [현장취재] 동상제막과 함께 성대히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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