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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시집 '참선일지'
견고한 시정신과 형상화 돋보여
박 진 환 (문학박사․문학평론가)
1. 전제
유진시인의 함자 뒤에는 호칭이 따라붙는다. 시인이자 수필가, 수필가이자 화가, 화가이자 첼리스트 등이 그것이다. 시인과 수필가와 화가와 첼리스트가 이른바 유진 시인이 겸업하고 있는 업종들인 셈이다.
남들은 한 분야의 전문성을 지키고 또 개발하기 위하여 전전긍긍 하는데 유진 시인은 용케도 네 분야를 무리 없이 잘 유지하고 또 실현해 나가고 있다.
현대를 일컬어 겸업시대라고 하지만 누구나 다 겸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겸업을 , 그것도 네 분야를 함께 이끌어 간다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대단한 능력에 해당된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능력은 초인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참 부러운 일이다. 그것은 유진시인이 단순히 겸업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정받는 수준의 전문인이란 덤이다. 시, 수필, 그림, 음악 그 어느것 할 것없이 이미 프로로 인정받고 있는 분야이고 또 유진 시인이 이 분야를 그 하나도 소홀함이 없이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찍이 폴 바레리는 시와 음악은 교차한다고 피력한바 있고, 20C에 들어서면서 T.E.흄은 시는 회화라고 규정한바 있다. 시와 음악과 회화는 인접성의 차원을 맥락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언어는 의미구조와 함께 소리값을 지니고 있는 모든 소리를 고저장단이라는 점들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음악은 다름아닌 이 소리의 리듬을 조율해 내는 예술이다. 그 때문에 언어예술인 시도 언어가 소리값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발레리의 지적처럼 음악과 교차하든지, 맥락관계를 갖든지 음악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물론 이러한 음악성은 시에 있어서의 리듬으로 규정돼 왔고 또 즐겨 이런 리듬에 시를 의탁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다만 현대에 오면서 이러한 음악성으로서의 리듬이 아닌 긴장으로서의 리듬, 이른바 정조를 조율해 내는 능력으로서의 리듬이 아니라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결합시킴으로써 팽팽한 탄력으로 작용하는 파장음으로 리듬의 개념이 바뀌긴 했지만 어떻든 시느 리듬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음악과의 맥락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시와 회화와의 상관성도 빠뜨릴 수 없는 분야다. 그것은 20C에 들어서면서 시를 회화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시를 언어로 그린 그림이란 뜻이 되는데 왜 시가 회화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해명하기가 어렵지 않다.
시가 회화일 수밖에 없는 것은 시각화 시대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1차적 이유를 성립시킨다. 20C는 시각문명시대도 19C의 관념이나 정서, 정신처럼 내면적인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객관하는 그런 과학문명시대다. 도리없이 시대의 요청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정신과 관념따위를 객관의 상관물을 발견, 회화화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대시다.
유진 시인은 음악과 회화라는 두 입점점의 영역을 자신의 시에 이입내지 혼용할 수 있는 전문성을 지니고 있고, 이러한 전문성은 시의 조건의 일부가 되어 있는 음악성이나 회화성을 그 누구보다도 철저히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 된다.
달리 말하면 유진 시인의 시에 베어 있고 베어 스며 있는 음악성이나 회화성이 시인 스스로가 프로로 활동하고 있는 활동과 무관하다는 뜻이다. 이점에서 유진 시인은 그 어느 시인보다도 행복한 편에 서 있게 된다.
유진시인의 첫 시집 『참선일지』에는 5부에 나누어 총 78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그렇다고 분류한 5부가 시와 음악과 회화처럼 확연한 영역을 지니거나 불가분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듯 싶다. 그것은 제 3부 「참선일지」를 제하면 비슷비슷한 근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유진 시인의 시역을 다양성 속에서도 정제된 시적 코아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것을 요약하면 참선일지 시편과 기타 시편으로 분류해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참선일지」는 일종의 禪味랄까, 정신적 깊이에서 끌어 올렸거나 정신적 覺에서 깨닫고 체험한 유진 시인의 시에 있어서의 저신본질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여타 시편들에서는 전제에서 밝힌바 있는 음악성이나 회화성의 요소들이 짙게 깔리고 또 베어나고 있는데 이점 그의 겸업들과 부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쯤에서 유진 시인의 시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2. 禪味, 혹은 내면 의식의 풍경보
유진 시인의 시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제3부 「참선일지」다. 한 타이틀 아래 25편을 묶어 진열하고 있는데 타이틀에서 암시하듯이 유진 시인의 좌선을 통한 선도수행의 산물이란 점에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좌선은 고요히 앚아서 참선함을 의미하고 선도는 참선하는 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둘은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좌선과 선도가 不二인 것이다. 주어진 삶에서 체험해야 하는 또 생의 욕구가 충족하고자 하는 욕정으로부터 일탈, 조용한 정인 속에서 도를 수행함으로써 획득하고자 하고 또 진입하고자 하는 禪에의 접근에서 더러는 깨닫고, 더러는 체험하고 더러는 대오하는 정진의 것들을 시로 형상화 해 낸 「참선일지」는 그래서 유진 시인의 정신적 삶의 지향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몇 편의 시를 제시했을 때 이해를 도울 것으로 본다.
가) 순간과 영원은
처음도 끝도 없는데
나) 태어남으로 죽어야 하고
죽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생사의 연쇄고리
다) 있음도 없음도 아닌
있고 없음을 넘어선 것을
들어도 들리지 않고
듣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
듣고 듣지 않음을
넘어선 것인 것을
비우고 또 비우다
비우는 것조차 잊으려
面壁에 집착하며
빈만큼 채우는 것을
예시 가)는 「참선일지․21」의 첫연이고, 나)는 「참선일지․27」의 첫연, 그리고 다)는 「참선일지․22」의 전문이다. 예외없이 예시들이 지니고 잇는 본질은 불교의 一元論에서 알 수 았는 不二의 사상이다. ‘처음과 끝’이 ‘태어남과 죽음’이 그리고 ‘있음’과 ‘없음’이 각기 따로 따로가 아닌 하나라는 不二는 일종의 反常合道다. 과학적 진술쪽에서 보면 모순이나 깨닫는 자 쪽에서 보면 진리다. 결국 깨닫지 못한자에게는 모순이나 깨달은 자에게는 진리라는 뜻이니 유진 시인의 정신적 경지는 이미 깨달은 자에 도달해 있다는 지적이 성립된다.
문제는 이러한 覺에 있기 보다는 이러한 覺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정진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다음 시편들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가) 장마 비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쳐 말을 걸어도
실눈 뜬 반가부좌로
미동도 않은 채
날 선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내는 그리움
나) 세상 많고 많은 말
한 보따리 묶어다가
바닥 깊은 바다에 방생하고
맑은 바람 한 잎 물어다 뱉으니
말, 말,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지며
黙言의 귀함을 일깨워 주네
다) 높이 올라가야
더 멀리 보인다기에
숨가쁘게
날개 짓만 하다가
세월이 약이라기에
허송한
세월만 보내다가
깊이 내려 갈수록
더 높고 멀리 보이는 이치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
예시 가)는 「참선일지․13」의 전문이고, 나)는 「참선일지․15」의 전문, 그리고 다)는 「참선일지․17」의 전문이다. 예시 가)에서의 시행 ‘날선 가위로 싹둑싹둑 / 잘라내는 그리움’은 무엇일까? 추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성에의 그리움이건, 삶에 대한 님을 향한 혹은 상실해 버린 고향에의 그리움 등 얼마든지 그리움의 대상은 설정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그리움을 날선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낸다는데 있다. 보고싶어하는 정이나 사모의 정인 그리움은 속세의 정신지향으로 보면 간절한 그리고 정을 끈으로 이은 정서적 표출로서 끊지 못하는 인륜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脫俗의 경지에서 보면 부질없는 구속의 끈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때문에 구속의 고리를 끊지 않고서는 禪의 경지에 도달 할 수가 없게 된다. 예시는 바로 그러한 좌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같은 맥락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깨달은 자의 경지, 그것은 함묵의 경지다. 도는 말로 깨우치는 것이 아니고 말을 넘어선 곳에서 얻어내는 覺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이치를 좌선을 통해 획득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黙言의 귀함’이 바로 그것이다.
다)도 예외는 아니다. ‘깊이 내려 갈수록 / 더 높고 멀리 보이는 이치’도 따지고 보면 反常合道다. 상식에는 어긋나지만 도에서는 진리가 된다는 등식이다. 주지하다시피 시는 과학적 진술이 아닌 擬似陳述이다. 사실보다 새롭게 꾸며 사실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감동을 체험하게 해 준다는 뜻이다. 이 이치를 유진 시인은 터득한 것 같은데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고 깨닫는 것이 그것이다. 이쯤 좌선의 경지 들어서면 비로소 하나되는 세상을 꿈꾸게 되는 不二의 세계를 내다보게 된다.
삶 가운데 두 손 모아
코끝을 바라보는 시선
세상 모든 것이
마음에서 생긴다면
슬픔을 만나면 슬픔과 놀고
기쁨을 만나면 기쁨만큼 기뻐하는
티 없는 마음으로
초록을 칠하면 초록이 되어주고
빨강을 칠하면 빨강이 되어주는
순백의 도화지 같은 마음으로
나를 나 속에 가두는 분별 없이
나와 남 둘이 아닌
모두가 하나되는 세상을 꿈꾼다
예시는 「참선일지․35」의 전문이거니와 비로소 불교적 원리로서의 一元論인 不二가 아니라 스스로가 깨달아 도달하는 경지의 不二가 터득되게 된다. 예시는 이를 말해주고 있다고 본다. 1연에서의 좌선의 자세와 2연에서의 禪과 마음은 곧 하나라는 이치, 3연에서의 슬픔과 기쁨은 한마음으로 여과시키는 정신적 합일 그리고 4연에서의 ‘초록과 빨강’이 종연에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自他不二는 참선으로써만이 획득될수 있는 정신적 일치내지 마음의 합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참선일지」는 정신적 구도 내지는 좌선을 통해 禪道에 들어선 유진 시인의 시적 정신이랄까, 정신적 지양이랄까를 말해주는 그의 시에 잇어서의 정신본질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3. 리듬과 회화의 표현 본질
앞서 지적했듯이 유진 시인의 시에는 시인 스스로가 겸업하고 있는 음악과 회화적 요소를 드러내지 않게 바탕에 깔고 있다. 바탕에 깔고 있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흠성되었다는 표현이 더 나을 듯 싶기도 한 그의 시의 표현본질을 리듬화했다는 두 경로를 추적해 보기로 한다.
가) 두둥둥 둥둥 북소리 나는
서낭당 돌아서면
가을마다 얼쑤 얼쑤
살풀이 굿 한판
바람이 메기는
굿거리 장단 받아
얼쑤 얼쑤
중중모리 자진모리
신명나게 잦아들며
두메 산골 원혼들의
첩첩 억장 풀어 내리는
늙은 무당의 붉은 손바닥
나) 아이가 바이올린으로
왈츠를 U고 있다
영롱한 비눗방울처럼
퐁 퐁 퐁
경쾌한 삼박자로 떠 가는
봄의 소리
(중략)
골목 가득
퐁 퐁 퐁
봄이 터지는 소리
예시 가)는 「산단풍」점누이고 나)는 일부가 생략된 「봄의 왈츠」전문이다. 두편의 시중 하나는 가을을, 다른 하나는 봄을 소재로 하고 잇어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런 대조속의 합일이 있다면 두 편의 시가 공히 음악적 요소를 끌어들여 시적 리듬을 조율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시 가)는 시행에서 볼 수 있듯이 ‘두둥둥 둥둥 북소리’나 ‘얼쑤 얼쑤’ 그리고 ‘중모리 자진모리’ 등 우리 가락을 끌어들여 시의 리듬을 조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예시 나)는 가)의 우리적 장단과는 다른 바이얼린이라는 서구의 악기를 빌어 리드미칼한 왈츠의 선율로 시를 조율시키고 있다. 경쾌한 삼박자로 터지는 ‘퐁 퐁 퐁’ 봄이 터지는 소리가 ‘둥 둥 둥’ 북소리와는 사뭇 다른 리듬감을 환기시켜 주고 있는데 문제는 소리값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소리값을 자신의 시에 끌어들여 음악적 리듬을 조율해 내고 있다는 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율장치는 정조를 조율하는데 알맞은 이른바 고전적 리듬의 한계를 극복해 주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낡은 정조가 아닌 감각 상호간의 호소력으로 파장하는 그런 리듬에 시가 의탁되어야 고전적 리듬을 극복할 수 있게 되는데 유진 시의 겨우 이를 훌륭히 극복해 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다음 예시는 이를 극명히 해준 것으로 본다.
하늘과 땅의 공간에 가득했던
무더위로 부푼 땡볕
칼날 소나기에 찍혀
만삭의 배가 터져 버렸다
논가 창고 양철지붕에선
망치질소리인지 괭과리소리인지가
불협화음으로 악을 쓰고
순식간에 불어난 강으로
달아난 소나기를 뒤쫓듯
다리 난간엔
탐조등 같은 해가
흙탕물을 굽어 살피고 있다
예사는 「소나기」전문이다. 소나기를 날세운 칼날로 변용해 놓고 한낮의 땡볕으로 부풀어 오른 고무풍선같은 공간을 점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만삭의 배가 터져 버렸다’라고 의외의 사실로 꾸며내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2연에서는 양철지붕에 쏟아지는 소나기를 ‘망치질 소리’와 ‘괭과리소리’로 다시 변용 불협화음화 하고 있는데 이쯤되면 상식에는 어긋나는 모순이 범해지고 이 모순은 과학적 진술에 위배된다. 그 때문에 모순이 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정작 의사진술쪽에서 보면 신선한 감각을 자극하는 溫情的진술 구실을 하게 된다.
종ㅇ녀에서 ‘다리 난간엔 / 탐조등 같은 해’를 설정해 놓고 이 탐조등으로 하여금 소나기로 이 일어난 흙탕물을 굽어 살피게 하는 것도 사실 쪽에서 보면 순모순인 꾸며댄 일종의 모순인 셈이다.
이와같이 모순과 대립, 대립과 갈등을 유발시키면 그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끼어들게 된다. 여기에서 긴장을 끌고 당기는 탄력으로 작용하게 되고 이 탄력이 파장하는 리듬을 형성하게 하는데 이것이 현대시에서의 리듬이다. 유진 시인의 시가 여기 와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적 리듬은 현대시법으로 조율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리듬의 맞물린 팽팽한 긴장은 시의 변용을 통한 향상화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다음 시편들은 이를 극명히 해줄 것으로 본다.
가) 풀어도 풀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랑의 물레질
때로는
깊은 마음의 물을 긷는
두레박이다가
가슴과 가슴을 전율케 하는
코일로 감기다가
또 때로는
심술로 얽혀버리는
실타래
오늘도
물레를 돌리며
실을 감는다
나) 휘파람 한 소절로
훌훌
옷을 벗겨내는 바람
노을 건너간 강 언덕에
백발뿐인 갈대
흔들흔들 흔들어 보지만
벗을 것이 없다
이젠
노을의 고향을 아시는
내 아버지
이 아침에도 나무를 심으시는
아버지의 노을엔
어떤 무지개가 걸려 있을까
아버지의 고향엔 지금
어떤 계절이 머물러 있을까
예시 가)는 「그리움․둘」의 전문이고 나)는 「세월」의 전문이다. 그리움이나 세월은 기슴으로 느끼거나 감지할 뿐 그 형체가 없이 일고 흘러가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적이고도 정신적인 무형의 것에 형식의 옷을 입혀 새로운 사물이나 존재로 태어나게 한 것이 곧 다름아닌 시의 형상화이다. 시의 형상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비로소 시가 회화화했다는 다른 것으로 명명하기도 한다. 예시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움’리라는 정서를 그 속성이 비슷한 ‘사랑의 물레질’이라는 물레에 감아냄으로써 유형의 것으로 변용해 내고 있다. 그런가하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일고 잇는, 그리하여 가슴 가득히 고인 그리움을 ‘두레박’을 드리워 떠 올리거나 실실이 감겨 자장응로 감전하는 코일로 사물화 한 것은 다같이 변용을 통한 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예시 나)도 같은 맥락성을 갖는다. 세월을 하얗게 늙어버린 ‘갈대’를 빌어 재구성 한다든지, 늙은 아버지를 내세워 오랜 세월 읽게 한다든지 하는 것도 일종의 형상화다. 이와 같이 유진 시인은 내면적이고도 정신적이며 정서적인 것에 사물의 형상을 입혀 변용해 내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시에 잇어서의 회화화다. 다음 예시는 실제로 봄꽃이 지는 계절을 화선지에 옮겨 채색하는 회화 자체로 형상화를 제시해 주고 있다.
지는 꽃잎
붓끝으로 묻혀다
화선지에 옮겨 본다
겨우내 서둘렀던
봄의 경작
내 봄은
화선지에 꽃을 피운다
가지들 꽃 지고도
한창인 봄
액자 속에서
다시는지지 않는 꽃잎
시 「봄꽃이 지고」에서 볼 수 있듯이 지는 꽃잎을 화선지에 옮겼더니 그대로 꽃은 피우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꽃은 다시는 지지 않는 꽃잎으로 화면 속에 피어 있게 된다. 화자는 이 작업을 ‘겨우네 서둘렀던 / 봄의 경작’이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겨우네 봄을 기다리면서 피워보고 싶었던 꽃, 혹은 한편의 시를 시인은 그렇게 탄생시켰던 것으로 볼 수 있게 한다.
3, 결어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유진 시인의 시는 「참선일지」로 시의 본질을 여타시편으로 그 표현본질을 대표하고 있는데 정신과 표현이 적절히 조화되면서 형상미학을 탄생시켜 주고 있다는 지적으로 결론은 집약될 것으로 보인다.
첫댓글 선생님 글씨가 너무 어지러워서 일단 스크랩한 후 확대해서 보렵니다. ^^
저도 항목님처럼 읽기가 좀 힘들었어요. 눈을 찡그리며 다 읽기는 했지만...^^ 선생님의 첫 시집이라 애정이 각별하시겠어요. 시집 이름이 특히 마음에 드네요. 소개된 몇 편의 시도 훌륭하시구요. 선생님 시집을 사서 선생님의 시심에 풍덩 빠져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