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고령화와 함께 각광받는 것이 보청기다. 서울에서 60~70대 이상 노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다는 종로 탑골공원 일대. 탑골공원에서 종로3가까지 이어지는 도로변에는 보청기를 취급하는 점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한, 세기, 복음 등 국내 업체를 비롯해 외국계 지멘스와 오티콘, 스타키 보청기 등이 이 일대에 지점을 두고 있다.
지난 2월 21일 찾은 서울 종로3가의 한 점포에서는 ‘청능사(audiologist)’들이 손톱만 한 크기의 보청기를 만지고 있었다. 청능사는 청력을 평가하고 보청기 관련 업무를 하는 전문 직업인이다. 독일제 지멘스보청기를 취급하는 청능사 조한용씨는 “보청기를 구입할 때는 직접 수리가 되는지, 분실보험에는 들어 있는지 꼭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청 등에 따르면 국내 보청기 시장은 연간 10만대 규모로 추산된다. 2012년 현재 모두 34개 국내외 업체가 보청기 생산과 수입에 관여하고 있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상황”이란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인구 고령화가 점점 진행되면서 국내 보청기시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귀가 먹먹하다”고 호소하는 난청 환자들도 해마다 느는 추세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 2005년 27만명에 불과하던 난청 환자는 지난 2007년 30만명을 돌파해 2009년 38만명까지 늘었다. 해마다 2만명 이상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보건복지부에 정식 등록된 청각장애인도 27만여명으로,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래프 참조>
연 10만대 시장으로 추산
하지만 귀가 잘 안 들린다고 보청기를 누구나 쉽게 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손톱만 한 크기에 불과한 보청기의 쪽당 가격은 수백만원을 호가한다. 성능이나 디자인, 브랜드에 따라 90만원부터 600만원대까지 천차만별이다. 양쪽 귀에 모두 낄 경우 1000만원이 훌쩍 넘기도 한다. 보청기와 비슷한 크기의 반도체 D램 가격이 채 1달러(약 1100원)가 안 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10%가량(추정)의 분실률을 감안하면 자동차 한 대 값에 맞먹는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얘기다. 수백만원에 달하는 비싼 가격은 각종 신기술이 작은 보청기 안에 집약돼 있기 때문이다. 음성기술의 총아라고 불리는 보청기는 송화기, 증폭기, 수화기, 배터리로 구성된 전자장치다. 송화기에 들어온 소리를 전자신호로 바꾸고, 증폭기는 전자신호를 키운다. 수화기는 다시 전자신호를 음향신호로 바꿔 귓속으로 소리를 내뿜는 구조다.
대개 끼우는 위치에 따라 귓속 외이도 속에 쏙 집어넣는 고막형, 귓구멍에 튀어나오게 걸치는 귓속형, 귀 뒤로 고리처럼 거는 귀걸이형 등으로 나뉘는데, 필요한 소리를 키워준다는 기능은 동일하다. 또 음성을 증폭시키는 증폭기의 종류에 따라 아날로그형과 디지털형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요즘은 디지털형이 주종을 이룬다고 한다.
보청기는 난청 환자가 잘 못 듣는 고주파 소리를 저주파로 압축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동 중에 바람 소리나 주변의 잡음을 적절하게 제어하고 필요한 소리만 키우는 기술도 탑재된다. 귀지로 인해 오염되는 것도 막아야 하고, 이동 중 진동과 귓속의 온도와 축축한 습도에서도 균일한 성능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고 한다.
유럽·미국 업체가 주도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국내 보청기시장은 대개 맞춤형 보청기 위주로 형성돼 있다. “맞춤형 보청기의 비중이 전체의 70% 정도”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얘기다. 맞춤형 보청기는 귓속에 쏙 집어넣는 형태로 생겨 미관상 깔끔하다. 다만 사용자의 귓속 생김새를 본떠서 만들다보니 제작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적지않다. “자신의 귀에 맞는 보청기를 제작하는 데만 족히 3~4일은 걸린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얘기다.
또 착용감을 향상하기 위해 소재와 디자인에도 상당한 공이 든다. 더욱이 4채널, 8채널, 16채널과 같은 채널 수에 따라 가격이 올라간다. 세기보청기의 한 관계자는 “수십만원짜리 이어폰과 몇천원에 불과한 싸구려 이어폰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까다로운 기술로 인해 초(超) 고부가가치의 보청기시장은 유럽과 미국 업체들이 사실상 독식하고 있다. 전 세계 보청기시장도 유럽과 미국이 80% 이상을 차지한다. 지난 2010년 미국의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가 분석한 보청기시장 조사에 따르면 포낙보청기의 모기업인 스위스의 소노바그룹은 전 세계 보청기 시장의 약 29% 내외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포낙의 뒤를 윌리엄 데만트(오티콘·21%), 스타키(16%), 지멘스(15%), GN스토어노드(리사운드·11%)가 그 뒤를 따랐다.<그래프 참조>
국내 보청기시장도 포낙, 지멘스, 스타키, 오티콘, 와이덱스, 리사운드 등의 유럽과 미국 업체가 주도하고 있다. 자체 브랜드를 내걸고 보청기를 생산하는 국내 업체도 있지만, 이들 역시 핵심기술 대부분을 유럽 업체들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이경원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청각학과 교수는 “동양에서 보청기를 독자 기술로 생산하는 곳은 일본의 리오넷 정도”라며 “리오넷도 요즘 자국 시장 점유율이 40%까지 떨어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특히 포낙(스위스), 지멘스(독일), 오티콘(덴마크) 등 유럽계 회사들은 일찍부터 보청기시장을 석권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계공업이 태동한 유럽은 일찍부터 보청기가 발달했다. 독일제 지멘스보청기를 취급하는 한 관계자는 “지멘스가 독일에서 공장을 돌리면서 상당수 근로자들이 기계 소음으로 인한 난청을 호소했다”며 “자기네 공장에서 근로자들의 난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청기 개발에 나섰던 것이 지멘스 보청기의 시작”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업체들은 군침만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점점 급증하는 보청기 수요에 비해 국내 업체들은 군침만 흘리고 있다. 지난 2000년 고령화사회로 접어든 우리나라는 오는 2018년쯤 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다. 국산 보청기 업체로는 대한보청기, 세기보청기, 복음보청기 정도가 꼽힌다. 국내에서 보청기를 주목한 것도 1980년대 전후다. 대한보청기가 1977년, 세기보청기와 복음보청기가 1981년 창업했다. 산업혁명 때부터 보청기에 관심을 가진 유럽에 비해 수백 년 뒤처진 셈이다.
더욱이 보청기 사용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심했다. 청각장애인이나 끼는 물건이란 인식이었다. 상당수 고령자들은 노인성 난청을 앓음에도 불구하고 미관상 보청기 착용을 꺼렸다. 이에 보청기 사용이 자연스러운 유럽이나 미국을 기반으로 한 포낙이나 지멘스, 스타키 등과의 경쟁은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영세한 중소업체들이 보청기를 취급하다 보니 AS망을 구축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보청기는 제품 성능 못지않게 튜닝이나 사후관리가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보청기를 맞춘 다음에도 최소 5번, 소음성 난청 환자의 경우 한 달에 한 번꼴로 청능사를 찾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더욱이 안 맞는 보청기를 낄 경우 ‘삑삑’ 하는 피드백 음이 생기는 하울링 현상이 귀에 거슬린다.
특히 핵심기술에서도 세계 수준에 비해서는 현저히 뒤처진다는 것이 업계 전문가들의 얘기다. 대한보청기와 세기보청기는 조립생산, 복음보청기는 스위스의 포낙과 기술제휴를 맺고 보청기를 생산한다. 실제 지난 2010년 세기보청기가 판매한 귓속형 보청기(SG-P2)는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부터 ‘보청기 성능 부적합’에 관한 지적을 받았다.
이에 전자기술을 갖춘 몇몇 대기업이 보청기시장에 뛰어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나 아직 구체적인 진전은 없다. 이경원 교수는 “대한보청기, 세기보청기 등 국내 업체들도 주요 핵심 부품은 거의 100%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라며 “우리나라 보청기 기술 수준은 유럽에 비해 10년 이상 뒤처져 있다”고 지적했다.
“음성증폭기 사용 주의해야”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보청기와 유사한 음성증폭기가 시장을 왜곡시키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음성증폭기는 자극적인 문구를 앞세운 전면 광고로 주요 일간지를 도배하며 보청기시장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 가격도 30만~40만원대에 불과해 쪽당 가격이 수백만원이 기본인 보청기에 비해 금전적 부담도 적다는 평가다.
음성증폭기는 주파수에 상관없이 모든 소리를 증폭하는 원리다. 음성을 주파수 대역별로 쪼개 필요한 부분만 비선형적으로 증폭하는 보청기와는 다르다. 난청 환자를 위한 ‘의료기기’인 보청기와 차이가 있다. 이로 인해 일부 노인성 난청 환자 가운데는 보청기 대신 음성증폭기를 사용했다 도리어 청력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덴마크 와이덱스 보청기의 한 관계자는 “요즘 신문광고에 많이 나오는 음성증폭기는 단순히 음성을 키워주는 확성기와 같다고 보면 된다”며 “보청기는 음성을 압축한 다음 사용자의 청력 상태에 따라 크고 작게 조정해주는 의료기기라서 의료기기가 아닌 음성증폭기와는 전혀 다른 제품”이라고 지적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청 첨단의료기기과의 정승환 연구관은 “음성증폭기와 보청기는 소리를 키워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음성증폭기는 개인별 피팅 기능이 없어 단순한 공산품으로 취급한다”며 “음성증폭기의 경우 잘못 사용할 경우 청각 상태가 오히려 악화되는 경우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