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
필자는 어린시절에 체질적으로 허약했다.
코피를 한 번 쏟으면 세수대야가 넘칠정도였는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동네 아저씨가 이 모습을 보시곤 나를 얼른 엎고 병원으로 간 것도 그 아저씨의 훈훈한 모습과 함께
추억속에 아련하게 피어오른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엔 운동종목을 3가지나 겸하는 학교 대표선수가 되었다.
이 시기(1970년대)는 정기적으로 1년에 한번 씩 군청소재지의 학교가 제일 큰 운동장을 보유한
필자의 초등학교에서 운동시합을 하였는데 볼거리와 이벤트가 별로 없던 그 시절엔 지역의 빅이벤트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군민입장에서는 아마도 한국시리즈정도라고나 할까 ?
송구,탁구,추구콜키퍼(후보) !
이 중 축구콜피퍼로서의 출전을 하질 못했다 왜냐면 주전 콜키퍼가 부상도 없이 잘 했으니까~~~^^
이것이 필자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는 생각을 지금도 해본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필자의 성격은 매우 내성적인데다 대중앞에 서면 위축되는 소년이었다.
그러하니 송구,탁구시합에서는 평소의 기량의 반도 펼치지 못했고 당연히 시합에서 예선탈락의 수모를 그 때 톡톡히 겪었다.
몰론 중학교에 들어가서 그 때 시합에서 붙었던 타 초등학교 출신선수들과 같은 중학교에서 만나게 되었고
비공식적인 경기를 제안하여 나의 실력을 보여주었지만 ~~~
필자의 본격적인 운동은 태권도를 시작하면서 시작되는데
이것이 결국은 지금의 나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성격개조는 물론이고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바탕으로 한 도전정신과 열정이 자연발생적으로 생동하기 때문이다.
특히 필자는 초등하교 5학년 때 엄마하고 생이별(生離別)을 하게 된다
한 동안은 아침에 일어나서는 엄마가 내 집에 없다는 생각에 눈물로 아침을 시작했다
그러던 필자에게 운동은 심신을 더욱 더 강인하게 하고 공부에도 집중하는 내공의 힘을 주어 중2때는 반년은 1등
반년은 2등을 하였는데 그 때의 1등 성적은 나에게 하면된다는 자신감을 지금도 부여하고 있다.
자립정신
구기종목으로 시작해서 중학교 진학 후 태권도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초등학교 6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네선배인 중 3하고 싸움을 하게 됐다.
그 당시엔 맞을 수 밖에 없지 않는가 ?
초딩 6학년 대 중3 이니~~~
근데 싸움 중에 하도 맞으니까 분함을 참지 못하고
주변에 있던 빗자루 등 무기를 갖고 덤비면 오히려 그 걸 뺏기어 더 맞으니 이 보다 야속한게 따로 없었다.
다음 날 얼굴은 통통 부어올라 참으로 어린 맘이 비분강개하였는데도
부모형제가 있응에도 그 놈(?)을 혼내 줄 사람이 없었던 것을 알고
그 때 난 깨달았다
아 !,세상은 내가 홀로 서야 하는 구나 !
그 후 태권도를 배우고 약 2년이 되었을 때 우리 동네에 가설극장이 들어왔다.
당시엔 여름이면 학교운동장에서 영화를 상영하던 시절이었다.
한 여름밤 컴컴한 운동장에서 그 선배와 우연히 맞딱드리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복수심 같은 심정이 일어 나 주체하지 못 하고 한 손을 잡고 비틀어 봤는데 쉽게 되는 것을 느끼면서
혼좀 내줘 볼까 했지만 그 냥 손을 놔 주었다.
난 그때 생각한다,
원수는 그냥 놔두는 것이라고 !
누가 그랬던가
'진정한 복수는 용서하는 것이라고 '
그리고 얼마 후에 처음으로 합기도장이 들어왔는데
나에게 있어서 무도에 대한 본격적인 학습이 이루어 지는 계기가 되었다.
공부하고 운동을 병행하니 둘 다 잘 되었다.
잡념도 없고 인내할 줄 알고 심심도 건강해지니 집중력도 나닐이 좋아지고
요즘말로 열정 뭐 그런것도 쑥쑥 크니 그야 말로 일거양득인 셈이었다.
중3이되어 진로를 고민하게 된다.
인천으로 유학을 가야하는데 어뗳게 해야 하지 ?
물론 의사결정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었다.
그 때 난 알았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자기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
당시에 지금으로 말하면 외고나 자사고같은 학교로서
부평고등학교가 특수하교로서 전국의 지망생들이 응시를 하였는데 필자는 낙방하었다.
이 소식을 접한고 집으로 돌아온 난 압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몇 시간동안을 울적하게 보냈다
이 때의 실패에 대한 경험은 지금 까지 많은 것들을 도전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나에게 심오한 교훈을 던져 주고 있다
별 보고 집에서 나와 비포장도로로 버스를 타고 전철을 갈아티고 별 보고 집으로 귀가하는 고1학생에게는
통학이 만만치 않았 고향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야 하나 아니면 하숙을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중 담임선생님의 권고로
전학은 불허되어 하숙을 한다.
운명
운명론과 운명개척론을 고등학교 시절에 뭔지도 모르면서 언성을 높이며 애들과 주고 받은 적이 있다.
요즘 송담스님의 법문을 듣다 보면 둘 다 맞는 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운명론의 관점에서 인생을 조망하면 인위적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전생의 업(業)으로 현세에서 보(報)를 받고
따라서 금생에 대충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일상에서 짓는 모든 것들이 이 또한 업이 되어
내생의 내 삶을 만드다하니 그 냥 대충 살아갈 수가 없지 않는가 ?
그러 하니 두 가지 이론이 전 인생에 걸처 스펙트럼으로 연동되지 않는가 !
일류회사에서 1등 제품으로 영업을 한다면 이 보다 더 좋은 영업환경이 어디 있을 까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는것이 세상사 순리이다.
필자는 시장점유율 9~30% 정도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제품으로 나름대로의 영업성과를 창출하엿다.
딱 한번이지만 1987년 6월 급여 때 세금만 110만원를 공제하였으니 회사타령 제품타령 할 것 없다.
작년에 안양 범계역 앞에 소재한 곳에서 강의를 몇 차례 진행하였는데 교육생 중 두 분이 필자에게
이렇게 얘기 하더라 " 대단하세요, 대우차로 나름 성공하였으니~ "
이 분들은 현대자동차 영업사원 출신으로 중고차 대표와 리퍼브 샵 사장이었다.
그렇다,
회사 탓하고 제품타령 할 새가 어디있나 ?
세상은 넗고 팔 때가 지천인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하고 생이별을 하였다.
자고 나면 엄마의 빈자리가 나를 매일 울게 만들었다.
근데 매일 울 수 만은 없지 않은가 !
운동했다,그 것도 이왕지사 나 자신도 방어할 목적으로 태권도로 시작하였다.
요금 힐링서적에서도 힘이 들 때 운동과 명상을 거론하는데 난 체험으로 그걸 진 즉 깨달았다.
이 소중함은 필자의 인생의 버팀 목이자 일상의 전부이다.
회사가 시장점유율이 낮아 인지도가 없고, 제품 라인 업이 안되어 대체할 판매제품이 없다고 불평할 시간에
심신수련을 먼저 하고 신규거래처 확보방안을 위한 영업전략과 마케팅 전략의 실행을 도출할 것인지를
연구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
엄마하고 모텔에서 !
엄마가 아프다 !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불편하시다 ~~~
이번 크리스마에 바닷가에서 목욕을 시켜드리고 몇일 보낼 작정으로 펜션을 갔는데,
욕조있는 방들은 예약완료~~~
일대 펜션을 수색하 듯이 다 뒤졌는데도 없다.
그래서 일단 포기하고 읍내로 들어왔더니 마침 한가하고 적당한 모텔을 찿았다.
욕조에 물을 받고 아내의 손길로 엄마의 때와 상처를 씼어 내려 간다.
내 가슴이 청량함과 마음의 깨끗함을 느껴 본다.
근데 밤새 주무시지고 못하고 화장실만 가신다.
낮에 드신 장어가 설상가상이 되었다.
다음 날 읍내에 죽집을 찾는데 '본죽'이 있더라
그래서 마치 오아시스를 찾은 양 날아 갔더니 문은 아직 안 열렸다.
그래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주인집에 통화까지 연결하게 되었으나 그도 소용 없었다.
그래서 편의점 야채죽을 들고 모텔로 향한다.
그 동안 우린 어머니의 봉양이 마치 자식이 나 혼자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게 현명한 판단이라 생각해서 지금 껏 이렿게 왔는데
이젠,그들이 밉다, 인면수심이란 단어로 연결된다 ~
어찌하여 자기들을 낳고 키워 준 부모에게 평생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
자식 낳고 기르면 철 든다 하는데 손주까지 보고도 개선이 안 되면 이게 정말 인간이란 말인가 ?
무슨 생각으로 제 자식들 키 울까 ?
집사람 보기에도 면목이 점점 더 없다
학부모 모임에서 그랬단다, 부모재산은 어느 넘이 독차지하고 봉양은 혼자서만 하니 필자가 분(憤) 하겠다고 !
사필귀정(邪必歸正) !
이 것도 운명(運命)인가 ?
한계 그리고 도전
중학교 시절은 필자에게 소중한 추억도 많고 일상의 희비가 참 많이 교차한다.
엄마의 부재가 슬픔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면학과 운동세계의 체험은 슬픔을 승화시킨 기쁨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고 세 살 많은 착하고 성실한 오촌이 귀뜸을 해 주셨다.
그래서 복습과 예습을 밤을 지새우며 했더니 초등시절 공부도 못 했는데 1학년 첫 시험에서 5등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태권도를 지도관(교내에 소재)에서 시작하였다.
고교선배들의 현란한 몸 동작과 이단 옆차기로 샌드백을 치는 모습은 어린 학생에게는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중2가 되서는 실력도 점차로 쌓이고 하더니 2학년 동안 매월 1등과 2등을 교차로 하였다.
그리고 운동도 동네에 합기도장이 생기면서 더욱 더 전문적인 무도의 세계의 향연을 맛 보았다.
지도관에서 2단을 보유한 고교 2학년 선배들의 지도로 운동을 하다 전문도장에서 수련을 하니 가일층 실력이 늘어갔다.
중 2학년 때 합기도 초단이 되어 검은 띠를 매니 그 때 기분은 뭔가 해낸거 같은 뿌듯함이 지금도 뇌리를 스쳐간다.
어느 날 학교 핸들볼 대표선수로서 시합을 앞 두고 운동장에서 맹렬히 연습을 하고 직 후 강당에 마련된 태권도장에서
또 한번의 운동으로 몸을 풀고 귀가하였다.
4시간여의 운동시간은 아마도 중학생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도 전문적인 종목으로 하드 트레이닝을 하였으니 ~~~
어쨌든 귀가하여 피곤하여 일찍 잠자리에 누웠는데 ,
아~ 내 몸이 붕 뜨는 느낌과 정신적으로 혼미해짐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잘 모르지만 이게 육체적 한계의 경계선이 아닌가 어렴 풋이 그 때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 경험은 지금 까지 여러 방면에서 살아오는 동안 필자에겐 도전과 인내의 큰 자산과 자신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공부는 시험 때가 되면 독서실을 이용했는데 동네에는 없어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를 가야
김포공항에 소재한 독서실을 이용 할 수 있었는데 공부하고 대충 않아서 자고 바로 등교 한다.
중2 겨울방학 시작 무렵에 교무주임 선생님께서 반으로 들어오셔서 애들한테 다음과 같이 주문하신다.
이 반에서 공부도잘 하고 놀기도 잘 하는 학생이 누구 ?
그랬더니 애들이 필자의 이름을 거명하였다.
이 후 조용히 교무주임 선생님을 따라 갔더니 졸업하고 텅 빈 3학년 교실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우리 애가 지금 6학년 곧 중1이 되는데 방학 때 네가 영어 수학을 좀 가르쳐 줄래 ?
그러면 너 3학년 올라가니 학생회장 추천할께 ~~~ 라고 하시더라
그 때 바로 이렇게 답변한다 영어는 자신있는데 수학은 어렵다고 하였더니 그럼 누가 좋겟냐고 하시길래
1,2등을 다퉜던 친구를 추천드렸더니 그 친구가 방학내내 가르쳤고 3학년 때 학생회장이 되었다.
인생의 첫 딜(Deal)을 이 때 경험한다 !
협상기법으로 대안개발을 하여 상호이익을 추구했어야 했는데 마지막 다 섯 번째인 '포기를 선언했다 ^^.
하여튼 운동도 공부도 한계가 뭔지는 몰랐지만 참 열심히 했다.
학교의 마지막 수업 종소리가 싫었고 도장이 경영난으로 폐쇄되는게 너무 슬펐다.
중 3 담임선생님을 고등학생이 되어 친구들하고 찿아 뵙더니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가사의 하다고 하시면서 1등을 했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신감으로서의 큰 자산이 될 수 있다고
하신 그 음성이 귓가에 맴 돈다.
소실적 이러한 부딪치며 도전하는 생활들은 나의 일상에서 언재나 자양분과 동시에 밑거름이 된다.
몇년 전 오촌 아저씨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맨땅에 헤딩한다고 ~~~
한계는 이 뭐꼬 ?
도전의 종착역은 뭐 꼬 ?
송담스님의 화두가 떠 오르면서 독자분들과 자문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