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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마태복음 1:1절
제목: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김구선생은 자신의 소원이 첫째도 대한독립이요, 둘째도 대한독립, 셋째도 대한독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소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제 소원은 하나님이 저를 언제 부르실지 모르지만 이 땅에서 목회하는 동안 구약 창세기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신약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을 모두 다 강해하는 것이 제 소원이라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4년동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경 여러권을 강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가장 최근에 디도서를 비롯해서 신약에서는 요한복음,사도행전,로마서,빌립보서,데살로니가 전후서, 디모데후서, 빌레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등 총 12권을 강해 했고, 구약에서는 룻기,느헤미야,욥,요나,학개등을 강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구약이든 신약이든 지금까지 제가 강해한 책은 대부분이 그리길지 않은 책들이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신약의 시작인 동시에 복음서 중에 첫 번째인 마태복음을 강해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마태복음이 총28장으로 구성이 되어있기 때문에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는 놀라운 힘과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마태복음을 함께 생각하는 동안 우리들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신약성경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이 4권의 책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과 달리 뒤에 ‘복음’이라는 말이 붙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는 복음이라는 말이 따라 다니는 것일까요?
이 책들을 복음서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책들이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말씀으로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란 예수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자어로 ‘福音’이란 ‘복된 소리’란 뜻인데,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다 ‘복된 소리’란 뜻입니다.
왜 예수님과 관련된 것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자기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천하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시고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구분케 하기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중앙에 두시고 그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곧 우리는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그런 나무를 만들어 놓으시고 사람을 골탕먹이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자신이 창조주임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것도 없었다면 사람들은 온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가졌으니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착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때마다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진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그 열매를 따먹음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에 의해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파기하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죽음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후에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구원을 받아보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행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수십년동안 자신의 육체를 고달프게 하고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도를 닦아서 구원을 얻어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수 십년동안 산 속에 파묻혀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자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선을 행하면서 구원을 얻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평생동안 자선사업과 남을 위한 봉사에 모든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구원의 길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 스스로는 그 어떤 노력을 한다할지라도 구원을 얻을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 작정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을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오직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려 왔습니다, 그것이 ‘구약’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어 그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신약’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보다 더 귀한 이름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가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기록한 책을 복음서라고 말합니다.
세상사람들은 부모님이 연세가 아주 많아서 돌아가시거나 아니면 친지나 이웃사람 중에 연세가 80세 혹은 90세가 넘어서 돌아가시면 좋을 ‘호’자와 죽을 ‘상’자를 써서 ‘好喪’이라고 말합니다. 즉 세상에서 오랫동안 사실만큼 사시다가 가셨으니 그 죽음이 복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오래 살다가 죽어도 예수를 모르고 죽으면 그 길은 영원한 죽음의 길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짧은 인생을 살았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그 인생이 복된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이 복된 인생인가 아닌가? 하는 것의 유일한 기준은 언제나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얘기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부자는 자색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에 비해 나사로는 거지였습니다, 몸도 병들어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있었습니다.
가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개들이 와서 자신의 그 헌데를 핥곤 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보기엔 이보다 더 형편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 나사로가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표현은 누가복음 16장 22절을 보면 죽어서도 이 두 사람은 세상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대접을 받았습니다.
아마 나사로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 시체를 거적데기에 둘둘 말아서 아무데나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서 ‘장사’되었다고 했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양지바른 곳에 호화롭게 무덤을 만들어 그곳에 그 부자를 묻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음, 그순간 이 두사람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상사람들에 의해 거적데기에 둘둘 말려 버려졌던 거지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양지바른 곳에 호화롭게 묻혔던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떴습니다.
여러분!
너무도 쉬운 질문을 한가지 하겠습니다. 이 두사람 중 누가 복된 인생입니까? 정말 나사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왜 나사로가 복된 인생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복된 인생인가 아닌가?의 기준은 ‘예수님’뿐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호화롭게 살아도 예수를 모르면 그 인생은 불쌍한 인생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좋은 약을 먹고 건강식품을 먹으면서 오래 살아도 예수를 모르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예수가 귀한 줄을 모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은 예수를 세상의 것과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예수가 자신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분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것을 몽땅 팔아서라도 예수를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 복음서의 시작이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는 놀라운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 첫째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니 좀더 어려운 말로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2위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요즘 강아지를 집에서 기르시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저도 어렸을 적에 저희 집에서 늘 개를 키웠기 때문에 개를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개를 정말 좋아하시는 분들을 보면 개를 자기 자식같이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조금 오래전 제가 부목사로 있었을 때 일이었습니다, 심방을 갔는데 그 집에서 ‘치와와’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6년전의 일이니까 그래도 요즘처럼 개를 집에서 기르는 사람이 적을 때 였습니다.
그런데 개를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또 개도 주인을 얼마나 따르던지… 개가 주인을 계속 졸졸졸졸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그 분이 심방온 사람을 대접해야 되겠는데 강아지가 자꾸 따라다니니까 방해가 됩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강아지에게 하는 말이 “타미! 아빠한데 가있어”
저는 그집에 강아지 아빠 개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아빠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집사님 남편을 두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개를 너무 좋아하다보니까 사람과 개가 구분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그 말을 듣는 분도 별로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개를 좋아해서 기르는 분들이 많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이런 말을 듣었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개를 좋아해도 정말 듣기 싫은 말이 있습니다. 어떤 말일까요? 그렇습니다. ‘개자식’이라는 말입니다. 개를 아무리 좋아해도 ‘개의 자식’이 되는 것은 싫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개의 자식이 되는 것보다 더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 더 치욕적이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자손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자손으로 오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교회가 사랑의 장기협회에 매달 얼마 되지 않지만 선교헌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매월 발행하는 월간지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관심있게 읽고 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사람들의 사연이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신장을 제공하는 사람들 중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제공하는 기사가 실린 것은 본적이 있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신장을 제공했다는 내용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른 것 같습니다, 부모는 자신의 목숨도 자식을 위해 내 줄 수 있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부모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자손이 되신 것도 이와같습니다, 그 분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온 천하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창조사역에 동참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사람을 지으실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죄로 인해 멸망당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사람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여전히 그분은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입니다.
불교의 역사관은 ‘윤회사상’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즉 역사는 계속 돌고 도는 것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생에서 선한 공적을 많이 쌓으면 다음 세상에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각종 동물로 태어나는데 이것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진다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관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 시작은 천지창조이고, 그 끝은 우주적인 종말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역사의 종말을 고하는 순간까지 오직 한분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류가 생긴이래 즉 아담이후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요?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구가 60억이라고 하는데 오고가는 세대에 이 지구상에 살았던 인구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요? 물론 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참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성인이라는 칭호를 얻고, 때로는 역사를 빛낸 훌륭한 인물이라고 후대의 사람들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빛낸 값진 일은 했을는지 몰라도 그들은 역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 땅이 생긴 이래 그리고 이 땅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역사의 주인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역사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고 누구든지 그 분을 영접하면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제 이 놀라운 소식이 증거 되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세계에 머무르고 싶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입니까?
오늘 이 말씀을 다시한번 여러분의 인생에 깊이 새기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마태복음 1장 1-17절
제목: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
여러분!
방금 제가 오늘 본문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참 지루하셨지요? 누가 누가를 낳고, 또 누구를 낳고…, 오늘 주보에 우리교회 성도중 ‘김영희’씨가 득남한 소식을 실었습니다. 만약 주보에 우리교회 성도 가운데 42명이나 되는 사람이 출산한 소식을 싣고, “아무개 성도님이 득남하셨습니다. 아무개 집사님이 예쁜 공주를 출산하셨습니다. 아무개 권사님이 손자를 보셨습니다” 하면서 제가 그것을 일일이 다 읽어내려간다면 끝까지 그 내용을 들으실 분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저도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고, 듣는 여러분도 인내심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마태복음 1장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읽기에 지루할 정도로 많은 사람을 여기에 열거를 하셨을까?하고 말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를 성경을 펼치는 처음 순간부터 그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사람의 이름을 열거하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왜 우리가 그토록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사실 얼마되지 않는 내용이지만 이것도 우리는 인내하면서 읽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여러분이 성경을 한번 읽겠다고 결심한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읽으려고 성경을 펼치면 마태복음 1장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끝까지 이름을 또박또박 읽어내려가셨는지요? 아니면 대충 읽거나 혹은 그냥 읽은 셈 치고 건너뛰어 18절부터 읽으셨는지요?
저도 처음에 족보에 담긴 깊은 의미를 알기전에는 마태복음 1장은 언제나 읽은 셈 치고 건너 뛰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의미없이 무작정 족보를 기록하실리는 없습니다. 아니 이 족보에는 정말 엄청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지난주에 예배를 마친후 식사시간에 어느분이 저에게 다가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에 그토록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줄 몰랐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 부분을 읽을 때 무심코 지나갔던 적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덧붙여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음주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말씀을 들으신다면 더 엄청난 영적인 진리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소홀히 하고 지나갔던 부분중에 하나가 오늘 읽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정말 놀라운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저는 그 부분을 함께 생각하면서 여러분과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역사의 분기점이십니다, 그래서 연도를 사용할 때 기원전은 B.C라고 하고, 기원후를 A.D라고 합니다, 그런데 B.C는 무엇의 약자입니까?(Before Christ) 즉 예수님이 오시기전 이란 말이고, A.D는 (Anno Domini)의 약자로 즉 예수님 이후라는 뜻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분기점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이 구약이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는 신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신약시대의 시작이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누구를 낳고하면서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도대체 예수님과 사람이 태어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길래 이렇게 지루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출생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구약에도 족보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제일먼저 언급되어진 곳은 창세기 5장입니다. 그런데 구약에 첫족보와 신약의 첫족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태복음의 족보는 ‘낳았다’는 말만 있습니다. 즉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기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족보는 ‘낳고 죽었더라’는 말이 나옵니다. 마치 장례식장에 온 듯한 기분이 듭니다. 왜 구약의 족보는 죽었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고, 신약의 족보는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까요?
창세기 5장 1절에 의하면 이 계보는 누구의 계보입니까? 아담자손의 계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담자손의 계보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에 관해 말할 때 죽었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1절을 계속해서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130세가 되던 해 자기 모양,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면 아담 이후에 태어나는 자손들도 당연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나야 할텐데 아담 이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아담이 타락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가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죄 가운데 태어나는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육체적으로도 죽고, 영적으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졌으니 영적으로도 죽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을 준비하시고 그 마지막 아담을 통해 태어나는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자들로 삼으십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아담이 누구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면 마지막 아담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아담의 자손들에게는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죽고, 또 죽고, 또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은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낳고, 또 낳고, 또 낳았습니다.
구약 룻기를 보면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의 가정이 흉년을 맞이하여 자신들이 살고 있던 유대땅을 떠나 모압땅으로 이주를 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압땅에서 거주하면서 가장이었던 엘리멜렉이 죽고, 또 두 아들도 죽었다고 합니다, 룻기의 시작은 죽음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룻기의 마지막 장을 보면 룻이라는 여인이 보아스라는 남자를 만나 자식을 낳고 또 그 자손들이 자손을 낳고 또 낳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룻이라는 여인의 인생이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뀌고, 어두움의 그늘에서 밝은 빛으로 바뀌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이유는 한가지였습니다, 그녀가 보아스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그분께 속해 있지 않고, 세상에 속해 있으면 죽고 또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면 살고 또 삽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히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을 얻게 된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지는 세계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또 이 족보자체에서 발견되어지는 차이점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대부분이 낳았다는 말을할 때, 남자가 자손을 낳은 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여자가 자손을 낳았다는 말을 할 때도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고,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고’라는 말을 함으로서 아이가 태어나는데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을 분명히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출생에 관한 기록인 16절을 보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앞의 문장과 다른 점이 있는데 어떻게 다릅니까? 만약 앞에 문장과 똑같아지려면 적어도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를 낳으니라”라고 해야 문맥상으로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를 낳으니라”라고 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두가지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첫째는 예수님은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 육신의 어머니의 몸은 빌리셔야 했지만 육신의 아버지는 필요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를 낳은 마리아의 남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가진 아버지 없이 육신을 가진 어머니에게서 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다른 아기들과 같은 방법으로 출생하셨다면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도 역시 아담의 자손이 되고 말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다는 표현을 쓰고 않고 ‘그에게서 나시니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영원전부터 계셨던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이하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계신분이시기에 마리아와 요셉이 혈통적으로 예수님의 부모가 되기 전부터 존재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누구에 의해서 태어나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사람들이 말하듯이 세계 4대 성인중의 한사람으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훌륭한 사상가나 철학가로 평가해서도 안됩니다. 좋은 가르침은 남긴 유명한 성현이라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분은 만물의 주인이시며,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부모에 의해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나신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히 예수님이 태어나신 계보를 설명하고자 하는데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이 족보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족보에 여자의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 유대의 풍습에 의하면 여자가 족보에 오른다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족보에 오른 이 여인들을 보면 하나같이 과거에 실수와 허물이 많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은 여인입니다, 라합은 비록 여리고 정탐꾼을 숨겨주긴 했지만 그녀의 직업은 기생이었습니다. 룻은 기생보다 더 천한 이방여인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는 유부녀이면서 유부남과 간통한 여인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기록한 마태가 과연 이 사실을 모르고 이 네 여인들의 이름을 기록했을까요? 구약성경에 보면 그 이름이 빛나는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는데 기왕에 족보에 기록하려면 그 빛나는 여인들의 이름을 넣을 것이지 왜 하필이면 실수와 허물투성이인 이들을 기록했을까요?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죄가 많고 허물과 실수투성이의 인생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두 용서함을 받을 수 있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복음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여기에 나오는 다말과 같은 자들입니다, 룻과 같이 약속의 언약에 관하여서는 이방인이며, 소망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라합과 같이, 혹은 밧세바와 같이 영적으로 날마다 간음하는 자들입니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입구에 이런 글이 써여 있다고 합니다,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 우리의 과거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희망이 없는, 지옥과 같은 인생이 우리들 과거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심으로 우리는 그 분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그것은 묻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우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같이 희어질 것이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옆에 두명의 강도가 있었습니다, 한 강도가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이 강도의 과거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강도의 과거를 꾸짖지도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의 고백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천국행 티켓을 주셨습니다.
참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과거에 우리가 어떠했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고백이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사실 이 책을 기록한 마태도 그의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세리라면 그 당시에 로마에 바칠 세금을 중간에서 착복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가장 멸시했습니다, 그런데도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과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마태의 과거를 묻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을 향한 우리 주님의 마음도 한결같습니다. 비록 과거에는 죄와 허물투성이였지만 이제는 예수안에 있는 들어와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거는 다 씻겨졌습니다. 이 놀라운 메시지가 예수님의 족보에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족보를 통해 알 수 있는 또 다른 놀라운 것은 역사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아브라함대부터 예수님의 탄생까지 이끌어오신 하나님의 손길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한집안에서 서울대학을 한명이 들어가기도 어려운데 할아버지때부터 아버지 그리고 손자까지 다 서울대학 출신이라면 정말 놀라운입니다, 아마 신문에라도 날만합니다, 그런데 42대에 걸쳐서 서울대학을 나왔다면 전세계에 토픽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불가능한 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42대에 걸쳐서 자자손손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수밖에 나지 아니하고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세계를 이루는 것은 더 더욱 놀랄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요셉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붙들고 계셨고, 마침내 그 속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유대땅의 한 가문의 족보가 아닌 전인류를 위한 족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실수로 택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 때부터 요셉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붙드셔서 마침내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시고 새로운 믿음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마태복음을 읽으실 때 예수님의 족보를 그냥 스쳐지나갈 수 없음을 아시겠습니까? 족보를 읽으실 때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마태복음 1장 18-25절
제목: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4월 27일(월)에 우리교회에서 저와 함께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목사님들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용인에서 목회하시는 한 목사님은 결혼한지 15년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교인수가 400여명정도 되면 중형교회인데 자녀가 없으니 가정에 대한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고민을 언젠가 털어놓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합심해서 기도를 했는데 그 다음달 모임에서 반가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사모님께서 임신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에게서 1년안에 자녀가 생기지 않는다면 일단 불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 한번쯤은 의사의 진찰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려 15년동안 아이가 없었다면 의사들은 포기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즉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그것도 첫아이를 놓고 뒤이어서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아이를 갖지 못하던 여인들이 뒤 늦게 하나님의 은혜로 아이를 출산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입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은 그녀의 나이 90세였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늙었고, 사라의 몸에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였기 때문에 그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라는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한동안 늦동이를 보는 집이 늘어나는 추세였습니다. 여자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서 아이를 다시 가집니다, 그러면 주위에서 걱정부터 합니다,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혹 출산하다가 잘못되지 않을까?” 그러나 말많은 사람들은 뒤돌아서서 ‘주책이야 주책! 저 나이에 무슨 애기람’하면서 비웃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도 비록 자식을 원해서 아이를 가졌지만 정작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사라에게도 이 두가지 모두 적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사라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주위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자식이 없다지만 그래도 90세에 아이라니 남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들이라면 ‘사라 나이 90세인데 과연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혹 아이를 낳다가 어떻게 되지 않을까?’하고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아뭏튼 세상적인 상식으로는 90세의 할머니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였던 엘리사벳도 본래 수태치 못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도 늙으막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쳤던 세례요한입니다.
그러고보면 성경에는 종종 나이가 많아서 도저히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여인들이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참 위대하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임신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할머니의 얘기가 아니라 아예 남자를 알지 못했던 여인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동정녀 탄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한국신화를 보니까 신화속에 가지 각색의 탄생설화가 있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석탈해(昔脫解) 라는 신라의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왜국 동북 1천리에 있는 다파나(多婆那)라는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나라의 왕비가 임신한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는데 불길한 일이라 여기고 알을 비단에 싸서 보물과 함께 나무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웠습니다. 처음에는 금관국에 도착했으나 사람들이 수상한 상자라고 집어 올리지 않았고 다음에 진한의 아진(阿珍) 나루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해변에 살던 할머니가 건져 올려 키웠습니다. 상자가 물에 떠올 때, 까치가 따라와서 까치 작(鵲)의 한 쪽을 따서 성을 ‘석’(昔)으로 하고 상자를 풀어 나왔으니 이름을 ‘탈해’라고 했다고 합니다.
박혁거세(朴赫居世) 라는 역시 신라의 왕이 있었습니다. 고허촌장(高墟村長)이었던 소벌공(蘇伐公)이 하루는 양산(楊山) 기슭의 우물이 있는 한 숲속에서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을 보고 그곳에 가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알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알에서 아이가 태어나 왕이 되었는데, 그가 태어난 알의 모양이 표주박 모양이라 해서 박씨(朴氏)라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고대신화에 재미있는 각종의 탄생설화가 있는데 오늘날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와같은 신화나 혹은 전해 내려오는 설화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동정녀 탄생’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학창시절에 예수를 믿지 않는 친구들에 의해서 가끔 이런 질문을 받아보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기적과 같은 일, 다시 말씀드려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이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천명을 먹이신 사건, 심지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두고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을 하셨는지요? 혹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러나 그 대답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사람은 당연히 물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그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물위를 걸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를 가지고 아무리 마술을 부려보아도 10명도 배불리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5천명을 먹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잠시 기절한 사람을 깨어나게 할 수는 있을지라도 죽은지 4일이 지나서 그 시체가 썩어가고 있는 죽은자를 절대로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유명한 신학자의 말대로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신이라면 그것은 결코 신일 수 없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외쳤지만 그도 워터루 전쟁에서 영국의 웰링턴장군에 의해 대패를 하고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당했습니다. 분명 사람들에게는 불가능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알지 못할 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수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인이라 할지라도 성령으로 잉태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가끔 엉뚱한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도 차라리 신화에 나오는 박혁거세나 석탈해처럼 알에서 태어났다고 할 것이지 굳이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동정녀 탄생이냐?’고 말입니다.
양복을 사면 양복주머니에서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양복과 똑같은 약간의 천 조각과 그 양복에 달려 있는 것과 똑같은 단추들입니다, 비닐 포장지 안에 넣어서 양복주머니에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주머니에 들어있으면 주머니가 불룩해져서 옷이 모양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양복회사에서는 그것을 넣어둡니까? 혹 단추가 떨어지면 똑같은 단추를 달라는 것이고, 혹 옷이 조금이라도 헤어지면 필요한 부분만큼 같은 천을 이용해서 그 부분을 고치라는 뜻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옷이 헤어졌다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헤어진 곳에 양철판을 붙이는 사람이 있나요? 흰단추가 없는데 그곳에 검은단추를 다는 사람이 있나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헤어진 곳은 양복안에 있던 똑같은 천으로 고쳐야 제격입니다, 떨어져서 잃어버린 단추도 양복안에 있던 똑같은 단추를 사용하는 것이 제격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예수그리스도를 이땅에 사람의 몸을 빌려서 오게 하신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더 신기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이땅에 오게 하실 수 있지만 이땅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과 동일한 방법으로 태어나시면 그 분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도 아담의 계보에서 태어나는 자손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라는 여인의 몸을 빌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셨지만 육신의 아버지와는 상관없이 성령으로 잉태케 하시고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우리가 머리로 이해해야 할 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에 갇혀 계시는 유한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관념을 뛰어넘으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대개 어렸을 때 부모님들이 미리 결혼할 사람을 정해놓습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도 부모님들 사이에서도 미리 정혼을 해두었다가 자녀들이 나이가 차면 결혼을 시켰던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아마 여기 계시는 분들 중에 그렇게 해서 신랑 얼굴도 모른채 결혼하신 분이 혹 있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모님들 사이에 정혼을 하면 법적으로는 결혼한 것과 동일한 적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파혼을 하게 되면 그것은 이혼이 되고맙니다, 그리고 이 정혼의 과정을 거치고나면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사이라는 것은 법적으로는 결혼한 것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결혼한 사이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정혼한 여인이 임신을 했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복음은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아이를 낳게 될 것인데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했고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마리아가 정혼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요셉을 한번도 가까이 한일이 없는데 임신해서 배가 불러온다면 그것은 간음을 행하였다는 것 외에 달리 생각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일이 자신에게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마리아가 임신하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신일이니까” 하면서 별생각없이 지나갈는지 모르지만 사실 마리아 편에서 본다면 이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사회에서 간음한 여인은 모두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면에 있어서 죽음보다 마리아가 더 큰 고통을 감당해야 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편 요셉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일입니다. 어느 남편이 아내가 바람을 피워 임신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여인을 그냥 두겠습니까? 그것은 여인으로서 어쩌면 죽음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까지도 다 감내하면서 마리아는 순종합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이와같이 때로는 고통과 괴로움을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약 마리아가 자신이 간음한 여인으로 오해받을 것과 그로 인해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에 대한 이런 저런 걱정에 휩싸여서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무슨 말입니까? 요셉도 마리아가 간음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겠습니까? 자신과 정혼하고 결혼할 날을 얼마남겨두지 않은 여인이 임신을 했다니 얼마나 분노를 느꼈겠습니까? 하지만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기를 원했습니다. 만약 이 일이 여러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게 되기 때문에 마리아와의 관계를 가만히 끊고서 이일을 정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신중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일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참 그렇습니다. 만약 요셉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부터 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니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들은 종종 어떤 문제에 관해 속단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을 혼자서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속단하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하는 여유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의문점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마리아가 임신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을 하게 될텐데 그 아이는 마리아가 순결하지 못해서 가지게 된 아이가 아니라 내가 인류를 위해서 큰 계획을 가지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케 한 아이니 염려하지 말아라’고 한번쯤 말씀하시지 않았느냐?는 생각입니다. 만약 한번이라도 그렇게 요셉에게 말씀하셨더라면 요셉이 마리아를 오해하는 일도 없었을테고, 서로가 다 좋았을텐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 것일까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하실때에도 양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고 미리 말씀해주셨더라면 사흘길을 가면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라고 한번쯤은 생각을 해봄직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미리 얘기하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적어도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에 따라 온전한 행동을 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가장 정확한 때에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20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요셉이 그 일에 관해 생각할 때에 나타나셔서 요셉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왜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는지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때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정확한 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 여러분이 기도하고 오랫동안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다고 초조해 하거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혹 그 문제가 지금 당장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괴로워하거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정확하게 응답하실 때가 언제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서두르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고기를 굽는데 아이가 달라고 막 때를 씁니다, 그렇다고 덜 구운 상태에서 그 고기를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아이가 가장 먹기 좋게 구워졌을 때 아이에게 줍니다, 덜 익은 것은 먹으면 아이는 배탈이 나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가 보채더라도 다 구워질때까지는 주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가장 정확한때에 응답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미리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가장 정확한 때라고 여기신 그때 요셉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리고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이 ‘예수’이며 그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만히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죄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할 때 ‘알고도 지은죄 모르고도 지은죄’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얼마나 죄의 종류가 많았으면 자기가 짓고도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조차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죄라해도, 죄의 원인이 수만가지라해도, 그 해결책은 오직 한가지만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분이시며 그 분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혹 여러분중에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구세주로 모시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마음의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의 문이십니다. 그분이 비록 인간의 몸을 빌어서 이땅에 오셨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