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100대 명산인 팔공산(1,213m)과 비슬산(1,084m)이 품고 있는 도시입니다.
전국에서 이렇게 1,000m급 이상의 명산 두 곳을 보유한 도시는 대구뿐입니다.
그래서인지 도시 전체 인구수에 비례하여 등산인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주말만 되면 수많은 등산객들이 지역뿐만이 아니라 전국 명산을 다녀오고 있습니다.
등산이라고 하면 흔히 산 정상을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다는 개념으로 이해하지요,
그러나 등산은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합니다.
앞서 얘기한 대로 단순히 올라갔다가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오는 등산은 일주입니다.
아무리 먼 거리를 돌아오더라도 그렇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어떤 곳까지 걷는 것을 종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종주는 멀리 뻗쳐있는 산줄기를 걸을 때 주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산줄기라면 백두대간과 9개 정맥 그리고 6기맥과 162지맥을 대표적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러나 이 산줄기들을 아는 등산인들은 우리나라 전체 등산객들 중 반에도 못 미칩니다.
대부분 건강유지 목적으로 그냥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올 뿐이지 산줄기 탐방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등산객들 아무나 붙잡아서 백두대간과 9정맥을 아느냐고 물으면 태반(太半)은 모른다고 하지요,
일제강점기나 다름없었던 1900년대 초에 일본은 조선의 자연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지질학자였던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郎, 1856~1935)를 파견하여 한반도의 지형과 지질을 조사하게 합니다. 이 자가
귀국하여 집필한 논문에 한반도의 산줄기는 13개 산맥으로 기록되었고 이것은 일제시대 당시 조선인들에
대한 한반도 지리교육자료로 이용되었는데요,
해방 이후에도 한국 정부가 이것을 폐기하지 않고 계속 교육자료로 활용함으로서 아직도 국민들의 국토
지리체계가 식민사관에 머물러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산맥은 알아도 우리 조상들이 조사하고 정립한 산줄기체계인 대간과 정간, 정맥에 대한 개념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한반도 국토지리에 대한 탐방과 조사는 삼국시대부터 있었겠지만 자료상 전하는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습니다.
이어서 조선시대에도 여러 학자들의 저술에서 백두대간의 용어를 발견하게 되지만 영조 재위시기에
신경준(申景濬, 1712-1781)선생의 역사지리지인 산경표(山經表)에 의해서 비로소 한반도 산줄기에
대한 확실한 개념 정립이 이루어졌는데요,
이 자료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잊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귀중한 자료집, 산경표는 서울 인사동의 한 고서점에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1980년대에 ‘이우형’
이란 분이 고서 열람을 하다 우연히 발견하고 이를 세상에 알렸다고 해요,
그 때부터 산악계를 중심으로 산경표의 산줄기를 따라 탐방이 시작되면서 백두대간과 9정맥은 서서히
종주붐이 일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2008년부터 백두대간종주에 관심이 생겨 화대(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지리산 주능선)종주부터
하였는데요,
이후에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는 대로 다니다 보니 지금까지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일요일, 한남정맥(지도상 거리 178.5km)의 끝에 도착했는데요,
금년 1월7일, 경기도 안성시 죽상면 칠장사에서 출발한지 10개월 만이었습니다.
종주 예정코스였던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서암리 것고개에서 월곶면 보구곶리까지의 낮은 능선은
도시화가 진행되어 각종 공장과 주택들이 들어섰고 좀 높은 능선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곳의 등산로 촬영은 군사보안상 저촉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했습니다.
휴전선 부근의 산줄기는 대부분 그런데요,
한남정맥의 끄트머리 풍경은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오전9시20분,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서암리 서암생활체육공원 앞 도로입니다.
이곳에서 숲이 있는 맞은편 능선의 들머리를 찾아갑니다.
것고개 부근 검바위약수터 표지석이 있는 진입로를 보구곶리 들머리로 삼았습니다.
서암생활체육공원 게이트볼장 옆으로 올라갑니다.
언덕을 넘어가는 오솔길에서 오른쪽의 길이 희미한 능선으로 올라갑니다.
걷기 좋은 아름다운 오솔길입니다.
묘지 옆으로 내려가는 능선에서 동북쪽의 김포시 하성면 일대가 보입니다.
고정리 지석묘 전방에서 갈산리의 방마곡과 남정골을 넘나드는 옛고개를 통과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완벽한 형태의 고인돌입니다.
고정리 지석묘에서 내려서는 고갯길입니다.
고갯길에서 오른쪽 능선은 올라갈 수 없는 절개지라 우회로를 찾습니다.
고갯마루 옆의 공장 진입로를 따라 올라갑니다.
진입로 끄트머리 공장의 왼쪽 축대 위로 능선에 올라갑니다.
갈산공단 뒤편의 능선을 지나갑니다.
사유지 능선에는 등산객들의 출입을 막는 담장이 있어서 오른쪽으로 올라갈 루트를 찾아야 했습니다.
불당골 방향의 담장이 끝나는 곳에서 왼쪽의 능선으로 올라갈 만한 곳을 찾기로 합니다.
담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올라가는 능선입니다.
잡목이 우거진 나지막한 야산에 올랐습니다.
야산 봉우리에 올랐더니 왼쪽으로 문수산(376m)이 나타납니다.
오른쪽 붉은색 건물이 있는 곳으로 내려갑니다.
유휴지를 가로질러서 붉은색 건물의 뒷산으로 갑니다.
뒷산 너머에서 만난 도로에서 북서쪽 56번 애기봉로 방향으로 갑니다.
공장지대를 가로질러서 맞은편 문수산 방향으로 갑니다.
오전11시32분, 김포시 월곶면 개곡리 애기봉로삼거리에 도착합니다.
애기봉로삼거리에서 맞은편 야산으로 올라갑니다.
텃골 북쪽 능선의 임도를 따라 문수산 안부인 78번 지방도 고갯길로 갑니다.
문수산으로 올라가는 능선이 아득하게 높아 보입니다.
오후12시44분, 문수산 안부인 78번 지방도 고갯길에 도착합니다.
연말이 되면 북한을 향해 크리스마스 트리를 밝히는 곳으로 유명한 애기봉 이정표가 있습니다.
애기봉 방향으로 가면 보구곶리를 한 바퀴 돌아서 강화대교로 갑니다.
이곳에서부터 왼쪽의 문수산 정상까지 된비알이 시작됩니다.
왼쪽의 사유지로 올라가는 능선은 울타리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할 수 없이 울타리를 따라 올라갑니다.
울타리가 끝난 곳에서 조금 올라가니 암릉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문수산 단풍도 꽤나 보기 좋습니다.
바위 사이로 올라갑니다.
모래와 자갈이 섞인 바위를 보니 문수산도 오랜 옛날에는 해변이나 강바닥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후1시36분, 문수산 정상의 산성 장대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문수산 북쪽의 전망대로 갑니다.
강화대교와 헐구산(466m) 고려산(436m) 별립산(416m)이 나란히 보입니다.
쉼터로 변한 장대에서 휴식을 취하는 등산객들의 한가로운 모습입니다.
장대에서 전망대 사이의 안부로 내려서고 있습니다.
전망대의 북쪽입니다.
왼쪽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과 넓은 들이 보이는 송해면이고 오른쪽은 북한의 개풍군입니다.
전망대의 북동쪽입니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류지역이고요, 맞은편도 북한의 개풍군입니다.
전망대의 동쪽입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사실상 바다입니다.
아래에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와 조강조수지가 보입니다.
문수산 정상의 장대가 날렵한 자태입니다.
전망대의 남쪽, 인천과 영종도 방향입니다.
북한의 개풍 지역을 약간 당겨봅니다.
왼쪽에 인민군 부대 막사로 보이는 건물이 있습니다.
언제나 통일이 되어 마음대로 가볼 수 있는 땅이 되겠습니까 ?
통일의 그날은 악랄한 김씨세습독재가 망하는 때에 오겠지요.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빨리 사라지기를 학수고대합니다.
문수산의 뷰 포인트가 이렇게 좋습니다.
전망대에서 보구곶리로 출발합니다.
보구곶리 해안으로 산줄기가 점점 낮아지는 한남정맥의 끄트머리입니다.
야영장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만추에 진달래가 꽃을 피웠습니다.
문수산성의 최북단 성곽으로 올라갑니다.
한남정맥의 마지막 봉우리 270봉입니다.
너머는 강화도와 북한의 개풍군이 마주 보고 있는 서해입니다.
저 산을 넘어가면 한남정맥 종착지인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입니다.
문수산과 270봉 사이의 안부로 내려가는 비탈이 제법 가파릅니다.
문수산과 270봉 사이의 안부입니다.
안부에서 올라간 첫 봉우리는 거칠고 비좁은 능선입니다.
봉분처럼 솟은 270봉입니다.
마지막 봉우리에서 한 바퀴 돌아봅니다.
오른쪽 작은 섬은 유도입니다.
지금 모래밭이 드러나는 것을 보니 썰물 때인가 봅니다.
북한 땅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면서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로 내려섭니다.
보구곶리로 내려서니 가을꽃들이 먼저 반깁니다.
꽃말이 참 좋은 '메리골드'이지요,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야생 국화인 구절초가 이곳에 있어서 반갑습니다.
보구곶리에는 귀한 약재인 구기자가 담장 노릇을 하네요.
2024년 11월3일, 드디어 1대간9정맥 완주의 대업을 달성하였습니다.
2008년부터 종주를 시작하였으니 도전 16년 만에 뜻을 이룬 셈인데요,
자주 걸었다면 훨씬 더 빨리 마쳤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우리 삶의 시원(始原)이 되어준 산줄기의 호연지기를 감상하며 그 골골마다 삶의 터가 어떤지
알아보는 일에 뜻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관점으로서는 1대간9정맥의 완주도 일련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야겠지요.
다만 이제 첫 과업을 완수했을 뿐이니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과연 얼마만큼 걷고 알게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6기맥과 162지맥을 알아보기 위한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이미 진양기맥과 수도, 비슬, 팔공의 지맥을 마쳤으니 5기맥 159지맥이 남았습니다.
끝이 시작인 셈이지요.
인생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
도전하는 삶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