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시련試鍊
오 영 환
늦은 겨울 어느 날, 때아닌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다. 창밖을 내다보니 우리 집 마당에 있는 소나무 위로 흰 눈이 소복소복 쌓인다. 참새가 날아와 소나무에 앉으면 가지는 조금씩 흔들리며 흰 눈은 잔디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서고에 있는 전화벨이 울 린다. “주택 매매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사무실로 오실 수 있나요?” “예, 가겠습니다.” 하고 약속을 했다. 중개仲介 사업을 하는 가까운 친구였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친구의 사무실을 간신히 찾았다.
사무실을 들어서니 대형 연탄난로에서는 큰 주전자의 물이 펄펄 끓고 있었고 뚜껑은 달랑달랑 소리를 내며 꼭지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른다. 이때 나는 난로 옆을 지나면서 운동화에 묻은 눈 때문에 발이 미끄러져 사무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순간 난로 위의 주전자에서 펄펄 끓던 물이 나의 허리춤 아래로 순식간에 쏟아졌다. 이때 나는 정신을 잃고 사무실 바닥에 쓰러졌다.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열탕화상熱湯火傷의 불청객이 찾아온 순간이다.
한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청주의료원이었다. 나의 바지와 속옷은 모두 벗겨져 있었고 의료진은 나에게 소독약을 병 채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허리를 시작으로 발목까지 소독약이 줄줄 흘렀다. 나의 열탕 화상을 초기에 응급처치하는 순간이다. 옷은 모두 벗겨져 있었지만 창피한 것은 둘째고 너무 아파 아내를 붙들고 통증을 호소했다. 생전 처음 보여주는 나의 애절한 모습이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근엄했던 나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어린아이처럼 보채기만 했다. 두 딸은 등을 돌려 흐느낀다. 아들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아빠 조금만 참으세요” 하면서 나의 손을 잡아준다. 잠시 후 서울로 갈 119구급차가 의료원에 도착했다.
서울의 화상 전문병원인 강남성심병원으로 나를 이송하기 시작했다. 출발할 때 병원 마당에는 어두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서울로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 갈증이 나 물을 달라고 하니 아내는 물 대신 물수건을 나의 입에 대어준다. 그러면서 청주의료원 담당 의사가 구급차 안에서 환자에게 물을 주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물수건은 겨우 입술만 적셨다. 구급차 안에서 또다시 통증이 밀려와 아내의 치마폭에 엎드려 신음 소리와 함께 끙끙댔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서울이 멀지요?” “얼마를 더 가야 되나요?” 하고 재촉을 했다. 1분이 새로운 숨 막히는 긴장의 순간이다. 얼마를 달렸는지 구급차의 경적 소리가 자주 들린다. 서울을 다 온 것이다. 강남성심병원 입구에 다다르니 환한 달빛 속에서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린다. 커다란 눈송이는 내가 타고 온 구급차의 창문에 소복이 쌓인다. 병원 입구에 있는 네온 불빛도 가까이서 보인다. 나를 서둘러 들어오라고 환히 비추는 것 같다. 병원을 들어서니 어느새 자녀들도 와 있다. 모두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음날 10시에 하반신 피부이식수술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수술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 마음의 긴장이 가슴을 짓누른다. 아내의 손을 잡고 수술실까지 같이 가자고 했다. 하지만 보호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아내의 손을 놓자마자 나는 불교 신자로서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저를 아픔의 고통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게 해 주세요’하고 빌었다. 수술이 시작될 무렵 세분의 의사 선생님께 아프지 않게 수술을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의사 선생님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깨어보니 회복실이었다. 수술이 잘 되었다고 하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나의 귓전으로 어렴풋이 들려왔다. 순간 생명의 소중함과 고마움이 나에게 밀려왔다. 아내는 내 손을 잡아주며 이마의 땀을 닦아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천만다행입니다. 그 펄펄 끓던 물이 얼굴로 쏟아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평생 고개를 숙이고 살아갈번 했어요” 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맞는 말이다. 나도 아내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자녀들은 집으로 직장으로 복귀하고 아내만 내 곁에 남아있다. 부부夫婦! 한국어 사전에 의하면 ‘결혼한 한 쌍의 남녀’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에 덧붙이면 부모와 자식지간은 1촌이라는 마디가 있지만, 부부는 마디가 없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렵고 힘들며 외로울 때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사는 것이 부부이다. 아무리 잘해주는 자식이 있어도 부부만은 못하다는 속담이 바로 나를 두고 한 말 같다.
병상 생활을 하면서 아내는 내 곁에서 고생을 참 많이 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가까이서 챙겨주었으니 말이다. 한번은 나를 부축이고 병실 복도를 걷다가 아내는 다리에 힘이부쳐 넘어졌다. 몇 년 전부터 무릎 관절이 안 좋은 상태에서 나의 보행을 부축이다 넘어진 것이다. 넘어진 아내를 일으켜 세우니 허리는 많이 굽었고 팔은 야위였다. 아픔 속에서도 아내의 애처로운 모습을 바라보니 가슴이 미어진다. 이때부터 우리 부부는 서로 부축이고 의지하는 병상 생활을 했다. 오히려 나의 병세가 차츰 호전되면서 아내의 보행을 도와주었다. 어느 때는 침대를 아내에게 내어주기도 하고 나는 간병인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부부의 정情은 바로 이런가 보다.
한 달여의 병상 생활을 마무리하고 청주집으로 귀가하는 날이다. 병실을 나서면서 그동안 정들었던 침대를 어루만져보았다. 나의 몸과 마음을 항상 따듯하게 챙겨준 고마운 침대였다. 한 달 전 그토록 아파했던 나의 고통은 모두 내려놓고 건강한 모습으로 병실을 나서니 감회가 깊었다. 제2의 인생을 덤으로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의 청주 집을 들어서니 아파트 베렌다에 있는 화분은 목이 말라 누렇게 색이 변하였고 남쪽 창틀과 TV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다. 장기간의 병원 생활로 꽃과 가재도구는 주인을 잃고 혼자 쓸쓸히 지낸 것 같다. 다음 날 아내의 손을 잡고 동네에 있는 목욕탕을 찾았다. 수술 흔적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용기를 냈다. 한 달여의 밀렸던 목욕을 마치고 집을 들어서니 향긋한 난蘭의 내음이 집안 가득한 것 같았다.
이제 나의 건강은 완전회복되었고 직장에도 정상 출근을 하였으며 10여 년 전 정년퇴직도 했다. 돌이켜보면 건강이 있었기에 정년의 아름다움도 따라준 것이다. 소중한 나의 몸에 생긴 수술 흔적은 내가 무덤에 가는 날까지 함께 가져갈 것이다. 곁에서 함께 아파해주고 의지하며 간병을 해준 사랑하는 나의 아내에게 이 글을 통하여 고마운 마음의 뜻을 전하고 싶다. 열탕화상熱湯火傷! 다시는 나에게, 아니 모든 사람에게 접근 금지의 명命을 내리고 싶다. 먼 옛날! 함박눈이 내리던 그 날, 커다란 연탄난로 생각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프로필 사진 및 약력
오영환
약 력
▶ 효동 문학상,
▶ 제5회 충북대학교 수필문학상
▶ 푸른솔문학 신인문학상 (수필가 등단)
▶ 제19회 산림문화 작품상 (당선)
▶ 제7회 청향 문학상 (특별상)
▶ 제15회 우리문화 바로알기 전국수필공모(대상)
첫댓글 오영환 선생님 첫 번째로 원고 올려주셨네요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ㅎㅎ
원고 편수 2편으로 조정했습니다
수필 1편 더 올려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오 교장님,
솔선수범의 모범이십니다.
鑑賞 잘했습니다^^*
교수님!
칭찬 말씀 고맙습니다
건강하신 6월 되시길 빕니다.
김태원 시인님!
청향문학 창간호 준비 하시느라 고생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