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마니산 469m 인천 강화
이번 일요일은 5주째라 자주 가는 산악회가 없다. 그래서 근교 산행을 할까했는데 집사람이 함께 바람 씌웠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하나로산악회 카페에 들어갔다. 마침 내가 가고픈 마니산에 간다기에 회장님께 예약을 했다. 서면 KT전화국 앞에 6시 30분까지란다.
일요일 새벽에 일어나 보니 세시가 조금 못되었다. 다시 잠을 청했지만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놈의 병이 도졌다. 산행하는 날에는 잠을 설치기가 다반사다.
5시 반경에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6시 30분에 서면에서 반겨 주는 회장님, 총무님과 인사를 나누고 승차하니 지난번에는 만원(滿員)이였는데 오늘은 자리가 많이 비어있다. 온천장, 덕포에서 회원님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두 곳에서 모두 탑승을 해도 인원이 모자란다. 새벽에도 비가 왔으니 예약을 하고도 참여하지 않은 것 같다.
칠곡휴게소, 용인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했는데 두 곳 모두 화장실이 텅텅 비어있었다. 이제는 따스한 봄볕이 내리고 있는 데 의아한 일이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휴게소 화장실마다 줄을 서야만 했는데..
서울을 지나 김포 쪽으로 들어서니 차량이 밀린다. 김포에는 43년 만에 찾아온다. 얘기봉이라는 이정표를 보니 추억으로 빨려든다. 6개월을 근무하고 후방으로 전속명령을 받고 가면서 “이쪽으로 소변도 안 본 다”던 이곳이 이렇게 반가울 줄 몰랐다. 한마디로 복날 개 맞듯 두들겨 맞고 행정병님 덕분으로 함께 울 수 있었던 그 전우들 잘 있을까? 그날 구타로 병원으로 후송 되어 의가사 제대하였다는 서울 그 전우도....?
5시간 40분을 달려 강화대교에 도착하였다. 옆에 아내에게 "저기에는 형덕이가(고향의 친구이고, 군대 동기)근무한 곳이고 나는 저 산 넘어 에서 근무 했어"라고 자랑삼아 얘기꽃을 피웠다
강화대교를 지나 잘 달리던 버스가 멈추더니 되돌아간다. 길을 잘못 들은 것 같다. 오는 곳에 공사하는 곳이 많아 네비게이션를 잘못 본 모양인데 ...한 일행이 "어렸을 땐 어머니 말씀 잘 들어야하고 결혼하면 아내 말 잘 들어야하고 차에 타면 네비게이션 말을 잘 들어야 된다."고 비아냥거리며 웃는다.
강화대교까지 되돌아오니 40여분이 걸렸다. 먼 거리라 시간이 촉박한데.... 늦는다면 영도까지는 심야 버스가 없어 택시를 이용해야 하는데 택시비를 달라할까?
1시 경 마니산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니 대형버스들이 즐비하다. 하차하자마자 회장님이 서두른다.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입장권 끊고 10여분 뒤 등산길에 올랐다.
길가에는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지었다는 산악인의 선서가 듬직한 바윗돌에 새겨져있다."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로 시작한다. 벌써 하산하는 행렬로 가득하다. "이제 올라가는 사람도 있네" 하면서 걱정하는 이도 있다. 고맙게도...
어디선가 구성진 노래 가락이 흘러나온다. 올려보니 불우이웃돕기 행사장 천막 밑에서 어여쁜 아가씨가 프로 가수처럼 맛 갈 나게 부르고 있다. 잠시 귀를 기우리고 노래 가락에 흥얼거렸지만 모금함 앞으로는 가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하면서...
마사 길을 조금 오르니 갈림길이 나온다.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우측 개울을 건너가는 단군 길과 좌측으로 가는 계단 길 두 갈래가 있다. 단군 길은 경사가 심하지 않아 힘이 적게 든다. 계단 길은 직각 층으로 되어 있어 매우 힘들지만 전망이 좋아서 대부부분 단군 길 보다는 계단 길로 오른단다. 그러나 하나로 산악회는 단군 길로 둘려 갈 모양이다.
마니산은 원래 두악(頭嶽)이라 하며, 민족의 머리로 상정되어 민족의 영산으로 불러져 왔다 고 한다.
아내가 화장실을 이용하는 시간에 일행들은 모두 올라가고 총무님과 산행대장님만 남아 우린 후미로 끌려 올라가 듯 올라가게 되었다.
이 총무님은 아내와 함께 대마도 갔을 때 처음 대면하였는데 아내가 자신에게 너무 친절하게 해주었다면서 늘 잊지 못한다고 했던 분이다. 나에게도 총무님은 내가 처음산행 할 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여기까지는 육산이라 힘든 곳이 아닌데도 나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나온다. 폐활량이 적어 남에게 민망 할 정도로 거칠게 쏟아진다. 그래도 사내라고 아내에게 "괜찮아?" 했더니 "이쯤이야"하고 큰 소리 친다. 저 큰소리가 오래 가야 할 텐데 걱정이다. 끈기가 없어 쉬이 주저앉기 일 수이다.
여기도 봄은 피해가질 안했다. 진달래가 만발하고 있다. 이번 봄은 해병켐프에서 훈련을 받았는지 혈기 왕성하게 예년보다 3~4일 빠르게 상륙했단다. 아무리 바빠도 이런 배경을 그냥 지나칠 아내가 아니다. 아내는 이쁘지도 않은 얼굴을 꽃과 비교를 해본다. "누가 예쁘지?"하는 표정이다. 물론 꽃보다 아내가 예쁘다고 할 팔푼이가 앞에 있어니까...
작은 오르막을 오르니 만희재 서영보 선생의 시문이 눈에 들어온다.
"만 길이나 높은 곳에 현모한 단을 쌓았는데
하늘까지 닿았고
가벼운 바람에 맑은 아지랑이는
그윽한 정을 끌어 올리네
아득히 앉아서 초파리 때를 헤아리니 우리 강토가
앞에 질펀하구나.”
참성단을 두고 읊은 글이다.
. 이 시문을 지나니 옥녀 계단이 나온다. 여기부터 오르막이 진짜 시작되는 것 같다. 큰 소리 치던 아내도 힘들어한다. "가방 줘 내가 멜 께." 했더니 그래도 큰소리는 여전하다.
씩씩대며 계단과 마사 길을 올라오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화남 고재형 선생의 시가 우리를 반긴다. "강화섬이 한 조각 배 띄운 것과 같다" 며 읊은 글이다. 시인의 마음이 내 가슴으로 스며든다.
우리가 막차 인 줄 아는데도 우리 총무님은 뒤에 오는 사람이 있다면서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자고한다. 아마 우리아내를 격려하기 위함이란 걸 본인은 아는지? 모르지? "항상 총무님이 도와 주서 든든해요"한다. 그럼 나는 뭐지? 속 좁은 난 서운하네...
능선 따라 걷는 재미가 붙을 쯤에, 식사 자리를 준비하면서 회장님이 부른다. 식사하고 올라가잔다. 벌써 2시가 넘었다. 어느 산악회든 음식은 푸짐하다. 한 사람이 한두 가지를 가져와도 여러 사람이 모이면 뷔페가 따로 없다. 과일은 기본이고 떡도, 술이랑 커피, 손수 담았다는 음료수도...특히 기쁘게 하는 게 있었다. 산대장님이 가져온 보드카 술이다. 이건 총각 때 친구 놈들과 어울릴때 마셔보고는 40년이 넘게 맛보지 못했는데..한 잔 받아 목을 축이니 목구멍부터 요동을 한다.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내고 출발을 했다. 여기서 부터는 골산이다. 암릉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깎아지는 듯 날이 선 칼날바위가 아니라 조약돌을 옹기종기 모아 놓은 듯 반질반질한 바위들이 모여 있다. 어느 곳에 앉아도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암릉을 내려오는데 아내가 부른다. "이거 봐요"하기에 손길 따라보니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돌출 되어 있다. 보기에 따라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고 날짐승의 머리 같기도 하고 아리송하다. 이럴 때는 보는 이의 생각에 맡기는 게 상책일 것 같다.
능선의 오솔길을 가다보니 기도원에서 올라오는 개미허리를 만난다. 이름이 재미있었지만은 아쉽게도 그 이유나 이바구는 알 수가 없다. 이제는 참성단이 빤히 보인다. 700m가 남았다. 이제까지는 바위 돌을 징검다리 건너듯 폴짝폴짝 뛰거나, 네발로 기어 올라왔지만 이제는 계단으로 이루어 져 있어 다소 편한 길이 되겠다. 물론 가파른 계단이지만...
그래도 중간 중간에 크고 작은 바윗길이 있어 밧줄을 타거나 손을 잡아 주면서 오르는 맛도 괜찮다. 이런 산행은 처음인 아내가 즐거워하는 표정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여기저기서 사진 찍기에 여념 없는 한분이 안면이 많다. 다가가서 보니 지난번에 대마도에서 산행 때 함께 했던 분이다. 반가웠다. 지난번에는 동부인 하였더니 오늘은 혼자이다. 그 사모님은 우리 이웃집 부인과 너무 닮아 기억이 생생하다. 그 분은 우리를 아는지 모르는 지 알 수 없지만 ...인사를 나누었더니 사진을 서어비스를 한다면서 포즈를 취하라한다. 지금까지 산행하면서 아마 가장 많이 카메라 앞에 선 것 같다. 고마웠다. 잘 생기거나 못 생기거나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즐거운 일이다.
드디어 계단 길과 합류하고 참성단으로 올랐다. 오르는 계단에서 부터 정숙해지고 숙연해 진다. 우리를 처음 반기는 건 수령 150년이나 된다는 소사나무이다. 소사나무는 참성단을 지키는 수호신 같다.
참성단은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곳으로, 지금도 개천절에 제를 올리고, 전국체전의 성화를 이곳에서 채화 한다
참성단에서 기도를 드리고 정상으로 향했다 불과300m거리다.
정상에 오르니 회장님이랑 운영진이 기다리고 있다. 같이 인증 사진을 하고 발아래를 보니 잘 정리된 논과 푸른 바다 그리고 그 위에 떠있는 작은 섬들 모두가 작품의 일부분이 된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창조되고 있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비문이 있다. 가파른 바위 윗면을 손질하여 그 위에 비문을 새겼다. 흐르는 세월에 글자가 희미하다. 그 옆에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강화유수를 지내던 최석항이 관내를 순찰하며 마니산에 올랐다가 이곳이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시선두포 별장 김덕화와 전등사 총섭승 신묵에게 명하여 새로이 고쳐 짓도록 하여 10여일 만에 고쳤다고 하였다. 비는 조선 숙종 43년(1717) 5월에 마련해 놓은 것이다.
아내를 앞세우고 가는 길에 곱게 다듬어 놓은 듯한 암릉과 암릉 사이에 작은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운치를 더해준다
칠선녀 계단을 지나 암릉으로 이어지는 길을 타고 있으니 정말 산악인이라도 된듯 아내는 고무되어 있다. 육산 이였더라면 지금쯤은 지루해 몇 번이고 주저 앉았을텐데...
자랑할 생각만 해도 즐거운 모양이다. 자신이 해내었다는 것을...
작은 봉우리에 오르니 눈앞에 바다와 섬이 따라와 있다. 아기자기한 모습이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
이제 부터는 내려막 길이다. 114계단을 내려가니 정수사와 함허동천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망설어 졌다. 일행 일부는 계단길인 함허동천으로 향해는데, 우린 정수사 쪽으로 향했다. 함허동천으로 가는 길과는 다르게 길이 허술 하여 의심이 들었다. 회장단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다 따라 내려왔다. 우측으로 조금 나오니 암릉위에 서게 되었는데, 아내는 내려막길 암릉을 보고는 기급을 한다. 오를 때는 자신이 있더니 솟다리의 단점이 겁먹게 하는가 보다. 용기를 주면서 동행했다. 역시 짧은 다리가 문제였다. 산대장이랑 내가 도와주어도 비명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문제는 내게 있었다. 밧줄을 타고 내려오면서 아내를 쳐다보다 균형을 잃어 무릅에 상처를 입었었다. 오늘 배낭을 바꿔 오는 통에 구급약도 가져오지 않았다. 민망해 그냥 내려오려니 산대장이 치료를 해준다. 고맙게..
나역시 산행에 경험이 많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긴 암릉으로 된 곳은 처음이다. 아내는 힘들어 하면서도 이제는 즐기는 것 같다. 비명도 질려 가면서...
암릉을 빠져나오니 앞에 돗대 바위가 보인다. 카메라를 줌으로 하려다 가까이에서 찍어려다 내려와 보니 모습이 다르다. 모든 것이 기회가 있고 순간이 있는데 놓쳤다.
성수사로 가는 길이 계곡으로 가는 길과 능선으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우리는 능선으로 내려왔다. 시간은 조금 더 걸린 것 같다.
더디어 성수사에 도착했다. 험한 고비는 넘겼다. 성수사에 들려 묵례만 올리고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아내와 손잡고 내려오는 길이 행복하다. 고난을 함께 했기에 오는 느낌일까?
차도로 내려오는 길에 해병대상륙공작대 비가 있다. 뭉클하는 가슴을 쓸어 담고 좌측으로 빠지는 고즈넉한 길을 택해 내려왔다. 낙엽을 밟으며 걷는 재미도 솔솔 하다. 아내는 스틱은 접어두고 긴 막대기를 집고 오면서 고승의 흉내를 낸다. 이제는 살만 한 모양이다.
마을에 도착하니 목련의 길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하얀 목련의 꽃잎에 내 작은 소망을 묻어 놓고는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