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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제73호 계간평
사유로 빚은 수필의 서정성
남홍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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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다’의 사전적 의미는 “진흙 등을 이겨서 무엇을 만들다”로 나와 있다. 우주의 하찮던 진흙으로 장인의 혼이 배인 도자기를 빚듯이 수필은 작가의 지적, 정서적 체험에 독자적으로 사물을 재인식하는 사유를 녹여내어 언어로 형상화 하는 문학이다. 하여 수필을 ‘쓴다’고 할 때와 ‘빚는다’고 할 때 두 개의 술어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도기처럼 빚어지는 작품에 칠정(喜怒哀樂愛惡慾)을 용해하면 문학의 첫 번째 조건인 수필의 서정성을 획득한다. 감성을 바탕으로 빚은 서정수필은 독자의 가슴을 열어 교감하게 하고 공감을 얻으며 작가와 독자 사이에 친화감을 조성한다. 그러나 사유의 경로를 거치지 않고 쓰여 진 수필의 서정성은 천속한 글이 되기 쉽다. 하여 성공적인 서정수필이 되려면 압축과 형상화를 통한 문학적 전략이 필요하다. 감성과 사색, 압축과 형상화를 골고루 갖춘 수필만이 독자와 작가 간에 가슴으로 소통하는 최적의 조건이 된다. 여과 없이 감정을 토로할 때 문학에서 탈선되는 표피적 감상이 되고 만다는 거다.
「현대수필」제73호에 실린 29편의 신작수필은 몇 편의 서사수필 외에 사유에 깃을 튼 서정수필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 중 다음 세 편의 작품에 평자의 시선을 로그인해본다. 사진작가와 수필작가의 심상을 교직한 김소현의 「사라 문 사진전」, 미꾸라지 양식장의 메기와 사도 바울의 가시(육체의 만성적 질병)를 긴장과 겸손의 근원으로 환기한 육상구의「메기와 가시」, 뻐꾸기와 오목눈이 사이의 부조리한 현현에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홍도숙의「울지마라 오목눈이」이다.
이들 작품은 소재로 끌어 온 대상에 현미경을 비추듯이 디테일하게 외연을 묘사하고, 대상의 내면을 파고들어 심도 있게 탐색하며, 서정이 묻어나는 삶의 해석에 있어 유사성이 보이기에 선(選)해본다.
1. 파문이 일다
김소현은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던 날「사라 문 사진전」에 가서 몇 개의 언어액자를 생성한다. 독자는 이 작품에서 사진작가 사라 문의 액자뿐 아니라 수필작가 김소현의 사색이 담긴 수필의 액자까지 겹으로 본다. 사진과 수필이 만난 ‘수사(隨寫)’라고 할까. 그리고 관조하는 작가의 심상은 아침 풍경을 감싸 안는 안개처럼 사진전을 감싸고도는 심적 아우라를 형성한다.
그는 사진을 시각으로만 읽는 게 아니다. 보이는 것으로부터 작가적감성과 열린 감각을 동원함으로써 평면에서 입체적 깊이로 들어가고 있다. “시각 외에 다른 감각의 촉수가 긴장”하며 사진에 동화되고 사진예술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면서 공감하고 있다.
어둑한 사진 속에서 “묘한 쓸쓸함”을 느끼고 반쯤 가려진 모델들의 얼굴에서 “상상의 몫”을 자극 받는다. 붉은 꽃잎과 어둠이 빚어내는 색채에서 “농염한 빛”이 만져지고, 고개 숙인 모델을 따르는 강아지의 흑백 사진에서 “고독”이란 추상을 본다. 이처럼 이 작품은 카메라 렌즈에 찍힌 회화적 이미지를 작가의 심안으로 읽으면서 입체적이며 감각적인 수필어로 퓨전화하고 있다.
사진전 한쪽에서는 그녀의 15분짜리 영화 ‘서커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서커스라는 말에서 풍기는 뉘앙스와 성능이 좋지 않은 카메라를 사용한 듯한 흐릿한 흑백의 동영상은, 애조 띤 아코디언과 피아노의 선율이 합해져 극한의 쓸쓸함과 향수를 불러내었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모티브로 한 영화에서 서커스단의 단장인 나스타샤는 검은 띠로 눈을 가리고 입가에 웃음 지으며 수레바퀴에 매달려 돌고 도는데, 마치 운명을 비웃고 있는 듯한 그 형상에서 언뜻 체념과 도발, 고통과 조소를 보았다.
서두에서 김소현은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는 날” 사진전에 갔다고 언술한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 왜, 작가 자신의 감성의 문은 열지 않을까. 왜, 사진전에서 풍기는 분위기에만 기대어 진술하고 있을까. 그것은 침묵으로 더 깊은 언어가 전해지듯이, 감성의 노출이 아닌 보여주는 ‘수사(隨寫)’로써 카타르시스를 전이하려는 작가의 의도로 인식된다.
많은 예술가들이 주제로 삼는다는 서커스를 보며 까마득한 옛날, 책가방을 메고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서커스를 구경하던 소녀를 생각한다.
초등학생인 소녀는 학교를 마치고 나면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거리의 공연을 찾아가곤 했다.
김소현의「사라 문 사진전」에서 전해오는 짙은 서정성은 또 하나의 액자처럼 짜 넣은 유년의 서사에서 비롯한다. 본론에서 그가 사진전에서 풍기는 정서를 매개자의 위치에서 ‘전달’해주었다면 위의 서사에서는 쓸쓸함, 고독, 농염한 빛을 삽화처럼 직접 그려주면서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회상에 젖어들며 교감할 수 있도록 한다. 이 부분에서 화자를 ‘소녀’라는 시점으로 차용하여 ‘순수’를 더해주는 기법도 눈여겨 볼만하다. 별 것 아닌 것으로 큰 장치를 획득했다고 할까. 또, “지금까지 살면서 놓치고 사는 게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는 열린 결어의 여운이 길다.
2. 고통이 승화되다
수필의 교시적인 기능은 고음보다 저음으로, 설명이나 명령문보다 자연물의 현상 등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로 볼 때 육상구의「메기와 가시」는 흥미로운 예화를 통하여 명징한 주제로써 독자에게 다가가는 작품이다.
미꾸라지 양식장에 풀어 놓은 메기로 인하여 “먹히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느라 활기를 유지”하는 미꾸라지의 메기효과와 “자신이 얼마나 약한 사람인지 알게 하는 겸손의 도구”가 된 성경의 인물, 사도 바울이 지닌 가시(육체의 질병)는 교만을 물리치는 에너지로 쓰임 받는 축이 되고 있다. 이 글의 중심어인 메기, 가시, 미꾸라지, 수족관은 우리의 일상과 인접한 객체로서 독자와 친화감을 조성하는 데 일조한다.「메기와 가시」에서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대상은 메기가 아니라 미꾸라지의 환경조건이다. 왜냐하면 그가 표현하려고 하는 위험을 초극하려는 인간과, 메기에게 먹히지 않으려는 미꾸라지의 처한 모습이 대등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위험에 도전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겪어봐야하고,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지금의 현실이 어떤 상황이든지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하는 이유일 것이다.
세상을 움직인 거인들은 한 결 같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통과 실패를 거듭한 분들이다. 그 중에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공식적인 실패만 27번을 겪은 후에 51살에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혼신의 노력은 초능력을 불러온다. 위 작품은 “자신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돌아 갈 힘을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이라던 영화 ‘가타카’의 주인공 빈센트와 같은 맥락에 위치한다. 즉, 인간은 타고나는 것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후천적 노력에 의해 변화된다는 담론이다.
문장 스타일에서부터 굵직함이 느껴지고 부성이 감지되는 육상구 작가의 이 작품은 몇 개의 예화를 끌어와 인생에 있어 고통의 통과의례를 보여주고 있다. 김소현이 사라 문 사진전으로 정서적 감응을 전해준다면 육상구는 몇 개의 예화로써 긴박한 생존의지를 언어의 필름처럼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포괄적 안목으로 주제를 환기하는 작가의 담론이지만 예화로 끌어 온 자신의 ‘불안과 초조했던 타향살이’의 회고에 관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내용면에서 다소 허전하다. 불안과 초조를 겪은 자신의 절실했던 삽화가 이빨처럼 빠졌기 때문이다. 이는 경험이 체화되지 못한 인상을 주며 작품이 탄탄한 구조에서 멀어지게 한다.
성경에서 전하는 사도바울의 ‘가시’란 바울이 하늘로부터 받은 육체의 만성적인 질병을 의미한다. 신은 바울의 교만을 겸손으로 바꾸기 위해 그의 육체에 가시를 박아둔다. 바울은 그 질병을 떠나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하지만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하였으며 바울은 그 가시를 안고 간구하며 자신을 단련하면서 겸손한 자가 된다.
우리는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가시 하나쯤 지니고 살아간다. 고통이 고통을 위로하듯이, 자신의 가시의 존재를 알기에 타인의 가시를 이해할 수 있고 진심으로 상대를 위로할 수 있다. 이로써 육상구 작가의 가시는 교만을 겸손으로 환기한다는 작가의 담론을 명쾌하게 대변해주는 주요 인자가 된다.
3. 부조리를 품다
70년대 후반에 등장한 생태 여성론이라는 에코페미니즘은 “자연생태계와 인간을 하나로 보고 생명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사상이다.” 이로 볼 때 홍도숙의「울지마라 오목눈이」에 나타난 새와 새 사이에서 발생하는 부조리한 현상은 에코페미니즘의 자장 안에 있다.
이 작품은 붉은머리오목눈이라는 새의 둥지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현상을 근원으로 한다. 하여, 위 육상구의 글에서 남성성이 감지된다면 홍도숙의 이 글은 억압구조를 지닌 여성성이 느껴진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의 이기적인 생리와 자신의 알을 밀어낸 뻐꾸기의 새끼를 품어주면서도 여린 울음소리로만 자아를 표출하는 오목눈이의 생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던 여성의 억압구조를 떠올린다. 또한 단장의 뻐꾸기 울음을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제 새끼를 키워보지 못한 한 맺힌 호곡의 소리”로 해석함은 뻐꾸기의 배리(背理)와도 화해하려는 작가의 강인한 모성성으로 인식된다.
아마도 산 너머에서 들려오는 단장의 뻐꾸기 울음은, 이집 저집에다 몸을 풀고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제 새끼를 키워보지 못한 한 맺힌 호곡의 소리일 게다.
오목눈이둥지에서 하루쯤 먼저 부화된 뻐꾸기새끼는 오목눈이가 먹이를 구하러 나간 사이에 그의 알과 새끼를 등으로 밀어 둥지 밖으로 떨어뜨리는 잔인한 행위를 한다. 그리곤 천연스럽게 오목눈이가 물어 온 곤충을 받아먹고 성장한다. 몸길이 13센티의 붉은머리 오목눈이가 몸길이 33센티로 몇 배나 큰 뻐꾸기를 길러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이중의 인고를 겪어야 한다.
작가의 눈은 뻐꾸기에 대한 비판의식보다 오목눈이를 향한 애정과 보호본능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오목눈이와 뻐꾸기 둥지에서 일어나는 숙명 같은 부조리성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기에 환유를 통해 인간의 강자와 약자를 표상한 기호가 된다.
뻐꾸기의 비도덕적인 폭력성 앞에서 순응하는 오목눈이의 삶의 방식은 약자로서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약한 자의 기호이기도 하다. 이를 지켜보는 제3자로서의 작가는 방조자로서 위치할 수밖에 없다. 약자가 권력에 의해 힘없이 와해되는 실존의 거울 같은 시사성을 던져주기도 한다. 뻐꾸기는 또 아담과 이브에 의해 죄성을 갖고 태어난 인간의 단면을 지닌 창조주의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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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호 신작수필 29편은 기승전결을 지니는 전통적 수법에 바탕을 둔 작품이 주를 이룬다. 보다 낯섦에 도전하려는 실험적 방법으로 수필을 ‘빚은’ 강한 터치의 전략이 없다는 점에서 허전함을 감출 수 없다.
디지털 시대에 살아가는 현대인은 국외에서도 인터넷전화기를 국내전화처럼 사용하고 국내의 핸드폰 등으로 문자전송까지 한다. 또,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 검색창을 클릭하면 정보의 넘침을 만끽한다. 외국에서 인터넷 쇼핑을 하여 국내에 사는 친인척에게 꽃 배달까지 할 수 있는 편리성이 문화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런 문명의 혜택을 처음 접하면서 대중들은 분명 쇼킹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낯설었던 편리성은 매너리즘이 된다. 예술가는 이러한 매너리즘을 극복하기 위하여 또 다른 새로움을 창안하여야만 하는 책무자다.
예술에 새로움을 일으키는 것은 영감 - ‘인간이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의 바깥에서 불현듯 사건처럼 찾아오는 것’에 의해서다. 작가의 영감은 독자에게 쇼킹하게 다가갈 때 파급의 속도전에 합류된다. 채 2초가 걸리지 않는 사건처럼 영감은 그렇게 다가올지라도, 작가의 피나는 연출 없는 영감은 무의미 속으로 용해되고 만다. 그 영감에 미적, 유기적 사유를 곁들여 수필언어를 직조할 때 문학은 ‘어둠 속 새의 까만 눈처럼 빛날 것’이라 생각하며 본 호의 소고를 마친다.
첫댓글 가시는 교만을 겸손으로 환기한다는 육 수필가님의 수필관에 빠져듭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수필열정이 활활 타오르는 교장선생님 늘 감사드립니다. 최근에 명징한 수필 평론으로 활약을 많이하는 남홍숙선생님은 호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