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파 간숙공파 (시호는 간숙공으로 허조의 형이시다)
- 시조 12세손 휘는 주(周), 자는 백방(伯方), 호는 숙재(肅齋)
t시호는 간숙공(簡肅公) 1359 - 1440
- 주세거지 : 개성, 용담, 함양
- 주요유적 : 정산서원(井山書院) 함양에 있으며 간숙공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 간숙공은 이성계의 전제 개혁에 참여하였으며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판 한성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강직한 성품으로 공과 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며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 세덕문헌록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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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보기록내용 -
字佰方號肅齋諡簡肅恭愍王8年己亥西記1359年生
早有詩名太宗壬辰西記1412年登文科拜參知議政府事出爲全羅京畿觀察使
世宗癸卯西記1423年拜吏曹判書判漢城府使致仕性嚴正恭儉尤篤性理說有曾外祖安晦軒先生之風焉
世宗庚申西記1440年12月 9日卒享壽82訃聞 上悼甚輟朝一日弔賻 賜諡簡肅壬戌西記1442年贈領相詳載史傳墓豊德採蓮洞兌山甲坐有墓表檜軒柳義孫撰有實記行于世享咸陽井山書院配貞夫人贈貞敬夫人陜川李氏父府使元척 世宗庚戌西記1430年8月20日卒疾극上賜肉及海菜訃聞又 賜賻物墓同封禮葬有石物
* 자백방 호숙제 시간숙 공민왕 8년 기해 1359년생
조유시명 태종임진서기 1412년 등문과 배 참지의정부사출위전라경기관찰사
세종 계묘 서기1423년 배 이조판서 판한성부사 치사 성엄정공검우독
성리설 유중외조안회헌선생지풍언
세종경신 서기 1440년 1월 9일 졸 향수82 부문 상도심철조일일조부
사시간숙 임술 서기 1442년 증 영상상재사전 묘 풍덕채련동태산갑좌
유묘표회헌유의손찬유실기행우세향함양정산서원배정부인증정경부인합천이씨
부부사원척 세종경술 서기 1430년 8월 20일졸 질극
상사육급해채부문우 사부물 묘 동봉예장유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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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肅公史傳(解)
世宗22年(1440)庚申 12月 初9日丁丑에 前判漢城府事許周卒하였다,
周의 字는 伯方이요 一字는 伯公이며 경상도河陽縣人이다. 외조부監察大夫 崔宰之家에서 養育되어 宰가 그 氣度를 奇特히 여겨 曰 此兒다 非凡하다고 하였다. 처음 蔭仕로서 補官되어 典法正郞에 至하였으나 當時權臣들이 奴婢의 訟事를 하는 자가 있어 周가 그 曲折을 알고 장차 斷罪하려 하나 長官의 勢力에 못이겨 陰으로 庇護하나 周는 法을 守하여 阿附하지 아니 하니 長官이 그사실을 漏洩시켜 權臣이 屢次 周의 私第에 와서 머리를 숙여 請託하나 周는 끝까지 服從하지 아니하니 權臣들이 甚히 원망하여 政府에 提議하여 周의 官職을 罷免하였다. 乙丑(1445)에 知襄州事가 되니 당시倭寇가 侵入하여 국민이 安業하지 못하고 모두 山谷中에 隱匿하여 避難하고 있으나 周는 邑城을 築造하고 防備를 튼튼히 하여 이것이 制止하였다. 戊辰(1448)에 安城郡事가 되니 吏屬들이 모두 두려워 하면서 잘 복종하였다. 다시 開城少尹에 任하고 庚午(1450)에 司憲府掌令에 再遷되고 얼마후에 工部摠郞이 되니 당시田法이 不備하여 富豪가 兼幷하는 弊가 심해 公의 稟으로 朝臣中 剛明公正한 자를 택하여 이것을 整正하게 되어 경기右道廉問計定使로 被擢되었고 辛未(1451)에 戶曹 摠郞에 遷하였고 壬申(1452)에 기도안염사가 되었다가 이태조 즉위시에 배내부경하였다. 정축(1457)에 본직겸사ㅓㄴ중승이 되고 노비변정도감을 신설하여 중외쟁송을 처단할때 주가 도청사가 되어 기사건을 처리하니 송자가 운집하나 일청에 첩기불망하여 실정을 은익 재송하는 자가 유하면 적발여신하니 모든 사람이다 복종하더라 후에 변정도감을 없애고 그사무를 도감에게 일임하고 판사수감사 지형조사에 승임되어 주가 곡직을 능변하니 송자가 이굴자퇴고로 부자가 종시무원이었다. 을묘(1459)에 세력가 들이 비리로 청탁하나 주가 불청하니 형조사를 파면하였으나 송자들은 한탄하였다. 신사(1461)에 경상도안렴출척사가 되고 을유년에 형조 참의를 배하여 동료와 더불어 의옥할 때 장관과 의불합하여 주가 역설하여도 장솬이 불청하므로 주가 사병하여 거가수월에 이르니 장관이 회오사과하므로 다시 취지갛였다. 병술(1466)추에 호조 참의에 전임되고 동에 판홍부복사가로서 질병에 의하여 면임하였다. 을축(1469)에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일을 만면 잊어 버리는 일이 없으므로 세인이 일기관찰사라고 칭하였다. 경인(1470)에 한선부윤을 배하고 임진(1472)에 참지의정부사를 특배하였다. 왕이 풍雷의 재변을 당하여 현량기구가 등용되지 못함을 염려하여 재상을 명하여 회의를 개최하니 중의가 모두 주에게 속하더라 얼마 후에 풍병으로 사임하고 한성부윤에 천하였다가 경기도관찰사에 임하였으나 다시 사임하였다. 갑오(1474)에 와이 재해를 당해 주에게 구언하였다 중외관리가 구폐에 인순하여 율문을 주수하지 아니 하고 경중을 분별항지 못하여 부녀가 모두 계옥하는 형편이온즉 청\컨대 자금이후로 이의율문하여 가죄사죄니외에는 부녀자는 인금하지 말로록 하라고 하였다. 병신(1476)에 자헌 개성유후사에 승임하고 세종즉위시에는 판한성부사이었으나 주소왈 세사는 모두 끝났다 약을 먹어서 무엇하리요 자손들이 약수첩을 진하였으나 질병이 어려워지자 친자목용하고 의관을 갖추어 침실에 누워 부녀자를 물리치고 기자를 훈교하되 범상제는 검약하게 하라하고 다시 말없이 졸하니 향년 82세였다 조정에 부문되니 철조1일치조하고 사시간숙하니 일덕불해왈간이요 집심결단왈숙이라 증영상하였다 주는 엄정공검하고 종명이 과인하며 려사삼밀하고 평생에 불교식 불망언하며 수대한서라도 관대를 필구하고 종일단좌하며 모구불태하며 부모상에 있어서도 극기애훼하며 명절에는 주효를 준비하여 형제가 회동하니 조조와 척 모주 고수달관이지만 자제의 예로써 섬기고 주도 여시부모의 도로써 대접하여 우애가 우독하였다. 숙재공모부인이 흥양이씨부사공 휘 길의 여이다. 사에 왈 공이 양우구감찰대부최재지가라 하나 차언이 자못 의심되는 고로 이씨보를 조사하여 보니 부사공의 배가 즉 준주최씨이다. 이것이 숙재공의 구라고 오기된 것이 아닌가 사료되나 감히 개기하지 못하였기로 참고로 기록하여 두는 바이다.
첫댓글 간숙공의 자녀관계는 어찌되는지 알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