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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upa Saram
(The Essence of One’s Own True Nature)
참된 성품의 핵심(1)
by Sorupananda 소루파나다
Benedictory Verse Addressed to the Self
참나에 바치는 기원시
1 May the unique Self, which appears as various objects in the same way that gold takes the shape of the mould into which it is cast, be our support and guide for composing this work, Sorupa Saram, which proclaims that the nature of the world is only consciousness.
금이 주조되는 주형(鑄型)의 형상을 취하듯이 다양한 대상으로 나타나는 독특한 참자아가 세상의 본질이 오직 의식일 뿐임을 선언하는 이 작품 '소루파 사람'이 진정한 자아로 이끄는 버팀목이자 지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Text
2 Since the three kinds of differences do not exist, everything is only consciousness.
The certainty of the existence of consciousness is stated in this way.
Since there is nothing at all that is different from consciousness, the five elements, along with the five senses and the five organs of sense, all these are consciousness only.
Whatever is in the beginning, in the middle and in the end – all these are also consciousness.
The indescribable illusion is also consciousness.
The one who perceives everything and the act of perceiving are also consciousness.
세가지 차별상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일체는 오직 의식일 뿐이다.
의식이 존재한다는 확실성은 이렇게 명시할 수 있다.
의식 이외의 다른 것은 전혀 없으므로, 다섯 원소와 오감, 오장육부와 더불어 이 모든 것이 의식일 뿐이다.
처음과 중간과 끝에 존재하는 모든 것 또한 의식이다.
묘사할 수 없는 환상 또한 의식이다.
일체를 지각하는 자와 그 지각하는 행위 역시 의식이다.
3 Question: Is there a logical way of concluding that everything is consciousness alone?
질문: 일체가 오직 의식일 뿐이라는 논리적 방안이라도 있나요?
Answer: Yes, there is.
All the world’s diversity, which derives from the misperceptions of the mind and which appears to be real – is it not the witnessing consciousness alone?
Hence, everything – beginning with liberation and including purity and impurity, joy and misery, that which is and that which is not – is only being.
답변: 물론 있다.
마음의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고 실제처럼 보이는 세상의 모든 다양성 - 그것은 주시하는 의식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해탈을 비롯하여 순수함과 불순함, 기쁨과 불행,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은 오직 존재(being; 있음)일 뿐이다.
4 Question: If all is being, do objects appear as one’s own Self, which is being consciousness-bliss?
질문: 만약 일체가 존재라면, 대상들은 존재, 의식, 지복인
자신의 참자아로 나타난다는 것인가요?
Answer: Yes, they do.
In whichever direction I look there is absolute perfection.
The real nature of all the holy waters is blissful consciousness.
The real nature of all the verses praising the Lord is bliss.
Apart from me, what other form can exist?
답변: 그렇다. 그렇게 된다.
내가 어떤 방향을 보든 거기에는 절대적인 완전함이 있다.
모든 성스러운 물의 진정한 본질은 축복받은 의식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시들의 진정한 본질은 지복이다.
나와 별개로, 다른 어떤 형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
5 Question: Is the above statement merely verbal or is it experienced?
질문: 그 말씀은 그냥 말씀일 뿐입니까, 아니면 체험하신 것입니까?
Answer: It is experienced as well.
My Guru instructed: ‘Sir, the world appearance and its substratum – all these are you.
There is no one who does not say “I”.
Therefore enquire thoroughly into the “I”.’
If this is known intently and thoroughly [one can say] ‘I myself am pure consciousness’.
Hence, I am the primal entity.
답변: 내가 체험한 사실이다.
내 스승님은 이렇게 가르치셨다. ‘선생, 세계의 모습과 그 바탕은 모두 당신입니다. “나”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러니 “나”를 철저히 탐구하시요. 이것을 철저히 알게 되면 “나 자신이 순수한 의식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나는 근본적인 실체인 것이다.
6 Question: Which entity had this experience of the Self, and when did the experience arise?
질문: 어떤 실체가 이 참자아를 체험했고, 언제 그 체험이 일어났습니까?
Answer: It is experienced by myself and the experience is ever-present.
I saw my real nature as pure consciousness.
I see only myself, and not the great multitude of the world.
Simply because I had not looked at myself thoroughly, did I at any time cease to exist?
답변: 나 스스로 그 체험을 했으며, 그 체험은 항상 드러나 있다.
나는 나의 진정한 성품이 순수한 의식임을 보았다.
나는 오직 나 자신만을 볼 뿐, 세상의 엄청나게 많는 대상을 보지 않는다. 내가 나 자신을 철저히 바라보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어느 한때라도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있는가?
7 Question: If everything is only the Self, why are the names many?
질문: 만약 일체가 오직 참나 일 뿐이라면, 왜 많은 이름이 있을까요?
Answer: The many names do not make the Self multiple.
Since everyone abides as ‘I’ and declares himself to be ‘I’, right up to Iswara there is nothing other than ‘me’.
The same person is addressed differently as son, brother and father; but for that reason will the body of the person become different?
답변: 많은 이름이 있다해도 자체가 서로 다르지 않다.
누구나 ‘나’로 안주하면서 그 자신을 ‘나’라고 선언하므로,
위로는 이스와라Iswara에 이르기까지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같은 사람을 두고 아들, 형, 아버지 등으로 다르게 부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몸이 달라지는가?
*’내가 존재한다’는 개념 이전의 것이 진실이며,
그 이후에 나온 것, 또는 ‘내가 존재한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은 것은 거짓이다. 기본적인 이 사실을 이해하도록 하라.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 즉 존재의 느낌은 마야Maya, 프라크리키Prakriti, 이스와라Iswara 등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어쨌든 모두 환상이요 무지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물질과 함께 사람이 창조되었다고 믿고서,
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특별한 외양을 지닌 개체적 존재라고 인식하게끔 작용하는 것이 마야이다. 그렇게 해서 의식은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형태가 있다고 착각하고 자신의 본성을 잊어버리게 된다.
8 Question: If so, the known and the knower will be different.
질문: 그렇다면, ‘알려지는 것’과 ‘아는 자’는 다르지 않나요.
Answer: No, they won’t be different.
It is my Self who remained as the [seer] ‘I’.
Those objects that were rejected as ‘not I’ – these too are my Self.
It is like someone who goes to sleep at night as himself, manifests [in dream] as the form of [the seer and] the world and then wakes up as himself.
답변: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르지 않다.
[보는 자]인 ‘나’로서 남아 있는 것은 나의 참 자아이다.
‘나’ 아닌 것으로 배척된 대상들 역시 나의 참 자아이다.
그것은 밤에 그 자신으로서 잠이든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보는 자와] 세계의 형상을 취했다가 나중에 그 자신으로 깨어나는 것과 같다.
9 Question: What is the inherent nature of the Self that shone as everything?
질문: 일체로서 빛나는 참나의 내적 성품은 무엇인가요?
Answer: It is ‘shining by itself as itself’.
The Self that shines as the body, as the beloved soul, as all the actions, as ignorance, as the enjoyment of true knowledge, as the blissful reality and as the one consciousness – that indeed is my own real nature.
답변: 그것은 ‘그 자체로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이다.
몸으로서, 소중한 영혼으로서, 모든 행위로서, 무지로서, 참된 지혜의 향유로서, 지복의 실재로서, 그리고 하나의 의식으로서 빛나는 참자아 – 그것이야말로 나 자신의 진정한 성품이다.
10 Question: Is it possible to give a true name to the Self that shines by itself?
질문: 그 스스로 빛나는 참나에 어떤 진정한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Answer: As it is a transcendental experience, it is not possible to give it a name.
They will describe it as bliss, as transcendence, and as the witness of all that remains at the culmination of the four Vedas.
What designation might I apply to my real nature, which all the treatises on jnana are unable to track down?
답변: 그것은 하나의 초월적 체험이므로 거기에 어떠한 이름을 부여하기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지복으로, 초월성으로, 4베다의 정점에 머무르고 있는 모든 것의 주시자로 묘사할 것이다.
앎(知; 즈냐나)에 관한 모든 저작들이 찾아내지 못하는 나의 진정한 성품에, 어떤 명칭을 붙일 수 있다는 말인가?
* four Vedas: the Rigveda, the Yajurveda, the Samaveda and the Atharvaveda.
11 Question: If it is transcendent, there is no scope for enquiry.
It is therefore necessary to indicate and signify it in some way.
질문: 만약 그것이 초월적이라면 그것을 탐구할 수 있는 여지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든 그것을 가리키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Answer: As it is everything and as it is nothing, it is beyond description.
Is it ‘I’? Is it That? Am I That? Is That ‘I’? Is it shining jnana? Is it the source of all sounds [nadanta]? Is it mauna? Is it the pure state [suddha]? Is it a void?
The self-shining natural state is all these and none of them.
답변: 그것은 일체이며 무(無)이기 때문에 묘사될 수 없다.
그것은 ‘나’ 인가? 그것That 인가?
내가 그것인가? 그것이 나인가?
그것은 빛나는 앎(知)인가? 모든 소리의 근원인가?
침묵인가? 순수한 상태인가? 공(空)인가?
스스로 빛나는 본원적 상태는 이 모든 것이면서 그 어느 것도 아니다.
12 Question: If it is said like this, none can realise the Self, and so there can be no realisation. Hence, a name should be given.
질문: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누구도 참나를 깨달을 수 없고,
그렇다면 어떤 깨달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이름이 주어져야 합니다.
Answer: The following are the names given by the Vedas.
Knowledge is ‘I’; love is ‘I’; perfect bliss is ‘I’; being is ‘I’; consciousness is ‘I’; tranquillity is ‘I’; purity is ‘I’; that which is unique and beyond the scope of the Vedas is ‘I’; pure consciousness, the source of all, is ‘I’.
답변: 베다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주어져 있다.
지혜가 ‘나’이다. 사랑이 ‘나’이다. 완전한 지복이 ‘나’이다.
존재가 ‘나’이다. 의식이 ‘나’이다. 고요함이 ‘나’이다. 순수성이 ‘나’이다.
베다의 범위를 벗어난 독특한 것이 ‘나’이다.
순수한 의식이자 만물의 근원인 것이 ‘나’이다.
13 Question: Are all these descriptions experienced?
질문: 그렇게 묘사되는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나요?
Answer: They are experienced and also transcended.
My son! I became and dwelt as the indescribable experience, transcendental joy, and everything else.
I felt no need to declare, ‘I have rid myself of the misery-causing karma’.
I recovered my Self and have been freed.
답변: 체험되어 지며 또한 초월 되어진다.
수행자여! 나는 그 형언할 수 없는 체험, 초월적 기쁨, 일체의 모든 것이 되었다.
‘나는 불행을 야기하는 업을 나에게서 제거했다’라고 선언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나는 내 참나를 회복하여 자유로워진 것이다.
14 Question: What is the benefit arising from this experience?
질문: 그 체험에서 나오는 유익함은 무엇입니까?
Answer: It is becoming the ruler of the kingdom of liberation.
I obtained the supreme lordship that is never lost.
I burned up the pair of opposites – happiness and misery.
I gave up the life of the body-forest, which tormented the mind.
I entered and occupied the house of liberation.
답변: 그것은 해탈 왕국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지고한 하나님의 지위를 얻었고 그것은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
나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상반된 대상들을 불태워 버렸다.
나는 마음을 고문하던 몸이라는 숲의 삶을 포기했다.
나는 해탈의 집으로 들어가 그 집을 독차지해 버렸다.
15 Question: What play will this king witness on his stage?
질문: 이 왕은 자신의 무대에서 어떤 역할에 주시하나요?
Answer: He will witness the dance of the three avasthas [waking, dreaming and sleeping].
In the waking state I will witness the dance of the five organs of action and the five organs of sense.
In dream I will witness the dance of the mind.
In thought-free sleep I will dance the object-free void-dance.
However, I will [always] remain as the exalted essence [the Self].
답변: 그는 세가지 상태[생시, 꿈, 잠]의 춤을 주시할 것이다.
생시의 상태에서 나는 다섯 행위기관과 다섯 감각기관의 춤을 주시할 것이다.
꿈 속에서는 마음의 춤을 주시할 것이다.
생각이 없는 깊은 잠 속에서는 대상이 없는 공(空)의 춤을 출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항상 그 드높은 본질[참나]로 남아 있을 것이다.
16 Question: Where was this experience when you were regarding happiness and misery as ‘I’?
질문: 당신이 행복과 불행을 ‘나’로서 간주할 때에 그 체험은 어디 있었습니까?
Answer: Then, too, I was remaining as the Self. I was nothing else.
Who was the one who remained as [the ego] ‘I’?
If I see him, I will not allow him to take up the form of the body.
Only the ‘I’ whose form is consciousness is the real ‘I’.
All other ‘I’s will get bound to a form and go through birth and death.
답변: 그때에도 나는 참나로서 머물러 있었다.
나는 달리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고 인] ‘나’였던 것은 누구인가? 만약 지금 내가 그를 본다면,
그가 몸이라는 형상을 취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형상이 의식인 ‘나’만이 진정한 ‘나’이다.
다른 ‘나’들은 하나의 형상에 속박되어 탄생과 죽음을 겪게 될 것이다.
17 Question: The Self is immutable. Will it not get bound if it gets involved in activities?
질문: 참나는 불변입니다. 그것이 만약 활동에 종사하면 속박되지 않겠습니까?
Answer: As the Self remains a witness, like the sun, it will not get bound.
Even if I bear the burdens of the family and have them follow me like a shadow, or even if the cloud called ‘maya’ veils, I am, without doubt, the sun of knowledge, self-shining as pure light and remaining as the witness [of the world].
답변: 참나는 태양처럼 주시자로 남아 있으므로 그것은 속박되지 않을 것이다.
설사 내가 가족이라는 짐을 지고 있어 그들이 그림자처럼 나를 따른다 해도, 또 설사 ‘마야’라는 구름이 나를 가린다 해도, 나는 의심할 바 없이 순수한 빛으로 빛나고 [세계에 대한] 주시자로 남아 있는 앎(知)의 태양이다.
18 Question: But the jnani is not remaining motionless like the sun.
질문: 하지만 앎(知; 즈냐나)은 태양처럼 부동의 상태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Answer: He also remains actionless.
Whatever comes, whatever actions are performed, in whatever I may delight, I am only pure consciousness, remaining aloof and aware, without becoming any of them.
답변: 그 또한 부동의 상태에 있다.
무엇이 닥쳐오든, 어떤 행위가 이루어지든,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든, 나는 그런 어떤 것도 되지 않고 초연하게 자각하면서 머물러 있는 순수의식일 뿐이다.
19 Question: All things move because the Self makes them move. Hence, is there bondage for the Self?
질문: 모든 사물이 움직이는 것은 참나가 그것을 움직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나에게 속박이 있는 것인가요?
Answer: Like the rope that makes the top spin, there is no bondage for it.
In the same way that a top is made to spin by a rope, desires fructify in my presence. But, like the rope that is used to spin the top, I will not merge with them.
I have rid myself of their connection.
I became my own Self.
My bondage is indeed gone.
답변: 팽이를 돌리는 노끈과 같이, 참나에게는 속박이 없다.
팽이가 노끈에 의해 돌려지는 것과 같이 욕망들은 내가 있는 곳에서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팽이를 돌리는 데 쓰이는 노끈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 욕망들에 합일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과의 연관을 제거해 버렸다.
나는 나 자신의 참나가 된 것이다.
나의 속박은 진정 사라져 버렸다.
20 Question: But what is the way by which knowledge and ignorance was destroyed?
질문: 그러나 지(知)와 무지가 소멸되는 그 방편은 무엇입니까?
Answer: In one’s own experience of the Self neither attainment of knowledge nor removal of ignorance is seen.
By what did ignorance get destroyed?
Through what did knowledge gained through enquiry arise?
How was the clarity, known as the experience of true knowledge, obtained?
Other than my Self, what do I know?
답변: 자기 자신의 참나 체험 안에서는 지(知)의 성취도 무지의 소멸도 보이지 않는다.
무지는 무엇에 의해 소멸되는가?
탐구를 통해 얻은 지(知)는 무엇을 통해 일어났는가?
참된 지(知)의 체험이라고 하는 그 명료함은 어떻게 얻어졌는가?
나 자신 이외에 내가 무엇을 아는가?
21 Question: If the dawn of knowledge and the removal of ignorance are not known, how can we call such a one a jnani?
질문: 지(知)의 깨침과 무지의 제거를 모른다면, 그런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진인(眞人)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Answer: With ignorance removed from knowledge, like unreal from real, becoming both and becoming neither – this indeed is the nature of the jnani.
When, ultimately, the real shone as ‘I’, did the unreal, which became ‘I’, go anywhere?
I myself became the base of both the real and the unreal, but remained beyond the reach of the conflicting pair of real and unreal.
답변: 실재에서 비실재가 제거되듯이 지(知)에서 무지가 제거되면,
그 둘 다가 되면서 그 어느 것도 되지 않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인(眞人)의 성품이다.
궁극적으로 실재가 ‘나’로서 빛날 때, ‘나’가 되었던 그 비실재가 어디로 가는가?
나 자신이 실재와 비실재 둘 다의 기반이 되었지만,
실재와 비실재라는 상반되는 쌍의 범위를 넘어선 곳에 머무른다.
22 Question: Previously it was stated, ‘I am the possessor of the body, but not the body’.
Now it is said, ‘I will remain different from the body and also be the body’. Which is true?
질문: 앞에서는 ‘나는 몸의 소유자이지 몸이 아니다’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나는 몸과 다른 것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또한 그 몸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것이 진실된 것입니까?
Answer: The truth is remaining in but aloof from the body, like the kernel in the mango seed that remains within the seed shell, but aloof from it.
Oh, I said, ‘I am the body!’ I regarded wealth as mine! I felt, ‘I am the enjoyer!’ Are all these not false?
Though I remained as everything, beginning with the body, the real ‘I’ always remained aloof without associating with anything, like the mango kernel in the seed of the sweet mango.
답변: 진실은 그 몸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몸으로부터 초연하다는 것이다. 마치 망고 씨의 핵이 그 씨 껍질안에 들어있으면서도 그것으로 부터 초연한 것과 같다.
나는 ‘나는 몸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부(富)를 나의 것으로 여겼다.
나는 ‘나는 향유자다’라고 느꼈다. 이것은 모두 거짓이 아닌가?
나는 몸을 비롯한 일체의 것으로 남아 있기는 했으나,
진정한 ‘나’는 그 어느 것과도 연관되지 않은 채 항상 초연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마치 달콤한 망고 씨앗 안에 망고 핵이 들어 있듯이.
23 Question: Is remaining like this [attached and detached] only in the period of ignorance, or also in the period of knowledge?
질문: 그와 같이 [집착없이 초연하게] 머물러 있는 것은 무지의 기간동안 인가요, 아니면 깨달음(知)의 기간 동안에도 그런가요?
Answer: It is in both.
The periods of jnana and ajnana were seen and passed like the periods in which intellect had not developed and in which intellect had developed.
Everything that was a superimposition during practice has now become false.
답변: 둘 다 그렇다.
깨달음의 기간과 무지의 기간은 지성이 계발되지 않았던 기간과 지성이 계발된 기간처럼 보였고 그렇게 지나갔다.
수행하고 있을 때에는 하나의 덧씌움이었던 모든 것이 이제는 거짓이 되었다.
24 Question: Is there birth and death during the period of ignorance that exists prior to this experience?
질문: 그 체험 이전에 존재하는 무지의 기간 중에는 탄생과 죽음이 있습니까?
Answer: As these are illusory, they do not exist.
Oh, where was I born? What did I worship as God?
Where did I seek refuge?
When I became the blissful essence, the reality, experiencing unbroken bliss, were not all these [known to be] false?
답변: 그것들은 환상이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 어디에서 내가 태어난 것인가? 내가 무엇을 신으로 숭배했던가?
내가 끊임없는 지복을 체험하면서 그 지복스러운 본질,
곧 실재가 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은 거짓임을 알게 된 것 아닌가?
25 Question: In what condition was the Self before the dawning of this experience?
질문: 그 체험이 밝아오기 전에는 참나는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Answer: When I am redeemed by realisation of the truth, I am not confused any more.
I lived as ‘someone’. I laboured in vain for ‘somebody’.
I underwent change, taking a thousand names.
Now, enough of this!
I have seen my Self, that which is hard for me to discover.
Oh, now I am free!
답변: 내가 진리를 깨달아 구제될 때, 나는 더 이상 혼동되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로 살았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헛되이 일을 했다.
나는 수많은 이름을 얻으면서 변화를 겪었다.
이제, 이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내가 발견하기 어려운 나 자신을 보았다.
오, 나는 지금 자유롭다.
26 Question: What is obtained and experienced if one sees the Self?
질문: 참나를 보게 되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체험하게 됩니까?
Answer: The mind dissolves in love and one becomes sat-chit-ananda.
I made the deceitful mind melt and dissolve.
I knew myself as I really am.
Since I am the substratum for everything, I became and dwelt as myself, the clear ambrosia of sat-chit-ananda.
답변: 마음이 사랑 안에서 해소되고 그대는 사트(존재)-치트(자각)-아난다(지복)가 된다.
나는 기만적인 마음이 녹아 해소되도록 했다.
나는 진정한 나로서의 나 자신을 알았다.
내가 일체의 바탕이기에 나는 나 자신이 되었고 나 자신으로 거주한다. 사트(존재)-치트(자각)-아난다(지복)라는 맑은 감로로서.
27 Question: Is the statement ‘The world is only the Self’ figuratively true and not literally true?
질문: ‘세계는 참나일 뿐이다’라는 말은 비유적으로 참된 것이며, 문자 그대로 참된 것이 아닌가요?
Answer: Anything seen cannot exist apart from the eye.
Similarly, the world does not exist apart from the Self.
Can there be anything seen that is apart from the eye?
Can there be anything heard that is apart from the ear?
Did any of the other four elements manifest independently of space?
Though the world may appear like a flowing mirage-river, when thoroughly examined, can the world exist apart from the Self?
답변: 보이는 모든 것은 눈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세계는 참나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눈과 별개의 보이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귀와 별개의 들리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른 네가지 원소(지,수,화,풍) 중의 어느 하나가 공(空)과 독립하여 나타날 수 있겠는가?
28 Question: Seer and seen appear different.
질문: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르게 보입니다.
Answer: This is just like seeing gold as various ornaments.
They are not different.
Here, other than myself, nothing else exists. I swear to this.
A gold ornament does not exist separate from the gold.
In the same way that one can change the shape of gold and give it different names, I described myself in various ways.
답변: 그것은 금을 금 장신구들과 다르게 보는 것과 같다.
금이나 금 장신구나 서로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나 자신 아닌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맹세코사실이다. 금 장신구는 금과 별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금의 형태를 바꾸어 거기에 여러가지 이름을 붙일 수 있듯이,
나는 참나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묘사한다.
29 Question: What is the nature of this experience?
질문: 그 체험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Answer: It is the transcendence that arises, dissolving thoughts, and in which everything shines as the Self.
It is beyond the reach of speech and it is beyond the reach of the mind. It is the clear ambrosia with which one does not get satiated, even when it overflows.
Like saliva that secretes on the tongue, it springs forth from within me. Like a dumb pot it remained as ‘I’, without being another.
답변: 그것은 생각들을 해체하면서 일어나는 초월성이며,
그 안에서 일체가 참나로써 빛난다.
그것은 언어의 범위를 넘어서 있고 마음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
그것은 넘쳐 흐른다 해도 포만감을 느끼지 않는 맑은 감로이다.
혀에서 분비되는 침처럼 그것은 내 안에서 솟구쳐 나온다.
그것은 먹통 항아리처럼 다른 어떤 것이 되지 않고 ‘나’로서 남아 있다.
* A dumb pot is a spherical, baked mud pot, without a mouth, that absorbs water through its porous skin.
*먹통항아리: 주둥이가 없는 원통형 오지 항아리로, 다공질의 표면을 통해 물을 빨아들인다.
30 Question: When everything exists as Sivam, why should one become Sivam?
질문: 일체가 시밤(웰빙)으로서 존재하는데, 왜 우리가 시밤이 되어야 합니까?
Answer: This is to enable the removal of all differences of ‘one’ and ‘two’ and to become perfect jnana.
Do not question, ‘What is the bliss of Siva? What is Siva-nature?
What is Siva’s activity?’
It is only the fullness of consciousness that does not get divided, does not unite, and does not become different.
답변: 그것은 '하나' 와 '둘' 이라는 모든 차별상을 제거할 수 있게 하여 완전한 깨달음(知)이 되기 위해서이다.
'시바의 지복이 무엇인가? 시바의 성품은 무엇인가? 시바의 활동은 무엇인가?' 라고 묻지 말라.
그것은 나뉘지도 않고 합쳐지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의식의 충만함일 뿐이다.
31 Question: What is to be rejected as asat [unreal], and what is to be accepted as sat [reality]?
질문: 무엇을 비-실재로 배척하고, 무엇을 실재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Answer: Reject objects that are known as asat and accept consciousness as sat. This is tranquillity.
All the tattvas [principles] that one knows are foreign to oneself.
While rejecting these objects as ‘not-Self’, realise the Self through the consciousness that remains as the one who rejects objects.
This is tranquillity.
답변: 비-실재라고 알려진 (인식의) 대상들을 배척하고 의식을 실재로 받아들여라, 이것이 고요함이다.
그대가 아는 모든 현상은 그대 자신에게 낯선 것이다.
이런 대상들을 '비-진아' 로 배척하는 한편, 대상을 배척하는 자로 남아 있는 의식을 통해 진아를 깨달으라.
이것이 고요함이다.
32 Question: If tranquillity is the one true thing, what is the witness?
질문: 만약 고요함이 하나의 참된 물건이라면, 주시자는 무엇입니까?
Answer: Tranquillity is itself everything, beginning from the witness right down to svanubhava [one’s own experience].
It is Sivam, the state of realisation.
Tranquillity is itself the witness-Self.
The witness-Self is itself Brahman.
Brahman is fullness.
The pure fullness realised by enquiry is itself the ever-present svanubhava.
This is the state of realisation, which is itself Sivam.
답변: 고요함 그 자체가, 주시자로부터 자기 체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이다. 그것이 시밤, 곧 깨달음의 상태이다.
고요함은 그 자체가 주시자-참나이다.
주시자-참나는 그 자체가 브라만이다. 브라만은 충만함이다.
탐구에 의해 깨닫는 순수한 충만함은 그 자체 항상 존재하는 자기체험이다. 이것이 깨달음의 상태이고, 그것은 그 자체로 시밤(웰빙)이다.
33 Question: Even if the mind subsides, sayujyam is attained only when maya is destroyed.
질문: 설사 마음이 가라앉는다 해도, 결합 (Sāyujya: merging or joining)은 마야가 소멸될 때에야 성취됩니다.
Answer: The destruction of the mind is itself the destruction of maya, and hence it is sayujyam.
I have seen the way of the birth of the mind that leads to the birth of the world and the birth of the doer, the ego ‘I’.
The non-subsidence of the mind is itself maya.
The firmness of those who destroy this maya is sayujyam.
답변: 마음의 소멸 그 자체가 마야의 소멸이고, 따라서 그것이 곧 (진아와의) 결합이다. 세계의 탄생과 행위자, 곧 에고인 '나'의 탄생을 가져오는 것은 마음인데, 나는 이 마음이 탄생하는 길을 보았다. 그 마음이 가라앉는 것 자체가 마야이고, 이 마야를 소멸하는 사람들의 확고함이 결합이다.
34 Question: If this is sayujyam, where will the past karmas go?
질문: 만약 그것이 결합이라면 과거 업들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Answer: In this experience they will disappear without leaving a trace.
I rid myself of the fear that arises from the misery of imagining, ‘I underwent an endless succession of births and deaths’.
All of the ancient world has become the vast, empty expanse that is my own Self, since everything other than my Self is false.
답변: 이 체험 안에서는 과거 업들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는 '나는 끝없는 생사윤회를 겪었다.' 고 상상하는 불행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을 나에게서 제거했다.
오래된 이 세계 전부가 광대하고 텅 빈 공간이 되어 버렸는데, 그것이 나 자신의 참나이다. 왜냐하면 나의 참나가 아닌 모든 것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35 Question: When there is such an experience, why perform karma?
질문: 그러한 체험이 있을 때, 왜 행위(종교의식 등 숭배행위)를 합니까?
Answer: When this experience has not arisen, actions are performed.
Until I became the endless, blissful experience through the superior wisdom that regards all worship and similar things as the ‘not-Self’, I worshipped the gods at the prescribed times and observed all the vows.
답변: 그런 체험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행위가 이루어진다.
내가 모든 숭배와 그 비슷한 것들을 '비-참나' 로 간주하는 수승한 지혜를 통해서 끝없고 지복스러운 체험이 되기 전까지는, 정해진 때에 신들을 숭배했고 모든 맹세를 지켰다.
36 Question: Who will attain this experience?
질문: 그런 체험은 어떤 사람이 얻겠습니까?
Answer: Only those who are pure and who have the prescribed qualifications will attain it.
The experience of reality – eternally abiding and shining as oneness, as freedom from impurity, as fullness, and as truth – is attained only by those who are most qualified, pure, who have a steady mind, and who are undergoing their final birth.
답변: (마음이) 순수하고, 정해진 자격요건들을 갖춘 사람이 얻게 될 것이다.
하나 됨으로서, 오염 없음으로서, 충만함으로서, 그리고 진리로서 영원히 안주하고 빛나는 실재의 체험은, 가장 뛰어난 근기의 순수한 사람, 안정된 마음을 가진 사람, 그리고 마지막 생을 살고 있는 사람만이 성취할 수 있다.
37 Question: What are the marks of a pure one?
질문: 순수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Answer: They are as follows:
[The answer is the content of verses 37-42]
They will not utter harsh words; they will not hate anyone; they will be of cheerful countenance; whatever things they relish, they will not use them for themselves but will offer them to the great ones; they will not associate with evil persons; they will not curse anyone; their eyes will not blaze with anger.
These are the ones who will rid themselves of birth.
답변: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심한 말을 하지 않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을 것이며, 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음식이나 맛있어 하고, 좋은 음식이 있어도 자기가 먹지 않고 훌륭한 분들에게 공양할 것이다. 그들은 삿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누구에게도 욕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들이 탄생을 제거한 사람들이다.
38 They will not value as real those things that are destructible; they will never speak out, saying, ‘This is good and this is bad’; they will not grieve over events of the past; they will not condemn anything; they are the exalted ones.
그들은 파괴될 수 있는 것들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을 것이고, '이것은 좋고 이것은 나쁘다' 고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지나간 일에 대하여 슬퍼하지 않을 것이고, 그 어떤 것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고상한 사람이다.
39 They will not speak contemptuously of the ordinances of the Vedas; they will not remain without chanting and melting with devotion as long as they live; they will not forget death; they will not get attached to this world through weakness of mind; they are the ones who will not be born again.
그들은 베다의 내용들을 폄하하지 않을 것이고, 살아있는 동안 (신에 대해서) 찬가를 부르지 않거나 헌신으로 가슴이 녹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죽음을 망각하지 않을 것이고, 마음이 약한 탓에 이승에 집착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사람들이다.
40 They will not experience at all sudden movements of the mind; they will only desire to know the path of salvation; their minds will not get immersed in attachments, saying greedily, ‘This is my wealth, my house, my wife and my children’. Such are the mature ones.
그들은 마음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전혀 경험하지 않을 것이고, 오로지 구원의 길만을 알고자 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이것이 내 재산이고 내 집이다. 내 아내이고 내 자식이다' 고 탐욕스럽게 말하면서 집착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다. 성숙한 이들은 그와 같다.
41 Will they care for things that are valued by others as desirable and not desirable? When one really looks, those who become tranquil and eternal, who experience truth and abide in the final state are few in number.
다른 사람들이 좋다거나 싫다고 여기는 것들에 그들이 관심을 갖겠는가? 그대가 참된 안목으로 볼 때는, 고요하고 영원해진 사람들, 진리를 체험하면서 최종적인 상태 안에 안주해 있는 사람들은 희소하다.
42 Those who do not see anything other than their Self here and in the hereafter, who are beyond both and without any division, will they degrade themselves by not regarding as trivial this phantom-like world appearance that is an illusory play of the sankalpas?
이승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어떤 것도 자기 아닌 것으로 보지 않고, 그 둘 다를 넘어서 있으면서 어떤 구분도 없는 사람들이, 비천하게도 산깔바(욕망)의 환상적 유희인 이 유령 같은 세계의 겉모습을 사소한 것으로 보지 않는 일이 있겠는가?
43 Question: Sastra vasana [a latent desire for scriptural knowledge], or the vasanas of knowledge and ignorance – will these too not arise in those jnanis even through forgetfulness?
질문: 그런 진인들에게도 망각으로 인해 경전습(經典習)이나 지(知)와 무지의 습(習)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Answer: As these are vasanas, they will not arise.
During every superimposing avastha the liberated one clearly knows that the illusion of sound and the illusion of real and unreal are only the illusion of the mind, because [he knows that] the superimposed avastha that appears and disappears is false.
답변: 그런 것들은 원습이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덧씌움이 있는 모든 상태(생시,꿈,잠)에서 해탈한 사람들은 소리(언어)의 환상과 실재와 비-실재의 환상이 마음의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안다. 왜냐하면 나타나고 사라지는 그 덧씌워진 상태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44 Question: If this is so, for such ones what constitutes the worship of God?
질문: 그렇다면, 그런 분들에게는 무엇이 신에 대한 숭배입니까?
Answer: Worship is only seeing the Self.
The great tapasvin devotedly worships with the flower of tranquil space and with the mantra of aloneness the deity [who abides as] the expanse of consciousness in the temple of the body. Who can equal those who live forever, revering such jnanis?
답변: 숭배란 참나를 보는 것일 뿐이다. 위대한 따빠스윈(고행자)은 고요한 허공이라는 꽃과 '홀로 있음' 이라는 진언으로써, 몸이라는 사원 안에 있는 의식의 무변제(無邊際)로 안주해 있는 신을 숭배한다. 그러한 진인들을 존경하면서 영원히 사는 사람들에게 누가 필적할 수 있겠는가?
45 Question: Why does everyone not perform this worship?
질문 : 왜 모든 사람이 그러한 숭배를 하지 않습니까?
Answer: Because of ignorance.
When the three prime fruits [mango, jackfruit and banana] along with rice pudding made with milk are right in front of them, they will long for food vomited by a dog.
Without knowing that we ourselves are the great essence, the basis of all things and all powers, they become slaves of the mighty.
답변: 무지 때문이다. 세 가지 으뜸과일(망고, 젝푸르트, 바나나)에 우유를 넣어 만든 쌀 푸딩과 함께 앞에 차려져 있는데도, 개가 먹다 토해 놓은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 우리 자신이 위대한 본질이고 모든 사물과 모든 능력의 토대라는 것을 모른 채, 그들은 힘이 강한자(마야)의 노예가 된다.
46 This concerns the fate of those who insult jnanis.
They do not know fairness and rectitude; they do not know the phantom-like nature of the world; they do not know themselves; they do not realise the disgrace that arises from their ignorance.
They are dark within themselves and without any reason insult those who are good, the righteous. Which way will these people go?
이것은 진인들을 모욕하는 사람들의 운명과 관계된다. 그들은 공정성과 올바름을 모르고, 세계가 유령 같다는 본질을 모른다. 그들은 그들 자신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무지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움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 내면에서 캄캄하며, 아무 이유 없이 선하고 올바른 사람들을 모욕한다. 이런 사람들이 어떤 길로 가겠는가?
47 Question: Are all books, other than those jnana scriptures that speak of supreme bliss, not true?
질문: 지고의 지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지(知)는 경전 외의 모든 책들은 참되지 않습니까?
Answer: No, they are not true.
The five flowers are his arrows.
The six-legged beetle is the bowstring.
The soft sugarcane is his bow.
This bodiless cupid is a valorous warrior.
He will infect everyone with powerful lust.
All this is false. Similarly, is all this barren world-appearance true?
You yourself reply.
답변: 그렇다. 참되지 않다. 다섯 송이의 꽃이 그의 화살이고, 다리가 여섯 개인 딱정벌레가 활줄이며, 부드러운 사탕수수가 그의 활이다. 이 형상 없는 큐피트는 용맹한 전사이다.
그는 강력한 욕심으로 모든 사람들을 감염시킨다.
이 모든 것은 거짓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모든 메마른 세계라는 겉모습이 참된가?
그대 자신이 대답해 보라.
(*주: 다섯 송이의 꽃은 지수화풍공 오원소, 다리가 여섯 개 달린 딱정벌레는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 X 2(음,양), 부드러운 사탕수수는 존재의식 또는 이스와라.)
48 Question: Are time and so on false?
질문: 시간 같은 것들도 거짓입니까?
Answer: To those who are not attached to anything, they are certainly false.
Be it time, or God, or karma, or illusory observances, the workings of the mind, the great enthusiasm that accomplishes things – to him who is not attached in any way, where is the question of taking them to be either good or bad?
답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이 분명히 거짓이다. 그것이 시간이든, 신이든, 까르마든, 환상적인 의식 행위든, 마음의 작용이든, 일들을 성취해 내는 큰 열정이든, 전혀 집착이 없는 사람이 그런 것들을 좋다거나 나쁘다고 여길 일이 어디 있는가?
49 Question: Are they [time and so on] at least necessary for the body?
질문: 몸에게는 최소한 그런 것들(시간 등)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Answer: Since the body is not-Self, they are not needed.
Why are they born, those cunning ones who do not seek their Self? What is this body that has come into being through food?
Who is the ‘I’? How many were the bodies that were discarded before? Innumerable were the bodies that were taken with delight again and again.
답변: 몸은 비-진아이므로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 자신의 진아를 추구하지 않는 저 영악한 사람들은 왜 태어나는가? 음식을 통해 생겨난 이 몸이란 무엇인가? 그 '나'는 누구인가? 그 이전에 버려진 몸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거듭 거듭 기뻐하면서 다시 취한 몸들이 무수하다.
50 Question: But are all these [jivas] reflected consciousness?
질문: 그러나 이 모든 것(개아들)이 반사된 의식입니까?
Answer: As there is no knowledge without the Guru enabling one to know, they are only reflected consciousness.
답변: 그대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해주는 스승 없이는 어떤 지(知)도 없기 때문에, 그들은 반사된 의식일 뿐이다.
To reveal the unreal as unreal and the real as real, truly a Guru was needed.
Alas! All the jivas, becoming kings and achieving greatness, are only reflected consciousness.
비현실적인 것을 비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구루가 필요했다.
아아! 모든 지바들이 왕이 되어 위대함을 성취하는 것은 오직 의식의 반영일 뿐이다.
51 Question: Why should the one Brahman appear differentiated as many, as reflected consciousness?
질문: 왜 하나인 브라만이 다수로, 반사된 의식으로, 차별화되어 나타납니까?
Answer: To those who do not see it as one, it appears as many.
What is the truth of the world reflection that appears in the one [Brahman] but does not appear as one?
Like the scenes that appear to the vision of a bewildered person, the world appears as many only to those with defective knowledge and who therefore do not see it as the one reality.
답변: 그것을 하나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다수로 나타난다. 하나(브라만) 안에서 나타나지만 하나로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반사물의 진실은 무엇인가?
정신이 어지러워 사람의 시각에 나타나는 장면들이 그러하듯, 결함 있는 지(知)를 가진 사람들, 따라서 그것을 하나의 실재(實在)로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만 세계는 다수로 나타난다.
52 Question: When all is one like this, what is the reason for not seeing it as one?
질문: 이처럼 모두가 하나인데 그것을 하나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Answer: I do not know the reason for not knowing the Self that exists as one’s own Self.
What a wonder it is that one seeks the Self without knowing the Self! What can I say of this? Know that this is like a person in this world standing [neck-deep] in water having his thirst unquenched.
What else can we say?
답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진아를 사람들이 모르는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자기를 모르면서 자기를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여기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 (목까지) 물에 잠긴 채 서서 갈증을 못 채우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라.
달리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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